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기홍·소설가
에릭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한국어를 배우러 온 40대 초반의 남성이다. 아랫배가 좀 나오긴 했지만 처음 봤을 때는 기껏해야 30대 중반쯤일 걸로 생각했다. 후배들과 함께 간 술집에서 우리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에릭은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그의 나이를 알게 된 순간 모두들 깜짝 놀랐다. 후배 하나가 그에게 동안(童顔)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여자 친구, 없어요. 노 스트레스."
그 자리에 있던 애인 없는 청춘들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공감을 표했다. 나도 같이 낄낄댔지만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 말을 떠올리고는 이상하게도 좀 슬퍼졌다. 그렇다. 모든 관계는 스트레스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동시에 관계는 우리를 구속하고 괴롭힌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건 결국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부모의 속을 썩이고, 연인의 애를 태우고, 친구들의 화를 돋우며 지금껏 살아왔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뿐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의 주인공처럼 "참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몇 번 고백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는 이런 대사가 몇 차례 반복된다.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나 자신이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그 사실을 서로가 공감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괴물이 아닌 사람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첫댓글 모든것이 다 마음에 있는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입니다. 반대로 발전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것이 스트레스이죠. 요놈을 잘 구워 삶아야 할 거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