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모 주교의 명상 칼럼] 마음디자인 시리즈(8)
죽음과 친하라(下)
만약 우리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오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살 것이다. /셔터스톡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대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와 아쉬움을 느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왜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들을 그토록 가슴 아프게 했던가? 왜 좀 더 사랑하며 살지 못했는가? 왜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지 못했는가? 아, 나에게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좀 더 사랑하며 보람되게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정작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에는 아무리 후회하고 아쉬움이 남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만약 우리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오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살 것이다. 대부분의 임사체험(NDE. Near Death Experience)을 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임사체험을 할 수는 없다. 만일 임사체험 같은 이런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부쩍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죽음 명상을 하면서 죽음과 친해지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 속에 잠겨 있다가 눈을 뜨면 나에게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도, 다투었던 사람들과 화해할 시간도, 또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시간도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을 상상해 보면, 자신의 삶이 더욱 새로워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소중해지며, 또한 자기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과 중요한 일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붓다가 말했다. "모든 발자국들 중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최고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들 중에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최상이니라."
죽음에 대한 명상은 어떤 무서움이나 혐오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함으로써 죽음과 친해지고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만이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명상은 궁극적 치유를 위한 명상인 것이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궁극적 한계상황이며 완전한 상실의 경험이다. 죽음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두렵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상황이기에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한계상황을 느껴서 포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죽음을 수용하는 마음의 평화에서 오는 차원이었으면 좋겠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명상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어 죽음과 친해진 사람은 “언제든 죽기에 좋은 날”이라는 생각으로 죽음이 찾아올 때 미소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쉽게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 오랜 명상 수련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경지이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만이 삶에서 진정한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기피하지 말고 죽음의 문제를 명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신앙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죽음에 대하여 철학자와 심리학자, 그리고 명상가들이 접근하는 태도와는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 죽음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니 두려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즉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니, 생명을 주신 이도 조물주 하느님이요, 생명을 거두시는 이도 조물주 하느님이니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조물주의 섭리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은 오늘 죽음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미소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죽음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 교회의 뒷마당은 대개 공동묘지인데, 묘지 입구에는 보통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 오늘은 내가 죽어서 여기 누워있지만, 내일은 당신이 죽어서 여기 눕게 되리라라는 뜻이다.
죽음과 친하라!
글 | 윤종모 주교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