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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年(년) 壬辰年(임진년) 壬辰倭亂(임진왜란) 때는 巨濟島(거제도) 場門浦(장문포)의 가 倭敵(왜적)의 巢窟(소굴)이 되었다는, 이승철이의 熱辯(열변)을 꼭 들어야 합니다. 長木面民(장목면민) 여러분 !!!!!💢💢
💢💢壬辰倭亂(임진왜란) 때는 巨濟島(거제도) 場門浦(장문포)의 가 倭敵(왜적)의 巢窟(소굴)이 되었다는, 이승철이의 熱辯(열변)은 맞았다. 그런데 왜? 2011年(년) 11月(월)에 發行(발행)한 長木面誌(장목면지)는 場門浦(장문포)가 李英男(이영남) 將軍(장군)과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場門浦(장문포)에서 戰略(전략)을 宿意(숙의)했던 場所(장소)라고 長木面(장목면) 客舍(객사)에 廣告(광고) 하고 있을 까? 참으로 怪異(괴이)한 일이다. 長木面民(장목면민)들은 歷史(역사)를 모르는 얼간이들만이 살고 있는가? 間或(간혹) 韓國(한국)을 다녀온 韓國人(한국인)들 中(중)에는 巨濟島(거제도)를 갔다온 先後輩(선후배)들이 자랑삼아 故鄕(고향) 長木面(장목면) 客舍(객사) 이야기를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歷史(역사)는 事實(사실)이 아닌데도 事實(사실)이라고, 떠들어 데는 되는 것으로 보아 더욱 더 寒心(한심)하다. 왜? 長木面民(장목면민)들은 歷史(역사)에 없는 이야기를 記錄(기록)해 놓고 宣傳(선전) 할까?????ㅉ..ㅉ..ㅉ.. Oh! My God!입니다............💢💢
💢KBS 韓國事典(한국사전) – 선비, 칼을 뽑다, 紅衣將軍(홍의장군)💢
💢💢郭再祐(곽재우) / KBS 2007年(년)15日(일) 放送(방송)💢💢
💢💢곽재우(郭再祐)💢💢
💢1552년 9월 16일(음력 8월 28일)~1617년 5월 14일(음력 4월 10일)💢
곽재우(郭再祐: 1552年(년) 9月(월) 16日(일)(陰曆(음력) 8月(월) 28日(일)) ~ 1617年(년) 5月(월) 14日(일)(陰曆(음력) 4月(월) 10日(일)는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 政治人(정치인), 軍人(군인)으로 壬辰倭亂(임진왜란)에서 크게 活躍(활약)한 義兵將(의병장)이다. 34歲(세) 때 文科大科(문과대과)에 及第(급제)하였으나, 宣祖(선조)를 批判(비판)한 答案誌(답안지)로 宣祖(선조)의 命(명)에 依(의)해 合格(합격)이 取消(취소)되고, 以後(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40歲(세)가 되도록 故鄕(고향)에서 學問(학문)과 낚시질로 歲月(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592年(년)(宣祖(선조) 25年(년) 4月(월)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고 官軍(관군)이 倭軍(왜군)에게 全滅當(전멸당)하자, 當時(당시) 故鄕(고향)인 慶南(경남) 宜寧(의령)에서 스스로 義兵(의병)을 組織(조직), 붉은 緋緞(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活動(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別名(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勇猛性(용맹성)에 놀란 倭兵(왜병)들은 郭再祐(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勝利(승리)한 功勞(공로)로 察訪(찰방), 助防將(조방장) 等(등)을 지낸뒤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歷任(역임)했다.
그러나 金德齡(김덕령) 等(등)의 義兵將(의병장)이 誣告(무고)로 犠牲(희생)되는 것과 永昌大君(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번 辭退(사퇴)하였다. 黨色(당색)으로는 北人(북인)이었으나 光海君(광해군) 執權期(집권기)에도 여러 번 官職(관직)을 辭退(사퇴)하거나 辭讓(사양)하였다. 仁穆大妃(인목대비) 廢母論(폐모론)에 이어 1613年(년)(光海君(광해군) 5年(년) 永昌大君(영창대군)에 對(대)한 流配刑(유배형) 與論(여론)이 나타나자 永昌大君(영창대군)을 辯護(변호)하는 上疏(상소)를 올리고 落鄕(낙향), 以後(이후) 昌寧(창녕)에 隱居(은거)하였다. 本貫(본관)은 현풍(現(현) 대구광역시 達城君(달성군) 玄風邑(현풍읍)으로, 字(자)는 계수(季綬), 號(호)는 망우당(忘憂堂), 諡號(시호)는 충익(忠翼)이다.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의령) 出身(출신)으로 黃海道(황해도) 觀察使(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門人(문인)이자 弟子(제자)이며, 그의 外孫女(외손녀)사위이다.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同門(동문)이자 同壻間(동서간)이 되었다. 戰亂(전란) 中(중) 스스로 天降紅衣將軍(천강홍의장군)을 自處(자처)하였으며 戰場(전장)에 나설 때 붉은 옷을 입고 白馬(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의 이름을 모르던 將卒(장졸)과 百姓(백성)들로부터 紅衣將軍(홍의장군)이라 불렸다.
1 生涯(생애) ~ 生涯初盤(생애초반).
1.2 壬辰倭亂期(임진왜란기) 義兵將(의병장) 活動(활동).
1.2.2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
7 郭再祐(곽재우)의 삶을 要約(요약)한 사위 성이도(成以道)의 만사(輓詞)
生涯(생애) ~ 生涯初盤(생애초반) ~ 出生(출생).
郭再祐(곽재우)는 慶尙道(경상도) 의령(宜寧) 出身(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死後(사후) 贈(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兼(겸) 經筵參贊官(경연참찬관)에 追贈(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孫子(손자)이고, 수(守) 黃海道(황해도) 觀察使(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晉州姜氏(진주강씨)의 셋째 아들로 柳谷面(유곡면) 世干里(세간리)에서 태어났다. 親兄弟(친형제)로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名(명), 繼母(계모) 許氏(허씨)에게서는 異腹同生(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異腹(이복) 누이 1名(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先祖(선조)는 宋(송)나라 出身(출신) 곽경(郭鏡, 1117年(년) - 1179年(년)으로 宋(송)나라 八學士(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高麗(고려)에 東來(동래)한 歸化人(귀화인)이었다. 郭鏡(곽경)은 1138年(년) 高麗(고려)에서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를 歷任(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封君(봉군)되었다. 5代祖(대조) 곽안방(郭安邦)은 世祖朝(세조조)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내고, 1467年(년)(世祖(세조) 12年(년) 李施愛(이시애)의 亂(난)을 鎭壓(진압)하는데 加擔(가담)하여, 原從功臣(원종공신)에 錄勳(녹훈)되었으며, 世祖代(세조대)의 淸白吏(청백리)였다. 高祖父(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門人(문인)이었으나 進士(진사)였고, 할아버지 郭之藩(곽지번)이 成均館司成(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家勢(가세)를 일으켰다.
修學(수학)과 少年期(소년기).
일찍이 生母(생모) 晉州姜氏(진주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郭越: 1518年(년) ~ 1586年(년) 8月(월) 6日(일)] 許氏(허씨)와 再婚(재혼)하였다. 일찍이 嶺南(영남)의 儒學者(유학자)인 南冥(남명) 曺植(조식)의 門下(문하)에서 性理學(성리학)을 修學(수학)하였으며, 後(후)에 曺植(조식)의 外孫女(외손녀)사위가 되었다. 함께 同門修學(동문수학)한 金宇顒(김우옹) 亦是(역시) 스승 曺植(조식)의 外孫女(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同壻間(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上京(상경)하여 科擧試驗(과거시험)에 應試(응시)하였으나 落榜(낙방)하였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曺植(조식)은 自身(자신)의 門徒(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漢城府(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消息(소식)을 묻곤 했다.
靑年期(청년기).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郭再祐(곽재우)가 쓰던 칼劍(검).
그 뒤 進士試(진사시)에 應試(응시)하였으나 進士試(진사시)에는 合格(합격)하지 못했다. 그는 北人(북인) 黨員(당원)이었으나 非主流(비주류)였던 탓에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에 依(의)하면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進士試(진사시)에 들었으나 及第(급제)하지 못하였다고 酷評(혹평)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585年(년)(宣祖(선조) 18年(년) 科擧(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等(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宣祖(선조)의 非違(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及第(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合格(합격)이 取消(취소)되어 落榜(낙방)되고 만다.
그 뒤 政界(정계)에 進出(진출)할 뜻을 抛棄(포기)하고 40歲(세)가 넘도록 學問(학문) 硏究(연구)와 낚시를 하며 故鄕(고향)에서 隱居(은거)하였다. 曺植(조식)의 門下生(문하생)들이 大部分(대부분) 金孝元(김효원)이 한때 曺植(조식)의 門下(문하)에 있었던 因緣(인연)으로 동인(東人)에 加擔(가담)하면서 그도 東人(동인)의 黨人(당인)이 되었다가 東人(동인)이 북인(北人-南冥學派(남명학파),慶尙右道(경상우도)과 남인(南人-退溪學派(퇴계학파),慶尙左道(경상좌도)으로 分黨(분당)될 때는 北人(북인)의 黨員(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東人(동인)과 北人(북인) 內部(내부)의 內紛(내분)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는 李山海(이산해) 等(등) 다른 北人(북인) 黨員(당원)들을 避(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였다.
그는 故鄕(고향)인 宜寧(의령)에서 열심히 農事(농사)를 지으면서 勤儉節約(근검절약)했는데,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에 依(의)하면 '財物(재물)을 늘려 財産(재산)이 몇萬金(만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鄙陋(비루)하고 吝嗇(인색)하다고 疑心(의심)하였으나, 郭再祐(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壬辰倭亂期(임진왜란기) 義兵將(의병장) 活動(활동).
戰亂(전란)初期(초기).
釜山鎭(부산진) 殉節圖(순절도).
壬辰倭亂(임진왜란) 初期(초기) 戰鬪(전투)인 釜山鎭(부산진) 戰鬪(전투) 場面(장면).
平生(평생) 隱居(은거) 生活(생활)을 하기로 決心(결심)하였으나, 1592年(년) 5月(월) 23日(일)(宣祖(선조) 25年(년) 陰曆(음력) 4月(월) 13日(일)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官軍(관군)의 敗北(패배)와 宣祖(선조)의 의주(義州)로 避難(피난) 消息(소식)이 날아오자, 6月(월) 1日(일)(陰曆(음력) 4月(월) 22日(일) 私財(사재)를 털어 故鄕(고향) 宜寧(의령)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千名(천명)에 이르는 義兵(의병)을 이끌고 guerrilla(게릴라) 活動(활동)으로 宜寧(의령)·창녕(昌寧) 等地(등지)의 山岳(산악)에 埋伏(매복)하고 있다가 神出鬼沒(신출귀몰)하며 倭軍(왜군)을 물리치고 倭軍(왜군)의 湖南(호남) 進擊(진격)을 沮止(저지)하였고, 倭(왜) 補給船(보급선)을 奇襲(기습)하여 補給(보급)을 遮斷(차단)하는 데 成功(성공)하였으며, 金時敏(김시민)의 晉州城(진주성) 싸움에 援軍(원군)을 보내 勝利(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緋緞(비단)으로 만든 軍服(군복)을 입고 我軍(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別名(별명)으로 有名(유명)하였다.
晉州(진주)大捷(대첩) 記錄畵(기록화).
1592年(년) 5月(월) 咸安郡(함안군)을 陷落(함락), 占領(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渡河(도하) 作戰(작전)을 展開(전개)하는 倭軍(왜군)과 交戰(교전),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緋緞(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先頭(선두)에서 많은 倭敵(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自身(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自處(자처)하였고, 奇襲(기습)과 埋伏(매복)이 成功(성공)을 거두어 官軍(관군)도 이기지 못한 倭軍(왜군)을 擊破(격파)하면서 有名人士(유명인사)가 된다.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
壬辰年時(임진년시) 倭(왜)는 15萬(만) 8800名(명)의 倭軍(왜군)을 9軍(군)으로 나누어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가 이끄는 1軍(군)(1萬(만) 8700名(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2軍(군)(2萬(만) 800名(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3軍(군)(1萬(만) 1000名(명)은 突擊部隊(돌격부대)로 漢陽(한양)을 占領(점령)하여 宣祖(선조)를 잡고, 나머지 軍(군)은 各(각) 道(도)를 占領(점령)하려는 戰略(전략)을 가지고 쳐들어왔다. 그 중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6軍(군) 1萬(만) 5700名(명)은 全羅道(전라도)를 占領(점령),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7軍(군) 3萬名(만명)은 慶尙道(경상도)를 占領(점령)하려는 戰略(전략)이었다.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倭(왜) 第(제) 6軍(군)이 東萊(동래)에서 咸安(함안)을 거쳐 南江(남강)을 건너 宜寧(의령)을 지나 六十嶺(육십령)을 넘어 全羅道(전라도)를 占領(점령)할 計劃(계획)이었다. 이 戰略(전략)에 따라 倭(왜) 第(제) 1, 2, 3軍(군) 突擊部隊(돌격부대)가 北上(북상)한 後(후), 倭(왜) 第(제) 6軍(군) 1萬(만) 5700名(명)이 釜山(부산) 東萊(동래)에서 咸安(함안)을 거쳐 湖南(호남)으로 進出(진출)하기 위해서 壬辰年(임진년) 7月(월) 鼎巖津(정암진) 나루에 到着(도착)했다. (그 以前(이전) 壬辰年(임진년) 6月(월) 嶺南道總義兵隊長(영남도총의병대장) 來菴(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年(년) 9月(월) 26日(일) ~ 1623年(년) 4月(월) 3日(일)]이 이끄는 義兵(의병)과 倭軍(왜군)과의 洛東江(낙동강) 防禦戰(방어전)이 있었다.) 郭再祐(곽재우)는 이 鼎巖津(정암진) 附近(부근)의 南江(남강)의 地形地物(지형지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郭再祐(곽재우)가 科擧(과거) 合格(합격)이 取消(취소)된 後(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낚시하며 歲月(세월)을 보내던 바로 그 南江(남강) 地域(지역)이다. 郭再祐(곽재우)는 이때 鼎巖津(정암진) 언덕에 兵士(병사)들을 埋伏(매복)시킨 뒤 날랜 兵士(병사) 몇명을 選拔(선발), 南江(남강)을 건너는 倭軍(왜군)을 늪지대로 誘引(유인)한 다음 화살攻擊(공격)으로 全滅(전멸)시켰다. 倭軍(왜군) 偵察隊(정찰대)는 鼎巖津(정암진) 一帶(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部隊(부대)의 通行(통행)이 困難(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通過(통과)할 수 있는 地點(지점) 近處(근처)에 나무 標示(표시) 等(등) 標式(표식)을 만들었다. 郭再祐(곽재우)는 倭軍(왜군) 偵察隊(정찰대)의 行動(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標識木(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標識(표식)들을 늪지로 向(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倭軍(왜군)이 잘못 표시된 標識木(표지목)과 표식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郭再祐(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兵士(병사)들에게 攻擊令(공격령)을 내려, 奇襲(기습) 攻擊(공격)을 加(가)해 倭軍(왜군)을 沒殺(몰살)시켰다.
官軍(관군)이 整備(정비)되지 못했던 壬辰倭亂(임진왜란) 初期(초기) 이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으로 倭(왜) 6軍(군)의 全羅道(전라도) 進擊(진격)을 막아 全羅道(전라도)를 保全(보전)하는 것이 壬辰倭亂(임진왜란) 勝利(승리)의 端初(단초)가 된다. 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 結局(결국) 倭軍(왜군)은 全羅道(전라도)를 占領(점령)하지 못했고 이로 因(인)해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의 全羅(전라) 左水營(좌수영) 等(등)이 陸地(육지)로 부터의 倭軍(왜군)의 攻擊(공격)없이 自由(자유)롭게 活躍(활약)할 수 있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初期(초기) 바로 이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 勝利(승리)가 連鎖的(연쇄적)으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 活躍(활약)을 可能(가능)케 한 것이다. 이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이 바로 郭再祐(곽재우)가 壬辰倭亂(임진왜란)에서 나라를 求(구)한 決定的(결정적) 貢獻(공헌)이다. 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 穀倉地帶(곡창지대)인 全羅道(전라도)를 防禦(방어)함으로써 倭(왜) 突擊部隊(돌격부대)의 補給船(보급선)이 南海(남해)를 돌아 西海(서해)로 올라가는 海路(해로)와 慶尙道(경상도) 內陸(내륙) 洛東江(낙동강)을 通(통)한 兵站線(병참선) 두 가지만 남게 되고, 이 中(중) 海路(해로)는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의 依(의)해 遮斷(차단)되고, 洛東江(낙동강) 兵站線(병참선)은 郭再祐(곽재우), 鄭仁弘(정인홍), 成天禧(성천희), 金沔(김면), 변연수 等(등) 嶺南(영남) 義兵(의병)들에 依(의)해 遮斷(차단)되어, 北上(북상)한 倭軍(왜군)들의 勢(세)가 弱(약)해지고 結局(결국) 再整備(재정비)된 官軍(관군)과 明軍(명군)의 攻擊(공격)을 못 견디고 後退(후퇴)하게 된다. 그리하여, 丁酉再亂時(정유재란시)에는 倭(왜)는 壬辰年(임진년) 敗因(패인)을 全羅道(전라도) 陷落(함락) 失敗(실패)로 보고 全羅道(전라도)를 通(통)해 北上(북상)하는데 總攻勢(총공세)를 펼친다.
官軍(관군)의 敗北(패배)와 그의 連戰連勝(연전연승)은 자주 比較(비교)되었고, 官軍(관군)들 中(중)에는 그를 猜忌(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倭敵(왜적)을 避(피)해 달아났던 慶尙道(경상도) 觀察使(관찰사) 金壽(김수)와의 個人的(개인적)인 惡憾情(악감정) 때문에 陋名(누명)을 쓰고 逮捕(체포), 拘禁(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赴任(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事情(사정)을 알고는 金誠一(김성일)의 特別(특별) 建議(건의)로 釋放(석방)된 後(후), 朝鮮(조선) 政府(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義兵(의병) 活動(활동)의 功(공)을 높이 사 같은 해 陰曆(음력) 7月(월)에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에 任命(임명)되었다가 備邊司(비변사)의 推薦(추천)으로 正(정)5品(품) 刑曹正郎(형조정랑)이 되었다.
李夢鶴(이몽학)의 亂(난)과 辭退(사퇴).
1592年(년) 陰曆(음력) 10月(월)에는 堂上官(당상관)으로 陞進(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兼(겸) 조방장(助防將)으로 陞進(승진)하였고, 10月末(월말)에는 武官(무관) 品階(품계)에서 文官(문관) 品階(품계)인 通政大夫(통정대부)正(정)3品(품)로 變更(변경), 任命(임명)하였다.
1593年(년)(宣祖(선조) 26年(년) 陰曆(음력) 4月(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任命(임명)되고, 陰曆(음력) 12月(월)에는 다시 星州牧使(성주목사)에 任命(임명)하기도 하였다. 1593年末(년말) 朝廷(조정)의 命(명)을 傳達(전달)받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洛東江(낙동강) 一帶(일대)를 防禦(방어)하고 무너지거나 破壞(파괴)된 城廓(성곽)을 補修(보수), 修理(수리)하였다. 星州牧使(성주목사)로 在職(재직) 中(중) 三嘉縣(삼가현) 嶽堅山城(악견산성) 等(등) 城地(성지) 修築(수축)에 熱中(열중)하다가 그해 12月末(월말) 晉州牧使(진주목사)에 任命(임명), 轉勤(전근)되었다. 곧 慶尙右道(경상우도)助防將(조방장)을 兼任(겸임)되었고, 1595年(년) 初(초) 晉州牧使(진주목사)로 赴任(부임)하였으나 일시 休戰(휴전)으로 壬辰倭亂(임진왜란)이 終熄(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玄風(현풍) 佳泰洞(가태동)으로 돌아와 다시 隱遁(은둔) 生活(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李夢鶴(이몽학)과 內通(내통)했다는 所聞(소문)이 擴散(확산)되면서 謀陷(모함)을 받고 李夢鶴(이몽학)의 亂(난)에 連累(연루)되어 逮捕當(체포당)하기도 했으나 罪(죄)가 없음이 밝혀져 釋放(석방)되었다. 그러나, 郭再祐(곽재우)와 切親(절친)한 사이인 義兵將(의병장) 金德齡(김덕령)은 끝내 李夢鶴(이몽학)의 亂(난)과 關聯(관련)된 陋名(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當(당)했다. 郭再祐(곽재우)는 스스로 辭退(사퇴)하였는데, 이 일로 郭再祐(곽재우)는 事實上(사실상) 官職(관직)에 對(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戰況(전황) 中(중)에도 그는 꾸준히 書信(서신)을 作成(작성), 朝廷(조정)에 狀啓(장계)로 보내 戰況(전황)을 報告(보고)하기도 했다.
丁酉再亂(정유재란)과 終戰(종전).
1597年(년)(宣祖(선조) 30年(년) 明(명)나라와 日本(일본)의 講和會談(강화회담)이 跛行(파행)으로 決裂(결렬)되고 日本(일본)과의 戰爭(전쟁)이 再發(재발)할 危險性(위험성)이 커지자 朝鮮(조선) 朝廷(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任命(임명)되었다. 慶尙左道(경상좌도) 防禦使(방어사)로 그는 倭軍(왜군)의 再侵(재침)을 對備(대비)해 1次的(차적)으로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 2次的(차적)으로 玄風(현풍) 石門山城(석문산성)을 쌓아 이 山城(산성)에서 倭軍(왜군)의 北進(북진)을 막는다는 戰略(전략)을 세웠다. 釜山(부산) 東萊(동래)에서 出發(출발)하여 金海平野(김해평야), 昌原(창원) 大山平野(대산평야), 密陽(밀양) 下南平野(하남평야) 竹(죽) 平地(평지) 直路(직로)로 올라오는 倭(왜) 右軍(우군)을 처음으로 山(산)다운 山(산)인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에서 1次的(차적)으로 沮止(저지)하고, 여기가 무너지면 2次的(차적)으로 玄風(현풍) 石門山城(석문산성)에서 沮止(저지)하여, 慶尙道(경상도)를 通(통)한 倭(왜) 右軍(우군)의 北上(북상)을 源泉遮斷(원천차단)하고 北上路上(북상로상)의 數(수)많은 邑城(읍성)과 生命(생명)을 지킨다는 戰略(전략)이었다.
玄風(현풍)이 무너지면 바로 大邱府(대구부)이다. 昌寧(창녕)과 玄風(현풍)에서 반드시 沮止(저지)해야 하는 狀況(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玄風(현풍)의 石門山城(석문산성)을 新築(신축)하였고, 그의 매제(成天祚)의 兄(형)인 壬亂義兵將(임란의병장) 성천희(成天禧), 四寸兄(사촌형) 郭再謙(곽재겸) 等(등)은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을 增築(증축)하였다. 이때 火旺山城(화왕산성)을 쌓는 것이 遲滯(지체)되어 成天禧(성천희)가 直接(직접) 비변사(備邊司)에 올라가 朝廷(조정)의 도움을 請(청)해, 火旺山城(화왕산성)은 倭軍(왜군)의 再侵(재침) 前(전)에 完成(완성)되었다.
丁酉年(정유년) 倭軍(왜군)은 12萬(만) 大軍(대군)을 半(반)으로 나누어, 左軍(좌군)은 全羅道(전라도)를 通(통)해 北上(북상), 右軍(우군)은 慶尙道(경상도)를 通(통)해 北上(북상)하려 하였다. 石門山城(석문산성)이 完工(완공)되기도 前(전)인 丁酉年(정유년) 7月(월) 下旬(하순), 梁山(양산)과 蔚山(울산) 西生浦(서생포)에서 出發(출발)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倭(왜) 右軍(우군) 6萬(만) 大軍(대군)이 慶尙道(경상도)를 通(통)해 北上(북상)하기 始作(시작)했다. 이에 郭再祐(곽재우)는 昌寧(창녕)의 火旺山城(화왕산성)으로 옮겨 倭(왜) 右軍(우군)과의 決戰(결전)을 對備(대비)하였다. 이때 防禦使(방어사) 郭再祐(곽재우), 從事官(종사관) 성안의(成安義), 助防將(조방장) 이영(李英), 助戰將(조전장): 장웅기(昌寧縣監(창녕현감), 全悌(전제)(靈山縣監(영산현감), 신초(玄風縣監(현풍현감), 李淑(이숙), 성정국(成定國), 辛邦櫓(신방로), 金忠敏(김충민)과 990名(명)의 義兵(의병), 그리고 영산 寶林寺(보림사) 스님들을 비롯한 僧兵(승병) 1000餘名(여명) 總(총) 2000餘名(여명)의 義(의)/僧兵(승병)이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을 堡壘(보루)로 加籐淸正(가등청정)의 倭(왜) 右軍(우군) 6萬(만) 大軍(대군)의 길목을 막아 섰다. 邑城(읍성)이 아니라 山城(산성)을 擇(택)한 것은 賢明(현명)한 戰略(전략)이었다. 火旺山(화왕산)은 높이가 756m로, 昌寧(창녕)쪽에서의 全面(전면)의 마지막 꼭대기 部分(부분)은 60度(도)以上(이상)의 傾斜(경사)로 매우 가파르다.
이때, 郭再祐(곽재우)는 部下(부하)들에게 이 山城(산성)은 敵(적)의 數(수)가 아무리 많아도 陷落(함락)되지 않는다라고 士氣(사기)를 振作(진작)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郭再祐(곽재우)와 義兵將(의병장)들도 이 火旺山城(화왕산성) 戰鬪(전투)가 쉽지 않은 것을 알고,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戰鬪(전투)에 任(임)했다. 玄風(현풍) 石門山城(석문산성)이 完工(완공)되지 않아,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이 무너지면, 바로 敵軍(적군)이 大邱府(대구부)로 올라가는 狀況(상황)이었다. 이때 火旺山城內(화왕산성내)에 섶나무를 쌓아두고 山城(산성)이 陷落(함락)되면 불을 질러 모두 죽겠다고 決意(결의)하고 戰鬪(전투)에 任(임)했다.
倭軍(왜군)은 처음 火旺山城(화왕산성) 昌寧(창녕) 쪽에서 前面(전면)으로 攻擊(공격)하였지만, 攻擊(공격)이 쉽지 않아, 나중에는 緩慢(완만)한 密陽(밀양)쪽으로 돌아서 攻擊(공격)하였다. 結局(결국), 倭(왜) 右軍(우군)은 이 火旺山城(화왕산성)을 陷落(함락)치 못하고 時間(시간)이 遲滯(지체)되어, 되돌려 全羅道(전라도)로 進擊(진격)하는 左軍(좌군)과 合流(합류)하였다. 이때 加籐淸正(가등청정)이 部下(부하)에게 “山城(산성)을 지키는 者(자)가 누구이냐”라고 물어 보고, “郭再祐(곽재우)가 지킨다”라는 答(답)을 듣고 結局(결국) 軍士(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倭(왜) 右軍(우군)의 바로 첫 進入(진입) 段階(단계)인 이 昌寧(창녕) 火旺山城(화왕산성)전에서 倭(왜) 右軍(우군)을 막음으로써 丁酉再亂時(정유재란시) 倭(왜) 右軍(우군)의 北上路(북상로)에 있던 모든 邑城(읍성)이 保全(보전)되었다. 壬辰年(임진년)에는 鼎巖津(정암진) 大捷(대첩)으로 倭(왜) 6軍(군) 1萬(만) 5700名(명)의 全羅道(전라도) 進擊(진격)을 막고, 丁酉年(정유년)에는 火旺山城戰(화왕산성전)으로 倭(왜) 右軍(우군) 6萬名(만명)의 慶尙道(경상도)를 通(통)한 北上(북상)을 막았다. 壬辰倭亂(임진왜란), 丁酉再亂時(정유재란시) 그의 業績(업적)과 功(공)은 실로 偉大(위대)한 것이었다.
1597年(년) 戰爭(전쟁) 中(중) 繼母(계모) 金海許氏(김해허씨)가 死亡(사망)하였으므로 城(성)을 나와 葬儀(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蔚珍(울진)으로 가서 3年喪(년상)을 입었다. 喪中(상중)에 戰亂(전란)은 終決(종결)되었고, 戰亂(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에 特別(특별) 昇進(승진)하였으나 辭讓(사양)하고 故鄕(고향)으로 落鄕(낙향)하였다. 慶尙左兵使(경상좌병사)로 赴任(부임) 直後(직후) 倭軍(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는 朝廷(조정)에 狀啓(장계)를 올려 軍士(군사)들을 故鄕(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生業(생업)과 農事(농사)일에 從事(종사)하게 해줄 것을 王(왕)에게 提案(제안)하였다. 그러나, 王(왕)이 拒絶(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故鄕(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漁父(어부) 生活(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戰爭(전쟁)을 하며 奇妙(기묘)한 戰術(전술)로 勝利(승리)했는데, 敵軍(적군) 軍船(군선)의 豫想(예상) 徑路(경로)를 豫測(예측)해 水路(수로)에 통나무를 박아 敵船(적선)의 通行(통행)을 막아 敵(적)의 物資(물자) 補給(보급)을 막았다. 또한, 倭軍(왜군)이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안전한 곳마다 깃발을 꽂아 軍士(군사)들이 그 곳으로 지나게 하려는 計劃(계획)을 알아채고 깃발을 늪지대에 꽂아 늪에 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였다는 逸話(일화)는 有名(유명)하다. 또 다른 兵士(병사)들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攪亂(교란) 戰術(전술)을 썼다. 또 寶物(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黃金(황금) 箱子(상자)에 벌을 담은 後(후) 길가에다 버려 놓았는데, 이를 寶物(보물) 箱子(상자)로 錯覺(착각)한 倭軍(왜군)이 열었다가 벌에 쏘여 죽기도 했다. 이 外(외)에도 里程標(이정표)를 바꿔 敵(적)을 混亂(혼란)에 빠트리는 等(등)의 奇妙(기묘)한 戰術(전술)로 나라를 지켜냈다.
終戰(종전)以後(이후).
終戰(종전)直後(직후)와 隱居(은거).
忘憂亭(망우정) 懸板(현판) (1602年(년)
郭再祐(곽재우) 親筆作(친필작).
1599年(년)(宣祖(선조) 30年(년) 다시 慶尙右道(경상우도) 防禦使(방어사)에 任命(임명)되었으나 그는 繼母(계모)의 喪中(상중)이었으므로 辭退(사퇴)하였다. 同年(동년) 9月(월)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에 任命(임명)되었으나 繼母(계모)의 喪中(상중)이었으므로 1個月間(개월간) 遲滯(지체)하여 10月(월)에 赴任(부임)하였다. 1600年(년)(宣祖(선조) 33年(년) 2月(월) 日本(일본)과 和親(화친)을 할 것을 建議(건의)했다가 司諫院(사간원)의 彈劾(탄핵)을 받고 推鞫當(추국당)하였다.
“ | 閫帥(곤수)는 이미 重任(중임)을 받아 兵權(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任意(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國法(국법)이 매우 嚴(엄)할 뿐더러 臣下(신하)의 義理(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決斷(결단)코 敢(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慶尙(경상) 左水使(좌수사) 郭再祐(곽재우)는 敵(적)을 討伐(토벌)해야 하는 義理(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和親(화친)을 通(통)하기를 主張(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羊(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引用(인용), 이를 文書(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疏章(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驕慢(교만)하고 悖戾(패려)한 罪(죄)를 懲治(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推鞫(추국)하여 율(律)에 依(의)거 罪(죄)를 定(정)하소서. | ” |
同年(동년) 봄, 그는 病(병)을 理由(이유)로 辭職上疏(사직상소)를 올리고 歸鄕(귀향)하였다. 그러나, 司憲府(사헌부) 等(등)으로부터 함부로 辭退(사퇴)하였다는 理由(이유)와 전해 赴任(부임)을 遲滯(지체)한 點(점) 等(등)을 口實(구실)로 彈劾(탄핵)을 받아 全羅南道(전라남도) 靈巖(영암)으로 流配(유배)되었다. 1602年(년) 流配(유배)된지 2年(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故鄕(고향)이 돌아와 玄風(현풍) 毗瑟山(비슬산)에 들어가 穀食(곡식)을 禁(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靈山縣(영산현) 南(남)쪽 昌寧(창녕) 蒼巖鎭(창암진) 솥바위나루 洛東江邊(낙동강변)에 亭子(정자)를 짓고 忘憂亭(망우정)이라는 懸板(현판)을 걸고 詩文(시문) 等(등)으로 消日(소일)하였다. 그러나, 宣祖(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出仕(출사) 要請(요청)을 받고 拒絶(거절)할 수 없어 1604年(년)(宣祖(선조) 37年(년) 初(초) 察理使(찰리사)가 되었다.
官僚(관료)生活(생활).
察理使(찰리사:예전에, 軍務(군무)로 地方(지방)에 派遣(파견)하는 臨示(임시) 벼슬을 이르던 말)로 在職(재직) 中(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修築(수축)과 改補修(개보수)를 建議(건의)하였다. 이어 그해 5月(월) 善山府使(선산부사)로 任命(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察理使職(찰리사직)에서 辭職(사직)하였다. 곧 安東府使(안동부사)에 任命(임명)되었으나 辭讓(사양)하였다.
1604年(년) 8月(월) 행(行)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月(월) 折衝將軍(절충장군) 行(행)龍驤衛(용양위) 副護軍(부호군)에 除授(제수)되고, 11月(월) 승자(陞者)하여 嘉善大夫(가선대부) 行(행)龍驤衛(용양위) 上護軍(상호군)에 除授(제수)되었다. 그 뒤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漢城府(한성부) 右尹(우윤)을 지냈다. 1605年(년) 2月(월) 다시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에 臨溟(임명)된 뒤 冬年(동년) 3月(월) 漢城府(한성부) 右尹(우윤)이 되고, 5月(월) 全羅道(전라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年(년)(宣祖(선조) 40年(년) 3月(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末(말) 司憲府(사헌부)로부터 飮食(음식)을 끊고 道術(도술)과 修練(수련)에 專念(전념)한다는 點(점)을 理由(이유)로 여러번 彈劾(탄핵)을 當(당)하였으나 王(왕)이 듣지 않았다. 1608年(년)(光海君(광해군) 卽位年(즉위년)에 다시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로 任命(임명)되어 赴任(부임)했다가 다시 行(행) 龍驤衛(용양위) 副護軍(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年(년)(光海君(광해군) 1年(년) 官職(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光海君(광해군)은 그를 慶尙右道(경상우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에 除授(제수)하여 불렀으나 모두 病(병)을 핑계로 辭讓(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生涯(생애) 後半(후반).
그 뒤에도 王(왕)이 여러 次例(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辭讓(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同門修學(동문수학)하였던 鄭仁弘(정인홍) 等(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은 이를 꺼렸다. 光海君(광해군) 卽位(즉위) 初(초)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辭退(사퇴)하였다. 1610年(년)(光海君(광해군) 2年(년) 光海君(광해군)은 여러번 忘憂亭(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官職(관직)에 出仕(출사)할 것을 懇請(간청)하여 結局(결국) 그해 漢城(한성)으로 上京(상경), 五衛都摠府(오위도총부)의 副摠管(부총관), 行(행)虎賁衛(호분위) 副護軍(부호군), 虎賁衛(호분위) 大護軍(대호군) 兼(겸) 五衛都摠府(오위도총부) 副摠管(부총관) 等(등)을 지냈다. 이어 漢城府(한성부)左尹(좌윤)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咸鏡道(함경도) 觀察使(관찰사)에 任命(임명)하여 赴任(부임)하였다.
咸境道(함경도) 觀察使(관찰사) 任期(임기)가 滿了(만료)된 1612年(년)(光海君(광해군) 4年(년) 全羅道(전라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에 任命(임명)되자 病(병)을 稱託(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以後(이후) 朝廷(조정)에서 仁穆大妃(인목대비) 廢母論(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對(대)한 死刑(사형) 建議(건의)가 나타나자 그는 人倫(인륜)이 무너졌다고 憤慨(분개)하였다. 1613年(년)(光海君(광해군) 5年(년) 4月(월) 다시 全羅道(전라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大北(대북) 系列(계열)에 依(의)해 永昌大君(영창대군)에 對(대)한 彈劾(탄핵)이 있자, 1613年(년) 5月(월) 辭職(사직) 上疏(상소)와 함께 永昌大君(영창대군)에게 罪(죄)가 없다는 上疏文(상소문)을 올리고 落鄕(낙향)했다. 以後(이후), 여러 次例(차례) 慶尙道(경상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水軍統制使(수군통제사) 等(등)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모두 辭讓(사양)하거나 辭退(사퇴)하였다. 1616年(년)(光海君(광해군) 8年(년) 倉巖江沙(창암강사)에서 隱居(은거) 中(중) 掌禮院(장례원) 判決事(판결사)를 除授(제수)받았으나 亦是(역시) 辭讓(사양)하였다.
最後(최후).
그 後(후)로도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 五衛都摠府(오위도총부) 副摠管(부총관),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 等(등)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모두 辭讓(사양)하였다. 나라의 形便(형편)이 어지러워지고, 水軍統制使(수군통제사) 李舜臣(이순신)과 罪(죄)없는 金德齡(김덕령)이 죽은 일 等(등)을 痛嘆(통탄)하여 벼슬을 辭退(사퇴)하고 隱遁生活(은둔생활)을 한다. 當時(당시), 여러 次例(차례) 慶尙道(경상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水軍統制使(수군통제사) 等(등)의 高位(고위) 武官職(무관직)을 提議(제의)받았으나 大部分(대부분) 辭讓(사양)하다 1617年(년) 4月(월) 10日(일) 忘憂亭(망우정)에서 死亡(사망)하였다.
글씨도 잘 썼는데 筆體(필체)가 雄健(웅건)하고 굵었으며, 詩文(시문)에도 能(능)했다. 6月(월) 1日(일)(陰曆(음력) 4月(월) 28日(일) 光海君(광해군)의 命(명)으로 葬禮費(장례비)와 葬禮物品(장례물품)이 朝廷(조정)에서 支給(지급)되었고, 바로 禮官(예관)을 派遣(파견)하여 葬事(장사)를 지냈으며, 禮曹佐郎(예조좌랑) 유약(柳瀹)을 派遣(파견)하여 葬禮式(장례식)을 主管(주관)하게 하였다. 死亡(사망) 當時(당시) 享年(향년) 66勢(세)였다.
死後(사후).
1617年(년)(光海君(광해군) 9年(년) 사람들은 地域(지역) 儒林(유림)들의 公議(공의)로 그를 追慕(추모)하기 위하여 宜寧(의령) 佳泰洞(가태동)에 忠賢祠(충현사)라는 祠堂(사당)을 세웠으며, 光海君(광해군) 때 그의 祠堂(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賜額(사액)이 내려졌다. 肅宗(숙종)은 그의 功績(공적)을 높이 사, 1709年(년)(肅宗(숙종) 35年(년) 贈(증) 兵曹判書(병조판서) 兼(겸) 知義禁府事(지의금부사)에 追贈(추증)하고, 다시 忠翊(충익)이라는 諡號(시호)를 내렸다.
著書(저서)로는 忘憂堂輯(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主人公(주인공)으로 한 郭再祐展(곽재우전)이라는 軍談(군담) 小說(소설)이 있으나 作者(작자)나 年代(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遺品(유품)들은 寶物(보물) 第(제)671號(호)로 指定(지정)되었다.
(現在(현재)까지도 많은 注目(주목)을 받고 있는 偉人(위인)이다)
關聯書籍(관련서적).
《망우당집》(忘憂堂集)
《곽재우전》(郭再祐傳) : 郭再祐(곽재우)의 一生(일생)을 小說化(소설화)한 군담소설(軍談小說).
家族關係(가족관계).
曾祖父(증조부) : 곽위(郭瑋), 곽승화(郭承華)의 아들.
할아버지 祖父(조부) : 곽지번(郭之藩).
할머니 祖母(조모) : 許氏(허씨), 허린의 딸.
아버지 父(부) : 곽월(郭越, 1518年(년) ~ 1586年(년) 8月(월) 6日(일.)
어머니 母(모): 晉州姜氏(진주강씨).
婦人(부인) : 상주김씨(尙州金氏), 尙州人(상주인) 김행(金行)의 딸, 曺植(조식)의 外孫女(외손녀).
아들 子(자) : 곽영(郭濚).
아들 子(자) : 곽활(郭活).
딸 女息(여식) : 玄風郭氏(현풍곽씨),昌寧成氏(창녕성씨) 두회암(斗回庵) 성이도(成以道)에게 出嫁(출가).
兄(형) : 곽재희(郭再禧).
兄(형) : 곽재록(郭再錄).
누나 : 玄風郭氏(현풍곽씨), 金海許氏(김해허씨) 허언심(許彦深)에게 出嫁(출가).
女同生(여동생) : 玄風郭氏(현풍곽씨), 昌寧成氏(창녕성씨) 권암(倦菴) 성천조(成天祚)에게 出嫁(출가).
叔父(숙부) : 곽규(郭赳, 學者(학자), 1521年(년) - 1584年(년).
評價(평가)
宣祖(선조)의 非違(비위)를 거슬려서 科擧(과거) 試驗(시험)에 合格(합격)했음에도 落榜(낙방)되자 그는 官職(관직) 進出(진출)을 斷念(단념)한다. 그러나 1592年(년)(宣祖(선조) 25年(년) 4月(월) 官軍(관군)이 倭軍(왜군)에게 全滅當(전멸당)하고 百姓(백성)들과 同僚(동료) 兩班(양반)들은 避難(피난)했음에도 스스로 義兵(의병)을 組織(조직)한 點(점)과 官軍(관군)을 殲滅(섬멸)하고 올라온 倭軍(왜군)을 여러번 神出鬼沒(신출귀몰)하여 물리친 點(점)이 높이 評價(평가)되었다.
關聯文化財(관련문화재).
寶物(보물) 第(제)671號(호) - 곽재우 유물 일괄(郭再祐 遺物 一括)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寶物(보물) 第(제)671-1號(호) - 곽재우 유물 일괄-장검(郭再祐 遺物 一括-長劍)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寶物(보물) 第(제)671-2號(호) - 곽재우 유물 일괄-마구(郭再祐 遺物 一括-馬具)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寶物(보물) 第(제)671-3號(호) - 곽재우 유물 일괄-포도연(郭再祐 遺物 一括-葡萄硯)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寶物(보물) 第(제)671-4護(호) - 곽재우 유물 일괄-사자철인(郭再祐 遺物 一括-獅子鐵印)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寶物(보물) 第(제)671-5號(호) - 곽재우 유물 일괄-화초문백지팔각대접(郭再祐 遺物 一括- 花草紋白磁八角大?)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寶物(보물) 第(제)671-6號(호) - 곽재우 유물일괄 - 갓끈(郭再祐 遺物 一括 - 갓끈)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忠翊司(충익사)管理事務所(관리사무소).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資料(자료) 第(제)23號(호) -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忠翼公忘憂郭再佑遺墟碑) : 慶尙南道(경상남도) 昌寧郡(창녕군).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資料(자료) 第(제)66號(호) - 의령 보덕각(宜寧 報德閣) :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郡(의령군) 芝正面(지정면) 성산리.
drama(드라마).
《朝鮮王朝(조선왕조) 五百年(오백년) - 壬辰倭亂(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배우:이동신)
《王(왕)의 女子(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이재구)
《不滅(불멸)의 李舜臣(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배우:이종박)
《懲毖錄(징비록)》(KBS), 2015년, 배우:임혁)
其他(기타).
1618年(년) 郭再祐(곽재우)의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기 위한 祠堂(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建立(건립)되고 훗날 그 規模(규모)가 擴張(확장)되었으며 光海君(광해군)이 賜額(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으며, 諡號(시호)는 한참 後代(후대)에 追贈(추증)되었는데 1709年(년) 兵曹判書(병조판서) 兼(겸) 知義禁府事(지의금부사)로 追贈(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諡號(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같이보기.
參考文獻(참고문헌).
壬辰筆錄(임진필록).
懲毖錄(징비록).
參考資料(참고자료).
이이화, 《韓國史(한국사) 이야기 11:朝鮮(조선)과 日本(일본)의 7年戰爭(년전쟁) 이이화 지음》(한길사, 2000
이가원, 《李朝名人列傳(이조명인열전)》 (을유문화사, 1965)
脚注(각주).
↑ 曺植(조식)의 딸 曺氏(조씨)와 사위 김행의 딸이다.
↑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 114券(권), 光海君(광해군) 9年(년)(1617年(년) 正史(정사) / 明(명) 만력(萬曆) 45年(년) 4月(월) 27日(일)(辛酉(신유) 13번째記事(기사) "前(전) 漢城府(한성부) 左尹(좌윤) 郭再祐(곽재우)의 拙技(졸기)"
↑ 《忘憂集(망우집)》 〈年譜(연보)〉 萬曆(만력) 13年(년)(1585年(년) 및 裵大維(배대유) 〈忘憂先生傳(망우선생전)〉
↑ 《宣祖實錄(선조실록)》 宣祖(선조) 25年(년)(1592年(년)6月(월) 28日(일)(丙辰(병진) 4번째 記事(기사) 및 8月(월) 18日(일)(乙巳(을사) 3번째 記事(기사); 郭再祐(곽재우), 《忘憂集(망우집)》 券(권)1, 雜著(잡저), 창의시자명소(倡義時自明䟽)·상초유사서(上招諭使書)·답초유사서(答招諭使書); 金誠一(김성일), 《鶴峯集(학봉집)》 券(권)3, 곽재우(郭再祐)를 신구(伸救)하는 서장(書狀)(1592年(년):券(권)4,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에게 보내는 便紙(편지); 李玄逸(이현일), 《葛庵集(갈암집)》 券(권)29, 嘉善大夫(가선대부) 行(행) 咸鏡道觀察使(함경도관찰사) 兼(겸) 巡察使(순찰사)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咸興府尹(함흥부윤) 忘憂堂(망우당) 郭(곽) 公(공) 市長(시장).
↑ 《宣祖修正實錄(선조수정실록)》 宣祖(선조) 29年(년)(1596年(년)8月(월) 1日(일)(丙申(병신) 1번째 記事(기사); 宋秉善(송병선), 《淵齋集(연재집)》 券(권)33, 忠勇將軍(충용장군) 贈(증) 좌찬성 金(김) 公(공) 德齡(덕령) 墓碣銘(묘갈명).
↑ 金道和(김도화), 《拓庵集(척암집)》 券(권)21, 贈(증) 刑曹參議(형조참의) 昌寧(창녕) 成(성) 公(공) 千熙(천희) 墓碣銘(묘갈명).
↑ 《宣祖實錄(선조실록)》 券(권)82, 宣祖(선조) 29年(년)(1596年(년) 11月(월) 20日(일)(壬子(임자) 2번째 記事(기사).
↑ 宣祖實錄(선조실록) 122券(권), 宣祖(선조) 33年(년)(1600年(년) 庚子(경자)/明(명) 만력(萬曆) 28年(년) 2月(월) 29日(일)(癸卯(계묘) 1번째記事(기사) "司諫院(사간원)에서 慶尙(경상) 左水使(좌수사) 郭再祐(곽재우)를 推鞫(추국)할 것을 請(청)하니 允許(윤허)하다"
↑ 《忘憂集(망우집)》 〈年譜(연보)〉 萬曆(만력) 41年(년)(1613年(년)5月(월)造(조); 券(권)2, 소(疏), 구영창대군소(救永昌大君疏)
↑ 《忘憂集(망우집)》 〈年譜(연보)〉 萬曆(만력) 45年(년)(1617年(년)4月(월) 10日(일)造(조).
↑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 光海君(광해군) 9年(년)(1617年(년)4月(월) 28日(일)(壬戌(임술) 3번째 記事(기사)
↑ 《光海君日記(광해군일기)》 光海君(광해군) 9年(년)(1617年(년)6月(월) 4日(일)(丁酉(정유).
external link(외부링크)
韓國歷代人物(한국역대인물) 綜合(종합)情報(정보) system(시스템).
郭再祐(곽재우) 將軍(장군) 義兵(의병) 깃발을 높이 들다 - Oh My News(오마이뉴스) 2005年(년) 08月(월) 10日字(일자)
郭再祐(곽재우)
記錄(기록) 아래 숨겨진 眞情(진정)한 삶의 숨결 - Oh My News(오마이뉴스) 2008年(년).08月(월).23日(일).
郭再祐(곽재우)의 삶을 要約(요약)한 사위壻(서) 성이도(成以道)의 만사(輓詞)
淑氣鍾天東 (숙기종천동) 맑은 기운이 하늘 동쪽에 모여,
斯人四海雄 (사인사해웅) 이 분이 나셨으니, 천하(四海)의 영웅이었다.
磊落器度遠 (뇌락기도원) 활달하고 거침 없는 도량은 원대하였으며,
傑魁容貌充 (걸괴용모충) 걸출한 용모는 충만하였다.
文章是末藝 (문장시말예) 문장(文), 이는 부차적인(末) 재주이고, (1)
本領乃孝忠 (본령이효충) 본령(本)은 孝(효)와 충(武)이었다.
心期尙古朴 (심기상고박) 마음에는 옛적의 순박함을 받들고,
世態盡磨礱 (세태진마롱) 세태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早絶干祿計 (조절간록계) 일찍이 벼슬할 계획을 끊어 버리고, (2)
永欲避塵籠 (영욕피진롱) 영원히 티끌 같은 世上(세상)의 榮華(영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生涯托漁釣 (생애탁어조) 이로, 限平生(한평생)을 낚시하는 일에 依託(의탁)하여,
佚宕期始終 (질탕기시종) 흥겹고 호탕한 일로 시종을 기약하였다.
金星動天上 (금성동천상) 그러던 中(중), 금성이 하늘 위에서 움직이니,
腥穢汗域中 (성예한역중) 왜적(腥穢)이 이 땅을 침략하였다.
列郡無男子 (열군무남자) 늘어선 여러 고을에 장부가 없었으니,
江淮保障空 (강회보장공) 洛東江(낙동강)과 남강(江淮)을 保護(보호)하고 막는 것이 텅 비어버렸다. (3)
投竿倡大義 (투간창대의) 이에 낚시대를 던져버리고 大義(대의)를 창하여,
仗劒氣如虹 (장검기여홍) 검을 짚으니 그 기세가 무지개와 같았다.
韜鈐運神器 (도검운신기) 兵法(병법)을 구사하는 것은 신기에 가깝고 (4)
軍士擁虎態 (군사옹호태) 軍士(군사)들은 범을 품은 듯 하였다.
身上紅綃服 (신상홍초복) 몸에는 붉은 비단 옷을 입고
手中落月弓 (수중락월궁) 손에는 낙월궁을 들었다.
幟山兵疑衆 (치산병의중) 山(산)에는 깃발을 꽂아 敵兵(적병)이 우리 군사가 많을까 의심케 하고,
錐江船不通 (추강선불통) 江(강)에는 말뚝을 박아 적선의 運行(운행)을 막았다.
鼎巖軍威赫 (정암군위혁) 鼎巖津(정암진) 戰鬪(전투)에서 我軍(아군)의 偉業(위업)은 빛났으며,
岐江戰血紅 (기강전혈홍) 紀綱(기강) 戰鬪(전투)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5)
兇酋挫鋒鋭 (흉추좌봉태) 왜장(兇酋)의 칼과 창을 꺾으니,
遐邇振威風 (하이진위풍) 그 威風(위풍)이 온 땅에 震動(진동)하였다.
江右因完保 (강우인완보) 江右(강우)가 이로 因(인)해 完全(완전)히 保全(보전)되니, (6)
王靈漸恢鴻 (왕령점회홍) 임금의 尊嚴(존엄)이 漸次(점차) 回復(회복)되었다.
大功堪畫閣 (대공감화각) 큰 功(공)은 화각에 새길 만하고,
高名謾比嵩 (고명만비숭) 높은 이름은 숭산에 견줄 만하다.
劇地運佩符 (극지운패부) 병부(兵符)를 차고 극지를 돌아 다니며,
滄海總元戎 (창해총원융) 蒼海(창해)에서는 軍士(군사)를 總指揮(총지휘)하였다.
明威秋日烈 (명위추일렬) 威嚴(위엄)은 가을 해같이 타오르고,
恩澤春光瀜 (은택춘광융) 恩澤(은택)은 봄 햇살처럼 깊고 넓었다.
偕作修戈戟 (해작수과극) 部下(부하)들과 함께 창과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며,
化行起疲癃 (화행기피융) 함께 行軍(행군)하고 잠자고 일어나며 部下(부하)들의 피로와 고단함을 달랬다.
憂國懐孤憤 (우국회고분) 憂國(우국)으로 孤憤(고분)을 품고,
封章奏重瞳 (봉장주중동) 封章(봉장)으로 임금(重瞳)에게 아뢰었다.
餐松自謫居 (찬송자적거) 귀양살이 이후로 솔잎을 먹음은
返樸固貧窮 (반박고빈궁) 순박하게 돌아와 가난하고 궁핍한 까닭이었다.(7)
丹鳳頻啣詔 (단봉빈함조) 宮闕(궁궐)에서 자주 조서를 받들어 오면,
彤庭暫鞠躬 (동정잠국궁) 宮闕(궁궐)을 向(향)해 잠시 몸을 조아렸다. (8)
北關將秉鉞 (북관장병월) 北(북)쪽 邊方(변방)의 守長(수장)이 되어 兵權(병권)을 掌握(장악)하였으나,(9)
貪官却解銅 (탐관각해동) 原來(원래) 그 자리를 바라던 官吏(관리)가 官服(관복)을 벗고 그만두려하자,
見幾能勇退 (견기능용퇴) 그것을 보고 조용히 능히 용퇴하여,
倻山香蒼穹 (야산향창궁) 향기와 푸른 하늘의 伽倻山(가야산)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洛濱開濱舍 (낙빈개정사) 洛東江(낙동강)가에 깨끗이 집을 지어 살며, (10)
人間謝事功 (인간사사공) 人間(인간) 世上(세상)의 일과 功(공)을 辭讓(사양)하였다.
泝遊乘扁艇 (소유승편정) 조각배를 타고 물결을 거슬러 오르며 놀기도 하고,
峨洋奏短桐 (아양주단동) 짧은 거문고로 곡조(峨洋)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臨亂萬夫特 (임란만부특) 난리를 당하여서는 만부 중에 으뜸이었는데,
投閒一釣翁 (투한일조옹) 한가히 돌아오니 한 명의 낚시하는 老人(노인)이었다.
危言霜雪凜 (위언상설름) 엄정한 말은 서리와 눈같이 늠름하였고,
直氣星斗冲 (직기성두충) 곧은 기운은 북두칠성에 솟구쳤다.
軍民恃藩翰 (군민시번한) 軍(군)과 百姓(백성)이 울타리와 기둥처럼 의지하였고,
朝野倚棟隆 (조야의동륭) 朝廷(조정)과 民間(민간)은 높은 마룻대처럼 의지하였다.
絶粒非學仙 (절립비학선) 穀食(곡식) 飮食(음식)을 끊은 것은 神仙(신선)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明哲孰如公 (명철숙여공) 누가 公(공)같이 밝고 지혜로울 것인가.
如何天奪速 (여하천탈속) 어찌 하늘이 이렇게 속히 데리고 가는가,
慟惜軫宸吏 (통석진신리) 애통하고 哀惜(애석)함이 大闕(대궐)의 臣下(신하)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事業輝竹帛 (사업휘죽백) 그 行(행)한 일과 業績(업적)은 역사책(竹帛)에 빛날 것이며,
姓名誦兒童 (성명송아동) 그 이름은 後世(후세)의 어린이들이 외울 것이다.
塵匣遺長劒 (진갑유장검) 먼지 쌓인 상자에는 긴 검만 남겨져 있고,
空江棄短蓬 (공강기단봉) 빈 江(강)가에는 낚시하던 짧은 뜸만 버려져 있다.
寂寞亭臺下 (적막정대하) 적막한 亭子(정자) 아래에는,
悲凉煙雨濛 (비량연우몽) 슬프고 처량한 안개비만 오고 있다.
先壟餘隙地 (선롱여극지) 선산 남은 틈새 땅에
今日卜玄宮 (금일복현궁) 오늘 무덤자리(玄宮)를 정하였다.
題輓哀永訣 (제만애영결) 이 만사를 쓰며 영결을 슬퍼하니
回首不勝恫 (회수불승통) 고개를 돌려도 이 슬픔을 견딜 수 없다.
撰 成以道 (성이도 지음). 망우당의 숭고한 선비정신을 기리며 역자 번역함.
(1) 郭再祐(곽재우)는 宣祖(선조) 때 文科(문과)에도 及第(급제)하였다.
(2) 위의 文科(문과) 合格(합격)이 임금을 批判(비판)한 答案誌(답안지)로 宣祖(선조)의 命(명)으로 取消(취소)되었다. 그 以後(이후), 벼슬에 뜻을 버린다.
(3) 最初(최초) 東萊城(동래성) 陷落(함락) 後(후) 죽 올라가면서 彈琴臺(탄금대) 申砬(신립)까지 官軍(관군)이 全滅(전멸)하였다.
(4) 韜鈐: 六韜와 玉鈐 - 戰略(전략)과 戰術(전술)의 兵書(병서).
(5) 紀綱(기강): 洛東江(낙동강)과 南江(남강)이 만나는 地點(지점)의 現在(현재) 南江(남강) 쪽.
(6) 江右(강우): 洛東江(낙동강) 오른편, 卽(즉) 慶尙右道(경상우도), 全羅左道(전라좌도)와 隣接(인접)함. 江右(강우)를 保全(보전)하고, 倭軍(왜군)의 全羅道(전라도) 進擊(진격)을 막았다.
(7) 壬辰倭亂(임진왜란) 義兵(의병)活動(활동)으로 家産(가산)을 消盡(소진)하였다.
(8) 임금이 계속 官職(관직)을 내려, 臣下(신하) 예의로 어쩔 수 없이 잠시 官職(관직)에 나갔었다.
(9) 秉斧鉞: 斧鉞 임금이 下賜(하사)한 觀察使(관찰사)나 兵馬使(병마사)의 도끼. 光海君(광해군)이 女眞族(여진족)(後金(후금) 侵掠(침략)을 對備(대비)해 郭再祐(곽재우)를 咸鏡道(함경도) 觀察使(관찰사)로 任命(임명)하였다.
(10) 昌寧郡(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洛東江(낙동강)가이다.
의령(宜寧)군은 慶尙南道(경상남도)의 中央部(중앙부)에 位置(위치)해 있으며 東南(동남)쪽은 嶺南(영남)의 젖줄인 낙동강(洛東江)과 남강(南江)을 끼고있는 肥沃(비옥)한 강안평야지대이며 西北(서북)쪽은 嶺湖南(영호남)의 지붕인 智異山(지리산)의 줄기인 자굴산(山)이 있는 山間(산간)盆地(분지)地域(지역)이다.
郡內(군내) 全域(전역)에 걸쳐서 先史(선사)遺蹟(유적)과 遺物(유물)이 分布(분포)돼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찍이 相當(상당)한 人口(인구)가 聚落(취락)을 이루고 살았던 地域(지역)으로서 獨特(독특)한 農耕文化(농경문화)가 뿌리내린 곳으로 推定(추정)된다. 古文獻(고문헌)에는 속상강한(俗尙强悍)이라고 했지만 淳朴(순박)한 人心(인심)世俗(세속)에 장충효(奬忠孝) 여문학(勵文學)의 氣風(기풍)에 傳統(전통)을 崇尙(숭상)하는 嶺南(영남)의 반향(班鄕)으로 일컫고 있다. 그리고 미맥(米麥)의 主産地(주산지)며 그밖에 木花(목화), 삼과 모시, 감, 밤이 많이 生産(생산)되며 特(특)히 닥(楮)이 지천이라 닥종이(조선종이)와 장판의 原産地(원산지)로서 全國的(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나 있을 뿐 아니라 지촌(紙村)이란 地名(지명)도 있을 정도였다. 아직도 宜寧産(의령산) 골짝쌀을 비롯하여 穀類(곡류)와 菜蔬(채소) 과일류는 질좋기로 이름나 있으며 山水(산수)景觀(경관)이 빼어난 自然環境(자연환경)과 편리한 交通(교통) 等(등) 田園住宅地(전원주택지)로서 最適地(최적지)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口傳(구전)說話(설화).
◈선바구와 샘골 漆谷面(칠곡면) 신포마을 뒤편으로는 先史(선사)遺物(유물)인 선바위(立石(입석) 11基(기)가 있는데 그中(중) 하나는 우뚝하고 몽실하게 잘 생겼다. 男子(남자)의 性器(성기)를 빼닮아서 흔히 ‘자○바구’니 ‘선바구’,‘칠성바구’라 불렀다. 그리고 동네 앞 案山(안산)은 가운데 부분에 골이 져 있고 중턱쯤에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자연옹달샘이 있다. 어찌보면 女子(여자)의 사타구니처럼 깊숙하고 오목해서 신통해 보인다. 옛날부터 이 선돌은 아이를 못가진 女人(여인)네들이 한밤중에 致誠(치성)을 드리면 得男(득남)素願(소원)을 이루는 신석이었고 案山(안산)에는 사람의 出入(출입)을 절대 禁止(금지)하는 곳이다. 만약 이 옹달샘에 손을 넣거나 하면 동네 女人(여인)이 淫蕩(음탕)해지고 狂症(광증)이 퍼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자○바구’의 靈驗(영험)과 함께 ‘보○새미’의 이상한 속신은 陰陽和合(음양화합)이 아니라 陰陽錯行(음양착행)과 關聯(관련)된 傳說(전설)이라 할 것이다.
◈부자려의 敎訓(교훈) 宜寧郡(의령군) 낙서면 율산마을 어귀에는 아담한 꽃집이 있다. 이 동네에는 孝誠(효성)이 至極(지극)한 김막련(金莫蓮)이란 분의 父親(부친)이 病患(병환)으로 신고하자 한겨울에 외(오이)가 좋다는 바 산골짜기 밭언덕에 가서 사흘 밤낮을 祈禱(기도)를 드렸더니 눈밭에 큰 오이가 있는지라 그걸 잡숫게 하여 病(병)이 나아서 몇해를 더 사셨고 돌아가신 뒤 侍墓(시묘)살이 3年(년)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아해(金雅海)는 父傳子傳(부전자전)으로 賤出(천출)의 孝子(효자)였다. 父親(부친)의 病中(병중)에 큰 잉어를 자시고 싶어하는지라 江(강)가에 가서 보니 한겨울이라 江(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사흘동안을 天地神明(천지신명)에게 간절히 祈禱(기도)를 했다. 이른 새벽이 되자 난데없이 큰 잉어가 얼음 위에 퍼덕거리고 있었다. 至誠感天(지성감천)이라고나 할까 잉어를 가져다 곰을 해드렸더니 病(병)이 나았고 여러 해를 더 사셨다. 아버지는 肅宗(숙종)때, 아들은 仁祖(인조) 때 旌門(정문)이 내려졌는지라 父子(부자)분의 孝誠(효성)을 기리고자 부자려(父子閭)라는 懸板(현판)을 달게된 것이라고 한다.
첫댓글 이승철~수 2021-06-16 오후 7:15 ~양 선생님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너무 좋은 자료입니다. 너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