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퓨리el
숙종하면 14살에 어린나이에 보위에 올라 수렴청정 없이 대신들을 휘어잡고 송시열에게 사약까지 내린 냉혹한 왕이나 2명의 왕비(인현왕후, 장희빈)를 폐위하고 그 중 한명(장희빈)에겐 사약까지 내린 피도 눈물도 없는 왕으로 알려졌지만 이런 숙종이 그 당시 유명한 동생바보였단 사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형제로는 명선,명혜,명안 이렇게 세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명선,명혜공주가 어린 나이에 일찍 죽고 막내동생인 명안공주 하나만 남게 됨. 거기다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조선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부인인 명성왕후 외에 단 한명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던 왕이였기때문에( 요것도 흥미로운 얘기가 많음ㅋ) 명안공주는 숙종의 단 하나밖에 안 남은 유일한 형제였던것.
숙종나이 14세때 아버지인 현종이 돌아가시고 숙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때 명안공주의 나이는 8세. 자신보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동생이 가엾어 숙종은 명안공주를 아버지처럼 잘 보살피며 예뻐했다함. 지금까지 전해지는 숙종의 동생바보 일화를 들어보자면
청나라사신에게서 고급비단을 선물 받으면 중전이나 후궁들이 아닌 동생 명안공주에게 먼저 주었다는 이야기나
숙종6년 때 명안공주가 오태주와 혼인을 하게 되는데 숙종이 공주가 궁에 나가 살 집인 공주궁을 일찍이 전례가 없던 1,826간으로 지어 주려하자 대신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이 일어남. 원래 공주궁의 정례는 1,200간인데 명안공주는 여기에서 626간이 초과된거니 집을 줄여야 한다며 신하들이 난리난리. 결국 조정의 반대에 못 이겨 1,400간으로 하도록 했지만 공주궁 공사에 추가공사비 대 주다가 걸리고 군인들을 공주궁 공사에 동원하겠다 고집부리다 승정원과 싸우고.. 여동생한테 삐까뻔쩍 신혼집 장만해주려다 숙종이 대신들과 실랑이 벌인 일이 숙종실록에까지 남아있음.
그리고 야사로 전해지고 있는 월곡동 일대에 오씨집안(명안공주 남편 집안)의 땅이 많았던 사연으로 어느날 시집 간 명안공주가 궁에 놀러와 오라비인 숙종과 함께 궁중다락에 올라 시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야사 중)
..
“오라버니 마마, 소인에게 땅을 물어 주시옵소서.”
“오호. 공주가 땅을 해 뭣 하는고. 그래 그럼 어디를 얼마만큼 준다?”
숙종의 눈에 큰 솔개 한 마리가 북쪽에서 나타나 동쪽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날았다.
“저어기, 저 솔개가 원을 그린 아래는 다 네 땅이니라.”
..
솔개가 원을 그린 아래 지역이 지금의 성북동에서부터 시작해 월곡동, 청량리 일대인데 땅이 갖고 싶다는 여동생의 말 한마디에 이 땅을 전부 명안공주에게 줬다고 함. 조선말까지 월곡동 일대에 오씨 집안의 땅이 많았던 사실이 이날 오누이의 대화에서 비롯됐다는 썰.
명안공주는 13세 때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인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와 혼인을 하게 되고 궁을 나가 숙종, 어머니인 명성왕후와 떨어져 지내게 되는데 시집간 누이 명안공주에게 보낸 숙종의 다정한 편지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음.
"새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고 섭섭무료하기 가이 없어하노라. 너도 우리를 생각하느냐? 이 병풍은 오늘 보내마 했던 것인데 마침 아주 잘 만든것이 있으매 치고 놓아라..날 춥기 심하니 몸 잘 조리하여 기운이 충실하면 장래 자주 들어올 것이니 밥에 나물 것 하여 잘 먹어라..."
편식하지 말고 잘 먹으라는 여동생에 대한 숙종의 걱정이 남긴 편지.
그리고 하나밖에 안 남은 딸이니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명안공주를 굉장히 예뻐했다 하는데 명성왕후가 시집 간 공주에게 쓴 편지도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음.
"글씨 보고 잘 있으니 기뻐하며 친히 보는 듯 든든탐탐 반갑기 가이없어 백번이나 잡아보며 반기노라.
아무 때나 이리 오래 못 본 적이 없더니 달포 되어가니 더욱 섭섭 그립기 무장장하노라.
너는 주인집 극진이 하옵신 덕을 입어 역병을 무사히 보내니 세상에 이런 기쁜 경사 어디 있으랴.
너는 효도하는 딸이 되어 우리를 기쁘게 하니 더욱 탐담 어엿쁘기 끝이 없어 하노라.
날도 춥고 하니 부디 조심하고 음식도 어른이 이르는 대로 삼가 잘 먹고 잘 있다가 들어오너라. 타락묵(우유로 만든 음식)과 전 가니 먹어라."
원래 조선시대 공주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은 거의 없는데 명안공주는 조선시대 왕자,공주 중 유일하게 작명단자(왕이 자녀의 이름을 직접 지어서 쓴 어필)가 유물로 보존되어 있고 숙종이 명안공주에게 하사한 물품이나(완초화문석, 운보문 겹보자기 등) 숙종, 명성왕후가 명안공주에게 쓴 편지들이 많이 보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
아버지 현종이 쓴 명안공주의 작명단자. 명안공주의 이름을 온희((溫姬)라 짓고
오래 살라는 기원의 뜻이 담긴 기수태다재(其數太多哉)를 옆에 씀.
오라비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위에 언니들처럼 몸이 많이 약했던 명안공주는 23세의 나이에 죽음.
동생이 죽자 숙종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슬퍼하며 10일간 육식을 금하고 한여름 날씨에 입관 전에 조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주집에 친히 나갔다함. 그리고 직접 공주의 묘비에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제문을 새겼음
"언니 명선과 명혜가 잇달아 죽음에 엄청난 슬픔을 가누지 못했는데,
이제 배필을 만나는 예를 올려서 화락한 금슬을 이루고 장수를 누릴 것을 기약했는데,
하루아침에 이와 같은 기별을 듣다니..유유한 나의 정으로 그대를 일찍 영결하려니 소리쳐도 응함이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거늘,
저 푸른 것이 하늘인데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환하고 밝은 세상을 버리고 저 어둡고 캄캄한 세상을 향해 가니,
천장지구토록 이 애통한 심정 감내하기 어렵구나"
명안공주를 무척 아꼈던 숙종은 동생이 죽은 후에도 동생의 시가를 돌봐줬다 하는데,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들에 대해 노론이 반대운동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로 책봉 반대의견을 올렸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숙종이 사사한것은 유명한 일. 그런데 이에 동조했던 오태주(명안공주의 남편)는 관직만 삭탈하고 이것도 바로 그 다음날 직첩을 복작 시켜주었다 함. 그리고 명안공주의 시어버지인 오두인이 인현왕후의 폐위와 관련한 상소를 올렸을때 그와 관련된 다른 이들은 집안이 멸문의 화를 당했지만 오두인의 집안은 여동생의 시가였기 때문에 그 화를 면케해주고 나중에 동생의 남편이였던 오태주가 죽었을때 동생과 합장해주고 이때도 직접 지은 비문을 세워줬다 함.
첫댓글 인간은 참 다면적이야..
제문 너무 슬퍼 ㅠㅠ
왜 일찍 죽었대ㅠㅠ 안타깝네
왤케 일찍들 죽엇대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알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왕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예 그 한자 자체가 사용이 금지돼!그래서 왕들은 쓰기 어렵고,실사용도가 낮은 한자 하나만으로 이름을 짓게 돼.하지만 공주는 왕위에 오르지 않아서(왕위에 오를 수 없는 태생의 왕자들도 그러다가 반정을 통해서 외자로 교체!)그런 불편도 없고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라는 충성의 의미로도 외자를 피했다고 해.혹시 아는 사실인데 오지랖 부린거면 미안해,
최민수가 숙종 연기한거 완전 쎘는데 동생한테 반찬투정 말고 골고루 먹으라고 편지쓰는거 상상이 안가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