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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5월 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8 11.05.13 17: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 5 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
요한 15,9-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유다의 자리를 대신해 줄 사도를 뽑는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있는 이들 가운데 마티아가 뽑혀 열두 사도 공동체 일원으로 사도직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신다. 친구는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가리켜 임금이나 주인이 아니라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줄 임금이거나 주인이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을 잘 안 들으면 당신 힘으로라도 제 갈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해 주시면 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십니다. 우리 삶의 어떤 것도 강제할 수 없는 그저 인생길을 함께 걷는 친구라고 하십니다. 마치 엠마오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길동무이셨듯이, 우리 인생길에서도 삶을 충고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친구이십니다. 우리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가 슬퍼하면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그런 친구이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도 우리가 떠나온 그 자리에서 마음 아파 하시며 그저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친구이십니다
.
우리가 예수님을 임금이나 주인으로만 바라볼 때 우리 기도는 늘 거래 관계처럼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두려워서 피하고, 잘하면 손을 내미는 그야말로 유아적인 관계에만 머물게 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주님과 깊은 인격적 만남도 우정도 생기기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함께 인생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보다 더 멋진 만남이 어디 있겠습니까?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을 바꾼다면,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관심은 돌보는 행위입니다. 꽃나무를 가꾸듯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의 관심이 있기에 세상 만물은 생기를 띠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의 향기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안다.’고 답하자, 말로 표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분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그분을 닮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물들어 가는것이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감동시켰듯이 너희도 서로 감동을 주며 살아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듯이 너희도 용서하며 살아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동입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명하고 계십니다.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동과 용서를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마티아 사도는 기술자의 수호성인으로서, 열두 사도 가운데 유다의 배반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려고 선발된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도에 대한 기록이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후대에 남겨진 전설로써 그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마티아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셨던 일흔두 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한 분이라 하기도 하고, 자캐오 또는 바르나바와 동일 인물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티아 사도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처럼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숫자를 채워 오순절에 내려오실 성령을 준비하는 데 그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비록 성경에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마티아 사도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열두 지파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한 사도입니다.

 

 

 

 

서로 존엄하게 대하여라

- 정순옥 수녀-

 

2003?-?2008년 말까지 결혼이민자는 503,196명이었다. 2009년 한 해 동안 약 167,000명으로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전국적으로 다문화 가정이 없는 지역이 없다. 한국에 있는 이민노동자 90퍼센트가 성공한다면 결혼이민자는 20퍼센트 정도 성공한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 7일 주일 오후, 파주 다문화가정센터에는 다문화 가정 대표자 부부의 안내로 수척한 모습의 한 베트남 여성이 여행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먼저 결혼한 사촌언니의 소개로 2007년 혼인해 79세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살과 2개월 된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괴팍한 성격과 욕설 때문에 그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헤어질 것을 각오하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을 나왔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냉장고 음식을 허락 없이 꺼내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의 옷도 한 주에 한 번만 갈아입히라고 하고, 화장실 전깃불도 못 쓰게 하면서 삶의 모든 면에 간섭하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곧바로 욕설로 이어졌다. 한번은 사소한 일로 시어머니와 손위 시누이에게 수없이 얼굴을 얻어맞았다고 한다. 3일 뒤 남편을 센터로 불러 장시간 조정했다. 그녀는 필요한 조건을 제시한 후에 남편을 따라 귀가했다.

가끔 한국인 며느리였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 라는 물음을 던진다. 물론 절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차별로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많은 여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자매님들?! 국제결혼여성들의 멘토, 후견인으로 친정엄마나 이모, 언니로서 이들의 등을 토닥여 주세요. 그럴 여건이 안 되시면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주세요. 오늘 예수님이 이주민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실지도 모르잖아요. 예수님은 마태오복음 25장 최후 심판에서 작은 자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또한 사기를 당해 집까지 잃어버렸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암 진단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기도하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서 울부짖으며 말합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에게 해준 것이 뭐 있다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러자 이 자매님께서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을 잃은 것도 한스럽고, 집을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이렇게 건강까지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느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

종종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무엇들 때문에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그 무엇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왜 잊어버릴까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기준은 그 무엇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통해 어떤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 하느님을 선택하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물건 사듯이 선택한 것처럼,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나에게 생겼을 때에는 물건 무르듯이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어렵고 힘든 세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기념하는 마티아 사도는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세웠지만, 이 역시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제비를 뽑은 사람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도구로 쓰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이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과 멀어지려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행복과도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 인해 세상의 부정적인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당신에게 비판하는 부분을 갈고 닦아라. 그런 과정이 당신을 만든다(장 콕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준석신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1,15 이하)을 보면 사도들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주님께서 뽑아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사도들은요셉이라는 사람과

마티아가운데서 제비를 뽑아마티아를 열두 번째 사도로 세웠습니다.
한 사람이 배반했으면 그냥 열한 명의 사도로 남겨두면 되는데도 왜 사도들은

굳이 주님께 열두 번째 사도를 뽑아주십사 간청했을까요? ‘열둘이라는 숫자는

매우 의미 있는 숫자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통성을 대표하는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이는 당신을 믿는

제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유다가 배반함으로써열둘에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마티아사도를 뽑으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인간의 실수로 좌절되는 법이 없습니다
.
절망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맙시다.

 

 

 

나를 아시는 주님, 주님을 아는 나

-김찬선신부-

 

오늘은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잘 알다시피 마티아 사도는 배반자 유다의 뒤를 이은 사도인데

사도들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한 다음 제비 뽑아 사도가 된 분입니다
.

이 기도에서 사도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주님이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이 고백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니 고맙고 기쁩니까
,
아니면 두렵고 떨립니까
?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우리 마음 상태에 달려 있겠지요
.
우리 마음이 슬프고 괴로우면

그것을 알아주심은 사랑이 되어 기쁘고 고맙지만

우리 마음이 악과 음모를 품고 있으면
내 마음을 아심은 폭로와 심판이 되어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아심에 대해
기쁘거나 슬픈 감정으로만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
전 존재적으로 응답하게도 됩니다
.
내 마음을 다 아시니 숨거나 숨기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숫제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맡길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도망치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앎과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
,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
,
이것에 따라 전적으로 맡길 수도 도망칠 수도 있는 것이지요
.
하느님을 좋은 분, 사랑이신 분으로 믿는다면 맡길 것이요
,
하느님을 나쁜 분, 미움이신 분으로 믿으면 도망칠 것이며
,
나쁜 분, 미움이시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좋은 분, 사랑이신 분으로 믿지 못한다면 완전히 의탁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다 아시는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 아시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잘 아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하느님을 다 알 수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을 다 알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하느님을 잘 알기는 해야 합니다.
좋으신 분, 사랑이신 분으로 말입니다
.

그러므로 마티아 사도의 뽑힘은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사도들의 善知識의 결과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뽑혀볼까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양승국신부-

 

<부족한 나, 충만한 그분>

 

오늘 우리는 배신을 때린 제자 유다를 대신해서 엉겁결에 사도로 뽑힌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티아가 워낙 기본이 되어 있던 사람, 초대교회 신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추천을 받을 정도로 여러 측면에서 모범적인 사람이었기에 베드로 사도에 의해 사도 후보자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아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마티아는 또 다른 후보자 유스토와의 심지뽑기를 통해서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가 제비뽑기를 통해 사도로 불림을 받는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너무도 오묘하다는 것, 인간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제 성소를 통해서도 잘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한때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손길이 느닷없이 저를 감싸더니 인생이 180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닐텐데, 이 길은 내 길이 아닐텐데...하면서 셀 수도 없이 거부할 때마다 하느님의 손길은 더욱 강하게 제 삶을 사로잡아 저는 꼼짝도 못하게 되었지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는 말씀, 제 개인적으로 너무도 절실히 와 닿는 말씀입니다.

 

내가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지만 하느님 그분께서 나를 불러주셨기에 나는 합당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엊그제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수도생활을 꿈꾸고 있는 몇몇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도생활 선택 동기가 너무도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이어서 서글펐습니다.

 

수도생활이란 삶 전체를 건 모험이자 투신입니다. 심심풀이 삼아 그저 한번 경험하고 말 성격의 생활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숙고와 일생을 건 결단을 통해 이루어져야할 진지한 선택이어야만 합니다.

 

수도원은 이 세상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또 다른 하나의 탈출구, 2지망 장소가 절대로 아닙니다.

 

수도원은 사랑을 실패했다거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속울음을 울면서 마지못해 선택하는 삶도 결코 아닙니다.

 

수도원은 세상의 고통과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종의 피난처 역시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이 보다 높은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의 삶이며 투쟁의 삶입니다.

 

비록 심지뽑기로 사도에 당첨된 마티아 사도였지만, 오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선배 사도들 못지 않은 충실한 복음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생명과 세례성사로 또 수도자로, 평신도 성소에로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결과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마티아 사도처럼 이왕 주어진 내 삶의 몫이기에 기쁘게 수용하고 기꺼이 투신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어떤 농장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농장은 넓고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겉모습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농장의 가족들도 모두 누더기 차림으로 형편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십니까?” 집주인은 스승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겐 매일 몇 리터의 우유를 만들어 주는 젖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팔거나 다른 먹을거리로 바꾸고 남은 걸로 치즈나 버터를 만듭니다.”

스승은 집주인 대답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어라.”

“하지만…, 그 젖소는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말이 없었습니다. 제자는 어쩔 수 없이 농장주인 몰래 젖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지요.

몇 년 뒤 제자는 그 농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아름답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자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어떻게 농장을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집주인이 말했지요.

“우리에게 젖소가 한 마리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장에 채소를 심었고, 나무를 잘라 내다 팔고 새로운 묘목을 심었지요. 그 뒤 면화 농사까지 지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그때 젖소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젖소가 있었다면 계속해서 젖소에 의지했었겠지요.”

젖소를 절벽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이 농부는 여전히 누더기 옷을 입고 형편없이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젖소가 사라졌기에 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였고, 그래서 더 잘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주변의 환경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대충대충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더욱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고통과 시련에 쉽게 포기하면서 힘들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 치료법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을 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을 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한 기적이 바로 나에게 이루어진다는 것. 놀랍지 않나요?

주님의 지상 명령인 사랑. 바로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성공의 열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실패의 열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빌 코스비)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양승국신부-

 

<편안한 사람>

 

연초에 제 개인적으로 세웠던 일 년 계획의 세부 사항 가운데 하나가‘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되짚어보니 여전히 형제들에게는 ‘부담스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책상 그러려니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동료 수도자들 가운데 정말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성품, 밝은 분위기, 적정선의 예의, 적당한 유머감각을 겸비한 편안한 그 형제와 함께 있으면 같이 있는 그 시간이 꿀맛 같은 휴식이요, 천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으뜸 계명인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 사람의 내면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통 충만하다면, 그 결실이 외적으로 드러나야겠지요. 그 결실은 다름 아닌 편안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상냥함입니다. 기쁨입니다. 다정함입니다. 겸손함입니다.

 

언젠가 심신이 무척이나 고달팠던 날 밤늦은 시간,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히 삭고 쩔었습니다. 제가 봐도 너무나 부담스런 얼굴이 거기 들어있었습니다.

 

가끔씩 거울 안에 들어있는 나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얼굴이 편안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불편한 얼굴입니까? 부드럽고 자상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짜증이 왕창 묻어나는 부담 제대로 주는 얼굴입니까?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천사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고집과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입니까?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다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기뻐 내 주위를 떠날 줄 모릅니까? 아니면 다들 뒤로 슬슬 물러나는 것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세상, 너나할 것 없이 다들 부족한 인간, 너무 아웅다웅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지나치게 작은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이웃의 허물은 물론 나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도 너무 크게 호들갑떨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보내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천국은 내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종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콧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기쁨 넘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봄일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청춘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그가 맞이하는 매일이 천국입니다. 그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     

-손우배 신부-

 

언제인가 결혼을 앞둔 한 신랑이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던 게 생각납니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제 곧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매사가 즐겁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여유 있고 친절하게 대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조차 흥에 겨워 일하는 그에게 우리는 뭐 좋은 일 있어?”라고
묻게 됩니다. 사랑이 가득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또 내가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생활이 즐겁고 생기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엔가 있고,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함께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합니다. 우린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함을 느낍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며, “내 안에 주님 사랑이 가득한 것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좋은 친구

- 김태훈 신부-

 

저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자기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자고 초대합니다. 그 초대는 어떤 요구나 명령이 아닙니다. 가련하고 부서진 모습으로 다가와서 부탁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동정과 사랑이 일어 기꺼이 그 짐을 메고 가게 합니다. 억지로 끌려가듯이 지고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혼자 무겁게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와 함께 메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 보며 그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 그의 부르튼 손을 잡고 가기 때문에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함께 있어서 기쁘다며 흐뭇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 더 깊은 우정이 솟아나기 때문에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 제가 힘들 때, 특히 버림받고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느낌을 받을 때, 홀로 있는 고통에 허덕일 때 그 친구는 자기 마음을 저에게 열어 보여 줍니다. 자기는 저보다 더 버림받았고 더 소외되었으며 더한 비난과 조롱 속에 있었고 처참한 고독 속에 있었노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비참함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저보다 더한 처지에 있는 그를 보면서 저는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그의 몫은 저의 것이 되고 저의 몫은 그의 것이 되고,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면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나에게 이 친구는 너무나 좋은 친구입니다
.

그런데 저는 그를 자주 함부로 대합니다. 평소에는 재미있는 친구들만 찾으며 버려두었다가 제가 어려울 때만 찾습니다. 그래도 그는 한 번도 저를 밉다고 하지 않습니다. 늘 저와 함께해 주고 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줍니다. 반면에 저는 그를 만나도 뭘 주기보다 요구를 더 많이 합니다. 그래도 그는 저를 싫다고 하지 않고 청하는 것을 다 줍니다. 그리고 이 좋은 사람은 내가 친구 하자고 조르지도 않았는데 이기적이기만 한 저에게 먼저 친구 하자고 손을 내밉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그 친구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오늘 그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한 번이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습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모델

-전삼용신부-

 

한 비행기에 조종사와 우주 과학자와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신부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고 하자 조종사는불행하게도 우리는 넷인데, 낙하산은 셋뿐입니다. 저는 아내와 첫 돌 맞은 아들이 있으니 살아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이어 우주 과학자는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나의 죽음은 세계 전체의 큰 손해입니다. 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남은 것은 신부님과 보이스카웃 소년이었는데 신부님은얘야, 남은 낙하산은 네가 써라. 나야 살 만큼 살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고 부활에 대한 믿음도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자, 보이스카웃 소년이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가방 어디 있지? ~, 과학자 아저씨가 내 가방을 지고 뛰어내렸네요...”

사랑은 하나뿐인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한 사람을 대신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줌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당 벽화나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더 나이 드신 아버지와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함께 그린 그림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받으시고 아버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림으로 표현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만이 인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아버지와 성령께서는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을까요?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을 바칩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야 서로에게 어떤 것을 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온전히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서로서로에게 당신의전부’,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신데 세 분이 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면 세 분의 생명들, 즉 세 개의 본질을 지닌 세 분의 하느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에겐 신적인 본질이 단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 분 하느님 중에생명의 본질은 단 한 분만이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분 이 생명을 당신 혼자 가지고 있으려 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계속 돌려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아들은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의 전부, 즉 생명을 받습니다. 그 생명을 통해 아들은 살지만 사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맞고 계신 것입니다.

아들은 이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당신의생명’, 즉 성령을 아버지께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이 아들의 죽음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을 아버지께 돌려보냈다고 표현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만을 보지만 사실 아들이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는 죽어계신 것이고 아들이 죽으실 때는 아버지께서 생명을 받아 사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이 없는 아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다시 당신의 성령을 아들에게 보내시어 당신은 죽으시고 아들을 부활시키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는 이 서로 간의줌과 받음의 운동을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세 분이 하나의사랑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아 지니고 있는 전부, 즉 생명을 우리에게 똑 같이 주시는 사랑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 십자가에서피와 물’, ‘생명과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아들은 온전히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일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시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죽임이란, 자신의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아들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그 분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그 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서로 자신을 온전히 주시는 사랑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델을 닮아가며 기쁘고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생명을 주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참 하느님의 행복은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도 이 사랑을 반복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가진 이가 먼저 다른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우리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엔 아버지도 달리셨고 아들도, 성령께서도, 우리 모두도 사랑을 위해 매달려야하는 사랑의 온전한 자리인 것입니다.

 

어제 시간이 좀 있어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들에 있는 제 모습이 그리 맘에 들지 않습니다. 얼굴 표정은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지, 또한 손가락은 왜 이렇게 ‘V’가 많은지, 또 좋은 배경도 많은데 왜 저런 곳에서 찍었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지요. ‘사진 잘 찍히는 법’을 말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자신이 어느 쪽 얼굴이 '더' 예쁜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쪽 얼굴이 더 많이 화면 속에 나오도록 자리를 잡습니다.

두 번째, 평범한 자세보다는 몸이 날씬해 보이고, 얼굴이 작아 보이는 자세를 취하도록 합니다.(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음)

세 번째, 손의 자세입니다. 어색하지 않게 손 자세를 취할 수 없다면 화면에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 의상입니다. 화려한 옷은 얼굴에 포인트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표정입니다. 밝고 자연스러운 표정이 좋은 사진을 만듭니다. 사진을 찍힐 때 자신 있는 태도와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이 사진 잘 찍히는 법이라고 하는데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이용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사진 잘 찍히는 법을 배우고 행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는 얼마나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주님께 얼마나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을까요?

기도는 열심히 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힘주어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또 어떤가요? 혹시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가족에게 조차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나는 사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제는 사람이 아닌,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 미움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친구로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사랑의 완성      

-강윤철 신부-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분의 계명을 지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 사랑 실천의 정도는 어떠한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사랑받는 정도는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할 것입니다. 사랑이란 관심에서
시작하고 그를 아는 것에서 성숙됩니다.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됨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이시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자기를 주려고 합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을 얻습니다. 이웃 사랑의 동기와 그 힘은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는 데서
생깁니다. 진정 나는 그것을 느끼고 그 기쁨과 힘을 얻고 있나요?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친구는 서로를 잘 압니다. 다른 사람을 친구로 삼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참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주 친구 예수와 대화하고
내 친구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가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받은 짝사랑처럼

- 원순희 목사-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계명이고, 이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벗 삼아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려주셨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크고 넓고 깊은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는 결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의 기도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형편에 처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인가?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인 줄 알고 행할 때가 참 많다. 그래서 성경은 내 전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타인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른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정도 하면 대단한 사랑인 것 같은데, 그 속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 사랑이 어떤 것이냐고 여쭈어 본 일이 있다. 그때 주님은 내 마음에 이렇게 들려주셨다. “사랑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모습이다. 끝까지 기다리고 오래오래 참고 견디며 죽기까지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에게 그 사랑을 되돌려 주기란 결코 쉽지 않다. 돌려주고 싶은데 그는 이미 내 앞에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주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것. 그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신 주님처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양승국신부-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살아있는 한 인간 존재 자체가 가장 큰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로구나, 그 어떤 처지이건 생명 그 자체는 주님 자비의 한 표현이로구나,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그 어떤 형제든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형제가 내게 준 그 어떤 상처도 그러려니, 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제의 모난 부분 앞에서도 조금은 관대해 질 여유가 생깁니다.


우리 눈에 비록 한심해보이고, 때로 비참해보일질지라도 그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축복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그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비록 이토록 부족하지만, 이토록 형편없지만,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시고, 지속적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우리는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불러주셨고, 계속해서 생명으로 불러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다면, 아직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오늘 이 아침 하느님께서 나를 다시금 생명으로 불러주셨다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역설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할수록 멀게만 느껴졌던 하느님 사랑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집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 순간 우리는 더욱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그 사랑은 순교자적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다들 끝났다고 말하는데도,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눈길 닿은 모든 대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상선신부-

 

우리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에게 주아진 자유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선택하도록 만든다.

기도를 할까 말까
밥을 먹을까 말까
묵상글을 올릴까 말까
항상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실 때
임명의 방법을 택하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유다의 자리를 채우려 할 때
임명의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 방식을 채택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 안에서 뽑아 세우실 능력이 있어지만
제자들은 그만한 권능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선택해 주시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때로 대통령 선거는 물론
수도회 안에서의 각종 선출들을 바라보면서
그냥 시간이나 돈 낭비 없이
하느님께 맡기고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는 사람을 뽑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자격요건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중에 함께 동행한 이들 중에서
뽑아야 하고,
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다.

우리의 선출은
때로 이런 자격요건은 제대로 갖추지 않은채
돈이나 명예, 학력, 언변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채
편가르기 식의 투표를 함으로써
올바른 지도자를 뽑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교회 안에서조차도
때로는 자리다툼(?) 같은 파당적 모습도
보게 된다.
자신이 정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투신할 생각도 없으면서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과 성체의 사람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할 생각도 없이 말이다.

오늘 수도회 총회를 준비하는 모임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격 있는 사람들 중에서
봉사자를 선출해 주시도록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선택은 의미가 없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가 회개생활 시초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소위 기도하고 나서 복음서를 세 번 펼쳐보았던
당시의 대중신심인 사돋들의 제비뽑기가
생각나는 오늘이다.

하느님의 선택은 마티아였다.
아마 우리의 인간적인 선택이었다면
요셉을 뽑았을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그는 바라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고도 하는 별명을 지닐 정도의
유명세를 타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리지 마라

-김찬선신부-

 

레오나르도를 수도명으로 받기 전
저의 세례명은 마티아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수도명으로 축일을 지냈지만
오늘은 제 본명 축일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저는 저의 세례명에 대해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수도명으로 바꾸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저는 얼른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마티아 사도께 죄송한데
제비뽑기를 해서 뽑힌 사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다른 사도들보다
정통 사도가 아닌 것처럼 생각했기에 그리했던 것이고
주님께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뽑았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미숙하고 비 신앙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이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이유로 뽑았다 해도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하물며 주님께 기도하고 사도들이 뽑았다면
당연히 거기서 하느님 뜻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기 위해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 기도하고 제비뽑기를 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아주 신앙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런 행위를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하던 행위가 있었지요.
하루를 시작하며 성서 3번을 펴보는 행위 말입니다.
오늘 하루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함인데,
그 기원이 프란치스코에게 있었지요.
프란치스코는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그 결정이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도록
성서를 3번 펼쳐보곤 하였습니다.

골똘히 생각하고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찾은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쪽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인지 몰랐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같이 가던 동료 형제에게 맴돌기를 하게 하였고
한참 맴돌기를 하는 그를 갑자기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지러워 쓰러지는 쪽으로 길을 갔습니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의 머리 굴림을 철저히 배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신앙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
아침기도 찬미가로 기도합니다.

복되신 우리 사도 성 마티아여
성령이 어떤 길을 보여주시든
우리도 지체 없이 기쁨 맘으로
그 길을 따르도록 도와주소서.


 새벽을 열며

 

 어제 저녁 미사 때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휴가 다녀온 뒤, 넘쳤던 그 에너지는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주일을 보냈기 때문일까요? 주일에 있었던 4대의 미사도 힘들었지만, 주일 낮에 있었던 3시간이 넘는 강의 때문에 완전히 지치고 말았답니다.

얼마 전에 제 동창 신부로부터 강의 부탁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창이기도 하니까, 저는 흔쾌히 강의를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강의하는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저는 강력히 말했습니다. 본당신부가 주일에 다른 일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더군다나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강의를 해달라고 하는데, 11시 미사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와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사정을 말하면서 부탁하는 동창신부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강의 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즉, 그저께 토요일 밤이었지요. 4시간이나 강의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휴가를 다녀온 뒤 곧바로 정신없는 주일을 보낸다는 사실이 기분 좋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강의부탁한 동창신부가 괜히 미워지고, 얄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동창신부를 골탕 먹일 생각을 했지요.

‘주일에 1시부터 강의를 하려면 11시 미사 끝나자마자 곧바로 가야하겠지만, 조금 늦게 가서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자.’

멋진 복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동창신부는 골탕을 먹겠지만, 강의를 들으러 온 신자들은 무슨 죄가 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왕 해주기로 한 것 좋은 마음 가지고 강의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다짐 후, 글쎄 동창신부로부터 곧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 “1시는 너무 무리인 것 같아서 내가 2시부터 강의하도록 했어. 그러니까 2시까지 와서 강의해줘.”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순간, 곧바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답니다. 사실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가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나’뿐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긍정적으로 바꾸어나갈 때, 이익을 보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은 이것뿐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그 길밖에 나와 내 주변과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빠다킹신부

 

   하나가 된다는 것     

-김동하 신부-


 한자(漢字)를 만들어진 틀로 나누어 보면 형성자(形聲字)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형성자란 소리와 뜻을 서로 합쳐서 한 글자를 만드는
원리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방(訪)’자는 방(方)이라는 소리와 묻다, 찾다(言)라는 뜻이 서로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라 합니다. 글자 안에서도 서로를 아끼고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만나서 합하였을 때입니다.
서로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끼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존중하여야 하는 몫은 아끼고 나머지는 서로가 나누어야 합니다.
아끼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을 만드신 아버지께서는 아끼시는 아들에게 세상을 살리라는 몫을
나누어주십니다. 아버지의 아끼심과 나누심을 본받은 아들은 당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가장 아끼는 목숨을 나눕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벗들이 몸소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시면서.
 

 

 쌍둥이 아빠

-윤영수 수녀-


 제가 알고 있는 입양가정 중 올봄에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의좋은 쌍둥이를 둔 가정이 있습니다. 씩씩한 쌍둥이 형제는 원래 쌍둥이로 태어난 건 아니고 각각 다른 부모에 의해 같은 해에 두 달 정도 시간 차이를 두고 태어나 저희 입양원에 들어온 아기들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쌍둥이가 된 애잔한 사연이 있습니다.
6년 전, 그 당시 IMF의 여파로 아기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 유난히 양부모를 찾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젊은 부부가 귀여운 딸을 키우고 싶은 생각으로 입양을 신청하러 왔다가 기어 다니는 남자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고민하다가 딸 생각을 접고 결국 생일은 다르지만 같은 또래의 두 아기를 입양하기로 했답니다. 두 아들로 인해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으로 부부는 행복하고 분주한 나날을 보냈답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겼습니다. 2004년 정월 초순, 용산역 부근에서 운행 중인 1호선 전철 기관사가 급하게 전철을 세웠습니다. 갑자기 철로로 뛰어든 만취한 중년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관사는 전철을 세우고 철로에 내려와 그를 부축해 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산발 서울행 새마을 열차가 달려와 그 기관사를 치여 숨지게 했습니다. 순직한 기관사는 바로 쌍둥이의 아버지 야고보님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부모가 필요한 두 아기의 아버지가 되어주었고, 술 취한 벗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야고보님은 분명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주님의 참 벗으로서 손색없는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윤정환 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오늘의 말씀은 '사랑의 계명'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기 전날에 유언과 같은 이 말씀을 하셨으며(요한 13,34),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에 앞서 오늘 제자들에게 다시금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짧은 생애의 전부를 요약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모든 이를 대신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누구보다 앞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서' 태어나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당신의 사랑에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선출됩니다(사도 1,26). 그것도 제비뽑기로 말이지요. 운이 좋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마티아의 입장에서는 사도로서의 막중한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로는 유다인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었고 여차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도 마티아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별다른 구절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만 아마도 일흔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사도가 된 후에는 어쩌면 그전에 유다가 했던 금전 관리의 몫을 담당했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마티아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며 복음을 전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심 수봉씨가 글을 쓰고 직접 부른 노래 중에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있지요.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꺼야...
  이 노래의 이어지는 가사를 보면 사랑의 대상은 얼굴도 아니고 멋도 아닙니다. 외모나 조건이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게지요. 단지 포근함과 넉넉함으로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릴 만큼,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당신밖에 아무 것도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대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애씁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일이 참 좋은 일인 바에야 좀 힘들고 어렵더라도 애써 참고 감당해 내야 하겠지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는 그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계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덕목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하느님을,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랑을 이렇게 저렇게 구별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볼 때 사랑은 모두 한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자식이 배우고, 형제의 사랑, 이웃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결국 그 사랑들로 가득 채워진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게 어렵게만 보이던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해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독서> : 유다의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

-경규봉 신부 -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러 곳에 많이 있었지만 여기서 특별히 120명의 교우가 모인 까닭은 자체 내에 의회를 갖춘 한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120으로 규정한 유대법의 규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즉, 120명이란 제자들의 수는 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서 모임을 주도한다. 베드로는 유다와 관련된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그를 대신하여 다른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직무를 맡도록 해야 하겠다고 말한다.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회계일을 맡았다(요한 12,6). 이는 주님께서 그를 대단히 신임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욕심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는 대죄를 지었다.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드시고 아무도 거기에 드는 이 없게 하여주십시오.”(시편 69,25)라는 말씀은 원수들이 머무르는 거처를 황폐하게 해 달라는 간구이지만,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킨다.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주십시오.”(시편 109,8)는 말씀은 원수가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켜서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대한 보증으로 삼는다.

사도들이 유다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사도의 자격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예수님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었다(1고린 9,1-2; 15,8-10; 갈라 1,16-17).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사람으로 국한시킨 까닭은 12사도 중 한 명을 선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12사도가 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사도의 자격 요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투표를 주관하시기를 기도한 후(잠언 16,33) 제비를 뽑았다. 제비를 뽑는 방법은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레위 16,7-10;여호 18,10). 그 결과 마티아(야훼의 아들이라는 뜻)가 사도로 뽑혀 사도직을 맡게 되었다.

성 마티아 사도는 이처럼 가리옷 사람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선교하였고, 이어서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카스피아 연안에서 큰 박해를 맞아 콜키스에서 순교한 후 그의 유골은 헬레나 성녀가 로마로 옮겼으며, 아그리치오 주교가 독일의 트리어로 옮겼다고 한다. 1127년에 그의 유골이 발견되어 베네딕또 회의 성 마티아 수도원 성당으로 옮겨 안치했다.

주님께서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주님으로부터 신뢰받는 제자였지만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꼴찌가 되었고, 마티아는 12사도에 속하지 않았지만, 유다를 대신하여 12사도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러므로 유다처럼 주님의 신임과 사랑을 받다가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꼴찌가 되지 않도록 하자. 오히려 마티아처럼 뒤늦게라도 주님께 뽑히는 신앙인이 됨으로써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천국 시민이 되자.........◆

 

 "부르심(聖召)의 신비"

-이수철신부-

언젠가 예로 들었던 불가의 속담이

우리 가톨릭 수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


‘사람 못 된 게 중 되고,

  중 못 된 게 수좌 되고,

  수좌 못 된 게 부처 된다.’


세속적인 의미로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수도원에 산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이나 서울 대학에 갈 정도로 잘나고 똑똑해도

하느님 뽑아 주시지 않으면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과연 잘나고 똑똑해서 수도원에 들어오기로 하면

몇이나 들어오겠습니까?


이래서 수도성소는 신비입니다.

비단 수도성소, 사제성소만이 신비가 아니라,

세례로 뽑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의 성소 또한 신비입니다.

 

우연이 아닌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수도자가, 사제가, 신자가 된 우리들입니다.


만약 수도자가 되지 않았다면,

또 만약 신자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상상, 참으로 헛되고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만약’은 없고,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그대로

하느님이 이끌어 주신 은총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역사가

하나의 고유한 살아있는 성경책이라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내 삶의 성경책을 잘 Lectio Divina(성독)해 보면

굽이굽이 하느님 은총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티아가 사도로 뽑히는 과정, 전혀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삶 전체를 잘 들여다보면

은연중에 부르심을 알아 챌 수 있습니다.

 

성소의 위기가 왔을 때 내

삶 전체를 Lectio Divina 하면서

내 성소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보는 작업이 너무 중요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객관적 조건이 충족된 두 사람 중에서

사도로 뽑힌 마티아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는 이미 사도직을 버리고 떠난 유다 대신에

마티아가 사도로 점지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의 이 분명한 말씀이 우리의 자랑이자 긍지이지만

이 부르심이 교만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미로

이 부르심의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우리에겐 절대적입니다.

 

또 저절로 성소가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사도로 뽑혔던 유다는 성소를 소홀히 한 결과

주님을 배반하여 사도직의 성소를 잃었습니다.

 

하여 우리의 정주,

수도승다운 생활,

순종의 세 서원,

기도와 노동과 성독의 매일의 수행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자 주님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수행들의 응답을 통해

끊임없이 성소의 나무를 가꾸고 돌보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힘들어도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에 충실하고

제가 매일 강론을 쓰는 것들 모두가

성소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자 몸부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막연한 서로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뽑아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이웃 형제들의 성소를 소중히 지켜 주는 사랑입니다.

 

 내 성소가 소중하듯이

이웃 형제들의 성소도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다시 뽑아주시고

풍성한 은총을 주셔서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사랑하는 사람
-강영구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쉘 시러스 타인의 창작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납니다.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림이 곁들여진 15장으로 된 짧은 동화입니다.
나무는 소년이 어릴 때 동무가 되어주고 놀이터가 되어줍니다. 달고 향기로운 사과도 주고 꿈도 줍니다. 소년은 자라면서 나무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만 줄 수 있는 나무는 행복합니다. 소년이 늙은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나무는 밑둥치 밖에 남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늙은이의 앉을 자리가 되어 자신을 내어주고 행복해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꼿꼿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주면 죽음이 남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마저도 행복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스승 예수님의 벗이 됩니다.

사랑하십시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一明)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양승국-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정화과정>


예수님을 떠나간 유다를 대신해서 ‘제비뽑기’를 통해 사도단에 들어오게 된 마티아의 축일입니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았던 부담스런 직책을 맡게 된 마티아의 성소를 묵상하면서 제 성소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수도 성소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성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성소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고위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성소가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수도자는 성소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성소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늘 절실하게 체험하는 바는 철저한 부족함입니다. 지독한 결핍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 그러한 부족함과 결핍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겠지만, 우리 각자의 노력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티아처럼 새로운 직책을 맡는다는 것,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가온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면 더욱 부담스럽겠지요.


뿐만 아니라 마티아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비뽑기로 사도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다 마티아는 전임자의 과오를 두고두고 껴안고, 또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였기에 주변의 눈길 역시 무척 날카로웠겠지요. 더욱 조신하게, 늘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전임자가 불명예스럽게 떠났기에, 그 불명예에 대한 뒷감당이 늘 마티아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난처한 분위기에서 사도로서의 삶을 출발한 마티아였기에 더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마티아는 자신에게 부여된 제자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제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양식이나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우선 안전합니다. 지난 삶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에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불편함도 없습니다. 편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싫어하지요. 과거에 안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은 시시각각으로 과거를 털고 일어설 것을 요청합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될 것을, 성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 과거의 방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그 옛날 마티아처럼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며 더 높은 가치관(예수), 보다 높은 목표(그리스도)를 향해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유다의 자리를 채운 마티아 †
-박상대 신부-


가리옷 사람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모습을 지켜본 11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의 다른 형제들과 여러 여자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 무렵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아간 이들의 앞잡이가 된 가리옷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어 예언하신 말씀을 들려준다.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하여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드시고, 아무도 거기에 드는 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69,25),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109,8) 라고 말한다. 시편 원문에는 "그들이 사는 부락을 돌밭으로 만드시고 천막에는 아무도 없게 하소서"와 "이제 그만 그의 명을 끊어버리고 그의 직책일랑 남이 맡게 하자"라고 되어 있다.

사도들은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님의 승천까지 줄곧 제자단과 함께 있었던 사람 중에서 바르사빠 또는 유스도라고 불리는 요셉과 마티아를 놓고 제비뽑기를 통하여 마티아를 뽑아 사도직분을 맡기고 예수부활의 증인 되게 하였다.(사도 1,12-26/제1독서) 따라서 마티아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일흔 두 제자단(루가 10,1)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아 사도에 대한 기록은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으나 유다지방을 두루 선교하다가 의회에 고발되어 돌에 맞은 뒤 도끼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리스와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 주님의 사도단에 새로운 멤버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제자 됨"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오늘 복음(요한 15,9-17)이 바로 그 관계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랑이란 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치를 도모하는 오늘 복음은 앞서간 참 포도나무의 비유(1-8절)를 통하여 일치의 기원이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즉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통한 일치를 그 원형으로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어떤 관계에 서 있는 지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쉽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본다면,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이시며(1절), 제자들은 그 가지이며(5절), 포도나무의 가지인 제자들의 본분은 나무에 잘 머물러 있는 것이고, 잘 머물러 있을 때 "무슨 소원이든 구하는 대로 다 얻을 것"이며(7절), 그렇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8절)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된 내용을 오늘 복음에 도입시키면 '예수와 제자의 관계' 및 '제자의 정체성'을 조명(照明)해 볼 수 있다.
① 우선 1절, 5절, 9절을 함께 생각한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포도나무인 예수를 가꾸고 사랑하신 것처럼 포도나무인 예수도 그 가지인 제자들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가지인 제자들은 나무인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② 다음은 4절, 7절, 12절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지 않고 또 예수의 말을 잘 간직한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데, 이렇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9절)는 것이다.
③ 마지막으로 8절, 16절, 17절을 함께 생각한다: 제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맺게 되는 많은 열매를 통하여 예수의 아버지는 영광을 받게 된다. 먼저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었고, 제자들이 드러내는 영광은 아들의 영광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선택하여, 이들을 벗으로 삼아 파견하기 때문이다. 파견 중에 행하는 모든 행위의 원리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1차 고별사(13-14장)에서 이미 새계명으로 선포되었고, 2차 고별사(15-17장)에서 재차 강조되어 선포된다.(12절, 17절) 여기서 강조되는 사랑의 새계명은 <아버지→아들→제자>의 범주를 넘어 <제자→세상>의 범위로 확충됨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서는 이 범주를 역순으로 <세상→제자→아들→아버지>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내리시는 사랑의 새계명은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제시하신다.(13절)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늘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도 예수께서 이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벗'으로 부르기로 하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이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스스로 붙어있을 나무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원리와 같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하게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섞지 않는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16절)

종이 할 일을 다했다고 주인이 영광을 받지는 않는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여 그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택하여 벗으로 삼아주셨다. 친구가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친구의 어깨도 함께 우쭐거려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와 제자간의 우정(友情)인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요한이 전하는 부활기간 마지막날의 주님 말씀 : 사랑 †

오늘은 부활주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활 7주간을 보내면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요한복음 21장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agapao와 phileo입니다. 여기서 agapao는 그만 '목숨을 바치는 헌신적의 사랑'의 의미이며, phileo는 '벗과 같은 친애적 사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섬길 때는 agapao적 사랑을 요구했으며, 그 본보기로 당신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기시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자들과 3년간 phileo적 사랑을 하시면서, '벗과 같은 마음으로 친애적 사랑'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계명인 '사랑'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오늘 부활 마지막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대한 묵상입니다.(5월 14일에 묵상한 내용을 함께 참조하십시오)
오늘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200주년 기념성서 : 해방절 / 개신교 :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에 게쎄마니 동산으로 가셨다.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며 또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20-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찬 때에 하신 이런 말씀을 여기에서 ‘포도나무 열매의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시 설명하시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에게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당신 안에 머물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계속 붙어 있으면서 뿌리에서 진액을 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잘 몰라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장할 생각은 하지 않고(우유통에 빠진 개구리 우화 : 침묵의 창 참조), 뛰쳐나가 복음을 전하노라 애쓰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전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포도나무 열매’의 비유는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나는 참 포도나무이며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그는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쳐주신다. 너희는 내가 이미 일러준 말로 인하여 깨끗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복음을 받아들여서 깨끗해졌고, 따라서 그들은 이제부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고 또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물려 계시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온전히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키기를 원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15,7절에는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또 그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을 구별하여 그들 안에 ‘예수님의 말’이 머물면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청하여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머무신다는 표현과 ‘예수님의 말’이 머문다는 표현을 구별하여 ‘예수님의 말’이 머문다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더 깊이 온전하게 머무신다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요한복음 14,10-1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0-11에 보면,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완전히 함께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완전히 함께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그 말씀으로 아버지께서는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찬 때에는 이런 관계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소개되었고 하느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는 아직 적용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단순히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관계보다 더 깊고 온전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가 포도나무 열매의 비유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머무시는 것과 같이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면 제자들이 하는 말은 곧 그들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엇이든지 너희가 바라는 것을 청하여라.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요한복음 8,26-31에 “나는 너희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판단할 것도 많지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서 말할 뿐이다....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요한의 첫째편지 3,9에서 요한은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자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는 사실을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고' 성장하는 상태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또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 신자들은 아버지께 무엇을 청하든지 다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곧 자신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청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 말씀 안에 깊이 머무는 신자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또"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7)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 안에서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먼저 듣고 그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음성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이 살아나와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모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보이시는 방법입니. 그 방법 중에는 음성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경우 등 다양합니다. 이런 때에 들은 대로 구하면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구하여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구하고는 믿음으로 구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나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함께 계십니다. 물론 신자들도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제자들이 당신 안에 온전하게 머물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 말씀은 곧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물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회개하며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치 ‘순종’과 ‘사랑’이 자신의 본성과도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성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육적으로 살아간다면 로마서 8,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 온전한 사람이 되면 기쁨에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에 있어 온전한 사람은 부모를 위하여, 또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부활의 기쁨을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예수님께서 벗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께서 명하시는 것을 행하면 그들은 당신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을 전제로 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고 사도로서의 사명을 담당하려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것은 그들이 스스로 ‘사랑의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가 그들 안에 머물러 있어, 그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제자들은 이 땅에 남아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이든지 청하여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묵상한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 중 가장 핵심부분인 13, 14, 15장은 모두 ‘새 계명(사랑)’을 지킬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을 받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 새사람, 완전한 사람' 즉,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성경 도처에 비켜갈 수 없으리만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1서’에서도 그 전체 내용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열매의 비유’를 되풀이 하여 설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1서 2,5절에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4,16-17절에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죽은 후부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관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물론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일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지만 그 모든 일들은 먼저 사랑에 있어 ‘온전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4,12-13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한 구절들을 모두 다 여기에 인용할 수는 없겠으나 특히 신약 성서는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한 형제가 되어 예수님과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9절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신자들이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형제가 되도록 정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또 루가복음 6,40에 예수님께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또 마태오복음 5,48절에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고 말씀하신 것 등은...
모두가 다 성경에서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예수님과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이 강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명실 공히 예수님의 형제가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제 부활기간이 끝나고 성령강림일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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