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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말말갈의 헤어스타일에 대한 논문이지만, 저자는 이를 발해의 당나라풍 문화까지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잘 쓴 논문이다.
일러두기: 참고문헌 및 주석은 생략하되 몇가지는 임의로 본문에 삽입했다 (초록색 ).
사료의 인용문에 대한 번역은 자의적일 수 있다 (원 사료의 앞뒤 문맥을 보지못했음).
역자가 임의로 집어넣은 말은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효공주 무덤벽화는 출처미상의 인터넷상에서 구했다.
일부 한자가 깨져서 "?"로 나온다.
조양시 출토 말갈 돌인형 고찰
(朝陽市出土靺鞨石俑考)
강념사(薑念思)
주제어: 朝陽市, 唐墓, 石俑, 粟末靺鞨
KEY WORDS:
ABSTRACT: Two stone tomb-figurines were unearthed from the large-sized Tang tomb at
글쓴이: 강념사(薑念思), 심양시, 110011, 심양고궁박물원(沈陽故宮博物院)
1993년 3월,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와 조양시박물관은 조양시 황하로(黃河路)에서 당나라 시대의 대형 무덤을 하나 발굴했다. 무덤 안 널길[甬道]의 벽감(壁龕, 벽면을 파내어 조각품이나 장식품을 놓도록 만든 곳) 안에서 2점의 변발 돌인형[辮髮石俑]을 발견했다. 당나라때 무덤 가운데서 변발 돌인형이 껴묻거리로 발견된 것은 처음인데, 변발 스타일로 보아 이 돌조각상[石像] 두 점의 모양새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북지구 고대 소수민족이다. 필자는 이 두 점은 고대 속말말갈족 사람의 돌조각상이라 보는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 더러 이제 아래와 같이 고증한다.
1. 돌인형의 출토상황
이 당나라때 무덤은 벽돌[塼]로 쌓은 원형(圓形)의 외방무덤[單室墓]이다. 2점의 돌인형은 본래 널길 중부에 있는 벽감에 놓여있었을 것이거니와, 사내는 동쪽에 계집은 서쪽에 자리했을 것이다. 무덤이 이미 도굴되었던 탓으로 출토할 때 사내인형[男俑]은 벽감 안에 없었다. 두 돌인형은 다 녹색 사암(砂岩)으로 조각해 만든 것인데, 아랫부분엔 사각형 받침대가 조각되어있다. 사내인형(사진 1)은 높이가 받침대까지 포함해서 112센티미터이고, 눈썹이 짙고 눈이 크며, 광대뼈가 높다. 머리터럭을 뒤쪽으로 쓸어 모우고, 뒷목덜미쯤에서 동여맨 뒤, 두 머리칼 가닥을 꼬아서 길게 땋아 아래로 늘어놓았고, 땋은 머리 꽁지는 묶어두지 않았다. 라운드-넥(round-neck)에 소매 폭이 좁은 창파오[長袍]가 (가죽)신발을 덮어 두르고 있다. 약간 치켜든 왼손에는 매가 한 마리 놓여 있고, 손가락에는 매를 묶어둘 줄이 걸려있다. 아래로 내린 오른손은 철과(鐵撾, 철퇴)를 쥐고 있다. 계집인형(사진 2)은 높이가 받침대까지 포함해 102센티미터이고, 눈썹이 짙고 눈이 크며, 입가를 살짝 올려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머리터럭을 두 가장자리 쪽으로 빗어 일으켜서, 정수리의 두 가장자리에서 각각 북상투[髻]를 틀어 올린 다음, 또 뒤통수쯤에서 머리카락을 땋아 뒤로 늘어놓았고, 땋은 머리 꽁지는 묶어두지 않았다. 옷깃이 아래위로 포개져 있으며 소매 폭이 좁은 창파오를 입고 있고, 허리춤에는 접섭대(蹀躞帶, 물품을 달 수 있게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허리띠 안으로 창파오 옷자락이 접혀 말리면서 긴 속옷이 드러나 있고, 다리에는 (가죽)신발을 신고 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두고 있는데, 왼손이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쥐면서 “차수(叉手, 오른 손을 밑에, 왼손을 위에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앞으로 모우는 것 = 供手)”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접섭대의 오른쪽엔 향낭과 노리개주머니[鞶囊]가 달려있고, 왼쪽엔 꼬챙이 모양의 물건이 하나 달려있으며, 몸 뒤에 따로 칼집에 꽂혀있는 손칼[刀子]을 한 자루 차고 있다. 두 인형의 뺨과 손은 다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머리터럭은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 출토 할 때 이미 벗겨지고 침식되어 있었지만 땅바닥 쪽에 (떨어져 있는 도료를 통해) 색깔 입히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 1. 出土石男俑
사진 2 出土石女俑
고대의 조양(朝陽)은 요서(遼西)의 요충지[重鎭]였다. 수나라때는 유성군(柳城郡)이었는데, 당나라 초 무덕(武德) 원년(618년)에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로 바뀌었고 또 무덕 7년에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로 바뀌었다가, 개원(開元) 7년(719년)에 평로군절도사(平盧軍節度使)로 승격되었다. 과거 조양지역에서 출토한 당나라 무덤은 대개 규모가 비교적 큰 전실묘(塼室墓)이고, 묘주(墓主)는 영주(營州)의 지방관원이 많다. 황하로의 당나라 무덤은 지금까지 조양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한 당나라 무덤이다. 비록 묘지(墓志)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관원의 품계를 대표하는 상아홀(象牙笏)이 출토하였다. 간이발굴보고서는 무덤형식과 껴묻거리 유물로 미루어 보아 그 묘주(墓主)는 측천무후[武則天]때 영주(營州)의 관원(官員)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는데, 이는 합당하다.
2. 돌인형의 족속(族屬)
이 두 돌인형의 조형은 다 변발로 되어있으되 당나라 옷차림을 하고 있다. 머리스타일과 용모를 보건대, 다 한족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은 아니며 응당 동북지구의소수민족에 속한다. 조양 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민족이 섞여 살던 땅이다. 당조(唐朝)때 영주(營州)의 경내에서 활약한 주요 소수민족은 거란(契丹), 고(구)려[高麗], 실위(室韋), 해(奚), 말갈(靺鞨) 등이다. 이들은 영주(營州) 경내로 이주해 살거나 영주 주변에서 유목했었는데, 영주(營州)와는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 우리는 우선 머리스타일로부터 돌인형이 어떤 민족에 속하는지 고찰해 보기로 하자.
상술한 여러 민족 중에서 거란, 고려, 실위는 다 변발민족(辮髮民族)에 속하지 않는다. 해족(奚族)의 머리스타일은 문헌에 적혀있지 않아서 당분간 자세하지 않다. 단지 말갈의 “풍속은 모두 변발[俗皆辮髮]”이로되, 현재로선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머리스타일만을 생각해 알 수 있다. 《신당서·북적전》에, “흑수말갈은 …… 풍속에 편발(編髮)을 하고, 멧돼지의 어금니를 꽂고, 꿩꼬리를 꽂아서 모자를 꾸며, 스스로를 여러 부(部)로부터 구별한다 [俗編髮,綴野豕牙,揷雉尾爲冠飾,自別於諸部]”라고 했다. 여기서 편발(編髮)은 바로 변발(辮髮)을 말하지만 흑수말갈의 변발이 어떤 종류의 스타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흑수말갈로부터 여진(女眞)이 비롯되었고, 만주족 또한 여진으로부터 나왔는데, 여진의 헤어스타일에 관해서는 문헌에 비교적 또박또박 적혀있다.《대금국지(大金國志)》권39에 “금나라 (사람은) 변발하여 어깨로 늘어뜨리는데, 머리통 뒤쪽에 남아있는 머리터럭은 색실로 묶는다.[辮髮垂肩,留顱後髮繫以色絲]”라 했다. 《북풍양사록(北風揚沙錄)》에서 말하길, “(여진) 사람은 모두 변발을 하는데 거란과는 다르다. 머리통 뒤쪽에 남아있는 머리터럭은 색실로 매는데, 부유한 사람은 주옥(珠玉)을 이용하여 꾸민다 [人皆辮髮,與契丹異,留顱後髮以色絲繫之,富人用珠玉爲飾].”고 했다.《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권3에서는 “(여진) 남자는 변발을 하여 뒤로 늘어뜨린다. 귀는 금고리로 꾸미고, 뒤통수에 남아있는 머리터럭은 색실로 묶는데 부자는 주옥으로 꾸민다 [男子髮垂後,耳飾金環,後顱留髮以色絲繫之,富者以珠玉爲飾.]”고 말했다. 이 기록들은 “변발”을 말했고, 또한 “머리통 뒤쪽에 남아있는 머리터럭[留顱後髮]”을 강조하며 만주족 남자의 머리스타일을 살피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머리깍기[髡] 또는 머리땋기[辮]의 머리스타일을 명확히 한 것이다. 즉, 이마 앞의 머리터럭은 깍아 없애되 머리통 뒤쪽의 머리터럭은 남겨서 뒤로 땋아 늘여 색실로 묶는다. 송(宋)·금(金) 시기, 이런 종류의 머리스타일을 가리키는 명확한 명칭은 아직 없었던 듯 한데, 만주족이 비로소 이 종류의 머리스타일을 “치발(薙髮)”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문헌 중에 때로는 “편발(編髮)”이라 했고 때로는 “곤발(髡髮)” 혹은 “삭발(削髮)”, “박발(剝髮)”이라고도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흑수말갈의 머리스타일은 앞머리는 깍되 뒷머리는 땋아 내린 형태일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조양에서 출토한 돌인형의 머리스타일과는 응당 같지 않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의 변발 스타일에 관한 명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비록 길림성에서 발견된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무덤의 벽화 속에 발해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이들 인물은 머리에 투구[兜?]를 쓰고 있지 않고 머리에 파수(?首, 두건) 혹은 복두(?頭, 감투)를 쓰고 있어 머리 모양을 볼 수 없다. 이 밖에도, 발해국은 비록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어 건국되었지만 발해인의 구성은 상당히 복잡해서 기존의 고려 유민은 물론 기타 부(部)의 말갈인도 있었던 바, 정효공주무덤 벽화 속에서 속말말갈인의 모습을 그린 것을 설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정효공주 무덤의 인물도
하지만 한가지는 긍정할 수 있다. 즉, 말갈이란 공통된 이름을 가진 각 부(部)는 비록 “풍속에 모두 변발[俗皆辮髮]”을 하지만, 변발 스타일이 반드시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때문에 당시 한 종족 공동체인 말갈은 또한 형성한 문화와 풍속이 완전히 서로 동일한 민족공동체는 아니다. 마찬가지 상황을 선비(鮮卑)에서 볼 수 있다. 선비는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등의 부(部)로 나뉘는데, 각자의 연원이 같지 않은 까닭에 머리스타일도 각자 다르다. 탁발선비는 “삭발(索髮)”이었고, 모용선비는 “피발(披髮)”이었으며, 우문선비 “사람은 다 머리터럭을 자르되 그 정수리 위의 (머리터럭만) 남겨서 머리장식으로 삼았는데, 길이가 몇 마디[寸]를 넘으면 짧게 하여 얹었다. (
이제부터 기타 측면으로부터 재차 이 추측을 보완하겠다.
첫째 증거는 사내인형의 왼손이 쥐고 있는 철과(鐵撾, 철퇴)다. 과(撾)는 병기(兵器)의 일종이다. 당나라 사람인
정효공주 무덤 벽화 중 철퇴를 든 무사
둘째 증거는 사내인형의 왼쪽에 얹어있는 매다. 이것은 시대와 민족을 몹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이 매 한 마리는 몸집이 퍽 작고 앵무새와 닮았는데, 응당 말갈의 동쪽에서 나온 것으로 요(遼)·송(宋) 이후에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렸던 일종의 귀한 송골매[鷹鶻]다. 《삼조북맹회편》권3에 “해동청이란 놈은 오국에서 난다. 오국의 동쪽은 큰 바다에 붙어있는데, 바다로부터 오는 놈을 해동청이라고 부른다. 작지만 몹시 튼튼하고, 발톱이 흰 것이 아주 남다르다. 이 놈은 반드시 여진을 (통해) 구한다. 해마다 외응방의 자제가 여진으로 가서 갑마 1천 여 사람을 발동하여 오국의 경계로 들어간다. 즉, 동해의 소굴에서 그 놈을 얻는 바, 오국과 전투를 치른 뒤에 얻는데, 여진은 그 난리통을 견디지 못했다 [海東靑者出五國, 五國之東接大海, 自海而來者謂之海東靑, 小而俊健,爪白者尤以爲異. 必求之女眞. 每歲外鷹坊子弟趣女眞發甲馬千餘人入五國界, 卽東海巢穴取之, 與五國戰鬪而後得,女眞不勝其擾]” 이것은 요나라때 여진으로부터 해동청을 획득하는 정황을 기록한 것이다. 해동청은 작지만 굳세서 백조[天鵝]를 잡을 수 있었고, 당나라 이래, 요, 금, 원, 명, 청 등 각 시대의 황실귀족이 사냥에 쓰던 송골매는 다수가 동북지구에서 획득한 것이다. 발해국 건국 후, 무왕(武王) 인안(仁安)3년(서기 722년)부터 희왕(僖王) 주작(朱雀)2년(서기 814年)까지 9차례나 당나라에 매를 바쳤다. 당조(唐朝)가 해동청을 이용했으며 또 상당한 일부의 매가 발해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서안(西安) 등지의 당나라때 황실귀족무덤 벽화 속에서 가응도(架鷹圖, 매를 손에 올려놓고 있는 그림)도 흔히 보이는 주제다. 그러므로, 말갈무사가 매를 손에 올려놓고 있는 돌인형이 영주의 당나라 무덤에서 나타난 것도 극히 정상적인 사건이다.
셋째 증거는 계집인형에 표현된 차수(叉手) 예법이다. 차수 예법은 송, 금·요, 금, 원 시대에 행하던 일종의 예법 방식이다. 송나라 사람이 쓴《사림광기(事林廣記)》 丁集 卷上 “유학(幼學)”류 “유학수지(幼學須知)”조에 “무릇 차수법(叉手法)은, 왼손으로 오른손 엄지를 꽉 쥔 채 그 왼손의 쌔끼손가락은 오른손 손목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모두 똑바로 하면서 왼손 엄지를 위로 오게 한다. 왼손으로 그 가슴을 덮어 가리는 것과 같은데, 가슴이 크게 드러나게 (손을) 모으면 아니되며 모름지기 2-3 마디(寸) (가슴으로부터) 조금 떨어지게 한다. (이것이) 차수법의 방식이다 [凡叉手之法,以左手緊把右手拇指,其左手小指則向右手腕,右手四指皆直,以左手大指向上。如以右手掩其胸,收不可太著胸,須令稍去二三寸,方爲叉手法也]라고 적혀있다. 이 기록과 대조해보면, 여기 여자인형의 차수예법은 상당히 표준적이다. 이런 차수예법은 요나라때 벽화 속에서 꽤 많이 나타난다. 송나라때 문유간(文惟簡)이 쓴《노정사실(虜廷事實)》에 “한족 남아는 윗사람으로 보이는 사대부나 늙은이 및 오랜 벗을 보면 옆으로 돌아 물러나 (모은 손을) 3번 머리 앞으로 내고 5번 허리를 구부리면서 서로 읍(揖)을 하되 소리는 내지 않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아읍(啞揖)이라 부른다. 이를 모르는 산야(山野)의 사람들은 예법을 모른 채 무리가 다 낄낄 웃는다. 거란 사람은 가슴 앞에 차수(叉手)하면서 또한 모두 소리를 내지 않는데, 이는 서로 읍(揖)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漢兒士大夫見上位·耆年及久闊交, 見者進退周旋, 三出頭, 五折腰, 相揖而不作聲, 名曰啞揖. 不知是者爲山野之人, 不知禮法, 衆咸嗤笑, 契丹之人, 叉手於胸前, 亦皆不作聲, 是謂相揖]”라고 적혀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근거로 “이런 종류의 차수 풍속은 본디 거란에서 나왔고, 한인(漢人)의 읍(揖)에 상당한다.”고 말했다 (林澐 1983). 조양 황하로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한 돌인형은 지금까지 발견된 차수예법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례(實例)다. 그런데 이 예법을 행하는 이는 곤발(髡髮, 머리의 주변은 모두 깎고 가운데 부분만 남기는 것)의 거란인이 아니라 변발의 말갈인이다. 이는 말갈인이 거란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말갈 등의 민족에 본디부터 이런 종류의 예의 풍속이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지금으로선 시원하게 답변하기 어렵고, 다만 당나라때 차수 예법은 이미 영주 지역에 있는 일부 소수민족 중에 두루 쓰이고 있었음을 말해줄 따름이다.
이상 고찰한 것을 종합해 보면, 조양 황하로 당나라무덤에서 출토한 두 점의 돌인형이 속말말갈에 속한다 함은 응당 큰 문제는 그다지 없다.
3. 조양 당나라 무덤에 껴묻힌 말갈돌인형의 역사배경 및 그 의의
조양 황하로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한 돌인형의 형상이 속말말갈에 속한다는 또 한가지 중요한 증거는 수나라때 수많은 속말말갈 부락이 영주로 이주해 왔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나라때 영주(營州) 관원의 무덤 속에 속말말갈 돌인형이 껴묻히게 된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말갈족은 퍽 일찍부터 영주와 밀접한 연계를 낳고 있었다. 북제(北齊)때, 영주자사 휘하에 말갈병(靺鞨兵)이 있었다. 또한 수·당때, 수많은 속말말갈 부락이 내부하자 영주로 이주케 했다. 역사문헌을 보면 두 차례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번째는 수나라때인데《구당서·말갈전》에 “추장인 돌지계(突地稽)란 이가 수나라 말에 그 부(部) 1천 여 가를 이끌고 내속하자 이들을 영주에서 살게 했다 [有酋帥突地稽者, 隋末率其部千餘家內屬, 處之於營州].”고 했다.《수북번풍속기(隋北番風俗記)》에 따르면 이 때 내부한 말갈 부(部)는 얼추 여덟 부, 1천 여 가에 정예병[勝兵]이 몇 천 사람이었다고 한다. 속말말갈이 두번째로 수많이 내부한 것은 당나라 고종이 고려를 멸망시킨 후인데, “당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그 땅을 아우르자 부중(部衆)은 흩어져 내뺐다. 속말(말갈)의 추장으로 이름이 걸비사우(乞比四羽)란 이가 마찬가지의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갔다 [唐滅高麗, 幷其地, 部衆奔散. 粟末之酋, 名乞比四羽者, 同乞乞仲象率家屬徙營州.”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권3 참조. 이 때의 속말말갈 내부에 관한 기록은 각기 다르지만,《발해국지장편》의 서술이 그래도 사실적이다.) 이 때 내부한 사람수는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후에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한 것을 따져볼 때 그 수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문헌기재에 따르면 영주로 이주한 속말말갈을 제외하고도 또한 소량의 백산(白山) 등 부(部)의 말갈인이 있었다. 이들 부락을 안치(安置)하기 위해서 당나라때 영주 부근에 연주(燕州, 후에 귀덕주(歸德州)로 개칭), 신주(愼州), 이빈주(夷賓州), 려주(黎州) 등의 주(州)가 설치되었다. 죽 이어서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서기 696년)이 되자, 이들 말갈인은 걸걸중상과 걸걸사우의 영도 하에 들어갔고, (당나라가) 거란을 다스리는 틈을 타 이탈하여 요서(遼西)를 뚫고 옛땅으로 되돌아가 나라를 세웠다. 말갈인은 영주에서 몇 십년이나 이주해 살았었고, 응당 일부 유적과 유물을 남겼겠지만 과거 조양지역에서는 속말(말갈)식 도기(陶器)만이 겨우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번에 황하로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한 두 점의 돌인형은 말갈이 이주했던 영주(營州)의 역사에 관련된 한 중요한 발견이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돌인형의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말갈인의 머리스타일과 생김새의 특징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돌인형 두 점의 얼굴 부분은 형태가 평평하고 코의 형태는 아주 넓은데, 러시아 아무르주 트로이츠키 무덤에서 출토한 말갈족의 머리뼈 특징과 비교적 유사해서(朱泓,1983), 속말말갈의 인종귀속과 풍속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다음으로, 당나라 무덤에서 발견된 말갈인 돌인형은 당나라때 영주(營州)의 사회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수·당 시기에 내부한 수많은 말갈인은 틀림없이 영주(營州)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가져왔을 터이고, 당나라때 영주(營州)의 관원 무덤에 껴묻혀 있던 속말말갈 돌인형은 그런 영향의 반응결과다. 사료《송막기문》에 “발해 남자는 꾀가 많고, 다른 나라 사람보다 굳세고 씩씩해서 세 사람이 호랑이 한 마리에 맞선다 [渤海男子多智謀, 驍勇出他國者, 三人當一虎.]고 했다. 말갈인의 이러한 민족성을 지방관원도 또한 알아주었을 테고, 관원 무덤 안에 껴묻힌 속말말갈 돌인형은 당시 영주(營州) 관리의 집 안에도 이런 속말말갈인을 부리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돌인형의 발견은 영주(營州)로 이주했을 무렵의 속말말갈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참고로서 가치가 있다. 사료《북사·물길전》에 따르면, 돌지계(突地稽)가 부(部)를 이끌고 영주(營州)로 이주한 후, “변방 사람과 왕래했고, 중국의 풍속을 즐겼기에 입을 관대(冠帶)를 달라고 했는데 [與邊人來往,悅中國風俗,請被冠帶]”, 그 사상관념과 생활방식에 몹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타 영주(營州)로 이주한 말갈인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화(漢化)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출토한 이 두점의 말갈 돌인형을 보면, 민족의 풍속이 여전히 남아있는 머리스타일을 빼고는 옷차림은 이미 완전하게 한화(漢化)되었고, 더군다나 계집은 사내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역사적 상황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만세통천 원년, 당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동쪽의 옛땅으로 되돌아 갈 때 이끌고 간 집단도 한화(漢化)한 말갈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뒷날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국은 여러 면에서 다 성당(盛唐)을 본떠 동북의 한 모퉁이에 치우쳐있는 발해국을 영향력이 몹시 큰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루게 했는데, 응당 말갈의 영주(營州) 이주 단계 역사와 상당한 관계가 있다. 이는 또한 수·당시기에 영주로 이주했던 수많은 말갈 부락은 어느 정도에서 뒷날의 발해국 건국을 준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 말갈이 영주(營州)로 한때 이주했던 시기의 역사는 발해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단계의 역사에 대하여 옛사람이 남긴 기록은 매우 한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고고학적 작업이 더 많은 새 자료를 가져다 주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너무 너무 귀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덤에서 출토된 돌인형 두점에서 발해 건국 이전 말갈의 역사를 추적하다니..... 우리 역사 학자의 분발이 촉구됩니다.
말갈이 만주족 조상이라들었는데 비슷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