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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묵상글 ( 연중 제18주일. - 창조적 허무.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 2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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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8.03 04:18
- 창조적 허무
연중 제18주일-2013
“나는 허무주의자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허무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허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데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허무를 저는 왜 좋아할까요?
물론 그 허무가 제가 좋아할 만한 허무이기 때문인데요,
제가 좋아할 만한 허무란 창조적 허무입니다.
창조적 파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던 집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공연히 집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집이 이제는 더 이상 집으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보기 흉하기에 부수는 겁니다.
그러므로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이고,
허무의 원조는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일 뿐 아니라 곧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이셨고 거기서 모든 것이 생겨났으며
생겨난 모든 것은 이 하느님이신 허무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허무란 말은 빌 허虛와 없을 무無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하느님은 무無이십니다.
그러나 무이시지만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없애시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로부터(ex nihilo)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허虛이십니다.
허이신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고,
그래서 텅 빈 분으로 늘 계시지만
비우심으로써 모든 것을 채우시고,
텅 비어 계심으로 사실은 가득 차신 분, 곧 허허실실虛虛實實이십니다.
하느님은 이러하신데 우리 인간은 허무로 되돌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허물기는커녕 더 쌓으려고 하고,
비우기는커녕 더 채우려고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재산 문제로 다투는 사람에게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탐욕貪慾이란 게 무엇입니까?
욕구하는 것을 탐하는 것인데,
비우려 하지 않기에 욕구가 생기고,
욕구를 채우려 하기에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제부터 저와 수련자들은 여름 체험 프로그램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전 수련소를 떠나 지금 전남 장성 노인 요양원에 와 있습니다.
오는 길에 저희는 전에 제가 녹음해두었던 노래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노래의 내용이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입니다.
오래간만에 이 노래를 들으며
진정 모든 것이 바람결의 먼지와 같음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진정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게 되어있고,
우리의 삶, 특히 영적인 삶이란 바로 허무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무화가 바로 창조적 허무화입니다.
창조적 허무화는 상태를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도록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것인데,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우리는 스스로 자신과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느냐,
아니면 스스로 허무로 만들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허무로 만드시느냐,
우리는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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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처방 ‘약(藥)’이다
“무지의 허무의 병(病), 탐욕의 병(病)”
“주님,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 주제와 직결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피난처가, 정주처가 될 때 비로소 한결같이 시종여일한 삶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 관련되는 여러 예를 나눕니다.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길은 정해지면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다산>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제대로 주님을 향한 길따라 자기 페이스대로, 우보천리, 호시우행의 자세로 가면 됩니다.
“인(仁)이 있는 곳은 아름답다. 사는 곳을 선택하되 스스로 인(仁)에 거하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논어>
삶은, 행복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인(仁)을, 사랑을 선택, 훈련, 습관화할 때 사필귀정 복된 행운이 뒤따릅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친지가 보내준 “백수의 등급”이란 글중 ‘2위 화백’과 ‘1위 도백’이 재미있어 나눕니다.
“화백은 화려한 백수로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0식님 이나, 아침 한끼만 먹는 일식님으로 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남정네, 아침식사후 나가면 해가진 후에 귀가하는 낮에는 집에 없는 착한 배우자, 지갑과 두귀는 열고 입을 닫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르신, 베풀지만 생색내지 않는 노신사, 변덕이 없는 바위같은 믿을 수 있는 노인, 어딜가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존경하는 멋지고 덕망있는 만인의 친구!”
참 멋지고 아름다운 극히 드문 노년인생이라 배울바 많습니다. 젊어서부터 이렇게 주님을 믿으며 지혜롭게 살았기에 이런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인생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노년인생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과거의 삶입니다.
“도백은 ‘도전하는 백수’입니다. 지나치면 주책입니다만 적당한 도전의 자세는 바람직합니다. 젊었을 때 하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으로 하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백수, 자기발전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고 봉사하고 노력하는 영원한 청춘, 영원한 현역이다.”
참 이상적인 인생 노년의 모습은 한결같이 영원한 청춘, 영원한 현역의 구도자와 수행자로 살아가는 화려한 백수, 도전하는 백수일 것입니다. 밖에서는 우아한 백조지만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의 부단한 발짓의 움직임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노력하는 자세가 참된 신앙인임을 보여줍니다. 아주 오래전 젊은 수도자들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써보라 했을 때 도발적 묘비명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생각납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바로 오늘 주일 제1독서 서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코헬렛>에 이어지는 <아가서>입니다. 이 두 성서는 과거 문제가 많다하여 성경에 편입해야 하는가 논란이 됐었다는데 성경에 속하게 됨으로 풍요로운 영적삶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 둘이 빠진 성경이었다면 참 메마르고 삭막했을 것입니다.
인간 마음의 고질병 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지의 병에 속하는 ‘허무의 병’이자 ‘탐욕의 병’입니다. 허무와 탐욕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허무해서 인간이요 탐욕을 지녀 인간입니다. 먼저 허무의 병에 대해 살펴봅니다. 때때로 젖어드는, 스며나오는 인생무상, 허무와 무의미한 존재론적 감정은 누구나의 실존적 체험일 것입니다. 코헬렛의 구구절절 고백에 공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사람에게 제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불행이다.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로다.”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적나라한 인간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 수렁에 빠지면,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속에 빠지면 참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이래서 죄악의 유혹에 빠져 존엄한 품위를 잃고 타락과 온갖 심신의 질병이니 바로 이런 상태가 지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무지의 허무와 무의미, 절망의 늪에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찌보면 이런 허무와 무의미, 절망은 하느님 구원의 초대장일 수 있습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주님, 진리와 지혜의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허무의 병에 이어 탐욕의 병입니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무지의 어리석음에 눈먼 사람은 건강과 밥과 돈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부유를 정죄하지도 않았고 가난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의 지혜로운 활용이, 지혜로운 분별이 자제와 절제가 중요합니다.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땅에 쌓고 모으는데 집중할 뿐 주위에 완전히 닫힌 자기 감옥속에 갇힌 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늘 향한 찬미와 감사의 문도 없고 이웃향한 나눔 사랑의 문도 없습니다. 하늘과 이웃과 완전 불통의 삶입니다. 천국같지만 내용은 고립단절의 지옥이자 자기감옥의 수인입니다.
탐욕을 마냥 탓할 수는 없습니다. 탐욕의 원인을 찾아보면 바로 탐욕의 깊은 중심부에 ‘두려움’이 또아리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바로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탐욕입니다. 이래서 누누이 “두려워하지 마라”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바로 두려움은 주님 향한 신망애의 결핍을 반영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은 인간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자, 내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앃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말그대로 자기도취의 착각입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임을 몰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비춰주는 거울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존재냐 소유냐? 존재는 자유롭게 하지만 소유는 노예로 만듭니다. 존재의 기쁨이요 소유의 쾌락입니다. 소유욕에서 벗어나 존재의 삶을 우선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심판선고가 준열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얻은 것은 재물이요 잃은 것은 목숨이라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비극이겠는지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복음이 일화를 대할 때 마다 인색한 부자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와 비슷한 꿈을 꾸고 난후 회개하여 재물을 나눈 스쿠르지처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도 꿈에서 깨어나 이웃과 나누는 회개의 삶으로 구원받지 않았겠나 상상해 봅니다.
허무의 병, 탐욕의 병이 치유되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만 곧장 치유에 돌입하면 완쾌될 수 있습니다. 하무와 탐욕의 무지의 병에 최고의 유일한 처방약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처방약이 바로 답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지상에 살되 천상의 그리스도안에 뿌리둔 우리의 복된 신원이기에 초연과 이탈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허무와 탐욕의 병의 치유에 유일한 처방약은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의 사랑을 깊이하는데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우리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은 저절로 시들어 죽을 것이요 물론 거짓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오늘 강론의 결론이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평생과제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참 고맙게도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허무와 탐욕의 병을 점차 치유해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며,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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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제1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는 것을 말하면서 진정한 참된 지혜를 찾도록 인도합니다.
<제2독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참된 지혜(생명)’를 가르쳐줍니다.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 안에 탐욕과 이해타산이 아닌,
사랑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진정,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 12,18)
그는 탐욕으로 눈멀었고,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으로 눈멀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느님도, 주위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형제들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과 재물만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쌓아 둔 재물에 희망을 걸면서,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 내일을 대비하는 삶이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니요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의 생명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
당연히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주인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안토니오 더블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가리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곳간에 자신의 말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생각을 많이 품은 사람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요,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곳간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주님의 말씀인가? 주님의 사랑인가?
아니면, 내 자신인가? 재물인가? 자신의 뜻인가?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고, 온전히 당신께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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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선을 열었던 태조 이성계와 조선을 여는데 함께 했던 무학대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인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은 어찌 생긴 모습이 돼지 같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생긴 모습이 부처님 같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대사에게 외모가 돼지 같다고 놀렸는데, 스님은 어찌 나를 부처님 닮았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답니다.” 이 이야기는 무학대사의 재치가 드러납니다. 이 짧은 대화는 우리 마음의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 내면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오신 교우 여러분은, 서로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룩한 부처의 눈을 가진 분들이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에 오신 분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는 길을 가다가 허름한 집을 보았습니다. 풍수에 능한 무학대사는 집의 주인에게 집의 풍수를 보니 앞으로 성공하여 큰 기와집을 지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앞으로도 이 집은 허름한 집으로 남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10년 후에 다시 찾아보니 태조 이성계의 말대로 집은 허름한 집으로 남았습니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임금님은 어찌 알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 집의 주인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서 기와집을 지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풍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마저 보는 태조 이성계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풍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좋은 터에 살아도, 하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사람은 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하느님도, 은총도 결국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집은 이 세상의 집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마음을 드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고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합니다. 땅의 일, 곧 불륜, 욕정, 탐욕, 우상 숭배 같은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 유산 문제로 중재를 요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는 어떤 부를 쌓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만 빛나는 재물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빛나는 마음입니까? 우리가 매일 먹고사는 이 땅의 집은 언젠가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집, 곧 하늘의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은 풍수보다 더 깊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 위에 지어지는 집입니다.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천 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돋아난 풀 같고, 저녁이면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소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 있는 이 순간이 곧 영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이 성체성사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예수님을 닮아,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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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삶 전부를 끌어안기! - 서른한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8월 2일 토요일- 서른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의 불완전함을 끌어안기
충만하고 의미 깊은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면모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마리아 쉬리버(Shriver)는 자신의 책 나는 마리아예요(I Am Maria)의 종결부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불완전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식별하도록 초대합니다. 다음 내용은 마리아 쉬리버의 주일 신문(Maria Shriver’s Sunday Paper),의 허락을 받아 발췌한 내용입니다:
요즘 어디를 봐도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군분투와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그러면서 저는 뭔가 다른 것, 뭔가 더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느낍니다. 취약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거의 날마다 바뀌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점이 전례 없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저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변화와 소음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자기 성찰과 깨달음, 그리고 더욱 충만한 살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낡은 규칙은 사라졌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깊이 숙고해 보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좋은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그리고 '나'를 잘못된 삶에 가두고 있는 낡은 믿음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바꿀 용기는 있는가?
인생은 우리 각자에게 다채로운 경험과 감정을 제공해 줍니다. 누구도 우리를 무너뜨릴 거라고 확신하는 힘과 사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직장을 얻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가지는 것만큼이나 그러한 사건들이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는 것은 소중한 삶의 교훈입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 즉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쉬리버는 "삶 전체를 받아들이려는"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의 시는 그녀가 쓴 "완벽한 그림"(Picture Perfect)이라는 시입니다.
References
[1] Maria Shriver, “Be Lit with Maria Shriver: An Exclusive Excerpt from ‘I Am Maria,’” Maria Shriver’s Sunday Paper, March 24, 2025. Used with permission.
[2] Maria Shriver, “Picture Perfect,” in I Am Maria (The Open Field, 2025), 128.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rtin Baron,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온화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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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무엇이 정말로 "허무"일까요?....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듣는 코헬렛서는 우리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말합니다. 코헬렛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도 자칫 그런 허무주의 혹은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삶이 정말 이렇게 암울하고 의미 없는 것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독서 내용에는 빠져 있지만 1장 14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나는 태양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
성서 학자들이 말하기를 코헬렛의 이와 같은 호소는 성경 역사 안에서 위기의 시대, 즉 스스로에게 삶에 대해 질문하면서 내면의 영을 심화하게 되는 시기의 도래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도 이런 호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과연 무엇이 "허무"일까요?! 인생 그 자체일까요??
우리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데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코헬렛이 우리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이 "허무"의 의미는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코헬렛은 인생 그 자체가 허무가 아니라 우리의 계산적 사고와 우리의 논리로 우리 삶을 보는 것에 이 "허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애쓴 것이 남의 차지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나의 노력이 노력하지도 않은 엄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을 억울해 하고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허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삶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행복했을 때는 참으로 사랑했을 때라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할 겁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러나 이런 사랑에 계산적인 논리가 개입되어 있었다면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거저 사랑받았고 또 거저 준 경험을 해왔습니다. 가장 비근한 것이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일 겁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어도 받은 사랑(불노소득)의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그리고 이외에도 우리가 거저 받은 사랑은 참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경험들을 자주 마음에 두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받았던 것보다는 손해 보았던 것을 더 많이 떠올리는지 모릅니다. 이렇듯이 계산된 논리에 의해 주고받는 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거저 받은 사랑을 더 많이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그 사람은 거저 주는 사랑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경험이 말해 주는 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받은 사랑과 받은 은총은 별로 의식하지 않기에 사랑을 주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33).
이런 사랑, 즉 '나'를 내어 주는 사랑과 '내' 것을 떼어 주는 사랑은 계산적 사고에 의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이 사랑은 삶의 풍요롭게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비결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사고와 교환의 가치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참 사랑이 빛을 잃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자기를 위한 심리적 만족이나 참 자아의 실현이 아닌 거짓 자아인 에고의 실현으로 여기는 상황인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참 사랑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것을 거저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에서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계산적 사고와 교환 가치 중심의 사고는 받은 것보다는 준 것, 혹은 이득을 본 것보다는 손해를 본 것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많이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본전 생각..." 그런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본전이라는 것이 본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보는 손해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본전 생각"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겠지요?!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산 사람은 인생의 후반기에 가서 "본전 생각"에 빠지기 보다는 본인의 삶에 주어진 은총과 선물들을 감사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삶을 풍요롭게 산다는 것은 '나'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즉 은총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구약 성서에는 ‘헤세드’(חֶסֶד)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 136편에 26번이나 나오는 단어로써 우리가 흔히 '자비'로 번역하는 단어인데, 그냥 단순히 '자비'로 번역하기에는 너무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입니다. 이는 언약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자애"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는 자기-내어줌에서 참된 충만함을 얻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내어주면서도 '내'가 오히려 충만해지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당신을 끊임없이 내어 주시기에 한없이 비워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계속해서 충만해지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헤세드’(חֶסֶד)를 우리 존재 안에 깊이 심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하느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참으로 사랑할 때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나'를 내어주더라도 여기에는 그 비워지는 곳을 채워주는 사랑, 즉 하느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질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빠져 살아가는 계산적 사고와 교환 가치 중심의 논리 때문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우리 존재를 깊숙히 바라볼 필요가 있고, 이 세상과 이웃들, 그리고 주변 모든 존재를 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이런 훈련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관상적 시각을 지니기 위한 수양이 되겠지요?! 관상이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상(觀想)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상(想)자는 서로 상(相)자 밑에 마음 심(心)이 들어가 있는 단어입니다. 생각할 상(想)자라고 말하지만 본래 이 한자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 이것이야 말로 참된 관상이겠지요?!
리처드 로어의 CAC에서 강조하는 [관상적 삶]이란 바로 이런 관상적 시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로마서 말씀을 더 깊이 숙고하는 하루로 보내면 좋겠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다시 우리의 부당함에도 이렇게 매번 그분의 생명 전체를 받아 모십니다. "주님,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고 진심 어린 고백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 고백이 정말로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충만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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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정말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강론하는 것, 신자들과의 만남, 어려운 사람을 향한 배려 등등 무엇 하나 잘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잠을 줄이고 열심히 독서했으며, 또 각종 강의를 들으면서 저를 만들어갔습니다. 시간 활용을 위해 플래너를 사용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빡빡한 하루의 연속이었고, 또 이렇게 살아야 잘 산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신학생 때와 다른 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더 중요한 미래는 이 세상에서의 미래가 아님을, 즉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나를 지웠습니다. 플래너와 일기 쓰기를 멈췄습니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빡빡하게 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당연하지만, 인간 사랑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 모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그럽고 베푸는 삶을 습관처럼 행해야 했습니다. 즉, 사랑에 성실한 제 모습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본당에 파견 나온 부제가 강론 중에 “제가 30년 뒤, 이 본당 주임 신부로 올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순간 계산합니다. 30년 후에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얼마나 시급함을 깨닫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마음의 변화와 불안, 그리고 근원적인 헛됨을 깨닫지 못하고, 재산으로 자신의 성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두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재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없으며,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을 하느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합니다. 진정한 부유함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얻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밤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요? 내 재물을 하느님 나라와 다른 이를 위해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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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 사랑, 삶.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글자 셋은 꼴만큼이나 속성도 닮았다. 저마다의 모서리와 귀퉁이를 가진 사람이 하늘처럼 둥근 사람과 합쳐 삶이 된다(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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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키엣 대주교님.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십시오
경제는 다른 나라를 제압하는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현실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셨는 데 그 해답은 예수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귀한 삶을 위하여 세상의 물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고 부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인 물질과 돈이 아니라 저 높은 세상의 가치를 모아 고귀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돈과 양식 등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재산과 옷 등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단지 외형적인 것일 뿐, 나의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이 나 자신을 만들고, 나의 가치, 내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그것이 그분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았습니다.
유다가 받은 돈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가 돈을 받는 순간 이미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옛날 가난한 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옷도 없이 허름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문을 들은 황제가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태양을 가리고 있는 당신을 피해 설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됩니다”
과연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높은 사람이고 누가 더 존중받아야 할 사람입니까?
고귀한 삶은 인격적으로 더 사람 답고, 더 훌륭한 인격을 만듭니다. 재산이란 그 사람의 삶의 질과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될 때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재산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복음에서 부유한 사람은 단지 재산을 모으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을 뿐 재산을 모으고 난 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만 보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의 물질과 현재의 세계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혼과 미래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아무리 많은 재산도 죽으면 사라지는 것으로 세상의 물질은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물질이 크기가 아니라 삶의 가치로 평가를 받습니다. 자신이 모은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 동안 행한 것은 무엇인지, 남은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하십니다.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이 아는 세상만 보지 마십시오
편협하고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물질과 세상을 초월하는 넓은 시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나라의 삶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돈과 재산은 여유로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세상에는 많은 부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돈과 재산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3. 돈이 나의 삶의 모든 것입니까? 고귀한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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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갈망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갈망의 근원에는 인간의 근본적 결핍과 존재의 충만과 확장 속에서 삶을 영위하려는 기본적 욕구가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갈망을 가졌으며 이 갈망에는 올바른 갈망과 그릇된 갈망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올바른 갈망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갈망입니다. 지혜를 얻으려는 갈망(잠언 5,19; 집회 1,20), 예루살렘에의 향수(시편 137,5), 거룩한 도시나 성전에 올라가고자 하는 원의(시편 122,1), 어떤 형태이든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시편 119,20.131.174) 등의 밑바닥에는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이 갈망은 인간 잘못된 갈망을 정화하고 집착과 위장된 가면을 벗기고 모든 기만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적인 힘을 줍니다.
그릇된 갈망은 인간으로부터 뽑아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늘 따라 다니는 근본적인 것이므로 인간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위험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잘못된 갈망의 슬픈 결과를 보여줍니다. 사막에서 굶주림에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앙의 갈망 보다 이집트의 고기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메추라기를 보며 하느님을 망각하게 됩니다(신명 8,1-5). 그리하여 그들은 이 잘못된 갈망에 희생되어 죄를 범하고 죽어갔습니다(민수 11,4.34). 그릇된 갈망에 떨어져 다윗은 밧 세바를 남편으로부터 빼앗고(2사무 11,2-4), 이 죄는 다시 많은 죄와 파멸을 초래합니다. 또한 아합은 자기의 잘못된 갈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벨의 권고에 따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써 왕조의 멸망을 초래합니다(1열왕 21장). 분별을 잃을 정도로 수산나에 대한 욕정에 불타던 두 노인은 죽음으로써 그 죄를 보상합니다(다니 13,820.62).
그릇된 갈망은 다른 말로 욕심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성서상의 의미로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다른 사람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까지 보다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그릇된 갈망을 의미합니다. 욕심은 넓은 의미로 탐욕, 곧 사악한 갈망입니다. 이 욕심의 특성은 이웃사랑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고 주로 재물과 금전 등의 물질적 재화를 끝까지 탐하는 데 있습니다.
성서는 욕심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욕심은 이웃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며 우상숭배의 행위를 조장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에서 나오는 이 우상숭배는 돈을 사랑하는 것(루카 16,14), 하느님께만 향해야 할 마음을 피조물에 향함으로써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경시하고 피조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마태 6,21-24).
그러므로 돈 욕심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 소멸된 현세의 재물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 별 가치가 없습니다(루카 6,20.24). 그러므로 우리의 갈망은 잠시 지나가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천상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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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이유는
곧 그분이 사람이 되신 이유와 같다
우리가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더 깊이 있는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이유는 곧 그분이 강생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강생의 동기는 그분의 수난과 성체성사 제정의 동기와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체성사가 단순한 부가적 발상이거나,
부차적이고 외적인 의식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에 본질적으로 결합된 신비이며,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자 심장부에 자리한 진리이다.
성체성사는 강생과 수난과 동일한 하느님의 논리에 따라 주어졌다.
그것은 이 신비들이 교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실현되도록 지속시키는 성사적 연장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영광 중에 오실 때까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강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
곧 하느님의 아들께서 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인간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셨는가?
그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고,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맺기 위함.
2. 완전한 덕의 모범을 삶으로 보여주시기 위함 —
특히 사랑, 겸손, 순명, 신앙심, 관대함, 용기를 중심으로.
3. 믿음을 통한 최고의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
4. 완전한 정의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을 바치시고,
우리의 구원 희망을 북돋아 주시기 위함.
5.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동기를 주시기 위함.
6. 성화 은총을 통해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분의 신부로 세우기 위함.
7.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높은 존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드러내기 위함 —
곧,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친교를 나누는 존엄.
8. 우리를 그리스도와 ‘혼인적 일치’로 이끄시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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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성화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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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혹시 여러분은 어떻게 은퇴를 준비하시고 있습니까? 제 생각엔 참된 은퇴 준비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 바로 해야 하는 것처럼, 죽음 이후 곧 하늘나라를 위해서도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하기에 이런 노파심에서 오늘 복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나라를 위한 투자는 30배 60배 아니, 100배의 배당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를 위한 ‘내 집 마련’, ‘종신연금’에 투자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6,19)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하는 데 우리 마음과 시선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서 아니면 재물을 향해서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재산 문제와 죽음의 문제, 오늘 복음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치 두 가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달아보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 일에 개입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12,13참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을 재물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기회로 삼으십니다. 유산 분배가 아니라 재물의 가치 자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재물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지만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도 재물 곧 돈 때문에 형제 사이를 갈라놓고 있으며, 사실 제 친형들은 실제로 돈, 보증 때문에 오래전에 갈라섰습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의 왕래마저 끊게 만드는 분열의 내막에는 대부분 재산 다툼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한평생 고생하며 모아 놓은 재산을 앞에 놓고 형제가 남만도 못한 가슴 아픈 관계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반면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잘 활용하면 이것처럼 큰 축복도 없습니다. 아무리 적은 재산 일지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쁘게 사용하면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없이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재물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믿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의지가 배제된 재물 소유는 가족과 이웃을 피눈물 나게 할 수 있고, 사방에 죽음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합니다. 또한 영원한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기보다는 세상에서의 물질적 쾌락과 안락에만 관심을 쏟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재물의 유혹이고 악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생에 대해서 오늘 제1 독서 코헬렛은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라고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3,1)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창세기 시작부터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보시니 좋았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성경은 창조의 근본적 선성善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하며, 또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물의 가치는 죽음 앞에서 상대화되며, 물질적 재물이 생명을, 더구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사례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돌연한 죽음의 소식으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맞았을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소중한가를 말해 줍니다.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노랫말처럼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란 가사를 한 번쯤 읊조리면서 죽음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 앞에서 실제적으로도 재물은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보여줍니다만, 제 친형들은 나이 들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나 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문제에 애쓸 필요가 없다거나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사실, 이 세상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그 삶이 우리에게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영원히 산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절실하거나 절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한하고 짧은 삶이기에, 이 삶이 의미와 보람 그리고 행복과 축복으로 넘치고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의 핵심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12,21) 핵심은 영원히 살 것처럼 현세 재물에 연연하고 집착하여 현세적인 창고를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사는 것이 영원히 참된 생명의 충만함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삶을 살지 않도록 바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충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생의 가치 기준을 잘못 세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명심하고 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은퇴 준비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 바로!, 라는 어느 은퇴 설계 전문가의 말처럼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미래 준비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어느 날 돈이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돈의 간곡하고 진솔한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 사람아 보아라. 너는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너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네가 내 것이다. 나는 아주 쉽게 너를 지배할 수 있다. 우선 너는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면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만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교회도.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지만,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난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에게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만난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단다.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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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는 하느님의 초대장
탈무드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늘 세 친구가 있단다.
제일 친한 건 돈인데 매일 만나지만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별 볼일 없이 떠난다나.
그 다음이 가족이라지만 그놈의 돈 때문에 평소에는 자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나,
죽음에는 그 누구보다 그렇게 슬퍼하면서 무덤까지만 배웅을 한단다.
마지막은 선행이라는 친구인데,
그와는 언제 어디서나 돈과 가족 때문에 만나기가 좀처럼 어렵지만,
마지막 하느님께 가는 길에는 꼭 함께하는 이다.
지금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뜬소문으로 취급하기는 좀 그런 것 같지만,
돈이 있어야 삶이 제대로 보장된다는 이들이 참 많다.
그러나 돈으로 보장되지 않는 게 많을뿐더러 그것으로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쩜 참된 삶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보장될 게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위의 세 친구에서 찾자.
사실 우리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며,
죽을 때는 모두 내려놓고 그분께로 가야 한다.
그래서 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한다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다.
그러니 마지막 그날에는 돈도 가족도 다 그분께 돌려 드려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탐욕을 가진 이들에게 이르셨다.
“어떤 부유한 이가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곳간들을 더 크게 지어 거기에 두자.’
그리고 ′자, 여러 해 쓸 것을 쌓았으니, 먹고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자신만을 위하고 하느님께 부유하지 못한 이가 바로 이렇다.”‘
오로지 자기 생명을 유지하려고 재물을 모으는 행위는 정말 바보짓이다.
주님만이 참된 생명과 재산을 주실 수 있기에 그렇다.
모은 재물은 최대한 모두 어렵게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로 나누어야 한다.
모은 재물에 행복이 있는 양 생각한다면,
그는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정녕 불쌍한 이다.
이는 재물을 삶의 첫 자리에 앉히려고 바장이는 이에 대한 큰 경각심이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떤 것이 지나치지 않는 욕심일까?
그 기준은 감사를 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탐욕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감사는커녕 오로지 끝없는 부족감을 탓하며 살기에, 모모한 탐욕이 생기는 거다.
우리는 공수래공수거를 늘 생각하면서, 그저 주심에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자.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이 감사만이, 모든 탐욕을 이기는 첫걸음일 게다.
어쩜 많은 소출을 거두어 보관만 한 부유한 이는 오로지 재물에만 관심을 둔 이 일게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께 감사는 물론 관심마저 두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물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은 채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은 죄인이다.
그는 재물을 우상으로 섬겼고 착취밖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이다.
반면에 하느님께는 마음이 열려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풍요함이나 부족함을 나눌 줄 아는 이는,
진정 하느님 앞에서는 언제나 부자이고 행복한 이다.
이처럼 하느님 안에서의 삶을 통한 재산의 사용과 나눔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은 분열의 도구가 아닌,
하느님 안에서 나눔으로써 친교를 이루어 가는 데 의미가 있기에.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가 되도록 늘 초대받았다.
따라서 그분 선물인 재산을 움켜쥐지 않고 손을 펴 가난한 이들과 나눌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부를 가질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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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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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같은 그물 안에
연중 제18주일
“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루카 12, 15)
유산보다 깊은 갈망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겉으로는 정의로운 요청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십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예수님은 단순한 분쟁 조정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정당한 몫’이란 말 아래 숨겨진,
'더 가져야 한다'는 집착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마음
예수님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한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고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는 자기 계획 속에만 갇혀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도, 이웃도 없습니다.
그는 생명을 소유의 연장선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진정한 생명은 소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숨결조차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함이란?
복음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이 말씀의 중심은 “하느님 앞에서”라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묻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너는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존재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삶
오늘 복음은 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가?”
“그 쌓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탐욕은 우리를 닫히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를 열고 연결시킵니다.
· 더 많이 가지려는 삶에서 → 더 깊이 나누는 삶으로
· 내 안에 쌓는 곳간에서 → 하느님 앞에 드리는 그릇으로
· “내가 더 있어야 돼”라는 불안에서 →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어”라는 믿음으로
진짜 부유함은 ‘쌓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안에 있습니다.
그 비움 속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와 존재의 본모습을 회복합니다.
주님,
자꾸만 소유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저의 마음을
주님의 진리로 바로잡아 주소서.
더 많은 것을 갖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오늘 저의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기를 원합니다.
탐욕이 아닌 신뢰로,
불안이 아닌 감사로
존재의 자리를 다시 세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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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떤 부유한 사람이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모아 두고 말합니다.
'이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야겠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잘못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동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서도 부유하다'는 것은
어떤 뜻인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이 부유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재산을 누려야하기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신의 재산으로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어 갑니다.
아프면 돈으로 치료받고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충족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이 필요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즉 돈이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돈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능력으로,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 한계가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한계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지고 올지 생각해 봅니다.
한계가 없는 존재가 되면 행복하다는 생각은
한계를 지닌 지금의 모습은 불행하다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마냥 불행하기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한계가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에도
만족과 행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행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손에 쥐는 순간
우리는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계가 주는 고통이 있어도
나의 삶을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갈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돈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지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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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3. 연중 제18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영희”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주로 오후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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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에서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엇인가? - 김종업 로마노
| 오늘 미사에서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엇인가? 제2독서(콜로3,1-5.9-11)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 그러므로- 앞장(2,20-23)으로 가보자 (콜로2,20-23) 20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뱀의 유혹을 먹은 선악의 영)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여, 21 “손대지 마라, 맛보지 마라, 만지지 마라.” 합니까? 22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23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 우리는 하늘의 의, 지혜, 안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 세례로 세상(죄, 심판)에 대해 죽은 사람들이다. (로마6,4-6.8)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否認, 자기버림)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아멘) 2그러므로~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이미 죽었고’- 完了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 나쁜 욕망, 탐욕?, 좋은 욕망, 탐욕도 있나?- 있다. 현세의 것을 구하는 것이 나쁜 탐욕이며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그래서 현세의 것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법규와 지혜의 가르침에 따른 자발적인 신심, 겸손을 진리로 말한다면 거짓말이라 한 것이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옛 계약)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새 계약)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끊임없이 믿어야 한다. 곧 지속적으로 늘 말씀 안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마음에 지켜야, 간직해야 된다는 말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 그리스도 밖에 서서, 그리스도 밖의 것을 구하는 모든 것이 죽음이요 헛되고 헛된 탐욕이다. 제1독서(코헬2,21-23) 2,21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세상, 후손)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2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3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시련, 고난)에도 그의 마음은 쉴(안식)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복음(루카12,13-15)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 아버지의 유산을 형제와 나누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런데 동생을 나무라는 듯 말씀하신다. 왜?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용서를 위한 중재자, 구원자로 오신 분이시다. 곧 세상 재물을 중재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말씀하신 것이다. 현세의 것에 매이는 그 탐욕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15ㄱ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 탐욕(에삐뚜미아) 에삐-강조하다. 뚜미아(두모스)- 희생제사에서 나온 말, 그러니까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며 희생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것이 탐욕(貪慾),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루가22,14-16.20)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에삐뚜미아)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 옛 계약의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것, 나쁜 탐욕이다. 곧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영원한 쉼, 안식을 누리는 새 인간으로 새 창조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좋은 욕망, 탐욕이다. 예전에 나는 미사를 내 뜻, 소원, 의로움을 위한 제사로 드렸다. 나쁜 욕망,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미사를, 예수님을 우상으로 섬긴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또 성모상, 요셉상 앞에서 내 뜻, 소원을 위해 간절히 바라며 열심히 기도했기에 우상적 신앙을 산 것이다. 말씀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지혜,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레32,33-34) 33 그들은 나에게 얼굴이 아니라 등을 돌렸다. 내가 그들을 줄곧 가르쳤건만, 그들은 순종하지도 훈계를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34 오히려 그들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집(성전) 안에 *역겨운 것(신상-탈출20,4)들을 세워 그 집을 더럽혔다. = 하느님의 계시의 영,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갈 수도 없는 구원의 길이다. (1코린2,4-13참조)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혼자가 아님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세상의 것을 탐했던 욕망의 나를 죽이고 다시 말씀 안에서 올바른 기도와 신앙으로 하늘나라를 욕망, 탐하는 나로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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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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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04
8월3일 [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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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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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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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세상을 떠난 이후, 우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만일 이렇다면, 주님 앞에, 후손들 앞에 얼마나 창피할 것입니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로 수전노였어. 그저 뭐든 태산처럼 쌓을 줄만 알았지, 10원 한 푼 나누지를 않았지. 그 천문학적 재산, 어려운 사람들 위해 좀 나눴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을 때, 단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그 많은 돈 놔두고 떠나려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고 죽었을까?”
반대로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큰 영예이겠습니까? “그분은 정말이지 의롭고 존경받은 부자였어. 열심히, 정직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기업을 운영한 경영자로서 모델이었지. 피 말리는 경쟁 사회, 하루 앞을 예측 못 할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회사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늘 연구하시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지. 직원들과 함께 창출한 이윤을 통 크게 나눌 줄도 아셨고, 직원 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어. 연말연시나 명절이면, 남모르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기부에도 열심이셨지.”
오늘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큰 병폐 중에 하나가 부의 극단적 불균형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나라보다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편중되어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분위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 위화감과 좌절감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적 재산을 축적한 이 땅의 재벌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와 사고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의 축척 과정에서 건전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들이나 소규모 영세업자들을 배려하는 상생 정신의 결핍이 눈에 띕니다.
이런 사회 현실 앞에 우리 교회에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입니다.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일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묶여있지 않고, 활발히 돌아다니게 하는 다리 역할이 우리의 몫입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극단적 생활고 속에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어려운 처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구체적 지원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부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야겠습니다. 부의 올바른 사용이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려줘야겠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부를 복음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해줘야겠습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부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한 부자에 대한 비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는 엄청난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나 봅니다. 얼마나 큰 풍작이었던지, 수확물을 저장해둘 창고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팔고 또 팔아 엄청난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흡족해진 부자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절)
그러나 부자의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부자가 재물의 안정적 기반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순간, 그 안정성을 순식간에 허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재물과 곡식과 창고를 그냥 내버려 둔 채, 빈손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오늘 우리 시대 부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비유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안전은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대상을 망각하고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큰 어리석음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시며 그분 품 안에 머무는 것만이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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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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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는 이미 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
인류의 가장 끔찍한 고통을 끝내기 위한 발명이, 어째서 발명가들에게는 지옥의 시작이 되었을까요?
이 비극은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인류는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를 이용한 공개 수술에 성공하며 환호했지만, 그 영광의 무대 뒤편에서는 세 남자의 인생이 파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치과의사 웰스, 그의 제자 모턴, 그리고 또 다른 스승 잭슨. 이 세 사람은 서로가 마취술의 최초 발명가라고 주장하며, 탐욕이라는 광기가 빚어낸 지옥도를 펼쳤습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소송을 걸고, 명예를 짓밟았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웰스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모턴은 특허 소송에 모든 것을 탕진한 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며, 잭슨은 두 사람의 비극을 지켜보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할 기술이, 정작 당사자들은 가장 끔찍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의 맨얼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남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유산을 나눠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왜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하고 얼굴을 굳히며 말씀하셨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한마디 말속에 숨겨진, 저 세 사람의 비극으로 향하는 길을 똑똑히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탐욕의 길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제가 아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한 봉지 사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제가 “아빠도 하나만 먹어보자” 하니 아이가 싫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럼 동생이랑 하나씩 나눠 먹으렴” 하니, 그것도 싫다고 자기 품에 꼭 껴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다음에 또 과자를 사 주고 싶을까요? 저라도 삐져서 다음엔 국물도 없을 겁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 재능, 재물을 자기 것인 양 꼭 껴안고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색한 사람은, 결국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스타 강사 김미경 씨가 방송 ‘어쩌다 어른’에 나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강사였던 그녀는, 석사 논문 표절 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강의가 끊기고 완전히 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녀는 그 끝없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삶이 오직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만을 갈구하는 ‘자아의 노예’로 살아온 삶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침묵 속에서, 자기 안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 어쩌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망해야 한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꼭 그렇게 인생의 급소를 맞고 쓰러져야만, 비로소 탐욕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망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직접 망해보는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이미 에덴 밖, 즉 ‘영적 파산 상태’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데이터가 이미 내장되어 있습니다. 굳이 새로 망할 필요 없이, 과거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어릴 적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훔치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죄책감의 고통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저를 도둑질로부터 지켜줍니다. 또래보다 일찍 담배를 피웠지만, 남의 것을 훔쳐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모두 이런 ‘작은 실패’와 ‘양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물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오늘 밤 내가 죽는다’는 생각의 예방주사를 매일 맞는 것입니다. 백신은 소량의 약화된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 주입해서, 진짜 바이러스가 왔을 때 이겨낼 항체를 만들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조금 불편하고 거북한 주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주사는,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우리 영혼이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백신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 예방주사를 맞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병을 온몸으로 앓아야 했습니다. 수도 한양이 불타고,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자신은 비에 젖어 의주로 도망치는, 나라의 ‘죽음’이라는 바닥을 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이순신이라는 보물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경이 없으면 나라도 없소. 모든 것이 경에게 달려 있소.” 자신의 권력이라는 창고가 완전히 파산하고 나서야, 그는 신뢰라는 진짜 부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매일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이 잠을 자다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잠드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나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할까 봐서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저는 이상한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후회 없이 행복하게 하루를 살자.’ 그렇게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기 시작하자, 역설적이게도 제 삶은 그 어떤 때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워졌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오늘 밤이면 다 놓고 가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교회는 이 위대한 지혜를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성무일도 끝기도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기도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기도가 아니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가장 간절한 기도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고백하며, 오늘의 모든 집착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는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이번 주, 우리의 실천 사항은 이것입니다. 매일 밤, 그 작은 죽음인 잠자리에 들기 전, 이 기도를 꼭 한 번씩 바칩시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탐욕과 걱정들을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백신을 매일 맞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닌, 하느님 앞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사람으로 매일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시어 저희 마음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시편 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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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선을 열었던 태조 이성계와 조선을 여는데 함께 했던 무학대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인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은 어찌 생긴 모습이 돼지 같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생긴 모습이 부처님 같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대사에게 외모가 돼지 같다고 놀렸는데, 스님은 어찌 나를 부처님 닮았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답니다.” 이 이야기는 무학대사의 재치가 드러납니다. 이 짧은 대화는 우리 마음의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 내면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오신 교우 여러분은, 서로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룩한 부처의 눈을 가진 분들이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에 오신 분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는 길을 가다가 허름한 집을 보았습니다. 풍수에 능한 무학대사는 집의 주인에게 집의 풍수를 보니 앞으로 성공하여 큰 기와집을 지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앞으로도 이 집은 허름한 집으로 남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10년 후에 다시 찾아보니 태조 이성계의 말대로 집은 허름한 집으로 남았습니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임금님은 어찌 알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 집의 주인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서 기와집을 지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풍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마저 보는 태조 이성계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풍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좋은 터에 살아도, 하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사람은 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하느님도, 은총도 결국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집은 이 세상의 집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마음을 드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고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합니다. 땅의 일, 곧 불륜, 욕정, 탐욕, 우상 숭배 같은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 유산 문제로 중재를 요청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는 어떤 부를 쌓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만 빛나는 재물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빛나는 마음입니까? 우리가 매일 먹고사는 이 땅의 집은 언젠가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집, 곧 하늘의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은 풍수보다 더 깊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 위에 지어지는 집입니다.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천 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돋아난 풀 같고, 저녁이면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소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 있는 이 순간이 곧 영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이 성체성사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예수님을 닮아,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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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이 다루는 주제는 ‘선택’과 ‘집중’입니다. 코헬렛의 상징적 표현인 “허무로다, 허무!”는 제1독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단순한 허무주의, 절대적 염세주의, 무정부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같은 시대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지혜에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초대하는 듯합니다.
제2독서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나타납니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잡다한 요소를 섞어 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종교 혼합 주의 현실 앞에서 바오로 사도가 단호하게 외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콜로 3,11) 이는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라는 형제적 격려라고 풀이됩니다.
오늘 복음은 유산 상속으로 일어난 논쟁에 관하여 탐욕을 경계하라는 예수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러고는 재화는 마땅히 하느님 중심으로 쓰여야 하며 그분께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12,21)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자신을 위하여 재화를 쓰기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데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무엇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나요? 일상에서 우리 마음은 어디에 머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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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반향 되고 있다. 허무다(hèbhel)라는 단어가 코헬렛에 22번이 나온다. 그 본래 의미는 수증기, 숨을 의미하여 폐에서 콧구멍과 입에 이르자마자 없어지는 숨처럼 단기적이고 단명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코헬렛은 말한다. 돈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일에 대한 수고와 걱정과 불안에 대해 돈이 과연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느냐고! 그러므로 돈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보통 두 가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의 재화를 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고뇌를 행복과 평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즉 부자가 된 그는 이제 그렇게 애써 모은 재화를 지키기 위해 밤에도 마음을 죄어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의 내용은 세상의 것들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고통과 실망 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복된 가난한 이들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화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재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첫째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이기주의라는 악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를 치료함으로써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산의 공평한 심판자처럼 행동하려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청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필요한 가르침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재화와는 관계가 없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가진 재산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소중하게 여긴 그 재화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잃게 한다. 즉 애덕과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재화를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존재할 수 없고 그의 재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모습이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생명과 재산이 그에게는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였던 그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고 있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시편 14,1) 잘못된 근거에 자신의 신뢰심을 두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후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이 부자는 아둔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는 어리석고 가난한 자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1절)
묵시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3,17). 세상에서 재화와 재물에 집착하여 거기에 매여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재화와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섬김을 받게 되니 그것이 우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에서 벗어나 올바로 주님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신뢰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화나 재물에 매여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물이나 재화에 집착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우상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재화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재물이 그것을 만드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올바로 사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2-3) 하느님 앞에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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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와 너>
루카 12,13-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와 너>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참으로 내가
되려
나의 것을
버립니다
오롯이 너를
품으려
너의 것을
잊습니다
네가 너이게
하려
내가 나로
있습니다
나의 것 아닌 나
너의 것 아닌 너
오롯이 있으나
서로 스미어
서로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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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것’만 있을 뿐입니다.>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ㄴ-21)
1)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는 말씀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루카 9,6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세속의 일은 세속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라는 말씀의 ‘너희’ 라는 말에는 예수님께 온 ‘어떤 사람’도 포함되기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 일은, ‘억울함’을 호소한 일이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형제가 모두 탐욕에 사로잡혀서 갈등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세속의 재물을 모두 이 세상에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사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는, “자신만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면서”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인색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은 곧 ‘탐욕’이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3)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1)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야고 4,14). 어리석은 부자는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늘 밤까지’, 즉 ‘몇 시간’입니다.
(2) 하느님은 ‘인간 목숨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목숨을 받아서 허락된 시간 동안만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고 하시면, 인간은 즉시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 일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3)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얻은 재물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내가 수확한 것’,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의 주인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자식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4)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부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 몇 시간은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가장 큰 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없이 혼자서만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말은, 사랑이 없으면 구원도,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한다는 뜻이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사랑 실천을 안 했더라도, 열심히 믿고 착하게 살고 죄를 안 지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 없는 선은 선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마태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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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부자 되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받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욕심은 만족시켜 주면 시켜줄수록 더해집니다. 더 많이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참으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푸는 마음은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만족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또 그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애착하고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그들은 세상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들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꼭 들어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창세기26장 12절-13절에 보면 “이사악은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수확을 백배나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수단이 됩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언3,9) 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는 큰 부자, 하늘의 부자가 되길 바랍니다.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재산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13장 6-7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천막이 넘쳐 났지만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재산분배문제로 다툼을 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없으면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52,7-9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천막에서 잡아채고 끌어내시어 생명의 땅에서 너를 없애 버리시리라. 의인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 보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을 믿으며 악행으로 제가 강하다고 여기던 사람!”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9-10).
집회서에서는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집회31,5-6)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복권사상 최고액인 3억1천 490만 달러(약3천억 원)가 걸린 복권에 당첨되었던 미국인 사업가 잭 휘태커(60)가 약 5년 만에 완전 빈 털털이로 전락했다고 언론이 보도하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행운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그는 부도수표 발행으로 기소되었고, 도박에 손을 대어 당첨금을 탕진하였으며 음주운전 혐의, 술집 지배인 폭행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차량과 사업체가 강도질을 당하는 등 그야말로 인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실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 법”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굴러 들어온 일확천금이 그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재물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지게 됩니다. 더더욱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루카 12,15)
그러므로 세상의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그러므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게 하시고(마태6,19-20).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결코, 살지 않게 하소서.” 아멘.
여러분, 부자 되십시오!
그러나 세상의 부자이기에 앞서 하느님 앞에서 큰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재물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 재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생명, 구원은 재산이나 다른 것에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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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동겸 베드로 신부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
오늘 복음은 형에게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소출을 위해 더 큰 곳간 을 지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온 사람은 아버지의 소유인 유산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몫을 주장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온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주시고 돌보아 주심을 잊고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 다는 교만에 빠져 착각을 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아버지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탐욕과 욕심에 빠진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장 크게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아 주심을 깨닫고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단순히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공동선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올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탐욕과 욕심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삶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이르기 위한 공과 덕을 쌓는 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수 있는 시선과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줄 것이고 또한 이를 우리의 삶의 자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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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강동금 베드로 신부님]
<어리석은 부자>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느 해 추석 무렵 라디오 뉴스가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소식이었습니다. 추석에 집에 온 남동생이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투다가 누나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부모를 찾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상당히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루카 12,13).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러한 잡다한 문제를 재판하고 중재하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재산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재산이 전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재산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이 화를 불러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많은 곡식과 재물을 새로 지은 창고에 쌓아 놓고 안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밤에 그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고 그러면 그의 재산이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이냐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2,17-19)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재산을 모은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그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대로 그 재산을 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재산을 주신 하느님께 먼저 바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창고에 보물을 쌓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늘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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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혁 루카 신부님]
<“만족하십시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돈과 재물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진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요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욕망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에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17개국 선진국 국민들이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그밖에 직업, 건강, 신앙, 자연, 사회, 친구, 여행, 취미생활 등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응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도, 건강도, 직업도,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응답한 것은 물질적 풍요, 바로 ‘돈’이었습니다. 한국인 응답자의 62%가 오직 돈 하나만을 선택했습니다. 돈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소중한 것’이라는 응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은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여기서 탐욕이라는 이 말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뜻합니다.
돈이 있어야 가족도 돌보고, 건강도 챙기고,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지만 틀렸습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곧 탐욕에 물들면 이러한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욕망은 분별력을 잃게 만들고, 그릇된 가치관을 만들어내며, 진짜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욕을 경계하고, 탐욕을 없애기 위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바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지 마시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족할 줄 아는 것도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키워 나가십시오. 그러면 탐욕에서 벗어나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 때 행복이라는 삶도 함께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의 삶은 결코 허무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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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정말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강론하는 것, 신자들과의 만남, 어려운 사람을 향한 배려 등등 무엇 하나 잘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잠을 줄이고 열심히 독서했으며, 또 각종 강의를 들으면서 저를 만들어갔습니다. 시간 활용을 위해 플래너를 사용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빡빡한 하루의 연속이었고, 또 이렇게 살아야 잘 산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신학생 때와 다른 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더 중요한 미래는 이 세상에서의 미래가 아님을, 즉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나를 지웠습니다. 플래너와 일기 쓰기를 멈췄습니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빡빡하게 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당연하지만, 인간 사랑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 모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그럽고 베푸는 삶을 습관처럼 행해야 했습니다. 즉, 사랑에 성실한 제 모습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본당에 파견 나온 부제가 강론 중에 “제가 30년 뒤, 이 본당 주임 신부로 올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순간 계산합니다. 30년 후에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얼마나 시급함을 깨닫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마음의 변화와 불안, 그리고 근원적인 헛됨을 깨닫지 못하고, 재산으로 자신의 성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두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재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없으며,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을 하느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합니다. 진정한 부유함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얻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밤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요? 내 재물을 하느님 나라와 다른 이를 위해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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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어떤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인디언 부족에서 성년식을 치를 나이가 된 아이들은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가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규칙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붙는데, 그 옥수수 밭에서 자기가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옥수수를 하나 가져와야 한다는 것. 옥수수는 단 한번, 단 하나만 딸 수 있으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옥수수 밭을 가로지를 때는 한 번 지나온 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시험의 결과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고 별 볼일 없는 옥수수를 가져옵니다. 옥수수 밭을 가로지르면서 좋은 옥수수들을 많이 발견하지만 더 좋은 게 있겠지, 조금 더 큰 게 있겠지 하면서 지나치다보면 어느새 출구에 다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출구 근처에서 그럴듯한 것을 가져오게 되는데, 보통보다도 못한 옥수수지만 정신없이 가져오느라 이제 살필 시간도 없습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더 좋은 것을 찾으려 욕심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고자 이와 같은 체험을 성년식에 통과의례로 만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지나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가장 좋은 것인지 모르고 지나치기도 하고, 혹은 지금 누리고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당장 주어진 좋은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더러 유산을 많이 남겨달라고 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며 어리석은 부유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앞으로 쉬면서 즐기고자 하지만 그의 목숨은 바로 그날 밤까지였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언제까지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생애는 아직 많이 남아있을 것만 같고 그러다 보니 죽음 이후의 세계는 종종 의식하지 못하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잊어버리고 지나칩니다.
이에 대해 오늘 제 1독서에서 코헬렛은 지혜와 지식, 재주는 모두 죽음 이후에는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우리 개인의 지혜 혹은 재주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며 유용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현세적인 것에만 투자할 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할 때 그것은 그대로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늘나라에 쌓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이켜 보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오늘 제2독서에서,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에 돈과 명예, 사랑을 단순히 “목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향한 “목적의 도구”로써 잘 사용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단순히 이 세상의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처한 상황,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들. 그럴 듯해 보일 수도 있고 탐탁치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뒤늦게 평가해봐야 늦습니다. 우리에게 다음 기회는 없고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생은, 하루하루가 다시 재활용되지 않는 완벽한 일회용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미사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하늘 나라에 무엇을 쌓아두고 있는가? 사랑을 수확할 겨를 없이 너무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 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을지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진리를 담아 우리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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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는 것을 말하면서 진정한 참된 지혜를 찾도록 인도합니다.
제2독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참된 지혜(생명)’를 가르쳐줍니다.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 안에 탐욕과 이해타산이 아닌, 사랑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진정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 12,18)
그는 탐욕으로 눈 멀었고,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으로 눈 멀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느님도, 주위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형제들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과 재물만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쌓아 둔 재물에 희망을 걸면서,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 내일을 대비하는 삶이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니요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의 생명은 무엇에 달려 있는가? 당연히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그리하여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주인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안토니오 더블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가리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곳간에 자신의 말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생각을 많이 품은 사람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요,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곳간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주님의 말씀인가? 주님의 사랑인가? 아니면, 내 자신인가? 재물인가? 자신의 뜻인가?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고, 온전히 당신께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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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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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삶의 가치는
재산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더 안전하고
더 많이 쌓아야
더 성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보험이나 계좌 잔고,
소유한 물건의 개수나
집의 크기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생명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습니다.
재산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은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직면하는
사람은 비로소
삶의 본질을
바라봅니다.
재산은
때로 사람을
보호하는 듯하지만,
종종 사람을
구속하고
속박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진실하게
관계맺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나눔 속에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삶을 살아갑시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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