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움직인 사람]
도나델로(Donatello :1386~1466)
이탈리아 미술에 혁신을 불러온
도나텔로(Donatello)
피렌체 르네상스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전통적인 고대 조각 미술 양식을 변형하여 이탈리아 미술에 혁신을..
대표작 : 〈다비드〉, 〈추코네〉, 〈성 게오르기우스〉, 〈막달라 마리아〉 등
도나텔로는 피렌체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했다고 일컬어지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그는 고대 로마 조각에 대한 광범위하고 상세한 지식을 기반으로 고대 미술을 대담하게 변형, 재창조했으며, 인체 연구를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적 표현에 더해 다양한 동작과 표정으로 인간성을 불어넣으며 이탈리아 미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16세기의 미켈란젤로가 조각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통합하기 전에 15세기의 조각가 도나텔로가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앞길을 예비했던 도나텔로도 비아 콰트로첸토에서 주목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피렌체의 조각가 후배였던 천재 미켈란젤로의 위세에 눌렸지만, 그래도 15세기의 르네상스 조각은 도나텔로가 압도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조각을 르네상스라는 새 시대의 이름으로 재현해냈고, 여기에 삼차원적 입체감까지 더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다비드〉가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아담하지만 지극히 아름다웠던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가 이미 존재했다. 미켈란젤로의 남성 승리자 〈다비드〉가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을 압도하기 전에 도나텔로의 여성 승리자 〈유디트〉가 피렌체 장안의 화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비아 콰트로첸토에서 도나텔로가 왜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는 것일까? 왜 도나텔로를 ‘유럽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피치 미술관의 도나텔로 전신상, ⓒ 21세기북스 |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나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대부분의 도심 광장(Plaza)을 차지하고 있는 황제 입상(立像)이나 그리스 · 로마 신화의 주인공 조각을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입체적인 조각 작품이다. 그런데 유럽의 중세 1000년 동안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입체 조각상이 자취를 감추었다. 극히 제한적인 예를 제외하고 중세의 조각은 이차원의 부조(浮彫)가 대세를 이루었다. 평면을 깎아서 마치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조각 형식이다. 표면에 돌출되는 정도에 따라 고부조, 중부조, 저부조로 나뉜다. 물론 도나텔로도 많은 부조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도나텔로의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 조각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예술 장르가 탄생한다.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삼차원 조각상처럼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입체적인 조각이 재현된 것이다.
예술가 도나텔로를 키운 사람은 코시모 데 메디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예술가와 후원자가 어느 정도까지 가까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제공한다. 코시모는 도나텔로가 창작 활동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반대로 도나텔로는 후원자가 절대로 아깝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놀라운 걸작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냈다. 1464년에 임종한 코시모는 산 로렌초 성당에 묻히면서 도나텔로가 임종하면 자기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실제로 도나텔로의 무덤은 그의 후원자였던 코시모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산 로렌초 성당에 있다. 예술가와 후원자는 마지막 가는 길도 함께했다.
도나텔로(Donatello, 본명은 Donato di Niccoló di Betto Bardi, 1386~1466)는 1386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성장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주도하던 피렌체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나텔로의 첫 번째 미술 선생은 로렌초 기베르티였다. 성 세례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 공모전에서 브루넬레스코와 경쟁했던 인물이다. 기베르티가 브루넬레스코와 벌인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 청동문을 제작하고 있을 때, 도나텔로는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나텔로는 스승의 경쟁자였던 브루넬레스코와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과 조각의 미학을 연구한다. 브루넬레스코가 원근법의 원리를 창안해낸 것도 이즈음이고, 도나텔로 역시 친구의 도움으로 원근법의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 도나텔로는 선원근법을 르네상스 조각에 접목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특별히 초기에 제작한 부조 작품에서부터 브루넬레스코의 혁신적인 선원근법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1420년대, 피렌체로 귀환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코는 곧바로 장안의 화제 인물로 떠올랐다.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건축과 조각의 신예가 선원근법이라는 혁신적인 미술 이론으로 피렌체 예술가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브루넬레스코는 그동안 불가능한 과제로 남아 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제작에 착수하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도나텔로 역시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 입체 조각상 제작에 착수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브루넬레스코가 있는 곳에 언제나 도나텔로가 있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최종 완공을 책임졌던 브루넬레스코는 내부 조각을 대부분 도나텔로에게 맡겼다. 브루넬레스코가 추구하는 공간의 이미지를 조각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사람은 도나텔로뿐이었다.
도나텔로의 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 두오모 박물관의 내부,ⓒ 21세기북스 |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받고 건축한 산 로렌초 성당의 구성구실과 산타 크로체 성당의 파치 가문을 위한 가족 예배당을 신축할 때도, 친구인 도나텔로가 실내장식과 조각을 맡았다. 도나텔로는 15세기의 천재적인 예술 이론가였던 알베르티와도 친구 사이가 되었고, 로마에 살던 그와 함께 두 번째로 로마를 방문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도나텔로는 조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대리석은 물론이고 청동 주물, 나무, 테라코타, 스투코(stucco: 치장 벽토) 등 조각을 위해서라면 다루지 못하는 재료가 없었다.
도나텔로, 브루넬레스코, 알베르티, 마사초 등이 우정을 나누며 시대정신을 공유함으로써 15세기 전반의 피렌체 르네상스는 대통합의 전성기를 맞는다. 특별히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코에게서 많은 지적 도전을 받았고, 그 일화가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소개되어 있다.
막역한 친구 사이인 동시에 피렌체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견인해가던 브루넬레스코와 도나텔로 사이에 서로 언짢은 일이 생겼다. 도나텔로가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각하면서 생긴 일이다. 작품을 일단 완성한 도나텔로는 친구인 브루넬레스코에게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코는 도나텔로가 조각한 예수의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뜨기라고 혹평했다. 친구의 냉정한 평가에 잔뜩 골이 난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코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자네가 한번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조각해보지?”라고 말했다. 건축가인 브루넬레스코가 아무리 그래도 조각가인 자신의 실력보다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브루넬레스코는 도나텔로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직접 조각했다. 도나텔로는 친구의 작품을 평가하려고 피렌체 시장 모퉁이에서 브루넬레스코를 만났다. 요리를 해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려고(도나텔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음) 시장에서 두 남자가 함께 계란과 치즈와 같은 간단한 장거리를 보았다. 브루넬레스코는 도나텔로에게 작품이 있는 화실을 일러주고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부탁했다. 작품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도나텔로는 서둘러 작품이 있는 곳으로 갔고, 브루넬레스코는 시간을 끌면서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하고 있었다
화실에 도착한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코의 작품을 보는 순간 들고 있던 계란과 치즈를 모두 땅에 떨어뜨릴 만큼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도나텔로가 음식 재료를 모두 떨어뜨리고 정신없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을 때, 시장에서 시간을 끌던 브루넬레스코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도나텔로에게 “저녁거리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대체 뭐 하는 거야?”라며 놀렸다. 그러나 도나텔로는 멍하니 작품만 바라볼 뿐이었다. 브루넬레스코가 조각한 예수의 모습은 완벽한 인간이 재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도나텔로는 시골뜨기처럼 조각한 자신의 예수와 브루넬레스코가 조각한 ‘완벽한 인간의 재탄생’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조각임을 인정했다.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네, 그것으로 충분하네. 자네가 진짜 그리스도를 만들었다면, 나는 시골 촌뜨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차이겠지!”
바사리가 기록으로 남긴 이 에피소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하필 이 이야기가 15세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되었을까? 우리는 화가 마사초의 작품 속에서 절망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던 아담과 이브를 발견할 것이고, 추운 겨울날 찬물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성 베드로 앞에서 세례를 받는 무리를 만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추위에 몸을 떠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도나텔로는 ‘완벽한 인간의 재탄생’에 성공한 브루넬레스코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조각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자신이 조각한 ‘시골 촌뜨기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에도 만족감을 표시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얼굴을 부여했다는 자부심도 서려 있다. 도나텔로의 조각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였던 중세의 예수는 처음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거룩한 구세주의 얼굴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성스러움의 일상화, 아니 일상의 성화(聖化)가 조형예술의 3대 장르인 건축(브루넬레스코), 조각(도나텔로), 그리고 회화(마사초)에서 구현되는 것이 15세기 전반 피렌체에서 일어난 예술의 혁명이었다.
도나텔로의 많은 작품 중에서 최초로 제작된(1408~1411년 사이) 것은 대리석으로 된 〈다비드〉와 〈성 요한의 좌상(坐像)〉으로, 1588년까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전면 파사드에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이다. 현재 이 초기 작품은 모두 피렌체 도심의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리석 〈다비드〉상은 1408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전면 파사드를 장식하고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12명의 조각을 계획했을 때 제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도나텔로의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비드의 발아래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를 두고 있는 것은 청동 〈다비드〉와 같은 구도를 취하고 있다. 대리석 〈다비드〉는 앞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청동 〈다비드〉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숙고하는 자세를 취하는 차이점이 있다.
피렌체의 경찰서 겸 감옥으로 사용되던 바르젤로는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 21세기북스 |
피렌체의 경찰서 겸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한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바르젤로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 작품들과 함께 도나텔로의 여러 걸작이 소장되어 있다. 이왕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리석 〈다비드〉를 소개했으니, 도나텔로의 다른 작품도 여기에서 함께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도나텔로가 조각한 대리석 〈다비드}, ⓒ 21세기북스
청동으로 만든 {다비드},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 청아출판사 |
가장 대표적인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은 청동으로 만든 〈다비드〉다. 이 작품도 대리석 〈다비드〉와 함께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르네상스 최초로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입체 청동 조각상이란 평가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청동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최고(最古)인 동시에 최고(最高)의 작품인 셈이다. 도나텔로는 동성애자였다. 15세기를 대표하는 동성애자의 작품에 걸맞게 청동 〈다비드〉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검은색에 가까운 청동 주물로 만든 작품이다. 바르젤로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전문가들의 복원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작품 복원 과정도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청동 〈다비드〉가 바르젤로 박물관에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받고 있다.
견학 온 피렌체 어린이들이 복원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 21세기북스
피렌체 도심에 있는 오르산미켈레 성당의 외벽
도나텔로, 기베르티, 베로키오 등이 제작한 걸작 조각상이 장식되었던 곳이다. |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또 다른 작품은 오르산미켈레 성당의 외벽에서 자리를 옮겨온 〈성 조지〉의 진품이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무기를 만드는 길드에서 주문했기 때문에 성 조지가 지니고 있는 무기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동상 아래 부조로 조각된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는 도나텔로가 친구인 브루넬레스코에게서 배운 선원근법을 최초로 적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오르산미켈레의 〈성 조지>, ⓒ 21세기북스 |
피렌체 도심에 있던 오르산미켈레 성당은 원래 곡물 창고였으나 그곳에 걸려 있던 성모 마리아 상이 기도에 응답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성당으로 용도가 변경된 곳이다. 피렌체의 여러 길드에서 여러 조각가에게 자기 길드의 수호 성자를 의뢰하여 외벽에 전시했고, 신예 조각가 도나텔로도 1410년대에 세 작품을 맡게 되었다. 물론 지금 오르산미켈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모두 모조품이다.
오르산미켈레의 〈성 마가, ⓒ 21세기북스 |
도나텔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성 마가〉는 피렌체의 직물 길드에서 주문한 것으로 1413년에 완성되었고, 현재 진품은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있고 콘트라포스토의 여유 있는 자세와 대리석 성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바르젤로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성 조지〉도 원래는 오르산미켈레 외벽에 전시되었던 작품이다. 세 번째 작품 〈성 베드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도나텔로가 제작했다는 설과 다른 사람이 제작했다는 설이 충돌하고 있다.
1419년, 도나텔로는 폐위당해 피렌체로 망명 와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영묘 작업에 참여했다. 르네상스 최초의 영묘라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요하네스 23세를 끝까지 후원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주문한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대표하는 재벌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의적절한 시기에 은행업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급성장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다른 은행가 가문들의 견제를 따돌릴 수 있었다. 바르디 가문이나 페루치 가문과 같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피렌체의 은행가 가문을 제치고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운했던 교황 요하네스 23세와의 인연이 숨어 있다.
‘교회의 대분열’이 정점에 달했던 1410년에 ‘피사 교황’으로 취임했던 요하네스 23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를 당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투옥되는 수모를 겪는다. 강제 폐위를 당한 교황에게 책정된 거액의 벌금을 지불하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사람은 바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와 그의 아들 코시모였다. 하이델베르크 성채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겨우 목숨을 건진 요하네스 23세는 피렌체를 망명지로 삼았고, 메디치 가문은 끝까지 그를 후원해준다. 이미 깊은 병에 들어 있었던 교황은 1419년, 피렌체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불법교황으로 낙인찍힌 한 인물의 쓸쓸한 최후였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이 불운했던 불법교황을 위해 조각가 도나텔로와 건축가 미켈로초를 동원했다. 비록 전임이었지만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영묘를 최대한 정성껏 만들고, 이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세례당 안에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 두 장인은 정성을 다해 르네상스 최초의 영묘를 제작했다. 교황청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그의 묘비에 “교황으로 불렸던 요하네스 23세”라고 표현함으로써,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에 대한 최대 예우를 보여주었다. 실물 크기로 가로누워 있는 요하네스 23세의 조각상이 도나텔로가 손댄 부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15년부터 1426년까지 도나텔로가 전념했던 조각 작품은 ‘조토의 종탑’ 하단을 장식할 다섯 개의 선지자 입상(立像)이었다. 현재 이 작품들은 모두 풍상에 자연 마모되고 산성비에 훼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피렌체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의 흔적을 확인하려면 바르젤로 박물관과 함께 두오모 박물관도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 브루넬레스코라는 불세출의 건축가를 친구로 둔 덕분에 도나텔로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파사드와 내부, 그리고 ‘조토의 종탑’ 외관을 자신의 조각 작품으로 장식하는 기회를 얻었다.
피사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영묘 부분,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21세기북스 |
두오모 박물관에서 도나텔로의 선지자 입상을 감상하기 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작품이 있다. 역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을 위해 제작했던 〈칸토리아(Cantoria)〉로 불리는 대리석 찬양대다. 원래 성당의 오르간을 설치하려고 벽면에 붙여두었던 작품이므로 박물관에서도 벽면에 높이 붙여 전시하고 있다. 상단 벽면에 작은 날개가 달린 어린 천사(푸토)들의 원무(圓舞)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다섯 개의 돌출부가 전체 무게를 지탱하고 그 위로 장식 기둥이 각각 두 개씩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칸토리아〉의 벽면에 조각된 어린 천사들은 고대 로마의 석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나텔로가 두 번째 로마 방문 이후에 〈칸토리아〉를 제작했기 때문에 로마의 영향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도나텔로의 걸작 〈칸토리아〉, 두오모 박물관 소장,ⓒ 21세기북스 |
이제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대리석 조각을 감상할 차례다. 먼저 가장 초기에 제작된 〈사도 요한〉을 보자. 이 작품은 입상(立像)인 다른 도나텔로의 작품과는 달리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도나텔로가 남긴 대형 인물 조각상 중에서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리석 〈다비드〉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1409~141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각주 이 작품은 원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파사드에 전시되어 있다가 1588년에 성당 내부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1936년부터는 두오모 박물관의 실내로 이전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을 포함한 상체가 아래 다리 부분보다 길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성당 파사드의 높은 위치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례를 맞추려고 그렇게 의도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도나텔로의 〈수염이 없는 선지자〉, 두오모 박물관 소장 |
도나텔로의 〈하박국〉 선지자, 두오모 박물관 소장, ‘추코네’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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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가 ‘조토의 종탑’을 위해 제작했던 선지자 입상은 〈수염이 없는 선지자〉, 〈수염이 난 선지자〉, 〈아브라함과 이삭〉, 〈예레미야〉, 〈하박국〉의 대리석 전신상으로, 모두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오모 박물관이 자랑하는 도나텔로의 목각 입상 〈막달라 마리아〉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추코네’는 도나텔로가 붙인 작품의 별명으로 ‘왕 대가리’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작품의 구도로 보아 지능이 낮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서 도나텔로가 이 ‘왕 대가리’를 조각한 다음 대리석 인물을 향해 말을 해보라고 재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기괴하게 생긴 선지자 하박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상념에 사로잡힌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위대한 선지자 하박국이 바보 얼간이처럼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1443년부터 10년간 도나텔로는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의 산 안토니오 대성당 중앙 제단과 성당 앞에 세워질 기마상을 제작했다. 베네치아의 용병대장 에라스모 다 나르미의 청동 기마상으로, 이 작품은 로마 시대 이래 통치자의 청동 기마상만 제작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화제가 되었다. 말발굽 아래에는 천체가 놓여 있고, 주인공은 갑옷을 입고 지휘봉을 든 채 오른손을 치켜들고 있다. 이 포즈는 세계의 지배를 뜻하는 고대적 상징으로, 이 기마상은 후일 모든 기마상의 선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엄청난 화제를 낳았으며, 공개되기도 전에 나폴리의 왕이 도나텔로에게 자신의 기마상 제작을 의뢰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완성 이후 설치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도나텔로는 그사이 대금도 받지 못하고, 파도바에 발이 묶여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에라스모 다 나르미의 청동 기마상, 파도바 산 안토니오 대성당, ⓒ 청아출판사 |
1453년, 도나텔로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말년에 이르러 도나텔로의 통찰력은 더욱 무르익었고, 그 결과 목조각상 〈막달라 마리아〉가 탄생했다. 이 작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기구한 젊은 날을 보내고, 정신적 고난에 억눌려 여위고 쇠약해진 모습이다. 건강하고 관능적인 젊은 육체를 잃은 늙은 여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독교적 구원을 찾는다. 1966년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이 작품에 피부색과 머리색 등이 사실적으로 채색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도나텔로는 이후에도 시에나 대성당의 주문으로 〈세례 요한〉 등을 제작했으며, 산 로렌초 성당을 장식할 설교단을 설계하기도 했다. 예수의 수난과 관계된 일화들을 부조로 표현한 청동 설계단은 도나텔로 사후 다른 조각가들의 손에 완성되었으나, 정확하고 기하학적인 원근법에 기반한 도나텔로의 독창적인 공간 묘사 기법(깊게 파고들어 간 뒤 배경과 앞으로 튀어나온 전경, 각각 다른 깊이감으로 표현된 인물들),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도나텔로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대리석 조각은 많이 훼손된 상태로 전시되고 있다. 1930년대까지 외부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풍상에 의한 마모의 정도가 심했으나, 최근 한 작품씩 차례로 복원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 입상 조각 작품들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두 작품은 ‘추코네(Il Zuccone)’로 불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대리석 전신상과 기괴한 모양의 목각 〈막달라 마리아〉다.
도나텔로의 목각 〈막달라 마리아〉, 두오모 박물관 소장, ⓒ 21세기북스 |
거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지만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목각 〈막달라 마리아〉는 도나텔로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나텔로의 마지막 활동 시기에 조각한 이 작품은 아름다운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에 친숙한 사람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목각으로 서 있는 성녀의 모습이 어딘지 기괴하고 으스스하다. 이빨 빠진 못생긴 얼굴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가 몸을 떨면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성녀가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으로도 좀처럼 기도하지 않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15세기 중엽부터 피렌체의 실권자로 행세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과 건축가 브루넬레스코와의 친분으로 말미암아 도나텔로는 피렌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렇지만 피렌체 밖에서도 작품 주문을 많이 받았고 장기간 피렌체를 떠나 있기도 했다. 살아생전에 워낙 유명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그의 주요 작품은 피렌체 외에도 나폴리, 파도바, 로마, 시에나, 베네치아 등지에 흩어져 있다.
도나텔로가 피렌체에 영구 귀환한 것은 1459년의 일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청동 〈유디트〉와 산 로렌초 성당에서 사용할 청동 설교단 제작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뇨리아 광장을 지키고 서 있는 〈유디트〉(복사본)는 작품의 주제만큼이나 풍성한 뒷이야기를 가진 작품이다. 유대인의 영웅 유디트(Judith)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적장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내려치기 직전이다. 절제된 여성의 내밀한 아름다움은 종적을 감추고 원수에 대한 단호한 적개심만이 청동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다. 살기가 느껴진다.
시뇨리아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유디트〉 모조품, ⓒ 21세기북스 |
1455~1460년 사이에 완성한 이 작품은 원래 시에나 두오모를 위해 제작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청동 조각 내부에 물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분수를 장식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 저택의 정원에 전시되어 있던 이 작품은 ‘자만에 대한 겸손의 승리’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언제나 신중하고 겸손한 처신을 유지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정신을 반영한 작품으로 이해한 것이다.
1495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시민의 봉기로 축출된 다음 이 작품은 베키오 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시민들에게 공개 전시되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이 작품의 의미를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시민의 승리’로 해석했다. 같은 작품이 수십 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재해석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다비드〉에 밀려나는 수모를 당한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칼로 목을 쳐서 죽이는 장면을 공개 전시하는 것이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함양하는 데 적절한가 하는 논의가 그치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라 술에 만취한 적을 죽인 행동이 과연 애국심과 용기로 정당한 것인가 하는 논의도 계속되었다. 결국 여자 청동 〈유디트〉는 남자 대리석 〈다비드〉에 밀려 시뇨리아 광장의 한구석으로 물러난다. 지금은 그래도 〈다비드〉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되어 있지만,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다비드〉도 모조품이고, 도나텔로의 청동 〈유디트〉 역시 모조품이다. 도나텔로의 진품은 훼손을 피하고자 베키오 궁전 안(Sala dei Gigli)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도나텔로가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제작한 산 로렌초 성당의 청동 설교단 |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서 주문받은 산 로렌초 성당의 청동 설교단은 도나텔로의 유작이 되었다. 거의 여든 살의 노년에 접어든 거장 도나텔로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회심의 역작이다. 친구였던 브루넬레스코가 건축한 산 로렌초 성당의 설교 제단을 부조 작품으로 장식했다(1463~1466). 작품의 주제에 따라 〈부활과 수난의 제단〉으로 불린다. 도나텔로는 이 유명한 설교 제단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임종했다. 그를 변함없이 후원해주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도 비슷한 시기(1464)에 임종했다. 1466년에 사망한 도나텔로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유언에 따라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다.
글 김상근 : 연세대학교(학사),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종교학 석사), 에모리 대학(석사)에서 수학했으며, 16세기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대한 연구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다. 2004년 귀국한 이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부학장과 연합신학대학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16세기 동서양 문화사상의 원류를 찾기 위해 르네상스 예술로 표현된 유럽의 시대정신을 추적하며, 동서양 역사를 단면으로 잘라 신대륙의 발견, 르네상스 예술,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동서 문화 교류사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출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저자 김상근, cp명 21세기북스
피렌체를 알면 인문학이 보인다! 단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메디치, 조토, 카라바조 등의 피렌체 천재들이 이뤄낸 르네상스 시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창조 에너지의 발상지 피렌체는 새로운 인간다움이 발견된 인문학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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