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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3.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4. 자기를 낮추는
마 18: 3.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1]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는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 요 3: 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행 2: 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로 받으리니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 격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 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을 의미한다.
* 골 4: 11-12 –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요일 5:14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어린아이는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답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라는 말이다.
(1) 어린아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본받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셨다. 믿음은 부분적인 신뢰가 아니다. 전적인 희생이고 봉사이며, 헌신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할 때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찬송가 : 구주 예수 의지함이
1.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2.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를 믿는 나의 맘을 그의 피에 적시네.
3.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 버리네. 안위 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4. 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 무궁 지나도록 함께 계시리로다.
[후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아멘
영문명 : Tis so sweet to trust in Jesus
작사 : 루이자 M.R. 스테드 (1850 - 1917). 영국태생의 선교사이며 찬송 작가. 남편의 죽음 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새삼 깨닫고 본 찬송시를 짓게 되었다.
작곡 : 윌리암 제임스 커크패트릭 (1838 ~ 1921). 미국의 저명한 찬송 작가로 찬송계 발전에 크게 기여함.
(2) 어린아이는 순진하다.
그들은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 역시 순수해야 한다.
외식적인 기도, 위선적인 삶, 형식적인 사랑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순수함을 원하시며, 진실한 마음을 바라신다.
3]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 18: 4. 자기를 낮추는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예수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 20: 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고 말씀하셨다(마 11: 29).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이다.
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천국은 이 세상과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는 운동을 하지만, 천국에서는 정반대이다. 이 땅에서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
천국의 원리는 섬김의 원리이다. 이 땅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지만, 천국은 정반대이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섬기는 자로 일하셨다. 이를 소명이라고 한다.
소명(라:vocatio, 영:calling, vocation, 독:Beruf)
기독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회개하고 믿으라는 소명과 세상에 있는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소명이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취급하려고 하며, 특히 일상생활의 일과 연관시키려고 한다.
전반적으로 구약은 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창세기 3: 14-19은 일이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고 해석되지만,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한 그 이전의 말씀은, 구약 전체에 수없이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정직한 일은 칭찬을 받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구약의 특징인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긍정을 반영한다. 신약은 실질적으로 히브리적이므로 일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태만을 정죄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일의 종교적 중요성에 대하여 신학적 반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신약의 대부분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는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는 수도원 생활과 사제의 생활과 관계가 있고, 후자는 비교회적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 비교회적 소명은 타락한 세상에서 죄의 억제를 위한 하나님의 자연법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중요성의 가치를 전적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종교적 봉사는 교회 안에서 가장 잘 수행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금욕적인 수도원 생활은 성생활과 자식의 의무를 하는 결혼생활보다 더 높은 소명으로 간주되었다. 결논적으로 중세시대에는 일상생활의 일을 통하여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종교적 중요성으로 인상적인 신학적 반영을 하지 않았다.
또한, 중세의 보편적인 종합이 수도원 생활과 사제의 직분을 높임으로 일상적인 일과 세속적인 직업의 가치를 떨어뜨렸는가의 문제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혁명적인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 서양 문화에 일의 독특한 개념을 제공했다고 사회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주장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신성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보다 더 유용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루터의 견해는 인간의[인격]과 그의 [직분]을 구별하였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의미했다.
의인화된 사람은 생활에서의 역할이나 소명이나 신분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신분들(예를 들면 남편, 아내, 사업가, 등)은 자연법의 확실한 구체화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복종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견해에 대한 영향은 어떤 특수한 고로의 교회적 혹은 종교적 소명을 빼앗고,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유혹하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고, 모든 유용한 세속적 소명을 적극적인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복고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가 태어날 때 받은 소명을 유지해야 한다는 개념을 종교적으로 시인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칼빈은 다른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소명의 무용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했다.
칼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표시로 그 사람의 소명을 세계적인 성공으로 유발해서, 현대 자본주의의 "작업윤리"를 위하여 놀라운 자극을 주었다. 이것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어쨌든 세속적인 일을 하나님을 위한 봉사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한 종교개혁자들은 서양 사회에 역동적인 요소를 소개했다.
현대적인 기술과 대량생산의 등장으로 일반적인 근로자들은 따분하고 단조로운 일을, 특히 주인에게 혹사당할 때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기에는 더욱 어려웠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이론서의 노동은 생산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고용주에 의해서 간주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견해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윤리학자들에게 무서운 도전이 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이 도전에 대응했고, 그 후에 미국에서 사회복음 운동의 지도자들과 교황 레오 13세와 피우스 11세가 대응했다.
역설적으로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하다고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 무관심하거나 그 불공평을 옹호했다. 이 개혁운동 이후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소명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들은 재산, 국가의 역할, 노동과 관리의 권리와 의무, 결혼, 전쟁, 그리고 관계되는 문제들에 관하여 글을 썼다. 천주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자연법의 이론으로 취급하고,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실용주의 입장과 상대적으로 한정된 공익의 입장에서 취급한다.
이처럼 천국의 제자 된 자들마다 이 도리를 본받아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성도를 많이 섬긴 자가 그 나라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천국의 원리는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원리이다.
2]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 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 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3] 어린아이 같은 믿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과 반석 위에 서는 확실한 신앙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이 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성장하는 믿음
어린아이에게는 쉬지 않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하고 자라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바로 이렇듯 성장하는 믿음이다.
과거의 믿음만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앉은뱅이 신앙이 아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성장하고 자라나는 살아 있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필요하다.
이러한 자들에게 천국이 약속된다.
(2)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가는 믿음
어린아이는 자라나면서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간다. 아니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형상을 간직하고 태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한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닮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속에 새기고 자라나야 한다.
(3) 겸손한 믿음
어린아이는 약하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그들에게는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한다. 약한 그들은 자연적으로 부모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믿음, 이러한 믿음을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요구하신다.
* 고후 12: 9-10 –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4) 순전한 믿음
어린아이는 교활하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꾸밈이 없고 솔직하다. 어린아이들은 자랑하지도 않으며, 가식적인 부분이 없다.
우리가 주님께 지녀야 할 태도는 이러한 순전함이다. 그분께는 우리의 교활한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숨기거나 감출 수 없다.
* 삼상 16: 7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분께 보여 드려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가장하거나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주님은 이러한 믿음을 원하시며 이러한 자에게 더 큰 위로로 함께 해 주신다.
(5) 사랑하는 믿음
어린아이는 결코 남에게 원한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화를 내기는 하지만 악의를 품지는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움보다는 사랑을 드러내기에 힘쓴다.
믿음은 사랑의 기초이며 사랑은 믿음의 완성이다.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사랑으로 증거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허울 좋은 믿음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의 내용인 사랑의 실천이다.
(6) 순종하는 믿음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복종한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응답하고 개선한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왜'라고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무조건적인 순종, 전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완전한 순종, 이러한 순종은 형식적인 제사를 능가하는 성도의 의무이자 축복이다.
* 삼상 15: 22-23 –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주님은 오늘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심으로 우리가 이러한 순종과 그로 말미암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7) 온유한 믿음
이삭은 자기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는 아버지의 손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이삭과 같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완악하거나 완고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온유함과 온순함으로만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온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이 온유했던 것처럼 그분은 우리 역시 온유하기를 원하신다.
* 마 11: 28-30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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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본받아야 한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본받아야 한다.
설교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본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