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1-8)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of water and Spirit h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말씀의 초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풀려난 사도들은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사도행전은,
시편 제2편을 인용하면서 헤로데와 빌라도가 기름부음받은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저지른 사건 안에서 이 시편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제1독서).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당시 지도층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계속 복음을
선포합니다. 시편에서 말하듯이, 민족들과 군주들이 일어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으므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도 당연히 위험을 겪으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협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선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마치고 성령으로 가득 차 그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담대함’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사도행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사도 2,29;
4,13.29.31; 28,31 참조).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또는 공공연하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용감하게 다하는 것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말로서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미 위협을 받은 상태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순교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질 수 없는 담대함을 먼저 하느님께 간청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오로 사도도 수인으로 로마에 잡혀 와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아주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28,31 참조). 결국 사도들은 모두
복음을 선포하다가 장엄하게 순교할 것입니다. 마치 순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총이나 거부나 박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가 성령의 힘이 아닌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움이나 십자가를
치워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담대함’을 청한 사도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탁,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생활 방식입니다.
지난 달 말에
우리는 독일 비행기의 추락으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슬픈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장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부기장이 문을 잠그고 하강 버튼을 누르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추락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기사가 나온 것입니다. 특히 부기장이 과거에 자살 성향 심리치료를 받았다는 사실까지 나오면서 고의로 추락시켰다는 기사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지요.
이 기사를 믿기는
싫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150명 가까운 이의 죽음과 함께 슬퍼할 그들의 가족까지 생각한다면 그 행동의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방향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지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살리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데 집중할 때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물학적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과 상처를 통해 얻게 되는 영적인 죽음, 그리고 이런 죽음이 어쩌면
더 큰 죽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에 도달되기까지 계속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다른 이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자기 기분 내키는 데로만 살려고 하면서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잘못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지요. 그런데 진정으로 살기 위한다면, 다시 말해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기 원한다면,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행기 운전에 서툰
당신이 비행기 조정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비행기 기장을 그 자리에 앉혀서 비행기를 잘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왜 운전에 서툰 당신이 삶의 기장석에 앉아있고, 하느님께서는 부기장석에 계실까요?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던 니코데모는 분명 자타가 공인하는 종교인으로 최고의 명성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밤에 찾아가지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지만, 실상 참 행복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는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 찾아갔다는 표현을 쓰지요. 마음이 어두운 밤과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참된 아들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보고 그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향한 새로운 탄생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앞에는 여전히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을 또 나를 그 첫째 자리에 계속해서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우리의
부조정사가 하느님이라면, 얼른 자리를 바꾸십시오. 그래야 안전하게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이 아이들을
보내는 이유(메리 보탐 호위트)
신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보낸 까닭은 시합에서 일들을
만들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열게 하고 우리를 덜
이기적이게 하고 더 많은 친절과
사랑으로 우리 존재를 채우기
위해서다. 우리 영혼에게 더
높은 목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신이 우리에게
아이들을 보낸 까닭은 신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무조건 이겨야 하고, 1등을 해야 하고, 남을 누르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 그것은 희망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네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살겠다는
새 인생 -이기정신부-
자랄 때 애인이
생기면, 결혼하면, 애가 태어나면 계속 사람은 달라집니다. 자녀답게 학생답게 자식답게 부모답게 그렇게 계속 사람은 달라집니다. 어릴 때부터 전혀
달라지지 않고 늙을 때까지 계속 천방지축일 수 없습니다. 달라졌다가도 변하는
사람이라서 달라짐보다 아예 새로 태어나는 게 좋아요. 상대가 사람이 아닌 신이기에 더더욱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려면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믿음으로 살겠다는 새 인생의 탄생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 표징과
이적으로 교만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
-전삼용신부-
새를 파는 가게에
잘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순기간 중 여러
곳에 특강을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모두가 저의 강의를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주일미사
중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사와 함께하니
조금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길게
해도 신자들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보통 때처럼 길게 했습니다.
그러자 한 참다못한
신자분이 일어서서 나가버리셨고,
한 할머니가
“이제 그만 좀
하세요!”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잘
한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움을 받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나 자신의 능력인양 생각해져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도우심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감사와 함께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물론 하느님은 좋은
의도가 있다면 필요한 도움을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
안에는 교만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 위해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까 표징과 이적들을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종’이라고 자신들을
칭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우리를 봉사자로 뽑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도움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표징과 이적들이 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교만만 커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를 보호해주시기 위해 일으키지 않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면서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작은
숫자로 큰 적을 이기게 해 주셨지만 이젠 자신의 힘으로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제사를 올렸고 죽이라는 적들을 살려두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게 해 주신 하느님을 믿지 않고 교만해져 밧세바와 죄를 짓고 병적조사를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주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이제는 정략결혼 등의 자신의 힘으로 부와 명예를 지켜가려하였습니다.
표징과 이적이
따른다면 그만큼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왜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지 않느냐를 불평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있는 겸손이 있는가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전파자는
도움이 없음을 한탄하는 이가 아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불러주신 것 자체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반영억신부-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가능한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지도를 받기 원합니다. 그래야 효과 있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기초가 바로 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성실하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무 잘 나서 바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수준 이하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이나 피아노를
배우는데 있어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때는 제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기초가 서기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준다고 하여
그것을 따라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한편 오래도록 꾸준한 훈련과 연습을 한 사람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지 못하고 단 번에 그들보다 더
나은 운동선수나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좋은
선생을 만나기 바라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사의 스승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
한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 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인간논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령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바람이 제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요한 3,8) 더
이상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그런데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매순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 거듭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제가 주로
준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평화방송과 함께
제작하려고 하는 ‘사제 양성과 사제의
삶’에 대한 다큐
작업입니다.
성소국에 있으면서
사제 양성과정,
사제란
누구인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제상‘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여름에 있을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성경
통독‘
프로그램입니다.
사제를 지망하는
예비신학생들이 성경을 함께 읽고,
성경의 내용을 함께
묵상하고,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있을
’성소주일‘
행사에 대한
준비입니다.
올해는
예비신학생들과 부모님을 초대해서 강의를 듣고,
기숙사도
들러보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일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들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밥은
물론 다른 것들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신앙인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채우면서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사도들은
수동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들을 다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변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들을
스스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표징을
보여주었고,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빵만으로 사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표징을
보인다면,
설사 죽음을
당하더라도 다시 살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배추 애벌레는 온 몸이 굳어 죽은 것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삶과
나비의 삶은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
기쁨,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 과정이 때로
고통이고,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 -이수철신부-
새삼
영적인 삶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돈과
밥이 전부가 된 현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대표 연설에서 경제만 99번 언급했다 합니다. 정치는
경제라할 만큼 돈과 밥으로 대변되는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여기에다
일자리의 일까지 더할 때 돈과 밥과 일은 현실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예전 김지하 시인의 시처럼 밥은,
돈은 하늘이 된 자본주의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돈
중심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과
밥, 하느님과 돈에서 하느님은 실종되고 밥과 돈만 남아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이
빠진 밥과 돈의 본능적 욕망만 남아있을 때 존엄한 품위의 인간도 실종입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하느님 믿음의 영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하느님 중심의 영적인 삶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제
지론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해 첫째는 하느님 믿음, 둘째는 건강, 셋째는 돈이다.“
피정중
자주 언급하면 모두가 공감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거나 하느님이 빠져 버리면 삶의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릅니다.
'먹고
일하고 놀고 쉬고 자고'등 정말
기도(祈禱)없이, 독서(讀書)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은
까맣게 잊고 돈과 건강만 챙기면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입니다.
비단
종교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지녀야 할 영적인 삶입니다. 돈과
밥이,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 끊임없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일깨워주는 바도 영적인 삶입니다. 깊은
밤 예수님을 찾는 니코데모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두
분의 주고 받는 대담이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의
하느님을 찾는 영적 갈망이 깊고 보는 시선이 예리합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또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영적 삶의 요체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심오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끊임없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한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이래야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삶에 영적시야가 열립니다.
예수님의
평생 비전이 하느님의 나라 였고 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평생화두이자 비전 역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다음
말씀이 영적인 삶의 핵심을 잡아 줍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니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성인들의 삶이 영에서 태어났기에 이처럼 자유로웠습니다.
똑같은
육의 현실에서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으로 나눠집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끊임없이 영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육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삶의 모델이 영에서 태어난 1독서의 베드로와 요한과 그 동료들입니다. 이들의
영적 삶을 받쳐주는 것 역시 열렬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기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합니다. 바로
복음의 니코데모에게 결핍됐던 것은 이런 기도를 통한 주님의 체험이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성령충만한
영적 삶이요 담대히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에서 새롭게 태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도
4,29) -오상선신부-
보통
우리는 어려움이나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그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게
되지요.
나에게 다가오는
짐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십자가를 할 수 있으면 안
질 수 있게 해 주시거나 그것을 벗어 던지고
갈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야속하게도...
오늘 사도들도
그러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과연 예수님의
제자답게 그 때문에
비겁해지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지고
갈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온갖
은총과 축복으로 그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회피하고 싶고 지고 싶지 않은
어려움이나 십자가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피하지
말고 그것을 담대히 지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그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입니다.
그러실거죠?
신중하되 담대하게
-김찬선신부-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오늘 사도들은
수석사제와 원로들의 위협 앞에서 두 가지를 청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병자의 치유와 같은
하늘의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위협이나 위험에 처할 때 보통
우리 인간이 취하는 두 가지 좋은 태도가
담대함과 신중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위협이나 위험이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이유도 없고
담대하게 행동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협을 받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어찌 되겠지 하지 않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판단이 선 다음에는 위험에 쫄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판단은 신중하게 하게 되지만
행동은 담대하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담대膽大하다는 말이 쓸개가 크다는 뜻이고
한의학적으로도 아마
쓸개가 튼실해야 담대할 수 있는 것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쓸개가 허해지고 약해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뭣을 할 때 이루게 될
성취와 보람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위험, 실패,
어려움 등을 더 많이 생각게 되고,
그래서 참 좋기는 한데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많이 생각게 되며,
그래서 재고 재다가 결국에는
그만 두는 경우도 많게 되지요.
이런 것이 인간적인 신중함과 담대함의 관계인데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담대함을 원합니다.
바로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인간적으로 심신이 건강하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서 담대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와 열망 때문에 담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성령 충만함으로 담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영적인 담대함이 인간적인 담대함과 다른 것은
이 담대함이 인간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자기 성취를 위해
담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담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 사도들은 그것을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기에
사도들은 병의 치유와 같은 하늘의 징표도
아울러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인이 아니고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복적으로 치유 은사나
하늘의 징표를 감히 청하지 못하는데
사도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기에
거리낌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영적인 담대함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이 되기를 빕니다.
영으로 태어나기 위해
-기경호신부-
니코데모는
최고의회의 일원이었고 부자였으며(요한 19,34-40), 학식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행하신 표징들을(요한
2,23-25) 보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님’이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그는 사회적 이목이 두려워서 또는 종교 질서에 관한 문제들의 논의와
연구는 밤에 하였던 랍비들의 관습을 따라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이다. 요한의 관점에서 낮과 밤을 대비하여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밤은
예수님의 체포 순간처럼 죽음과 죄악의 세계요 육의 영에 매인 상태라 할 수 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오신 기원은 알아보았으나 여전히 어둠 속,
육의 질서 안에 머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베푸심으로써 당신의 계시가 구약 성서의 계시를 이어받아 그것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신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는 ‘다시’의 뜻도 있다. 한편
요한에게 있어 ‘본다’는 것은 안다, 믿는다, 사랑한다, 고백한다 등과 통하는 개념이다. 곧 생각과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아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에게 이제는 ‘위로부터 태어나다’(3절)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5절)로,
‘하느님의 나라를 보다’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다’(5절)로 좀 더 상세히 풀어서 답해 주신다. 여기서 ‘물로 태어남’은 세례 성사로 새롭게
태어남를 뜻하며,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성자를 통해 인간을 새롭게 하고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열어주며 그가 자신의 새로운 존재를 의식할
수단인 신앙을 불어넣어주는 성령의 작용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인격적이며 전존재적인 변화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영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3,6)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육’은 연약하고 허약한 인간을 뜻하며, 자연적인
인간 조건,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하느님과 동떨어진 인간성, 죽음에 부쳐진 인간성을 의미한다. 한편 ‘영’은 앞 구절들과 관련시켜 볼 때 분명
‘성령’을 가리킨다. 인간은 육의 영역과 자연질서에 속하여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기에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성령의 온전한 선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니코데모가 어둠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차츰 이런 ‘영의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주셨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자칫 ‘위로부터’ 곧 ‘영의 질서’와 ‘하느님의 주도권’을 망각하고 육의 영에 매여 살고 있는 또 한사람의 니코데모가
아닐까? 우리도 니코데모처럼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으로 믿긴 하지만 정작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소홀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또 영적으로 아둔하면서도 예수님께 물음으로써 서서히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겼던 니코데모와 같은 영적 열망과 갈증조차 없이 살아가는
건 아닌가? 혹시 나는 굳어진 사고의 틀과 시선, 습관화된 정서적 반응과 같은 육의 작용에 휩쓸려 성령의 활동에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체험이란 규칙의 준수나 일정한 틀 속의 활동이 아니라 겸손되이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태도임을 명심할 일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생각의 끈과 애착의 끈끈함을 내려놓고 영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한상우신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모든 곳에서 봄을 알리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행복을 낳으시고 기쁨을 낳으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기에 탄생과 부활이
있습니다.
내보내고 비워야 살아있는 생명이 됩니다.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모두는 예외없이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은 잡고있는 것을
놓아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사랑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바람같이 어떻게
놓고 어떻게 사랑할지를 생명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유롭기에
우리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기쁨을 주어서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매순간이 탄생이며 매순간이
생명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삶이란 우리 내면에 계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신비가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됩니다.
가장 귀중한 믿음은 사랑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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