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는 요순이 있다면 한국 역사에는 바로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있다. 그 분의 업적을 언급하라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훈민정음 창제, 대마도 정벌, 4군6진 개척,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의 발명, 신기전 등 각종 화약무기의 개량 개발,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 편찬,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17만 명을 대상으로 한 백성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확립한 조세제도(공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1426년(세종 8년) 5월 19일 고려 멸망 후 도화원이 간수하고 있던 고려 역대 군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불태웠다”는 <세종실록> 기사가 보인다. 이른바 세종의 분영갱상(焚影坑像)이다. 2년 뒤인 1428년(세종 10년) 8월1일 더욱 지독한 기록이 등장한다. “충청도 천안군이 소장한 고려 태조(918~943)의 진영과, 문의현(청원)의 태조 진영,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공신들의 영정을 모두 각각의 무덤에 묻었다. 전라도 나주가 소장한 고려 2대왕 혜종(943~945)의 진영과 조각상, 그리고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진영도 개성으로 옮겨 능 곁에 묻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433년(세종 15년) 6월 15일 세종이 고려 역대 임금 18명의 어진이 마전현(경기 연천 미산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전현의 정갈한 땅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437년(세종 19년) 7월 17일에는 경기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돼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의 무덤 근처에 있던 암자로 이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1992년 10월 개성 서북쪽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의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포크레인 삽날에 희한한 유구가 걸렸다.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을 굴착작업 하던 중 지하 2m에서 왕건 동상이 나왔다. 어진은 실제의 모습대로 그렸겠지만 동상의 경우 불교에서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종합한 32대인상으로 제작됐다.
불교에서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세계를 평정한다는 이상적인 제왕이다.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 232?)과, 이를 본받고자 한 후대의 중국 양무제(502~549), 진무제(557~559), 수문제(581~604) 등 전륜성왕을 자처한 통치자들은 모두 통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동상에 32대인상의 요소가 한껏 가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이 동상은 951년(광종 2년) 태조 왕건의 원찰인 개경 봉은사에서 어진과 함께 모셔졌다. 몽골과 합단(哈丹·원나라의 반란세력)의 침공 때도 왕건 동상은 강화도에 피란했다가 돌아왔다. 조선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조(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을 연천 마전군으로 옮기라”(<태조실록> 1392년 8월8일)는 것이었다. 그 후 세종이 1428년 충청도 청원에 있던 왕건의 어진과 동상을 개성의 왕건릉(현릉) 옆에 묻으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 초상화의 유래는 뿌리 깊다.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고구려 벽화고분(감신총·평남 용강 신덕리)의 인물은 임금이 쓰는 흑립라관(黑笠羅冠·비단을 재료로 만든 관모)에 홍포(紅袍)를 입고 있다. <신당서>에 “고려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의 상아 장식 위에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畵國王形)”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기(高麗伎)’는 당고조(재위 618~626) 즉위 직후 수나라 제도에 따라 만든 9가지 악 가운데 하나인데 고구려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멸망 전인 646년(보장왕 5년) “동명왕 어머니의 조각상에서 3일간이나 피눈물이 흘렀다”는 <삼국사기> ‘보장왕조’ 기록도 있다. 또 신라에 원한을 품은 궁예가 경북 영주의 부석사 벽에 그려진 신라 임금의 초상을 보고 칼로 내리쳤고, “지금도 궁예의 칼자국이 남아 있다”(<삼국사기> ‘열전·궁예조’)는 기록도 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은 자화상을 그린 뒤 그림에 ‘기진자사(其眞自寫) 기찬자작(其贊自作)’라 해서, ‘그 초상화는 내가 그리고, 그 찬문도 내가 썼다’고 했다. 자화상을 초상(肖像), 즉 ‘닮을 초(肖)’에 ‘본뜰 상(像)’이라 하지 않고 ‘사진(寫眞)’이라 해서 ‘내면의 ‘참됨(眞)’을 ‘그대로 드러낸다(寫)’고 했다. 오죽하면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가 “터럭 한 올이 달라도 내가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고 했을까. 그래서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세종도 마치 살아있는 듯 사실적으로 그린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를 보는 일이 불편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조를 상징한다고 봤다. 그러니 색출작업까지 해서 없애버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세종이 그렇게 분영갱상을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가 몇 점 있다. 공민왕(1330~1374·재위 1351~1574) 부부의 어진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공민왕의 어진에 손을 대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다. 세종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가 조선을 개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태조 4년) 종묘를 만들면서 고려 공민왕의 영당을 곁에 세우고 공민왕의 초상화를 받들었다. 구전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때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을 타고 공민왕의 어진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성계로서는 공민왕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 머물러있던 변방세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에 나설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이 적극 도왔다. 쌍성총관부를 탈환한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이성계 가문은 공민왕 때 중앙무대로 진출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로서는 변방의 세력으로 머물던 가문을 발탁한 공민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1365)의 부부 초상화가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1395년 당시 공민왕 영당에 봉안됐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移模·원본을 베껴 그린 그림)한 것이다. 공민왕 부부가 나란히 앉은 채 그린 초상화의 형식은 이후 역대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박연(1378~1458) 부부와, 문신 하연(1376~1453) 부부의 초상화 등 조선 전기의 부부초상화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태조 왕건의 어진도 남아있다. 7명의 고려 임금 위패를 모신 마전(연천)의 숭의전에 소장돼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러나 태조의 초상화는 근대에 제작된 소략본이다. 이 어진은 장막을 치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얼굴을 왼쪽으로 약 30도 돌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