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6년 나주에서 고등학교룰 다니는데 정식으로 학교수업은 다 끝났다.
정식으로 학교수업은 끝났으니 , 나에게 고등학교 졸업장은 줄것이고 나주고등
학교에 대한미련은 없다. 왜냐 내가 광주에 있는 광주고등학교를 갈려다가 못
가고 집에서 가까운 농촌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
아마도 이때쯤 되었으니 날씨는 쌀쌀하고 겨울 준비가 시작되어가는 시기이다.
나는 나주에서 좀 돈을 주고 허름한 잠바를 샀었고 나주시에 있는 사진관에서
반명암판의 사진을 찍어 대학입시원서에 제출할 사진이다. 머리는 스포츠머리로
단장을 하고 이제는 시골의 고등학생이 아니다. 물론 내가 서울로 가지고 갈 물건은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를 할 고등학교 책 몇권이다.
그 시절은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5.16 혁명을 일으키어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 가난으로부터 물리치는데 혁명공약의 내용이다. 나주초등학교 앞에는 호남비료공장이
우람히 서 있다. 기술진은 서독사람들이다 . 크프랭카드에는 "호남비료공장사장 김재규 취임"
이라는 큰 프랭카드가 걸려있다.
내가 사는 마을은 나주에서 제일 빈촌에다 못배운 농촌사람들이 농사나 짓고 산에서 고사리
나 장작을 팔아 나주나 영산포에 갔다가 팔아 가계에 도움이 되는 석유, 빨레비누 등 아주 필요
한 물건을 사서 생활을 하는 형편이다. 집안에 시계가 없어 나주읍내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를
부를다고 한 것 같다.
우리마을은 거의가 논이나 밭이 없어 광산김씨 문중의 농토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집들도
문중의 선영땅을 이용하여 집을 짓고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이용 대가로 일년곡수를 얼마씩
문중 에다 낸다. 마을에 전기불이 있나, 라디오가 있나 시계가 있나 그냥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잠자고 하는 일이 하루 일과이아다. 가울걷이를 하고 겨울에는 긴 농한기가 이어진다.
겨울철인 농한기에는 주막이 하나 있는데, 하투놀이나 하고 술이나 먹고 노는 기나긴 농한기
가 계속된다.
나는 도저히 서울에 가서 대학을 다닐 형편이 못 된다. 대학을 가겠다고 공부를 한적이 없다.
형편도 않되고 학교에갔다오면 지게에다 소 깔을 베오는게 일과요 소죽을 써주는게 나의 일
이다 선친은 나주 향교의 제관이나 문중의 일이나 보시는게 하시는 일이다. 물론 농촌일을
하시면서 선비의 모습이 역역하시다 한문도 많이 하시고 .......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 고민을 하게 되어 더 넓고 큰 사회에
나가 열심히 대학에서 공부를하면 무엇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꿈이었다. 돈이 여유가 있나?
시골의 농촌학교에서 실력이 제대로 있나? 가진게 젊음과 꿈을 이루겠다는 야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던 나주에서는 어떠한 것을 찾을수가 없는 그래서 서울로 1966년 11월 호남선의
야간열차에 무임승차로 상경길로 나섰다.
첫댓글 아련한 옛날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상경하셔서
고난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밝은
미래가 되셨기를
응원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
법도리님 우리삶방에 지식인이시고 훌륭한 분이십니다
상경하는데는 용감하였으나 그 이후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나이로 태어나서 하고싶은 일한번 못한게 후회가 됩니다
물론 서울시 공직하였고 하고 싶응 노후에 문학공부도 하였지만 ....
감사합니다
농한기에 대부분 화투같은 것으로
노름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농톤에나
있었던 시기 같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깨인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학업에 충실했으니 바로 동구리
님 같으신 분이시지요
무임승차로 상경한 지난 추억은 두고
두고 잊지못할 이야기 거리로 남았
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과찬이시고 요 내가 살아갈 길은 무엇이냐?
항상 그러한 생각을 갖고 살아감니다
그래도 시골에서 고등학교라도 다녀서 좀 생각이 있는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동구리님~
그 당시에 시골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것이 어딘데요
그랬기에 지금의 동구리님이 계시지요
향수가 묻어 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시인님 고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농촌학교라 도서관이 있나 집에가면 일이나 하고 공부하다보면 눈은 감기고 ....
집에도 책이 한권도 없는 농촌의 실정 입니다
동구리님~
그 당시 시골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머리가 깨인 사람들은 서울로 무작정 왔습니다만
비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과 글을 쓰신다니 보람이 있겠습니다.
꿈과 희망의 꿈 키워 나가세요.
그시대의 가난과 어려운 삶이 었고 일제식민지가 할퀴고 간 뒤이며
6.25가 전국을 초토화되고 이념의 대립으로 겨우 해벙만되어 정부가 들어섰지
어려운시대입니다
정말 힘들게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내셨네요ᆢ 그래도 끝까지 학업을
다하시고 만년에 지금도 공부하시니
박수른ㄷ 보냅니다
선배님 가능한 글담밤에 참석해 주시기를
빌어 봅니다
죄송합니다 만 며칠후에 전남대 병원에 입원하여야
합니다 불가합니다
다음편 빨리 올려 주세요.
뭐 별것도 아닌데 요....
그때 시대상을 알리기 위하여 올려보았습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부모님덕에 힘안들이고 공부 했으니 그저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우리는 어려운시절에 거쳐온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야 거리가 되는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봤습니다.
고생끝에 낙이시라고
하고싶은 문학공부
하셔서 성공이시잖아요.
이젠 건강만 챙기시길 빌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건강이 지금 좀 않습니다
전남대에서 지금 치료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