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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희] 내시의 딸 - 오 공화국 시대 28
그러나 그 분을 다시 부르신 것은 고종이었다고 했다.
고종을 도와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려 고심하는 사이 어느 날 찾아온 어이없는 병환으로
속수무책 임종을 앞두었을 때 이 대감의 집안에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나타나 사직동의 모든 종복들의 신원을 회복시켜 주자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시에 종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종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재산을 밖으로 내다 버리는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버님은 그런 행동을 지켜보면서 어쩐지 그 자제 분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게 그 분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그 분의 후손까지도 의를 가지고 대하여
그 분의 집안을 지키라는 분부를 내리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며 엄하게 말하였다.
"승화야. 너는 비록 이렇게 나에게서 자라났지만 일반 여염집의 핏줄이 아니다.
조선조 오백 년을 이어온 왕가의 핏줄이다.
나는 여태까지 너의 아비로 살았지만 지금은 이제 너를 지켜야 하는 신하로서의 길을 가야한다.
너는 사직동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저는 그런 것 몰라요.
아버지. 그냥 아버지의 딸 남양 홍씨의 딸로 자라게 하고는 이제 와서 다른 성이라며 내치는 것은 제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예요."
나는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마음, 의리를 지키라고 한 조부의 말씀에 충실한 그런 모습에 다만 엄숙할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처럼 가장 단순한 사람만이 갖는 의리보다는 고집만 같았다.
한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때때로 나는 아버지에게 불안했던 것이 누구든 아버지를 양반으로 대접하거나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면
곧 그 사람이 가장 예의범절이 밝은 사람이 되고 명민한 사람이 되고 또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아버지의 성품이었다.
내 조부란 이는 참으로 사람을 잘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이 어느 것을 믿고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아무런 비판이나 자의식 없이 다만 자신의 부친이 설정해 놓은 그런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여태까지는 그냥 저를 기르다가 왜 저를 이제 와서 다시 사직동으로 가라 시는 거예요?"
"그것은 네가 성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나는 물론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우둔하다고 해도 아버지가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아버지가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혹시 간첩인 그 분이 두려운 것은 아닌가요?"
나는 물론 억지였다.
그때 아버지가 엄주하게 말하였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맞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온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뭐 하러 그런 억지를 부리세요? 저는 아버지의 딸인데요."
그때였다. 엄마가 나의 팔을 잡았다.
"승화야 너는 가거라. 너는 먼저 가거라.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마. 아버지와 함께 나는 네게로 갈 것이다."
엄마가 말하며 나를 밀쳐내었다.
"승화야.
나는 아버지와 따로 할 말이 있다.
아버지를 내가 설득할 것이다."
엄마가 나를 밀쳐내었다.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가거라. 승화야.
사직동으로 가 있어."
엄마의 말에 나도 초안 산을 힘없이 내려왔다.
밝은 햇볕이 쏟아지는 초안산.
어느 곳이나 개발이 이루어지고 이제 초안산은 자꾸 허물어지고 있었다.
한 쪽 귀퉁이를 떼어 아파트를 짓는다고도 하고 한쪽 귀퉁이는 대학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렇게 허물어지는 그런 초안 산을 혼자서 내려왔다.
이제 초안 산에 나무꾼은 없었다.
사자들이 가장 안락하게 살아가던 초안 산.
초안 산의 어디가 그렇게 명당의 기운을 가졌기에 이토록 묘를 많이 쓴 것일까?
그 묘들은 왜 하나같이 산자들의 버림을 받고 이렇게 쓸쓸하게 퇴락해져 가는 것일까?
불과 몇 기의 묘만이 후손들의 보살핌을 받았고 너무나 많은 묘들이 그대로 쓰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기함을 할 뻔했다.
이제 사람들의 산책로가 되어버린 곳, 누군가가 아마 계단을 만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계단에 놀랍게도 계단 하나에 동자석이 묻혀있었다.
가로로 넘어져 계단이 되어 사람들은 산을 오를 때마다 그 동자석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올라갔던 것이다.
나는 멈춰 서서 그 동자석의 모양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자석은 옆으로 누워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고 바로 말하면 사람들은 그 동자석의 어깨를 밟고 지나는 셈이었다.
나는 손으로 그 동자석에 묻은 흙을 하나하나 털어 보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섞인 동자석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 얼굴이 나를 향하여 웃고 있었다.
나는 진력으로 그 동자석을 끌어내 보고 싶었다.
아무리 이름 모를 묘의 동자석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계단 밑에 누워 사람들의 디딤 터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돌멩이를 찾아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조금씩 흙을 파내면서 동자석의 몸체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흙을 더 파내면서 힘을 들여 그 동자석을 파내고 있었다.
"무엇하는 거유?"
길을 올라오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동자석으로 계단을 했잖아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할머니가 혀를 찼다.
"그렇고 말구 그렇고 말고."
할머니도 그 모양이 딱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같이 해 봅시다."
우리는 같이 동자석을 끌어내었다.
그 동자석의 무게는 보통 무게가 아니었다.
온전하게 돌인 것은 알았지만 문인석이나 무인석이 아니라 동자석인 것을 그 중 만만하게 본 나의 안목이 틀린 모양이었다.
흙속에 묻히기도 했지만 동자석의 무게만도 보통 무게가 아니라 힘없는 노인과 나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나는 우선 동자석 위의 흙만 긁어내었다.
그렇게 흙을 긁어내고도 동자석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우리 힘으로는 어림없겠지요?"
내 말에 그 할머니가 "우리 힘으로는 어림없겠지만 또 알우?"
"네?"
"알 수 없는 힘이 도와 주실지 말이야."
"알 수 없는 힘이라니요?"
할머니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전에는 이 길에 장군님이 다니셨지.
구척장신에 기골이 장대하고 모습이 준수하신 헌헌장부이셨지.
그 분이 이곳에 묻히셔서 우리는 그 장군님을 모신다우."
"장군님이요?"
"그렇지. 장군님이지."
나는 할머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졌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동자석에 힘을 들였다.
"저 통나무를 써볼까요?"
나는 순간 지렛대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길가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끌고 와 동자석 밑으로 간신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치 널을 뛰듯이 할머니와 나는 그 위로 옮겨 서서 번갈아 힘껏 널을 뛰었다.
한 번 두 번 우리는 넘어지지도 않고 널을 뛰었고 그 덕에 동자석이 이제 완전히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옮기지는 못하고 그 산등성이에 동자석을 세울 수는 있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수고하셨습니다."
할머니가 그 동자석을 보고 빌었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눈짓을 하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거기서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나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렇게 고마울 데가."
나는 순간 이 할머니를 보고 마마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
할머니가 합장을 하고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 혹시 마마할머니세요?"
"마마할머니?"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저 아래 신당을 모시는 박 만신이라고 하우. 마마할머니라니?"
"아, 네."
비로소 그 할머니가 무당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궁에 살던 집 후손이우?"
할머니의 느닷없는 말에 내가 움찔거리자...
"혹, 저기 홍 대감집 자손이우?"
할머니가 나를 정확하게 지목했던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를 아세요?"
박 만신이 무릎을 쳤다.
"맞구먼 맞구먼. 참으로 이런 인연이... 내 거기 조부님을 그 옛날에 한번 뵈었지.
키가 구척장신이시고. 목소리는 호랑이 같고.
산 위에서 호령을 하면 온 초안 산이 쩌렁쩌렁 울렸우."
"아, 네."
"그렇게 대단하시던 분이 그래도 손을 잘 들이셔서... 아들이 효자란 소리는 이미 들었다우.
이렇게 장성한 딸이 있었구먼."
할머니는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손이 귀한 집 자손이구먼. 그러나 걱정말우.
아들만 사 형제를 줄줄이 보고 살 테니..."
그러고는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참 묘하다. 참으로 묘하다."
"할머니 왜요?"
"그 얼굴의 관상이 참으로 묘하구려. 참으로 귀한 상이고 어찌 보면 참으로 천한 상이다.
전에 임꺽정이란 도적이 이런 상을 타고 났다더니만.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제 관상을 보셨어요?"
"관상이라기보다는 참으로 묘하구려."
"무엇이요?"
"생전 처음 보는 그런 관상이구려.
참으로 희한하다."
나는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어진 지아비 만나겠고 곧 부녀상봉 하겠우.
허나 진득하게 같이 살 운명은 아니겠우. 그래도 슬퍼 말우.
거기 앞날이 부모공덕 보다는 스스로 얻어내는 운명이라 그러니."
그리고 할머니는 일으켜 세운 동자석을 보더니 허리춤에서 수건을 끌러 닦기 시작하였다.
흙을 닦아내고도 자꾸자꾸 들여다보면서 공들여 닦기 시작하였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허궁천하 비비천하 삼만은 도리천하
올려 달라 삼십 칠 관, 내려달라 이십 팔 관
하늘이 마련된 후 땅이 마련돼야
천상에 옥황상제 일월성신
북두대성 칠원성군 삼불제석 나 계시고
땅이 마련돼야
팔도명산 산신국사 도사신령 나 계시고
천룡지신 사해용왕이 나 계시고
사중구생 열위보살 나 계시와
인간 절처 봉생이 화기하니
각위 천하장군 지하장군 각성장군과
각성별성이 나시와 천상옥황사자 도청대장
소거백마신장과 이십 팔만 신장과 십이 신장과
오방신장 나 계시와 축천 축지 이산역수
호풍하는 흥운장내 변화가 무극커늘
천하대신 지하대신 통감하실 적에
호호 칭칭 맺힌 마음 춘설같이 풀으시고
태산같이 맺힌 마음 일월같이 풀으시고
난초같이 맺힌 마음 초록같이 풀으시고
박월화 애동제자 양어깨에 듬뿍 실어 서기 줄도
내리시고 명기 줄도 내리시어
흐린 정신 제쳐놓고 맑은 정신 돌려내어
말문도 열어주고 글 문도 내려주고
온갖 조화 신통력을 골고루 내려주사
상통천문 하달지리 명견만리 주유천하
인간화복 길흉사를 무불통달하게 하사
억조 창생 만인간을 구제 중생케 하옵소서
옴 급급여율령 사바하"
그 할머니는 그 긴 주문인지 경인지를 다 읊더니만 또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의 주문이 다 끝나는 것을 기다려 겨우 산을 내려왔다.
신당을 지키는 무당, 그녀는 어찌하여 이 초안산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모시는 신이 이 초안산에 근거한 것인지 그녀는 초안산에 있는 동자석 하나에도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경을 다 듣고야 겨우 산을 내려왔다.
이제 초안산 아래는 다 파헤쳐져 있었다.
아파트를 짓는지 공사가 한창이고 그 많던 무덤들은 대학이 들어서 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이층 집은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는 도깨비의 조화만 같아서 멍청하게 서 있는데 거기 옥영이 이모가 있었던 것이다.
"너를 찾아왔다. 어서 가자."
저만요?"
"그래. 어서 가자.
우리는 이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너는 진작 내 수양딸이었던 것을 잊었니?"
나는 옥영의 이모의 차에 올라탔고 선선히 사직동 집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 거기는 또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이었다.
할머니들은 내가 들어서자, 일어서기도 힘든 몸짓으로도 하나같이 일어섰고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 분들은 궁중의 상궁마마님들이시다.
네 소식을 듣고 이렇게 오셨다."
절을 한 할머니들이 다가와 내 손을 꼭꼭 잡았다.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할머니들은 눈물을 흘렸고 옥영의 이모는 거기 앉아서 그 노인네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여 사시게 될 날이 있었습니다.
진작 이렇게 모여 사셔야 하였는데, 이 몸의 불찰이 너무나 컸습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면서 난감해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 분들은 창덕궁에 계시던 상궁마마들이시다. 그간 고초가 많으셨다.
네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시고 싶으시다는 전갈이 와서 우리는 이렇게 이 분들을 모셔들었다.
이 분들은 그간 네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실 분들이야."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곧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만큼 연로한 그들과의 동거를 알리는 소리에 나는 기겁을 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와 살아보고는 나는 한 번도 노인들과 함께 산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많은 할머니들이 나와 함께 살아야한다니...
"이 할머니들 하고요? 같이요?"
옥영의 이모가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들이라고 하지말고, 정 상궁이라고 하고 박 상궁이라고 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생 아기씨를 모시며 살고픈 쇤네들의 소청을 들어주소서.'
약간은 코미디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난 후 나는 "전 곧 상계동으로 갈 거예요.
저는 이곳에서 살기 싫어요. 이모님."
"이모님이라고 하지 마라. 양 어미래도..."
"저는 가고 싶어요. 이곳에서 살기 싫어요."
나는 투정처럼 말했고 옥영의 이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승화야."
나는 옥영이모를 쳐다보았다.
"승화야.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너희 아버님께서 출감하실 것 같아."
"네?"
"어떻게 그런? 그게 가능해요?"
"이미 몇 분이 출감하셨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장기수 한 분을 석방하셨는데 어쩌면 이번 차례지 싶은데,
혹,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너에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빌자꾸나. 겉으로 드러난 이데올로기라는 사슬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 험한 옥사에 계신 분께서 당하셨을
고초를 생각해서도 나는 네가 그 분을 따스하게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였으면 좋겠다."
"전 그 분을 아직, 그 분이 저의 아버지라는 확신도 없고 또 아버지라고 부를 용기조차 아직 없어요.
저는 정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하겠고요."
옥영의 이모가 나에게 다가와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하자꾸나.
우리는 그렇게 이곳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너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있기만 해라.
나는 네게 그간 못해준 모든 것들을 다 해주고 싶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니?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니?
네 아버지 때문에 당한 고통, 감히 종친이라고 나서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시대는 훨씬 관대해 졌다."
"전 어머니를 찾아갈 거예요.
버렸던 저를 이렇게 데려다 아버지라고 하며 만나면 그 분은 제가 반가울까요?
이미 버렸던 저를 보며 그 분은 마음이 편할까요?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그럴지는 몰라도 이 시대에, 암울한 이 시대에 그 분이 택한 것은 자신의 행복이 아닌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그런 평등한 세상을 꿈꾸신 것이다.
나는 물론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라.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을 위하여 그 분이 사죄하는 길이 여럿이 함께 잘사는 이상향을 건설하자는 공산주의식 논리였을 것이다.
그 분은 그 논리에서 자신의 안일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선택을 하셨던 것이다."
"그럼 만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한 처녀의 일생은 그대로 망쳐도 되는 것이었나요?
자신의 씨를 잉태한 처녀를 그렇게 부인하며 신분위장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말하고 감옥으로 숨었을 때,
남은 그 처녀는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던가요?
그리고 자신이 부인한 그 처녀가 아기를 낳아 이렇게 자라났다고 하면 그 분은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저를 볼 수 있을 만큼 뻔뻔한 파렴치한인가요?
도대체 종친이 뭐기에, 다 망해빠진 왕실이 뭐기에 이렇게 저를 난감하게 묶어 두시려는 거예요?"
옥영이모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계속 말을 했다.
"더구나 저는 직계 왕실 자손도 아니잖아요?
고종이 계셨고 순종이 계셨고 영왕이 계셨는데 뭐 하러 일개 사생아인 저를 왕실의 후손이라고 굳이 끌어다 붙이시는 건데요?"
"승화야. 너무 슬프지 않니? 너는 슬프지 않느냐?
오백 년을 면면히 이어온 조선의 왕실이 이렇게 문을 닫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것이 너는 애달프지 않느냐?
그래. 승화야.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인데 어찌 나라를 망하게 한 왕실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러나 적어도 너는 그 망한 나라의 왕실에서 이 나라를 위하여 적어도 몇 사람만은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사람들이란 걸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렇게 이 나라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옥영이모가 나의 어깨를 안았다.
"나는 네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 지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아왔는가도 알고 있다.
그 당시 이 선생님이 검거되신 걸 나는 신문을 보고서 알았다.
그리고 그 동거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가회동의 네 외가에도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었지만 그 분들이 함구를 해버리는 바람에 영영 너를 못 찾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병원 영안실에서 눈빛이 초롱초롱한 너를 만나고 나는 얼마나 안도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종친의 집 사람도 아니고 다만 귀인마마를 낸 집안의 사람으로 그 왕실의 왕족들을 보호해 드려야 한다고
시모님께 들었을 뿐이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성장하는 것이 너무나 기꺼웠다.
다만 너무 힘겨운 생활에 보탬을 드리고 너를 데려오려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는 시대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내가 섣부르게 너를 데려왔을 시 어떤 불이익이 닥치거나 네가 주목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완화되었다.
그래서 너에게도 나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야.
너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으냐?"
"보탬이요?"
"그래. 너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사는 게야.
그리고 함께 네가 살아갈 이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이야."
나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앉아있었을 때 한 상 가득 잘 차린 저녁상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같이 들고 온 저녁상과 그 뒤에 따로 들고 따라온 작은 상의 규모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이게 다 뭐예요?"
하나같이 반들반들한 방짜 유기로 차려진 밥상, 그 옛날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그런 상을 받으면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밥상을 이렇게 받아요?"
내가 따지듯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의 그 호사스런 환경이 자꾸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은 상궁마나님들이 차리신 것이다.
이제 그 분들은 너무나 연로하시다. 언제 다시 이런 상을 차리실지 몰라.
그 분들은 마지막일지도 모를 너의 아버님 생신 상을 차린 것이다."
"생신이요?"
"그렇다. 오늘이 너의 아버지 생신이시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수저를 들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생신 상을 나 혼자 받아야 한다니...
내가 수저를 들고 맛도 느끼지 못하고 밥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 옥영이모가 말하였다.
"승화야. 상궁마마님들이 갑자기 들이 닥쳐서 너는 좀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을 보살펴 드리는 것도 어쩌면 의미있는 일 일 것이다.
그 분들은 이제 가실 곳이 없어.
평생을 왕실을 위하여 일한 분들이지만 궁에서 내쳐진 후 혼인도 할 수 없고
그 누구의 도움의 손길도 받지 못하고 평생을 외롭게 사신 분들이시다.
그 분들은 너를 보살피는 것을 마지막 당신들의 소임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기뻐하는 일이셔.
네가 당황스럽더라도 너는 그냥 그 분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제 직장은 그만 다니고 새로이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문득 마마할머니가 생각났다.
궁에서 나와 학림사의 그 다 쓰러져 가는 요사채에 머무르다가 거기서 돌아가신 그 분도 여기 상궁마마들과 같은
운명이었던 것이다.
살길을 찾아 아기 배냇저고리를 만들던 그 손길이 기억났다.
"전 학림사에서 마마할머니하고 부르던 상궁님을 만난 일이 있어요."
"그래?"
"네. 거기서 사시다가 어느 날 기별도 없이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그렇다. 그 분들은 대개 그렇게 쓸쓸한 노년을 보내셨다.
너는 그 분들에게 의지가 되고 있어.
부디 그 분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느 새 상이 나가고 난 후 마마할머니들이 전부 들어왔다.
그 분들은 나를 세워놓고 등판이며 기장이며 품을 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옷을 짓기 위하여 하는 행동들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죽기 전에 입성 하나 저희 손으로 지어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들의 손길이 웬일인지 무척 따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