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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일(화), 맑음
1. 백운동천. 동농 김가진의 글씨다. 이 암벽 아래 동농의 별서가 있었다
“白雲洞은 예로부터 靑龍洞과 竝稱하는 城內 名所로 비록 三淸洞보다 狹小하나 林壑이 幽美
하여 漢陽朝 初에 白雲洞으로써 松京 紫霞洞에 比하였다. 最近에 와서 東農 金嘉鎭의 別墅가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 날은 白雲莊이란 瀟灑한 一料亭이 되고 말았다.
白雲洞을 그린 名詩로서 自然의 眞髓를 探得하기는 南川 石希璞의 五言絶句이다.
步入白雲洞
洞虛雲影斜
山深人不見
獨坐澗邊花
이 詩를 읊을 때 白雲洞 속에 逍遙하는 當時 幽人의 閒寂美를 彷彿히 想見할 수 있다.”
백운동에 대한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1888~1939)의 『永晝漫筆』 의 「近郊의 名勝」
중 ‘백운동’에 대한 내용이다. 자하문 터널을 가기 전에 오른쪽 언덕배기를 올라 예수그리스
도 후기성도교회 앞을 지나면 휑한 골짜기가 나오고 그 옆 너른 공터가 동농 김가진의 별서
터다.
남천 석희박(南川 石希璞, 조선중기 문신, 1616?~?)이 읊은 오언절구의 현장이다.
백운동을 걸어서 들어가니
휑한 골짜기 구름에서 빛이 내리고
산이 깊어 사람은 보이지 않아
꽃 핀 개울가에 홀로 앉아 있네
개울은 오래 전에 물이 밭았고, 주변에는 서양등골나물 하얀 꽃이 만발하였다.
서양등골나물은 산림청에서 칡덩굴, 환삼덩굴과 함께 생태를 교란한다 하여 3대 박멸식물로
지정한 바 있다.
2. 동농 김가진의 별서 터
3. 동농 김가진의 별서 터 주변
4. 동농 김가진의 별서 터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은 구한말 주 일본공사를 역임하여 외교에 밝았다.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동단 총재로 상해 임시정
부를 지원하였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그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각각 독립장과 애족장을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5. 경기상고 교정에 있는 반송, 서울시는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하였다.
6. 경기상고 교정에 있는 반송
이처럼 보기 좋게 줄지은 반송나무를 나는 여기 말고 아직 본 적이 없다.
7. 청송당 터(聽松堂 址)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이 공부하던 서당 이름이다. 청운동에 있는 경기상고 교사 뒤편이 그 터다. 청
송 성수침은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처형되자 벼슬길을 포기하
고 이곳에 서실을 마련하여 ‘청송’이란 편액을 걸고 은거하였다. 아들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이다. 청송은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로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8. 청송당 터
9. 정선 겸재의 청송당 그림이다. 그때는 이랬다
10. 경기상고 교수(校樹), 우룡송(雨龍松)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청송당 일우(一隅)에 서 있는 이 노송은 마치 중국 황하의 登
龍이라 할까 …” 하며, 제우룡송(題雨龍松) 시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聽丘聳爲千歲松 청구에 우뚝 솟은 천년송
風霜萬苦此地雄 만고풍상 이겨내 크고 뛰어나도다
光風霽月令猶在 밝은 빛 맑은 달 의연한 기상에
滿堂學聲永世榮 만당한 배움 소리 길이 빛나리
11. 청운초등학교 화단을 장식한 자수궁교(慈壽宮橋) 난간석
청운초등학교 앞은 예전에 백운동천이 흘렀다. 청운초등학교 앞에 그 백운동천을 건너는 자
수교(慈壽橋)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신교(新橋), 또 그 아래에 도렴동에는 종침교(琮琛橋)
가 있었다.
조선시대 자수궁이 위치해 있던 곳이므로 다리 이름을 자수교라고 하였다. 자수궁교 혹은 자
수궁다리라고도 불렀다. 자수궁은 본래 태조 이성계의 7번째 아들인 무안대군 방번의 집이
었는데, 문종이 이 집을 수리하여 자수궁이라 하고 세종의 후궁들 가운데 비구니가 된 사람
들을 머물게 하였고, 그 후로 왕이 죽고 나면 그 후궁들이 머물던 곳이 되었다. 연산군의 어
머니인 폐비 윤씨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다. 1927년 백운동천 암거공사로 인하여 소멸되
었다.
근처에 있는 자교교회(慈橋敎會)는 ‘자수교’에서 비롯되었고, 종침교에서 그 이름을 따온 종
교교회(琮橋敎會)는 ‘종다리교회’라고도 했다 한다. 나는 여태 종교교회를 ‘종교교회(宗敎敎
會)’로만 알았다.
12. 청운초교 주변 화단의 달리아
13. 청와대 뒤편 백악산
14. 신교 사진(1900년대 초 촬영), 독일 「성베네딕토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소장
신교의 안내문이다.
“신교는 청계천 발원인 백운동천의 상류에 있었던 돌다리이다.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사
당인 선희궁을 인왕산 기슭에 지으면서 놓았다. 1920년대 백운동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진 것
으로 추정되며, 난간석 6기가 청운초등학교 내에 보관되어 있다.”
청운초등학교 앞에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의 집이 있었다.
보도 옆 화단에 송강의 시비를 여러 개 세웠다. 그의 시 「山寺夜吟(산사에서 밤에 읊다)」
이다.
蕭蕭落木聲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錯認爲疎雨 성글은 빗소리로 그릇 알고
呼僧出門看 동자승 불러 나가 보랬더니
月掛溪南樹 시내 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다나
15. 선희궁(宣禧宮) 터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暎嬪) 이씨를 제사 지내기 위해 1765년
(영조 41년)에 지은 사당이다.
선희궁 터는 서울농학교 교사 뒤편에 있다.
16. 서울농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
석공예 명장인 오금석 선생의 작품이다.
작품명은 ‘손말로 꽃 피운 농학교 100년’이다.
기념비의 수화는 ‘백(百, 100)’이다.
지금은 개교 104주년이다.
17. 한양전경
정선 겸재의 ‘한양전경’ 그림이다.
이춘제(李春躋)가 세심대와 옥류동 자락의 높은 곳에 세운 서원소정(西園小亭)에 앉아 도성
안을 조망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겸재 정선이 이춘제(李春躋, 1692∼1761)가 후원에 새로 지은 삼승정(三勝亭)을 당시의 수
도 서울을 배경으로 그린 이 〈한양전경(漢陽全景)〉은 〈삼승조망(三勝眺望)〉으로도 지
칭된다. 화면에 등장한 주인공인 집주인 이춘제는 49세이고, 정선은 65세로 완숙기에 접어
든 작가의 필력이 잘 나타난다. 이 그림은 당시 정선이 살던 옥인동을 그린 〈옥동보강(玉洞
步崗)〉, 삼승정을 담은 〈서원소정(西園小亭)〉 등과 같은 화첩에 속해 있다. 현재 이 화첩
은 나뉘어져 각기 편화나 액자로 꾸며져 소장가마저 분산되어 있다.(한국 미의 재발견 - 회
화, 2005.3.24., 솔출판사)
‘서원소정’은 서울농학교 교사 후원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18. 지금의 한양전경
19. 서원소정은 아마 이 정자 아래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20. 해공 신익희 가옥(해공구가) 표시
21. 해공 신익희 가옥 일부
어떤 때는 개방한다는데 이날은 개방하는 날이 아니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있다.
2005년 2월 11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22. 필운대(弼雲臺)
조선 선조 때 영의정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옛 집터로서, 현재는 배화여자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본관 뒤뜰 큰 바위에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쓴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 왼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
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다. 끼쳐
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我祖舊居後
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두산백과)
23. 필운대(弼雲臺)
필운대는 인왕산 자락 필운동 배화여자대학교 교사 뒤쪽에 있다.
오후 늦게 보러 갔다. 연만한 정문 수위에게 필운대를 보러 왔다고 하자, 쾌히 승낙한다.
쭈욱 올라가시다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왼쪽 길로만 가시라고 한다.
24. 필운대 옹달샘
26. 보현봉, 필운대 보고 내려오던 중 왼쪽 편으로 북한산 보현봉과 문수봉(왼쪽)이 보였다
종로마을 부근 담에 그린 벽화를 사진 찍었다.
아울러 그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담스토리 벽화
위항문학의 발생지
주로 한시를 가리키는 개념이나 넓게는 시조 ․ 가사 및 전(傳)을 포함한 산문에 이르기까지
중인계층에 의해 창작된 모든 문학작품을 일컫는다. 양만문학과 서민문학에 대응되는 개념
으로 중인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관(譯官)과 경아전(京衙前) 등의 전문지식인과 기술
직 중인이 주도한 것이지만 서얼과 승려, 하층민까지 참여했으므로 중인 이하 하층민을 위항
인 또는 여항인(閭巷人)이라 일컫던 예에 따라 위항문학 또는 여항문학이라고 한다.
위항인의 고향
가객(歌客) 장우벽(張友壁)은 날마다 인왕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다 내려왔다.
그래서 그가 노래 부르던 곳을 사람들이 가대(歌臺)라고 불렀다. 장우벽의 아들 장혼(張混,
1759~1828)과 서당 훈도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은 인왕산 서당에서 함께 자란 친구
였다.
옥류천(玉流川) 가에 천수경(千壽慶)이 집을 정한 뒤부터 위항시인들이 하나둘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대로 인왕산 자락에 살았던 중인 출신들인데, 천수경이나 장혼은 인왕
산에서 서당을 운영했으며, 김낙서 ․ 박윤묵 ․ 임득명 ․ 김의현 등은 규장각 서리였고, 왕태는
술집 머슴이었고, 서경창은 비변사 서리였다.
그들은 양반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선사회에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서러움을 시와 술
로써 풀었다. 이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지었던 시들이 해마다 시축과 시첩을 이뤘다.
옥계사의 주동인물인 장혼은 옥계사 수계첩의 발문에서 자신들이 시사(詩社)로 모이게 된
동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면 하루를 가지 못하고, 권세나 이익으로 사
귀면 한해를 넘기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은 오래 계속될 수가 있다고 하였
다. 이제 나와 그대들이 모두 시사 결성하는 것을 좋아하니,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우정을 돈
독히 하며, 서로 잊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1786년 7월)”라고 밝힌다.
문화와 예술의 발신지
이곳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주거지인 동시에 가장 개방적인 문화의 발신지로 꼽
히고 있다. 정조가 읊은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 청풍계, 반지, 세검정 등의 인
왕산 자락 명승지를 다섯 군데나 꼽았다. 인왕산은 왕이 인정한 서울 최대의 명승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중기에는 김수항과 그의 아들 등 사대부정신의 사표가 되어 온 안동 김씨 일문
의 터전으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시회 장소로 각각 각광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817년엔 왕
족의 후예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들 중인들의 활동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옥인동
의 한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큼지막한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 중후
기의 문화의 역량이 서로서로를 부추기며 차고 흘러넘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은 숙종~영정조 대의 ‘조선 르네상스’가 배태되고 성장한 공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상용 ․ 김상헌 등 선대에 목숨을 걸고 지킨 ‘충절’과 ‘의리’의 사대부정신이 이곳 옥류동 계
곡에서 후손들의 맑고 개방적인 학문과 예술로 꽃을 피운 것이다.
옥계사 십이승(玉溪社十二勝)
최창규가 주동하여 위항시인 13명이 1786년 7월 16일 옥계에 모여 시사(詩社)를 결성하였
다. 이들이 일년 열두 달 모이는 날과 장소를 정해 놓은 것이 옥계사(玉溪社) 십이승(十二
勝)이다.
(1) 청풍계 산기슭의 시회(음력 7월, 楓麓修禊) - 옥류동 청풍정사
(2) 국화 핀 뜨락의 단란한 모임(8월, 菊園團會)
(3) 높은 산에 올라가 꽃구경하기(2월, 登高常華) 인왕산 필운대
(4) 시냇가에서 갓끈 씻기(6월, 臨流濯纓) 옥류천
(5) 한길에 나가 달구경하며 다리밟기(정월 보름, 街橋步月)
(6) 성루에 올라가 초파일 등불 구경하기(4월, 城臺觀燈)
(7) 한강 정자에 나가 맑은 바람 쐬기(8월, 江榭淸遊)
(8) 산속 절간에서의 그윽한 약속(9월, 山寺幽約)
(9) 눈속에서 화롯가에 술 데우기(10월, 雪裏對炙)
(10) 매화나무 아래에서 술항아리 열기(11월, 梅下開酌)
(11) 밤비에 더위 식히기(5월, 夜雨納涼)
(12) 섣달 그믐날 밤새우기(12월, 月+巤寒守歲)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司馬唱榜日 口呼七步詩 : 사마 시험 방이 내걸리는 날 일곱
걸음 걷는 사이 시를 짓다
腹裏詩書幾百擔 내 뱃속엔 시서가 백짐이지만
今年方得一欄衫 금년에야 겨우 난삼을 걸치게 됐다오
傍人莫問年多少 옆 사람에 내 나이는 묻지 마오
六十年前二十三 육십년 전에 스물 셋이었다오
* 欄衫(난삼) : 생원이나 진사에 합격하였을 때 입던 예복
추재 조수삼이 지은 ‘추재기이’에는 양반집을 도적질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억울하
게 누명을 쓰는 사람이 없도록 매화를 그려놓았다는 ‘일지매’ 이야기가 있다. 80살이 넘어서
진사에 합격하고, 양반이 된 조수삼의 시가 중인의 심정을 대변한다.
차좌일의 통곡
송석원시사 동인 차좌일(車佐一, 1753~1809)이 병 때문에 송석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적
이 있었는데, 그는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詩能成一軸 酒亦過三行 시가 한 축을 이루고 술도 또한 세 바퀴는 돌았구나
臥病同玄晏 違期愧尾生 현안처럼 병들어 누웠으니 시회의 기약을 어긴 게 미생에게 부끄러워라
澗氷千片白 山月十分明 시냇가 얼음조각은 희기만 하고 산의 달빛도 밝았을 텐데
默想群賢意 頗知老子情 동인들의 뜻을 가만히 헤아려보니 이 늙은이의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라
― 「朝見松石軸次韻」
미생(尾生)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에서 밀물이 들어오는 것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죽은 사람이다. 병들었다는 핑계로 시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그날 지어진 시축
(詩軸)을 보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회에 꼭 참석하고 싶어 했던
동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위항문학의 발전
경치 좋은 송석원(松石園)이 위항시인들의 모임터가 되자, 옥계사 동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장혼이 1812년에 지은 시 「赴松石園會會五十餘人次李義山韻」을 보면 이날 50여명이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그래서 장혼의 제자 장지완은 천수경의 전기에서 “집이 좁아 밥을 지
을 수가 없었다”고 했으며, 조희룡도 천수경의 전기에서 “시를 아는 사람들이 송석원 시회에
참여치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였다.
이처럼 송석원의 시회가 성황을 이뤄 집이 좁을 정도가 되자, 장안의 수백명 위항시인들에게
일년에 두 차례 문통(文通)을 보내 연당(蓮塘)에서 모여 시를 지었다. 이 모임이 바로 백전
(白戰)이다.
백전(白戰, 이 행사를 계승한 것이 오늘날의 ‘백일장’이다)이란 글자 그대로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 위에다 시를 써서 실력을 겨루는 싸움이다. 이 모임에 수백명이나 모여들 정도
로 위항인들은 일체감을 형성하였다. 이 모임이 신분상승을 위한 모임은 아니었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위항시인들이 모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역량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난해서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채 참석하는 동료들을 위해 두 사람 몫의
음식을 마련해 대접할 정도로, 그들의 일체감과 시회에 대한 애착심은 대단했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무심코 다니던 동네에 많은 사연들이 있었네요.
우리 곁에 숨어있는 역사를 더듬어보는 재미가 있군요~ ^^
어캐 저런 내용을 다 아신데요? 경기상고는 제 모교랑 담장을 공유한~ ...예전엔 도상이라고 유명한 학교였다고만 들었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