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유다의 자리를 대신해 줄 사도를 뽑는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있는 이들 가운데 마티아가 뽑혀 열두 사도 공동체 일원으로 사도직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신다. 친구는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가리켜 임금이나 주인이 아니라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줄 임금이거나 주인이라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을 잘 안 들으면 당신 힘으로라도 제 갈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해 주시면 되니까요.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을 바꾼다면,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가지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관심은 돌보는 행위입니다. 꽃나무를 가꾸듯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의 관심이 있기에 세상 만물은 생기를 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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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마티아 사도는 기술자의 수호성인으로서, 열두 사도 가운데 유다의 배반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려고 선발된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도에 대한 기록이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후대에 남겨진 전설로써 그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존엄하게 대하여라 - 정순옥 수녀-
2003?-?2008년 말까지 결혼이민자는 503,196명이었다. 2009년 한 해 동안 약 167,000명으로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전국적으로 다문화 가정이 없는 지역이 없다. 한국에 있는 이민노동자 90퍼센트가 성공한다면 결혼이민자는 20퍼센트 정도 성공한다고 볼 수 있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또한 사기를 당해 집까지 잃어버렸던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암 진단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기도하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서 울부짖으며 말합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에게 해준 것이 뭐 있다고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러자 이 자매님께서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을 잃은 것도 한스럽고, 집을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이렇게 건강까지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느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 종종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무엇들 때문에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그 무엇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왜 잊어버릴까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기준은 그 무엇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통해 어떤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 하느님을 선택하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물건 사듯이 선택한 것처럼,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나에게 생겼을 때에는 물건 무르듯이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어렵고 힘든 세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기념하는 마티아 사도는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유다를 대신해 사도로 세웠지만, 이 역시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제비를 뽑은 사람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도구로 쓰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이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과 멀어지려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행복과도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 인해 세상의 부정적인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당신에게 비판하는 부분을 갈고 닦아라. 그런 과정이 당신을 만든다(장 콕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준석신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1,15 이하)을 보면 사도들은
나를 아시는 주님, 주님을 아는 나 -김찬선신부-
오늘은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양승국신부- <부족한 나, 충만한 그분> 오늘 우리는 배신을 때린 제자 유다를 대신해서 엉겁결에 사도로 뽑힌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티아가 워낙 기본이 되어 있던 사람, 초대교회 신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추천을 받을 정도로 여러 측면에서 모범적인 사람이었기에 베드로 사도에 의해 사도 후보자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아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마티아는 또 다른 후보자 유스토와의 심지뽑기를 통해서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가 제비뽑기를 통해 사도로 불림을 받는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너무도 오묘하다는 것, 인간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제 성소를 통해서도 잘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한때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손길이 느닷없이 저를 감싸더니 인생이 180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닐텐데, 이 길은 내 길이 아닐텐데...하면서 셀 수도 없이 거부할 때마다 하느님의 손길은 더욱 강하게 제 삶을 사로잡아 저는 꼼짝도 못하게 되었지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는 말씀, 제 개인적으로 너무도 절실히 와 닿는 말씀입니다. 내가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지만 하느님 그분께서 나를 불러주셨기에 나는 합당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엊그제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수도생활을 꿈꾸고 있는 몇몇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도생활 선택 동기가 너무도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이어서 서글펐습니다. 수도생활이란 삶 전체를 건 모험이자 투신입니다. 심심풀이 삼아 그저 한번 경험하고 말 성격의 생활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숙고와 일생을 건 결단을 통해 이루어져야할 진지한 선택이어야만 합니다. 수도원은 이 세상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또 다른 하나의 탈출구, 제 2지망 장소가 절대로 아닙니다. 수도원은 사랑을 실패했다거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속울음을 울면서 마지못해 선택하는 삶도 결코 아닙니다. 수도원은 세상의 고통과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종의 피난처 역시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이 보다 높은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의 삶이며 투쟁의 삶입니다. 비록 심지뽑기로 사도에 당첨된 마티아 사도였지만, 오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선배 사도들 못지 않은 충실한 복음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생명과 세례성사로 또 수도자로, 평신도 성소에로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결과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마티아 사도처럼 이왕 주어진 내 삶의 몫이기에 기쁘게 수용하고 기꺼이 투신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양승국신부- <편안한 사람> 연초에 제 개인적으로 세웠던 일 년 계획의 세부 사항 가운데 하나가‘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되짚어보니 여전히 형제들에게는 ‘부담스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책상 그러려니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동료 수도자들 가운데 정말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성품, 밝은 분위기, 적정선의 예의, 적당한 유머감각을 겸비한 편안한 그 형제와 함께 있으면 같이 있는 그 시간이 꿀맛 같은 휴식이요, 천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으뜸 계명인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 사람의 내면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통 충만하다면, 그 결실이 외적으로 드러나야겠지요. 그 결실은 다름 아닌 편안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상냥함입니다. 기쁨입니다. 다정함입니다. 겸손함입니다. 언젠가 심신이 무척이나 고달팠던 날 밤늦은 시간,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히 삭고 쩔었습니다. 제가 봐도 너무나 부담스런 얼굴이 거기 들어있었습니다. 가끔씩 거울 안에 들어있는 나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얼굴이 편안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불편한 얼굴입니까? 부드럽고 자상한 얼굴입니까? 아니면 짜증이 왕창 묻어나는 부담 제대로 주는 얼굴입니까?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천사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고집과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입니까?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다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기뻐 내 주위를 떠날 줄 모릅니까? 아니면 다들 뒤로 슬슬 물러나는 것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세상, 너나할 것 없이 다들 부족한 인간, 너무 아웅다웅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지나치게 작은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이웃의 허물은 물론 나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도 너무 크게 호들갑떨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보내며 살아가는 삶이겠습니다. ‘천국은 내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종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콧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기쁨 넘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봄일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청춘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그가 맞이하는 매일이 천국입니다. 그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 -손우배 신부- 언제인가 결혼을 앞둔 한 신랑이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온 세상을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좋은 친구 - 김태훈 신부- 저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자기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자고 초대합니다. 그 초대는 어떤 요구나 명령이 아닙니다. 가련하고 부서진 모습으로 다가와서 부탁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동정과 사랑이 일어 기꺼이 그 짐을 메고 가게 합니다. 억지로 끌려가듯이 지고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혼자 무겁게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와 함께 메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 보며 그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 그의 부르튼 손을 잡고 가기 때문에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함께 있어서 기쁘다며 흐뭇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 더 깊은 우정이 솟아나기 때문에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모델 -전삼용신부- 한 비행기에 조종사와 우주 과학자와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신부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고 하자 조종사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넷인데, 낙하산은 셋뿐입니다. 저는 아내와 첫 돌 맞은 아들이 있으니 살아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이어 우주 과학자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나의 죽음은 세계 전체의 큰 손해입니다. 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남은 것은 신부님과 보이스카웃 소년이었는데 신부님은 “얘야, 남은 낙하산은 네가 써라. 나야 살 만큼 살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고 부활에 대한 믿음도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자, 보이스카웃 소년이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가방 어디 있지? 아~, 과학자 아저씨가 내 가방을 지고 뛰어내렸네요...” 사랑은 하나뿐인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한 사람을 대신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줌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당 벽화나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더 나이 드신 아버지와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함께 그린 그림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받으시고 아버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림으로 표현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만이 인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아버지와 성령께서는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을까요?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을 바칩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야 서로에게 어떤 것을 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온전히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서로서로에게 당신의 ‘전부’, 즉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신데 세 분이 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면 세 분의 생명들, 즉 세 개의 본질을 지닌 세 분의 하느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에겐 신적인 본질이 단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 분 하느님 중에 ‘생명’의 본질은 단 한 분만이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분 이 생명을 당신 혼자 가지고 있으려 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계속 돌려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아들은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의 전부, 즉 생명을 받습니다. 그 생명을 통해 아들은 살지만 사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맞고 계신 것입니다. 아들은 이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당신의 ‘생명’, 즉 성령을 아버지께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이 아들의 죽음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돌려보냈다고 표현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만을 보지만 사실 아들이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는 죽어계신 것이고 아들이 죽으실 때는 아버지께서 생명을 받아 사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이 없는 아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다시 당신의 성령을 아들에게 보내시어 당신은 죽으시고 아들을 부활시키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는 이 서로 간의 ‘줌과 받음’의 운동을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세 분이 하나의 ‘사랑’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아 지니고 있는 전부, 즉 생명을 우리에게 똑 같이 주시는 사랑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피와 물’, ‘생명과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아들은 온전히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일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시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죽임이란, 자신의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즉,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아들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그 분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그 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서로 자신을 온전히 주시는 사랑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델을 닮아가며 기쁘고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생명을 주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참 하느님의 행복은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도 이 사랑을 반복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가진 이가 먼저 다른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즉,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우리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엔 아버지도 달리셨고 아들도, 성령께서도, 우리 모두도 사랑을 위해 매달려야하는 사랑의 온전한 자리인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 -강윤철 신부-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분의 계명을 지켜 사랑의 먼저 받은 짝사랑처럼 - 원순희 목사-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계명이고, 이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벗 삼아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려주셨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크고 넓고 깊은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는 결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양승국신부-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살아있는 한 인간 존재 자체가 가장 큰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로구나, 그 어떤 처지이건 생명 그 자체는 주님 자비의 한 표현이로구나,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그 어떤 형제든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형제가 내게 준 그 어떤 상처도 그러려니, 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제의 모난 부분 앞에서도 조금은 관대해 질 여유가 생깁니다. 우리 눈에 비록 한심해보이고, 때로 비참해보일질지라도 그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축복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그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비록 이토록 부족하지만, 이토록 형편없지만,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시고, 지속적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우리는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불러주셨고, 계속해서 생명으로 불러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다면, 아직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오늘 이 아침 하느님께서 나를 다시금 생명으로 불러주셨다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역설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할수록 멀게만 느껴졌던 하느님 사랑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집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 순간 우리는 더욱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그 사랑은 순교자적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다들 끝났다고 말하는데도,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눈길 닿은 모든 대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상선신부- 우리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김찬선신부- 레오나르도를 수도명으로 받기 전 어제 저녁 미사 때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휴가 다녀온 뒤, 넘쳤던 그 에너지는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주일을 보냈기 때문일까요? 주일에 있었던 4대의 미사도 힘들었지만, 주일 낮에 있었던 3시간이 넘는 강의 때문에 완전히 지치고 말았답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빠다킹신부 하나가 된다는 것
-김동하 신부- 한자(漢字)를 만들어진 틀로 나누어 보면 형성자(形聲字)가 많은 부분을 쌍둥이 아빠 -윤영수 수녀- 제가 알고 있는 입양가정 중 올봄에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의좋은 쌍둥이를 둔 가정이 있습니다. 씩씩한 쌍둥이 형제는 원래 쌍둥이로 태어난 건 아니고 각각 다른 부모에 의해 같은 해에 두 달 정도 시간 차이를 두고 태어나 저희 입양원에 들어온 아기들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쌍둥이가 된 애잔한 사연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윤정환 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오늘의 말씀은 '사랑의 계명'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기 전날에 유언과 같은 이 말씀을 하셨으며(요한 13,34),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에 앞서 오늘 제자들에게 다시금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짧은 생애의 전부를 요약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모든 이를 대신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누구보다 앞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서' 태어나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당신의 사랑에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선출됩니다(사도 1,26). 그것도 제비뽑기로 말이지요. 운이 좋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마티아의 입장에서는 사도로서의 막중한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로는 유다인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었고 여차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도 마티아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별다른 구절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만 아마도 일흔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사도가 된 후에는 어쩌면 그전에 유다가 했던 금전 관리의 몫을 담당했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마티아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며 복음을 전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사랑의 계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덕목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하느님을,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랑을 이렇게 저렇게 구별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볼 때 사랑은 모두 한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자식이 배우고, 형제의 사랑, 이웃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결국 그 사랑들로 가득 채워진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게 어렵게만 보이던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해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독서> : 유다의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 -경규봉 신부 - "부르심(聖召)의 신비" -이수철신부- 우리 가톨릭 수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중 못 된 게 수좌 되고, 수좌 못 된 게 부처 된다.’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수도원에 산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이나 서울 대학에 갈 정도로 잘나고 똑똑해도 하느님 뽑아 주시지 않으면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과연 잘나고 똑똑해서 수도원에 들어오기로 하면 몇이나 들어오겠습니까? 비단 수도성소, 사제성소만이 신비가 아니라, 세례로 뽑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의 성소 또한 신비입니다. 우연이 아닌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수도자가, 사제가, 신자가 된 우리들입니다. 또 만약 신자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상상, 참으로 헛되고 부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만약’은 없고,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그대로 하느님이 이끌어 주신 은총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역사가 하나의 고유한 살아있는 성경책이라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내 삶의 성경책을 잘 Lectio Divina(성독)해 보면 굽이굽이 하느님 은총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 전체를 잘 들여다보면 은연중에 부르심을 알아 챌 수 있습니다. 성소의 위기가 왔을 때 내 삶 전체를 Lectio Divina 하면서 내 성소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보는 작업이 너무 중요합니다.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로 뽑힌 마티아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는 이미 사도직을 버리고 떠난 유다 대신에 마티아가 사도로 점지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부르심이 교만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미로 이 부르심의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우리에겐 절대적입니다. 또 저절로 성소가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사도로 뽑혔던 유다는 성소를 소홀히 한 결과 주님을 배반하여 사도직의 성소를 잃었습니다. 하여 우리의 정주, 수도승다운 생활, 순종의 세 서원, 기도와 노동과 성독의 매일의 수행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자 주님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수행들의 응답을 통해 끊임없이 성소의 나무를 가꾸고 돌보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힘들어도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에 충실하고 제가 매일 강론을 쓰는 것들 모두가 성소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자 몸부림입니다. 우리를 뽑아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이웃 형제들의 성소를 소중히 지켜 주는 사랑입니다. 내 성소가 소중하듯이 이웃 형제들의 성소도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다시 뽑아주시고 풍성한 은총을 주셔서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사랑하는 사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양승국-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정화과정> 예수님을 떠나간 유다를 대신해서 ‘제비뽑기’를 통해 사도단에 들어오게 된 마티아의 축일입니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았던 부담스런 직책을 맡게 된 마티아의 성소를 묵상하면서 제 성소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수도 성소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성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성소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고위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성소가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수도자는 성소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성소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늘 절실하게 체험하는 바는 철저한 부족함입니다. 지독한 결핍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 그러한 부족함과 결핍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겠지만, 우리 각자의 노력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티아처럼 새로운 직책을 맡는다는 것,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가온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면 더욱 부담스럽겠지요. 뿐만 아니라 마티아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비뽑기로 사도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다 마티아는 전임자의 과오를 두고두고 껴안고, 또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였기에 주변의 눈길 역시 무척 날카로웠겠지요. 더욱 조신하게, 늘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전임자가 불명예스럽게 떠났기에, 그 불명예에 대한 뒷감당이 늘 마티아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난처한 분위기에서 사도로서의 삶을 출발한 마티아였기에 더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마티아는 자신에게 부여된 제자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제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양식이나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우선 안전합니다. 지난 삶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에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불편함도 없습니다. 편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싫어하지요. 과거에 안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은 시시각각으로 과거를 털고 일어설 것을 요청합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될 것을, 성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 과거의 방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그 옛날 마티아처럼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며 더 높은 가치관(예수), 보다 높은 목표(그리스도)를 향해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유다의 자리를 채운 마티아 † 사랑이란 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치를 도모하는 오늘 복음은 앞서간 참 포도나무의 비유(1-8절)를 통하여 일치의 기원이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즉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통한 일치를 그 원형으로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어떤 관계에 서 있는 지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쉽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요한이 전하는 부활기간 마지막날의 주님 말씀 :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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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의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