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연이 무너지고 북연의 고운 정권은 단 2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풍씨와의 관계는 중립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데..
비문에 후연과의 전쟁기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거하고 계시는데...
비문에 보면 비문 건립의 내용이
<비석을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새기니,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부분에 <만일 만년 후에도 편안히 묘를 지키는 자가 있으면, 내가 몸소 한, 예의 땅에 내려와 순수하여 취할것이니, 명령에 준비하여, 관리하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후반부네 나오는 수묘인 규정에 있어서 그 대상이 거진 이 <한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이 비석의 대개의 내용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기록대상에 대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 장수왕 정부는 새로 고구려인이 된 선비족 출신 백성들에게 후연의 역사는 고구려사의 일부로서 광개토왕의 대 후연전쟁은 대외정복사가 아니라 내란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
라고 하셨지만...
새로 고구려인이 된 것이 어찌 선비족 출신 뿐이겠습니까????
백제의 한수 이북 땅을 많이 차지하고 많은 백제인이 새로이 고구려인으로 편입되었을 텐데..백제를 정벌한 기록은 어찌 그리 처참히도 많을까요??
또한 순수하게 공훈을 빛내기 위함이라면 비문에 선비적을 처참히 공격했다 적었다 한들 수도에 건립된 비문에 지방의 선비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비문이 건립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텐데..
더군다나 내정이나 정치에 대한 공훈은 일절 한마디 없고 단지 군사적 업적만을 적어놓았습니다. 그것도 중국국가와의 대결은 누락되었습니다. (후연을 고구려가 유목민국가로 인식해을지..중국쪽 국가로 인식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짙은 것인데.. 비문에 등장하는 부여인, 백제인 등 역시 고구려인을 이루게 된 것은 일부 소수의 선비족과 유사한 상황에서 더군다나 전술한 나라들이 비문에 이전부터 속민이었다고 주장되어진 것으로 보아 이들을 공격한 기사를 싣는 것 역시 정치에 도움안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님 주장대로 생각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님의 주장대로 생각 할때에 선비계 국가와의 전투기록을 뺀 것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첫댓글고구려 수도에 비를 건립하는 것이 그 내용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는 것입니까? 그런내용까지 외국에 잘 알려진다는 일반적인 상황이 있습니가.. 저는 비문의 군공기사들이 수묘인규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님이 말하는 정치적 이유에서 누락된 것이 아니라..
첫댓글 고구려 수도에 비를 건립하는 것이 그 내용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는 것입니까? 그런내용까지 외국에 잘 알려진다는 일반적인 상황이 있습니가.. 저는 비문의 군공기사들이 수묘인규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님이 말하는 정치적 이유에서 누락된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