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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준하와 돌베게친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민주화운동가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 보고서
※ 이 보고서는 舊 민주당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가 지난 1993년 3월 29일부터 8월 28일까지 장준하선생의 사인규명을 위해서 활동한 결과인「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 보고서」로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인『광복50년과 장준하』에 실렸습니다.
1) 보고서 발간 즈음하여
민주당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가 지난 다섯 달 동안 장준하선생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벌인 조사활동을 한 권의 보고서로 발간하게 되었다. 먼저 우리 조사위원회 활동을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목적한 소망대로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우리 조사위원회로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노력해 왔다. 이 과정을 결산하고 그 동안 새로이 밝혀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깊이 있는 진상규명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이 보고서를 발간하게 되었다.
지난 3월 우리 민주당이 장준하선생의 사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은,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있었던 많은 사건들의 진상을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그릇된 역사를 청산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무엇보다도 '변화와 개혁'이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거의 청산이 선행되어야 하며, 청산없는 개혁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는 믿음에서, 우리 당은 장준하선생의 의문의 죽음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항일운동을 하셨고, 재야의 정치지도자,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장준하선생의 죽음이 단지 그가 절대권력자인 박정희씨의 유신을 반대했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18년 동안 의문에 쌓인 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우리 국민의 수치요, 양식있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사위원회는 크게 두 방향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갔다. 첫째는 사건 현장, 장준하선생의 시체, 목격자의 증언 등 사인규명에 대한 조사였다. 둘째는 사건의 역사적인 배경, 당시의 정치상황, 정권과 이 시간의 관계 등 주변정황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위원회는 10여 차례의 회의와 세 차례의 현장답사, 사건 관련자의 증언청취 등을 통해 진상규명에 노력한 결과, 조사위원회의 최소목표인 사인규명에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데 이르렀다.
첫째로 장준하선생의 사인은 결코 실족추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운데에 홈이 파여진 원형의 인공물체에 의한 후두부 골격이었다.
둘째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과의 증언면담과 현장조사 결과, 목격자의 증언이 맞는다면 장준하선생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높은 75미터 지점에서 실족추락한 것으로 되는데, 이는 사체의 상태로 보아 실족추락이 아니라는 의문을 더욱 깊게 만든다.
셋째로 따라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크며, 장준하의 사인규명을 위해서는 목격자의 증언과 무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상의 조사결과가 장준하선생의 사인을 완전히 파헤치는 데는 지극히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발간이 그 동안 사건을 왜곡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시나리오의 허구가 확인되고,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인 눈으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보고서의 발간이 우리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끝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보다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비록 우리 조사위원회는 이것으로 활동을 마무리하지만, 장준하선생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 계속해 나갈 것이다. 또한 장준하선생의 의문의 죽음이 김구선생 암살사건 등 역사적인 미제사건들과 함께 국회차원에서 진실이 규명되고 오욕의 현대사를 청산하기 위해서 국회의 특위구성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우리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 활동에 협조하신 많은 분들, 특히 권위있는 법의학자이신 문국진 박사님과 면담에 응해준 많은 사건 관계자들에게 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감사드린다. 또 이 보고서의 발간을 결정해 주신 최고위원회에 감사드리며, 보고서 발간과 조사활동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삼웅 민중당 당보주간과 황귀현 전문위원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그 동안 재야 등에서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조사활동을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이런 분들이 모두 함께 진상조사에 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지난 시대의 어두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장준하선생의 사인규명은 물론 군사정권이 저질렀던 모든 의문사와 국민의 의혹을 받는 사건들을 모두 밝혀나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발간사를 가름하고자 한다.
1993년 9월
민주당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 위원장 최고위원 한광옥
2) 조사위원회 구성
1993년 3월 29일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과거 정권하에서 의혹사건으로 남아있는 고(故) 장준하선생의 사인규명을 위해 어두웠던 역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를 구성
위 원 장 한광옥최고위원
위 원 이부영최고위원
위 원 장기욱 의원
위 원 강수림 의원
위 원 이해찬 의원
위 원 김옥두 의원
위 원 류인태 의원
위 원 장준익 의원
위 원 조철구 박사
간 사 황귀현 법사전문위원
3) 의문사 사건 경위
오전 6시경 자택출발
함석헌 선생 자택 방문. 함선생은 등산만류 (이소선 증언)
상봉동에서 호암산악회(회장 김용덕) 산행버스 승차
(동행자 40여명, 이중 20% 정도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음)
오전 11시경 약사봉 계곡입구 도착
오전 12시경 계곡 끝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여장을 푸는 사이 장선생이 혼자 정상쪽으로 올라감 (김용덕 증언)
오전 12시 10분 뒤따라 온 김용한이 군인들과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장선생을 만나 같이 등반시작
오전 12시 40분 ∼ 오후 1시 장선생과 김용환은 함께 정상을 거쳐 조금 내려온 지점에 점심식사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20분경 벼랑쪽으로 하산하다가 장선생이 소나무를 잡고 바위에 발을 딛는 순간 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미끄러져 14m 벼랑 아래로 추락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50분경 김용환은 내려와 회원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달
오후 2시 10분경 김용덕, 김희로, 김응식, 김영봉, 박사범(사범은 이름이 아님) 등이 사고장소에 도착하여 장선생의 사망을 확인함
오후 3시경 가족들 익명의 전화로 사고소식 들음
오후 3시 30분경 일행 철수시작
오후 5시경 김희로의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 유지현 중위가 위생병 1인과 같이 도착
오후 6시경 김응식의 연락을 받고 이동파출소 이수근 순경이 이동면 제중의원 의사인 이종헌을 데리고 현장 도착
오후 7시경 미망인 김희숙 여사 현장 도착
의문사 사건 경위
오전 6시경 자택출발
함석헌 선생 자택 방문. 함선생은 등산만류 (이소선 증언)
상봉동에서 호암산악회(회장 김용덕) 산행버스 승차
(동행자 40여명, 이중 20% 정도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음)
오전 11시경 약사봉 계곡입구 도착
오전 12시경 계곡 끝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여장을 푸는 사이
장선생이 혼자 정상쪽으로 올라감 (김용덕 증언)
오전 12시 10분 뒤따라 온 김용한이 군인들과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장선생을 만나 같이 등반시작
오전 12시 40분 ∼ 오후 1시 장선생과 김용환은 함께 정상을 거쳐 조금 내려온 지점에
점심식사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20분경 벼랑쪽으로 하산하다가 장선생이 소나무를 잡고 바위에 발을 딛는 순간
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미끄러져 14m 벼랑 아래로 추락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50분경 김용환은 내려와 회원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달
오후 2시 10분경 김용덕, 김희로, 김응식, 김영봉, 박사범(사범은 이름이 아님) 등이
사고장소에 도착하여 장선생의 사망을 확인함
오후 3시경 가족들 익명의 전화로 사고소식 들음
오후 3시 30분경 일행 철수시작
오후 5시경 김희로의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 유지현 중위가 위생병 1인과 같이 도착
오후 6시경 김응식의 연락을 받고 이동파출소 이수근 순경이 이동면 제중의원 의사인 이종헌을
데리고 현장 도착
오후 7시경 미망인 김희숙 여사 현장 도착
4) 조사활동
1. 조사위원회 회의
1) 1차 회의
일시 : 1993년 3월 30일 오후 4시
장소 : 중앙당 최고위원회 회의실
논의 및 의결사항
- 사건과 관련하여 포괄적인 의견교환
- 조사의 범위, 방법 등 논의
- 역할분담 및 일정확정
2) 2차 회의
일시 : 1993년 4월 8일 오후 2시
장소 : 중앙당 최고위원회 회의실
논의 및 의결사항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중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 비디오 테이프 시청, 의견교환
- 1부 : 암살인가? 실족사인가? (3월 14일 방영)
- 2부 : 거사와 암살 (3월 28일 방영)
- 조사 및 증언청취대상 확정 및 업무분담
3) 3차 회의
일시 : 1993년 4월 19일 오후 2시
장소 : 중앙당 최고위원회 회의실
논의 및 의결사항
- 이부영 최고위원, 장기욱 의원, 강수림 의원이 각반 조사활동 보고
- 이부영 최고위원은 장선생의 유가족에게 사체부검의 가능성 여부 타진
- 강수림 의원은 김용덕씨, 송형덕씨를 면담하기로 함
- 조철구 박사는 장선생의 사체검안 소견서를 제출하기로 함
- 김용환을 대동하여 현장답사할 필요성을 확인, 가능성 여부 타진
- 추가 조사가 필요하므로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종결하지 말고, 일단 중간활동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함
4) 4차 회의
일시 : 1993년 4월 24일 오후 2시
장소 : 중앙당 최고위원회 회의실
논의 및 의결사항
- 각반 보충조사활동 보고
- 중간활동보고서 토의, 수정작업
- 중간활동보고서 채택
5) 5차 회의
일시 : 1993년 8월 28일 오전 10시
장소 : 중앙당 최고위원회 회의실
논의 및 의결사항
- 2차, 3차 현장답사결과 토의
- 활동보고서 작성에 관한 토의
- 최종활동보고서를 빨리 작성하여 최고위원회에 제출, 확정하기로 함
2. 약사봉 현장답사
1) 1차 답사
일시 : 1993년 4월 2일 오전 9시 30분 ∼ 12시
장소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 계곡
참석자 : 한광옥 위원장, 이부영 최고위원, 강수림 의원, 김옥두 의원, 류인태 의원, 조철구 박사(이상 조사위원) 그 외 중앙당 및 지구당 관계자, 보좌관, 동아일보 기자 등 총 25명
답사내용
- 장준하선생에 대한 추모 묵념
- 사고가 발생했다는 절벽, 사체발견장소, 사체를 옮겨온 장소, 호림산악회 등산팀이 식사준비를 위해 머문 장소, 장선생이 군인 2명을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자소 등을 현장확인
- 사고 1주일 후 현장을 답사한 김삼웅씨가 제기한 10가지 의문점과 이철우씨의 당시 상황설명을 중심으로 조사위원들간에 의견 교환
2) 2차 답사
일시 : 1993년 8월 20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6시 30분
장소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 계곡, 약사봉 일대 및 사고현장
참석자 : 한광옥 위원장, 강수림 의원, 김용태(사고목격자), 김상웅(홍보위 부위원장), 당보기자 등 총 11명
답사내용
- 유일한 사고목격자인 김용환씨와 함께 2차에 걸친 등반을 통해 산행경로를 따라 사건경위 재확인
- 김용환씨는 산행입구를 찾지 못했음
- 산악회 일행이 점심을 먹은 장소도 찾지 못했음
- 뛰어넘었다는 2개의 능선과 계곡도 없었음
- 계곡으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찾지 못했음 (김용환씨가 가리킨 길을 따라 가 본 결과 유원지입구로 내려오게 되었음)
- 아래 14m 70cm 지점으로 올라가 본 결과 정상쪽에서 이 지점으로는 접근 불가능
- 김용환씨는 지금까지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14m 70cm 지점보다 훨씬 높은 75m 지점에서 추락했다고 증언
- 장선생의 사체는 머리가 왼쪽으로 놓여 있었다고 증언
- 양정환씨(도평리 이장), 한종문씨(도평리에서 약 30년 거주) 등과 면담, 당시의 주변정황에 대한 설명 청취
3) 3차 답사
일시 : 1993년 8월 27일 오후 14시 30분
장소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 계곡
참석자 : 한광옥 위원장, 강수림 의원, 김용덕(호림산악회 회장), SBS 홍순철 PD, 김정현(전문산악인), 일요신문 기자 등 총 12명
답사내용
- 김용덕씨와 함께 일행이 점심을 먹은 장소 확인
- 장선생과 김용환씨가 등반을 시작한 산 입구 확인
- 김용환씨가 장선생이 추락한 지점으로 지정한 곳의 높이를 고도계로 측정한 결과 약 75m 확인
- 전문산악인 김정현씨에 의해 75m 지점이나 14m 지점 모두 정상쪽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
- 김용덕씨는 사체의 위치에 관해서 머리가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증언 (김용환씨와 반대임)
3. 사건 관계자 조사
1) 김용환씨(유일한 사고목격자)
일시 : 1993년 4월 17일 오후 6시
장소 : 구의동 민주당 성동(병)지구당 위원장실
면담자 : 강수림 의원(조사1반장)
증언내용
- 회원들이 점심식사를 준비한 지점에서 장선생의 행방을 묻자 김용덕씨가 가르쳐 주었음 (기억은 확실치 않음)
- 산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니까 장선생이 군인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 (사병은 이등병이었는데 촌애들 같았음)
- 정산 아래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장선생과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시국관계 얘기를 했음
- 장선생이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 위험한 계곡 쪽으로 하산하여 따라 내려왔음
- 추락지점에서는 김용환이 먼저 내려왔는데, 내려가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음
- 떨어진 곳에서 장선생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김용환이 인공호흡을 했음 (거기는 돌무덤이 아니었고, 잔잔한 고운 모래가 있었음)
- 일행에 연락하고 김용덕, 김희로, 김용덕의 동생 등 4∼5명과 함께 사고현장으로 갔음
- 김희로씨가 다시 인공호흡을 하고 안되겠다 싶어서 잠바를 벗어 들 것을 만들고 장선생을 모셨음
- 그날 밤 의정부경찰서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구치소에서 자고 의정부지청에 가서 오후에 풀려남
- 장선생의 시계를 김용환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김희로씨가 풀어서 주었다고 함
- 8월 17일경 함께 현장답사하기로 의견을 모음
※ 김용환씨의 취직과정에 관한 추적조사
조사위원회는 김용환이 살고 있는 당진의 민주당 지구당원들과 주민들로부터 "김용환이 사건 이전에는 삼촌이 월북한 것 때문에 취직을 못하다가 사건 이후 중학교사로 정식 취직이 되었다." 는 제보를 받고 이를 조사하였음.
일시 : 1993년 4월 16일 오전 9시, 4월 20일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조사
장소 : 호서고등학교 교장실
면담자 : 장기욱 의원(조사2반장)
증언자 : 홍곤유씨 (현재 김용환씨가 재직하고 있는 충남 당진 호서고등학교 교장)
증언내용
- 현재 김용환씨는 호서고등학교 사회과목 교사로 있음
- 최근 SBS 방송 이후 신문을 보고 김용환씨가 사고 목격자임을 알고 있음
- 1976년 2월경 충남도교위(교육감)의 호서고 교사신규채용예정자 김용환(및 김재웅) 등에 대한 1976년 4월 20일자 충남도경(정보과)의 신원 이상없다는 회보에 의거 채용하였음
- 당시에는 교사자격증이 있는 지역사람이 귀했으며, 특히 타지에서 온 사람은 오래 있지 않았음
당진교육장실 확인 결과
- 1975년 3월부터 1976년 2월까지 1년간 당진중학교 강사(현임교 발령)로 근무한 자료가 있으나(보고장부, 교원명부), 정규사령부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음
2) 김용덕씨(당시 호림산악회 회장)
일시 : 1993년 4월 30일 오후 6시
장소 : 구의동 강수림 변호사 사무실
면담자 : 강수림 의원(조사1반장)
증언내용
- 김용환씨에게 산행 전에 전화를 한 적은 없음
- 오전 11시 전후에 약사봉 계곡에 도착, 장선생과 중간에 같이 갔음
- 계곡 끝 식사준비 장소에는 산악회 임원진 외 여자를 포함해서 5∼6명 정도 더 있었음
- 맞은편 동네에 10분쯤 갔다오니 장선생이 먼저 올라가고 김용환씨가 뒤따라 올라갔다고 함
- 오후 1시 조금 지나 김용환씨가 땀이 범벅이 되어 울상을 지은 채 사고소식을 전했음
- 사고현장에는 김용환, 김용덕, 김영봉, 김덕희, 박사범 등이 갈려갔음
- 사고현장 바닥에는 흙같은 산모래, 돌 등이 있었으며, 고운 모래는 아니었음
- 장선생의 몸이 깨끗하고 상처가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음
- 오후 3시 30분경 철수를 시작하고 사고에 관하여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했음
- 군부대에 신고한 이유는 마을이 상당히 멀고 부대가 많았기 때문
3) 송석형씨(당시 동아방송 기자)
일시 : 1993년 4월 28일 오후 4시
장소 : SBS 보도국 사무실
면담자 : 강수림 의원(조사1반장)
증언내용
- 1975년 사건이 일어난 당시 동대문 지역의 출입기자로서 김진현씨로부터 장준하 사건이 타살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갖고 있으니 사건을 취재해 볼 것을 지시받음
- 김진현씨, 유경환씨에게서 사건이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는 점을 전해 들음
- 취재는 유가족들을 만나고 추모등반을 하는 등 정황증거를 수립하는 것 등이었으며, 추모등반시 추락했다고 하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루트 자체가 접근하기가 어려웠음
- 박미정(당시 부장)에게서 무조건 철수의 취재 중단지시를 받음
- 최호(당시 국장)에게서 그 지시가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의해 중단된 것으로 추측하였음
- 사건 전체가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취재노트 요약본을 김진현씨에게 주었으며, 윤재걸 기자가 1985년 신동아 보도 때 메모를 인용, 현장약도 등을 이용하여 타살리 아닌가 하는 기사를 작성
4) 서돈양 변호사(당시 의정부지청 검사)
일시 : 1993년 4월 14일 오후 6시
장소 : 서돈양 변호사 사무실
면담자 : 장기욱 의원(조사2반장)
증언내용
- 사건 당일 당직검사였는데, 퇴근 후 밤 11시경 집으로 전화가 와서 새벽 1시쯤 의사와 함께 사고현장에 가서 시체를 확인
- 다음 날 유일한 사고목격자인 김용환을 불러 조사했는데, 장선생의 시계를 왜 김용환이 차고 있었는지 추궁하면서 머리를 쥐어박기까지 했음
- 당시에는 추락사로 생각했음
5) 김준엽씨(장준하선생과 함께 광복군 활동, 前 고려대 총장)
일시 : 1993년 4월 13일 오후 7시
장소 : 퍼시픽호텔 커피숍
면담자 : 이부영 최고위원
증언내용
- 장선생이 죽기 전 1975년 5월말 경 함께 식사
- 장선생은 '박정권은 통상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 고 역설하여 김준엽씨는 만류
- 친일파들이 장준하선생을 타살했다고 확신
- 사고 당시 장선생의 시체에서 후두부 함몰상 외에 큰 상처는 없었으며, 양 손바닥 상단에 찰과상을 보았다고 진술
4. 의학적 소견
1) 시체검안 소견 : 조철구 박사
① 두부(머리)
- 안면부 : 얼굴 전체에 좌상·찰과상·열창 등이 외상이 있음, 단 우측 콧구멍에서 출혈을 확인
- 두개골부 : 우측 측두 기저부에 직경 약 2cm의 정원형의 두개골 함몰골절을 촉진으로 확인, 골절 변연은 부드럽고 불규칙하지 않음, 골절부위의 피부는 골절크기와 동일하게 좌상흔이 있고 중심부틑 작은 구멍(면봉삽입 정도)의 개방창이 있고 이곳으로 출혈이 약간 있음을 확인, 기타 부위에서는 외상이나 골절상 확인 안됨 (이하 '확인 안됨'은 '없음'을 의미)
② 경부(목) : 외상 및 경추골절상 확인 안됨
③ 흉부
- 전흉부(앞가슴) : 외상 및 늑골 골절상 확인 안됨
- 후흉부(등) : 우측에만 상부에서 하부로 향한 빗살모양의 찰과상을 확인(모래에 긁힌 것 같음), 흉추골절상 확인 안됨
④ 복부(배) : 외상 및 복강 내 출혈 확인 안됨
⑤ 요부(허리) : 우측으로만 후흉부와 같은 찰과상을 확인, 요추골절 확인 안됨.
⑥ 골반부(엉덩이) : 우측 둔부에만 후흉부와 동일한 찰과상이 있고, 드문드분 굵은 모래가 박혀있음을 확인. 우측 둔부(엉덩이) 상 외면에 주사바늘 자국을 확인. 골반골이나 대퇴골두부 골절상은 확인 안됨
⑦ 상지부(양팔, 손) : 양측 액와부(겨드랑이)에 방사선상의 피하익혈상이 확인됨. 우측 상박외측부에 주사바늘 자국 확인
⑧ 하지부(다리, 발) : 우측 대퇴 후면부에 후흉부와 동일한 찰과상이 약간 있음. 상·하지부 전체에서 골절상 확인 안됨
이상의 검안소견으로 보아 직접 사망의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골절상으로 인한 두 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됨
두부를 비롯해서 외상을 입기 쉬운 겹간부, 주관절부, 수·족관절부 등 돌출부위의 외상이 전혀없는 점으로 보아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이 없고 후두부 골절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음
2) 법의학적 소견 : 문국진 박사
일시 : 1993년 4월 19일 오전 10시
장소 : 여의도 문박사 자택
참석자 : 강수림 의원(조사1반장), 조철구 박사
내용 : 우측 귀의 뒷부분에 난 정원형 함몰골절, 피하익혈상, 중앙부출혈점이라는 당시 검시를 하였던 조철구 박사의 그림을 가지고 문의
- 그림에 나타난 것과 같은 상처는 요철상태가 중앙부분이 연필심과 반대편으로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는 문박사의 설명
- 주사자국의 경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주사하면 구멍이 커진다고 함
- 부검을 해보면 정확하며 지금도 사체를 보면 탈골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으며, 후두부의 함몰골절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함
5) 결언
1. 장준하선생의 민주화투쟁 재조명
당 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칠흙같이 어둡던 암흑시대에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장준하선생의 일생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 특히 장준하선생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장준하선생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섰고, 한비밀수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왕초'라고 규탄하다 투옥되었으며,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 만큼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시켜서는 안될 사람" 이라고 박정희에 대해 대통령자격 불가론을 펼쳤다.
반면 박정희는 눈엣 가시인 장준하의『思想界』를 세무사찰 등으로 탄압했다. 장선생은 "소극적인 언론투쟁이란 결국 독재정권의 비정을 결과적으로 기정사실화 시켜 주는데 어찌 언론인으로서의 그 긍지를 부끄럼 없이 지니고 있을 수만 있겠는가" 라고 하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중출마, 당선하여 언론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박정희와 대결하였다.
마침내 1973년 12월 24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서명자가 10일만에 3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박정희와의 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긴급조치 선포 1주일만인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첫 위반자로 수고되어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형집행정지 중이던 1975년 8월 17일 의문투성이의 사고로 서거하고 말았다.
2. 당시의 시대적 상황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1972년 10월 박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하여 국가권력을 집중, 대통령이 모든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는 통치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사회영역 전반에 걸쳐 관료적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973년 8월에는 유신에 반대하던 김대중씨를 납치·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1975년 4월에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려 군대를 학교에 진주시킴으로써 학생들의 민주화요구를 완전히 차단하는 등 박정희 개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일체의 개인·집단·계층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최대의 강압·물리적 폭력을 자행하는 등 극단적인 국가테러 시대였으며,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의 음모가 노골적으로 행동화되던 시대였다.
3. 장준하선생 사인규명의 의미
이러한 시대, 이러한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준하선생의 죽음은 독재정권에 항거한 실천적 민주주의자, 광복군에 참여 독립운동을 했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민족주의자,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없이 전폭적인 지지와 긍정의 자세를 보인 바와 같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아온 자주 통일주의자, 진실만을 국민에게 당당하게 전달하고자 한 자유언론인의 종언을 의미했다.
따라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을 진상규명하는 것은 독립운동가요 민주화운동 지도자의 한 분인 장준하선생의 죽음을 언제까지나 의문 속에 묻어놓을 수 없으며, 다시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의문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준하선생 사인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이를 시발로 백범 암살 등 과거 건국 초기의 정치적 암살사건들과 그 후 독재정권하의 각종 의문사에 대한 진상도 명쾌히 밝혀, 은폐되고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고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다.
4. 조사위원회 활동결과 및 평가
우리 민주당은 1993년 3월 29일 최고위원회 결의로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동 위원회를 2개 반으로 나누어 업무를 분장하고 약사봉 답사, 관계자 조사 및 증언 청취 등 사명감을 가지고 활발한 조사활동에 임했다. 그 결과 기존의 의문점 중에서 의혹이 해소된 것과 불확실한 사항들을 제외하고 다음과 같이 장준하선생 사인에 대한 의문점을 새로이 확정, 제시하게 되었다.
1) 조사활동 결과 새로이 제기된 문제점
▶ 사인에 관한 문제점
① 장준하선생 사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직경 2cm, 중앙부에 홈에 있는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가격하여 생긴 후두부 함몰상으로 추정됨 (문국진 박사, 조철구 박사)
② 오른쪽 팔과 엉덩이의 의문의 주사자국은 보통 주사자국보다 크게 확장된 것으로서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주사한 경우에 해당되며, 마취주사후 선생의 몸을 고정시킨 뒤 후두부 급소부위를 강타했을 가능성이 높음 (문국진, 조철구 박사)
▶ 사고현장에 관한 문제점
① 김용환씨의 증언에 따르면, 추락지점에서 돌무덤이 아닌 고운 모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장답사 결과 사고현장은 견치석(모난돌)이었으며, 높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물체가 정지하기 어려움 곳임 (당 조사위원회의 현장답사 및 사건 1주일 후의 추모등반에서 확인)
② 현장답사 결과 김용환씨는 등반을 개시한 산 입구, 장선생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는 바위,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했음 (2차 답사)
③ 김용환씨가 지적한 야산입구에 도달해 본 결과, 그곳에는 약사봉에 이르는 등산로가 없었고, 조금 올라가서 2명의 군인과 만난 지점에서 보았다는 개울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음 (2차 답사)
④ 김용환씨는 2개의 작은 능선을 넘어서 계곡을 건너 뛰었다고 증언했는데, 현장에서는 그러한 지형지물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하산한 결과 엉뚱하게도 약사계곡 유원지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음 (2차 답사)
⑤ 사고현장에서 김용환씨는 지금까지 알려진 추락지점보다 훨씬 높은 곳(고도계로 측정결과 약 75m 높이)을 지정, 그 곳에 올라가 본 결과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이었으며, 만약 그곳에서 추락하였다면 장선생의 시체가 많은 손상을 입었을 것이 경험측상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는 것은 추락사로 믿기 어려웠음 (2차, 3차 답사)
⑥ 검찰조사 결과 장선생이 잡았다가 놓쳤다는 소나무가 휘어진 상태로 있었다고 발표했으나, 김용환씨는 소나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진술함 (면담조사 및 2차 답사)
2) 사고당시 해소되지 않은 기타 문제점
① 김용환씨에게 평소 존경하던 장준하선생의 죽음이 일생의 충격적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호흡시의 장선생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사고당시의 상황을 자기체험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가능성' 운운하면서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처럼 진술하는 등 목격자라고 하기 어려운 점이 많음 (면담조사 및 2차 답사)
② 김용환씨가 사건 10일 전에야 겨우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해제되어 등산로는 없는 8월의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장선생을 만날 수 있었는지는 의문임 (2차, 3차 답사)
③ 김용환씨는 당시 장선생을 뒤쫓아가 등반을 개시했다는 지점 주위에 집이나 논밭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당시 군인가족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집이 많았으며, 논밭의 경우도 30여년 전부터 경작해 온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주변정황에 대한 김씨의 설명이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음 (2차 답사)
④ 김용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시에 장선생이 배낭을 메고 있었다는데 장선생의 안경과 지참한 보온병이 깨지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음 (사건 1주일 후 추모등반 때 제기)
⑤ 추락시 소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잡았다면 손바닥 안쪽에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상처가 없었고, 손바닥 상단에만 엎어질 때 생긴 것으로 보이는 멍이 발견되었음 (조철구 박사 증언)
⑥ 새벽 1시에 현장에 가서 임시방편으로 후래시를 들고 현장을 점검했던 검찰이 낮에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을 대동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았음 (서돈양 당시 의정부지청 검사 면답조사)
⑦ 사건발생 1주일 후 현장을 답사하고 사건 진실을 밝히려고 하던 당시 동아방송 송석형 기자는 부장으로부터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취재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음 (송석형 당시 동아방송 기자 면답조사)
⑧ 가족들이 오후 3시경 익명의 전화로 사고소식을 들었고, 동아일보사서도 거의 같은 시간에 취재기자를 수소문하고 있었다는데, 당시 산에는 전화가 없었고 인가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장에 있던 사람이 그 시각에 연락하는 것은 불가능함 (가족들과 장봉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증언)
⑨ 장남 호권씨는 사고 직전 청와대 고위관계자로부터 몸조심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함 (장선생의 장남 호권씨의 증언)
⑩ 장선생의 사망원인에 대해서 일부 관계자들이 사실과 다르게 선생이 술을 먹고 다른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계곡으로 뛰어내리다가 실족 추락사했다고 조작하여 이를 현장에서 유포시키고, 이 조작한 내용을 당시 현장에서 들은 위생병의 진술과 선우연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진술이 거의 유사한데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그 진위를 가려내지 않았음 (실족 추락사라는 시나리오를 유포시킬 계획이 사전에 결정되었을 가능성 - SBS 제기)
⑪ 당시 인근 군부대 수사과에 근무했던 오영씨는 사건 당일 밤 11시경에 현장에 도착, 첫 보고는 실족사로 올리고 다음날 추가로 현장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수사종결 (SBS에서 오영씨 증언)
⑫ 김용환씨가 목격했다는 군인 2명에 대한 조사여부와 조사결과에 대해서 밝혀진 바 없음 (사건 1주일 후 추모등반 때 제기)
⑬ 장선생의 사망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기사 작성자인 당시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를 검찰에 연행하고, 편집자인 성낙오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고도, 긴급조치 사상 처음으로 기소유예 석방한 것은 사건의 원인규명을 차단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음
3) 평가 및 향후과제
장준하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8년이나 경과하여 사건 관계자들의 기억이 희미하고 증언이 상호 충돌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당 조사위원회가 강제력이 없는 관계로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상호 모순되는 진술을 검증하는 작업이 이뤄질 수 없었고, 사건 관계자들 중 일부는 사망했거나, 일 부는 현재의 신원·소재가 불분명하여 접촉이 이뤄지지 못한 점 등은 당 조사위원회가 장준하선생의 사인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커다란 현실적 제약으로 작용했다.
이런 제약 속에서 당 조사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사인이 직경 2cm, 중앙부에 홈이 있는 인공적인 물제를 가지고 직각으로 가격하여 생긴 후두부 함몰상으로 추정됨으로 사실의 재확인을 위해 장선생의 가족들에게 사체의 재부검을 요청했으나, 객관성있는 사인규명을 위해 국회차원에서 요구하면 응하겠다고 답변했다.
당 조사위원회는 유일한 사고목격자인 김용환씨를 대동하여 약사봉 등반경로를 따라 사건경위를 추정한 결과 김씨의 증언이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아 김씨가 장준하선생과 같이 등반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이상의 물적증거 및 정황증거 등을 종합해 보건대, 장준하선생은 단순히 실족사한 것이 아니라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 민주당의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는 이러한 역사적 진상규명작업이 정당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특히 사건 관계자 중 많은 사람들이 국회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면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 관계자들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 또 이 사건이 역사의 뒤안 길로 묻히기 전에 국회차원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정조사권 발동 등을 통해서 장준하선생 사인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규명해야 될 것이다. 이를 시발로 하여 국회에서 백범 암살, 김대중 납치사건 등 독재권력이 개입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상도 아울러 밝힘으로써 은폐되고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 잡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적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93년 5월 19일 민족사의 정통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 (계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