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현지시간)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국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의 리미티드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7부작)는 상당한 충격을 안긴다. 아르바이트로 바텐더 일을 하는 무명 코미디언이 불쌍해 보이는 뚱뚱한 여성 마사에게 차 한 잔을 권하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이를 사랑으로 오해해 집착과 위협, 사생활 침해를 당한다는 내용이 기둥 줄거리다. 개드 자신이 당했던 일을 돌아보며 이 어려움을 떨치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스탠드업 코미디로 올렸는데 제법 인기를 끌었고, 이를 눈여겨 본 넷플릭스가 리미티드 시리즈를 제안해 만들어졌다. 넷플릭스에 공개하자마자 '색다른 스토킹 얘기, 반전 매력이 가득한 스토킹 얘기'란 개드 자신의 평가처럼 상당한 인기와 뒷얘기를 낳고 있다.
개드의 무명 시절을 괴롭히고 힘겹게 만들어 이 연극과 시리즈의 영감을 제공한 실제 여성이 누구인지를 놓고 누리꾼들이 추적에 나섰고, 그 결과 스토커로 몰린 여성이 개드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위협했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이 26일 전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현재 런던에 살고 있는 그녀는 "쇼 때문에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며 "내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있다. 내가 어디 사는지 알리고 싶지 않지만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개드는 10여년 전 자신을 힘들게 만들긴 했지만 지금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어 성공의 발판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실제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 여성은 개드가 이 시리즈에서 자신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들을 숨기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출신에 법학을 공부했으며 나이는 개드보다 스무 살 가량 많으며 맞춤법에 어긋나는 메시지를 남발한다는 점 등으로 자신의 신원에 관한 정보를 드러나게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개드는 시청하는 이들에게 실제 주인공의 신원을 알려 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여성으로 추정되는 이가 스토킹 피해를 입는 것이다. 온라인에 살해 위협 글이 공공연히 올라오고,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사는 남성은 '다른 이들과 함께 당신이 개드를 스토킹한 것처럼 당신을 스토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의 여성은 애버딘 대학 법대를 졸업한 58세 여성이라며 정작 본인은 이 시리즈를 시청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개드가 문제의 스토커 여성에게 받았다고 주장한 이메일은 4만 1071개, 350시간의 음성 메시지, 페이스북 메시지 46개, 트위터 메시지 744개, 편지 106쪽이다.
BBC 방송은 켄트주에서 지난 한 달 접수된 스토킹 피해 신고가 346건이었는데 이 중 75건이 남성 피해자가 신고한 것이었다며 시리즈 인기에 힘입어 남성들의 스토킹 피해 신고가 늘어난 것이라는 경찰 관계자 발언을 전했다.
시리즈 내내 도니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마사 역할을 연기한 배우 제시카 거닝의 빛나는 열연이었다. 넷플릭스에는 7편 뿐만 아니라 12분 분량의 메이킹 필름이 있는데 개드는 거닝의 연기력에 놀라 자신의 연기를 깜박한 일화를 들려주며 칭찬하기 바쁘다. 거닝은 맹목적인 집착에 도니를 괴롭히는 마사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특히 선병질적인 마사의 웃음 장면은 압권이다.
거닝 역시 현실의 마사를 찾아내려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대중에게 촉구했다. 마사로 오인돼 피해를 입었다는 여성은 "내가 마사를 연기한 여배우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7편의 리미티드 시리즈 가운데 1~3편은 도니와 마사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도니와 예술학교 동기, 도니와 트랜스 여성 테리의 관계가 교차돼 그려진다. 4편은 무명 코미디언의 성공에 도움을 주겠다고 꼬여 마약을 먹여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명 작가 대리언에게 당한 학대가 그려지는데 누리꾼들은 실제 작가가 누구인지 추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 엉뚱한 인물이 지목돼 소셜미디어를 통해 위협적인 메시지를 받았는데 경찰은 이 사건 경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스토킹과 성적 유린을 주제로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가 현실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긴다는 점도 흥미롭다.
6편의 마지막 10분은 신인 코미디언 선발대회 무대에 오른 도니가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내가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혐오를 더 사랑했음"을 인정하고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깊게 들여다 보면, 마사야 말로 도니를 정말 깊이 사랑하고 아꼈음을 도니가 깨닫고 놀라워하는 장면이 7편에 나온다. 그 동안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마사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어보면서 '끔찍한 스토킹범인 마사가 어쩌면 누구보다 자신을 깊이 사랑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6편 마지막의 용감한 고백으로 성공에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에서 7편 전반부에서 부모와 화해하고 마사의 진실을 깨달아 허탈해진 도니가 어느 펍에 들어가 보드카 코크를 주문했는데 수중에 땡전 한 푼 없었다. 바텐더가 그런다. "제가 한 잔 살게요." 오래 전 자신이 마사에게 친절을 베풀어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처럼, 이 시리즈의 결론은 너도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서로 피해를 주고 받으며 얽혀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