“낮별은 밤별보다도 밝고 아름다운데, 태양의 빛에 가려져 영원히 하늘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올가 베르골츠가 쓴 『낮별』의 한 구절이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반대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것들이 깨지기 쉬운 편견이거나 고정관념인 경우도 있다.
다양한 이(異)문화 체험과 동시통역사 경력을 토대로 상식과 정의에 반문을 제기하는 작가 요네하라 마리. 『교양 노트』는 “현실의 뒤편에 놓인, 틀림없는 또 하나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 그 ‘생각 코드’를 담은 책이다.(이 책의 원제는 『한낮의 별하늘』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왕성한 탐구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프레임을 벗겨내고 유연하면서도 깊이 있게 세상을 읽는다. 교양을 쌓고 사유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데 그녀의 ‘교양 노트’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솝 우화 가운데 북풍과 태양의 이야기가 있다. 북풍과 태양이 서로 자기 힘이 더 세다고 자랑하며, 여행자의 모자와 외투를 누가 더 빨리 벗길지 내기하는 내용이다. 보통 이 이야기의 교훈은 ‘외부의 강요보다 스스로의 의지가 중요하다’라는 것으로, 태양의 역할이 긍정적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마리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북풍의 의지에 반하는 것으로 여행자는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자각했다. 하지만 태양의 경우, 여행자는 태양의 의지를 마치 자기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해 외투와 모자를 벗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한 듯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끊임없이 사고, 자신의 의견인 양 방송 진행자나 신문의 논조를 반복한다. (…) 정신의 자유를 위해서는 허울뿐인 자유보다는 자각하고 있는 속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89~90쪽, 「북풍형, 태양형」에서
우리가 그동안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것들을 이처럼 뒤집어 생각한다. 또한 세계문화사와 현대의 시대적 풍경을 연결하며 얻는 깨달음과 사유가 돋보인다.
만인이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그와 동시에 만물이 돈의 위력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어떤 권위나 신비도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면서 그 베일이 벗겨진다.
— 69쪽, 「돈의 영역」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의 차이라는 불합리한 ‘성역’이 없어졌으나, 이제는 돈에 구속받지 않는 것이 없다며 현대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은 보험으로 해소하고, 유희를 즐기는 데까지 돈을 지불해야 하고, 심지어 장기(臟器) 비즈니스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 돈의 위력이 닿지 않는 새로운 ‘성역’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자행된 강제적인 민족이동 문제와 현대 사회의 획일화를 연결하기도 한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의 민족이동이 민족과 문화의 차이를 없앤 ‘이상적인’ 인종을 만들고자 했던 스탈린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수천만 명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달성하려 했던 대사업을, 스탈린이 적대시했던 시장원리의 메커니즘이 훨씬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강제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게, 심지어 훨씬 대규모로, 요컨대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완수했다.
— 180쪽, 「민족이동과 획일화」에서
따끔한 지적이다. 소위 개발도상국에서 공업 선진국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이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은 상품을 만날 수 있고, 사람들의 사고법까지 획일하면서 민족과 문화의 차이가 놀랄 만한 속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세계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요네하라 마리식 지식여행도 빠지지 않는다. 요네하라 마리는 외국 여행을 할 때면 택시 운전사와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가장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는 이를 러시아의 서정시에 트로이카 마부가 등장하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과 연결한다. 대다수 국민이 농노였던 19세기 러시아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지식인은 소수 부유층에 불과했다. 생활 수준이나 문화 수준의 격차가 너무나 컸던 두 계층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 중의 마차 안이 거의 유일했다. 민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마부와 지식인의 교류가, 러시아 서정시에 통풍구를 냈으며 중층적인 구조를 이루는 데 영향을 끼쳤다.
세계적으로 쓰는 시간 헤아리는 법과 권력의 관계, ‘사상누각’이 성서에 처음 등장한 표현이라는 것, 그림자 연극의 유래와 현대 영화 산업과의 관계, 동서양 모두가 갖고 있는 상상의 동물 ‘용’의 모델 등, 요네하라 마리가 소개하는 이문화와 거기에 숨은 뜻.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패턴화한 사고를 의식하고 새로운 지식을 쌓을 수 있다.
타고난 재담가 요네하라 마리는, 딱딱하게만 느껴지던 지식과 교양의 세계로 독자를 의뭉스럽게 인도한다. “발터 베냐민은 이야기꾼의 두 모델로 농경문화 속에서 오래도록 농사를 지은 노인과 전 세계를 항해하는 뱃사람을 들었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들을 읽었더라면 거기에 두 문화의 접점에서 그것을 이어주는 통·번역가도 포함시켰으리라.”(「옮긴이의 말」에서)
그녀는 지식을 저작(詛嚼)하고 운용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지식이라고 해도 쉴 새 없이 뇌에 담아 넣기만 하는 것은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생생활부터 신화, 전설, 동화 등 친근한 소재를 비틀어보며 무거운 주제에 대한 고찰로 이어간다. 또한 쉬운 언어와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문화인류사적 내용에 대한 ‘저작’과 ‘운용’의 부담감도 줄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