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증권·통신·블록체인…변하는 세상 먼저 읽었다
김형진 세종텔레콤 회장
[524호 2021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채권·증권·통신·블록체인…
변하는 세상 먼저 읽었다
김형진 세종텔레콤 회장
17세 상경, 등기소 직원으로 사회 첫 발
성공 실패 거듭하며 들풀 같은 삶
AMP 과정으로 서울대와 인연
관악경제인회 발족 기여하고 싶어
김형진(AIP동창회장) 세종텔레콤 회장의 삶은 들풀 같다.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해 외삼촌 법무사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고, 경기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습을 병행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은 뒤늦게 세종증권 회장을 하던 40대에 다녔고 서울대와는 AMP(최고경영자과정) 등 4개의 특별과정(AMP 51기·AIP 21기·ALP 8기·GLP 2기)으로 인연을 맺었다.
사업가로서의 부침도 심했다. 1981년 명동 채권시장에 뛰어들어 기반을 잡았으나 주식투자 실패로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를 반전의 계기로 활용해 전환사채 같은 신상품으로 금융시장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동아증권을 인수해 세종증권을 만들며 제도 금융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불법 회사채 영업을 이유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 결국 세종증권을 매각해야 했다. (불법 회사채 영업은 2심에서 4500만원 벌금형으로 감형됐고, 매각된 세종증권은 농협에 인수됐다.) 세종증권을 매각해 받은 돈으로 M&A를 통해 인수한 GNC와 온세텔레콤을 통합한 회사가 지금의 세종텔레콤이다. 평생 익숙했던 금융의 품을 벗어나 통신으로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평탄했다고는 할 수 없는 삶과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순간들에 관해 물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하셨는데, 사회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사법서사(현 법무사) 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신 외삼촌 소개로 동대문등기소의 사환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1977년도지요. 낮에 직장, 주말엔 방송통신고 다니면서 열심히 살았죠. 각종 민원 서류 작성법을 배웠고, 구청, 동사무소, 등기소, 은행을 들락거리며 금융, 부동산 등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1978년엔 법원 임시서기보 시험에 합격해 서울민사지방법원 성동지원에서 근무를 했지요.”
-1981년 명동 사채시장에서 첫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요?
“서울지방법원 강동등기소에서 근무 중 방위 소집 영장이 나왔어요. 국군7068부대에서 복무를 했는데, 그 부대가 행정학교와 특전사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일과 관련해서 변호사 사무실을 오갈 일이 많았어요. 그때 채권 장사들이 나눠주던 책받침이나 자 등의 홍보물을 보고, 채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후 명동의 한 채권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채권의 가치에 눈을 떴죠. 당시 명동은 증권사와 어음할인업자, 사채업자들이 모두 모이던, 대한민국 최고의 자금 조달처였어요. 스물넷에 대흥사라는 회사를 설립해 전신전화 채권과 국민주택 채권을 취급하며 꽤 큰돈을 벌었죠.”
-그 뒤 나락을 경험하셨죠.
“함께 채권업을 하던 동업자가 주식으로 큰돈 버는 것을 보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20억원의 빚을 지게 됐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할 만큼 힘들었죠. 그때 다행히 금융실명제 시행을 앞두고 돈 벌 기회가 왔습니다. 홍승기업을 설립하고 차명으로 돈을 숨겨둔 사람들의 돈을 찾아주면서 1년 만에 10억을 벌었어요. 다시 신용이 생겨서 전환사채와 채권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1997년 세종기술투자라는 창업투자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동아증권을 인수하면서 제도권 금융시장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차별화 포인트로 가장 강조한 서비스를 꼽는다면?
“세종증권으로 바꾸고, 인터넷 홈트레이딩 시스템(HTS)을 선보였죠. 이를 통해 업계 최초로 거래 수수료를 인하할 수 있었고, 신규 고객이 폭발적으로 늘었죠. 이후 투자 정보뿐 아니라 주식 매매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무선 통신 단말기를 고객에게 무료 제공하기도 했고 새로운 온라인 거래 시스템 구축이나 전국에 사이버 영업소를 설치한 것도 제일 먼저였습니다.”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만 두 번의 구속 수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혐의는 무엇이었고, 진실은 무엇이었는지요?
“당시 제가 국내 최초로 증권매매 수수료를 대폭 낮추고, 100년짜리 BW를 과도하게 발행하는 등 금융당국과의 갈등 관계에서 저의 구속의 원인이 됐습니다. IMF 당시 남들 돈을 잃을 때 돈을 번 것도 이상하게 봤고요. 첫 번째 혐의가 증권회사 면허 없이 회사채 1조7000억원 어치를 매매해 530억원 차액을 챙긴 거 였어요. 무허가 채권 거래에 증권거래법을 적용해 처벌받은 것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국가 경제 회복에 도움을 준 데다 당시 관행이었음이 인정돼 벌금형을 선고 받고 풀려났죠.
두 번째는 세종증권이 농협에 매각될 때 농협중앙회 회장에게 청탁과 함께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였습니다. 법이 바뀌어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은 사람은 금융업을 할 수 없게 돼 어쩔수 없이 세종증권을 매각하게 된 건데, 매각 과정에 우리 회사가 농협에 로비를 해서 팔았다는 협의로 법정 구속이 됐습니다. 저는 그동안 준법감시를 통해 회사를 투명하게 경영했기에 구속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법원에서 다행히 제 주장이 관철돼 무죄가 됐습니다.”
-수감생활 중 동양 고전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돈에 대한 가치관, 경영에 대한 가치관에 변화가 생긴 게 이때였다고 했는데 그 교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역’의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이란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한눈팔지 않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도덕경’을 통해 최고의 법은 자연에서 배우는 법이란 가르침을 얻었고요. 조직 경영을 할 때 짐승처럼 자연 경영을 해서 스스로 먹고살게 해야 경쟁력이 생기지 탑다운 방식으로 지시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입니다.”
대담 : 방문신(경영82-89) SBS 논설위원
-명동 채권시장이 사업가 인생 1막, 세종증권이 2막이었다면 3막은 통신사업자로의 변신인 것 같습니다. 1막, 2막과 달리 3막은 성격이 전혀 다른데요.
“세종증권 시절 사이버 거래를 하면서 통신의 중요성을 깨달은 게 있어 엔터프라이즈네트웍스(EPN)와 온세통신을 인수했습니다. 재매각을 염두에 둔 M&A였는데 그 뒤 생각이 바뀌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종텔레콤의 역점 분야는 무엇인지.
“주력 사업이던 통신에서 글로벌 협력 사업을 강화하고 있고, 블록체인 기반의 신 기술이나 디지털 전환 및 비대면 시대에 어울리는 ICT융합서비스를 확장 중입니다. 블록체인의 경우 자체 개발한 메인넷 ‘블루브릭’을 필두로 블록체인 기술을 생활에 접목한 융합서비스와 플랫폼으로 완성할 계획이고요. 이미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지역에서 특례를 받고 부동산 집합서비스 및 수익 배분 서비스(앱)인 비브릭(BBRIC)과 의료 마이데이터 서비스 앱인 비헬씨 서비스 출시도 앞두고 있습니다. 통신 분야에선 글로벌 인프라 플랫폼 기업인 디지털엣지와 데이터센터(IDC) 사업을, 글로벌 퍼블릭 클라우드 빅3사인 AWS, MS애저, 구글 등의 공식 파트너사로서 전용회선 사업을, 글로벌 네트워크 품질개선 솔루션인 ‘아리아카’ 등과도 협력 중입니다.”
-서울대에 개설된 특별과정을 4개나 다녔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외대 등 28개 과정을 수료했어요. 사업을 하다 보니 교수님을 많이 알아두는 게 좋더라고요. 서울대 AMP, AIP, ALP 과정을 통해 많은 멘토를 둔 게 큰 보람입니다.”
-삶에 부침이 있었던 만큼 특유의 경영철학 또는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큰돈은 쓸 줄 알고 투자할 줄 아는 사람에게 들어옵니다. 투자할 때는 돈을 좇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흐름을 타고 발빠르게 먼저 움직여야 하죠. 명동에서 돈을 벌 때 하나에 성공했다고 안주하지 않았어요. 국공채, 회사채, 양도성 예금증서, 전환사채로 경제의 흐름이 바뀌면 과감하게 갈아탔습니다. 돈을 모으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 줄 알아야 하고, 보이는 곳에서는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살기 어려운 사람은 호경기에도 생기고, 큰돈을 버는 사람은 불경기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현재 가상화폐 시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생 4막으로 준비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후원회장과 한중포럼 자문위원장을 하고 있어요. 두 일이 궁극적으론 대한민국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생각해 열정을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4년간 안익태 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은 경력이 눈에 띕니다.
“전임 이사장이었던 고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님과 인연으로 이사장을 맡았지요. 안익태 선생님의 악보 등 유품을 한국에 가져와 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유족들을 설득해 애국가의 저작권을 정부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안익태 작곡상 제정, 숭실대에 안익태 기념관을 마련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음악에 문외한이었는데, 4년간의 재단 일을 통해 음악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총동창회 차원에서 관악경제인회 발족을 준비 중입니다.
“이희범 회장님께서 열정을 갖고 추진 중이신 것으로 압니다. 경제인 모임이 결성되면 서울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AIP동창회장도 맡고 있는데, 총동창회에 기여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봉사할 생각입니다.”
‘세종’의 뜻과 ‘공부 경영’
세종기술투자, 세종증권, 세종캐피탈, 세종텔레콤. 이처럼 김형진 동문이 만든 회사에는 ‘세종’이라는 이름이 많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세종의 본래 뜻, 즉 세상에서 가장 큰 집(=최고의 경지)이라는 의미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은 무엇일까?
37년간의 창업 인생, 경영 인생을 김 동문은 ‘공부’라는 한 단어로 압축했다. 2019년에는 ‘공부 경영’이라는 이름의 책을 내기도 했다. 구치소 수감 시절 빠져 들었던 사기(史記)를 비롯해 사서삼경, 이황의 성학십도 등 동양 고전을 읽으며 내가 누구인지, 기업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주역에도 관심이 많다. 세종텔레콤의 로고(CI)는 태극과 음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원을 대상으로 ‘세종의 법계, 태극에 담긴 경영철학’이라는 강연을 한 적도 있다.
40세 이후 뒤늦게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서울대 특별과정 4개 등 모두 28개의 과정을 학습한 것 역시 ‘공부 경영’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집무실 입구에 걸려있는 2개의 액자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배어 있다. 자강불식(自彊不息), 알인욕 존천리(遏人慾 存天理). 쉬임없이 스스로를 강하게 하며, 욕심을 피하며 하늘의 이치에 닿는다는 뜻이다.
프로필
△1958년 전남 장흥 출생 △경기대 석사 △홍승기업 대표 △세종증권 대표이사 △세종금융지주회사 대표이사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자문위원 △전경련 국제경영원 이사 △안익태 기념재단 이사장 등 역임 △현 민화협 후원회장 △한중포럼 자문위원장 △2015년 국민훈장 동백장 (민간 통일운동 기여) △2017년제4회 한중 경제협력포럼 한중경제협력상 △2017년 자랑스러운 전남인상(경제 부문)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