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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3대 왕- 태종 이방원
안녕 하세요? 오랫만입니다. 모두 잘 지내셨어요? 벌써 6월이 다 가고 있네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주말이 찾아와주어 잠시나마 시간 낼수 있음에 감사 해야겠지요. 6월이 되면 의례히 기억해야할 우리의 아픈 역사, 민족적 비극 바로 6.25 한국전쟁... 근대화와 맞물려 제 다름대로의 역사관점에서 바라본 조선, 대한제국, 또 제국주의 식민지화, 미소 냉전시대 속에서 발발한 한국 전쟁까지의 그 역사적 배경을 좀 더 디테일하게 이해하고 ( 또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 오늘 이라는 이 시간을 의미있게 남기고자 합니다.
저는 전주 이씨입니다.
저의 조상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바로 태종 이방원 조선 제3대 왕을 만나지요. 네에, 저는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후손, 혈통입니다. 어릴적 기억에도 저희 증조부, 또 조부모님들의 역사 교육의식과 조상님에 대한 제사의식 또한 성대하고 특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들만의 dignity가 무척 강했습니다. 늘 집안 가득 면학 분위기가 있었지요. 직업군도 되돌아 보면, 거의 학자 집안이라고 명명합니다.
해서 저 역시 어릴적부터 독서하는 습관이 잘 길들여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학자, 행정고시, 대학 행정사무관, 교장, 교수, 교사 등등 이런 직업군이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교육자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순수학문, 학자의 길은 좋았으나 저 나름대로의 생각으론 한국교육 시스템은 현재 많은 문제점이 산재해 있고, 그보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
어릴적부터 세계사와 중세,근대 시대의 왕정 정치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죠. 좀 엉뚱하게도...
특히 영국 왕족, 프랑스 왕정, 러시아 황제, 조선 왕족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까지 그들의 생성과 지속, 몰락의 과정을 지켜보며 그 배경과 배후를 제대로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자들의 민족은 미래도 밝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늘 우월하고 충분히 특별했고, 때론 용감했고 평화롭고 무척이나 예의바른 하나의 백의 민족임을 잊지맙시다.
3세기 삼국 영토...
정말 거대하고 우월한 민족이었음을 꼭 상기합시다. 이 얼마나 멋진 민족입니까?
이대로 지속을 못한건 우리 후손들의 탓일 뿐... 우리 조상들은 무척 강하고 또 현명하였음을...
제국주의의 세계지도, 어마한 대영제국의 식민지 국가들...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그 동안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도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두어야 했던 대영제국의 배경은, 바로 끝없는 자원의 쟁취와 값싼 노동력, 대량생산된 그 많은 상품들의 판매처이자 또 제작 산업의 현장으로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지요. 더구나 왕정정치로 산업화가 더딘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이 그 첫 타겟이 됩니다. 그것 역시도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충분히 내재된 현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옥한 토지와 곡창지대, 풍부한 천연자원, 선량한 노동력, 신이 내려주신 좋은 기후에 따른 부동항 확보등 그야말로 아시아는 특히나 조선은 누구라도 취하고 싶은 물류 항만의 요지이자 대륙 진출의 첫 시작점, 또 큰 대양으로 향한 첫 발걸음이 되는 매력적인 지리적 입지탓에 너무나 많은 서구 열강들과, 청나라, 러시아, 일본등 수많은 침략을 받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가여운 조선... 1919년 3월1일... 3.1운동이 일어난지도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패권의 나라는 그 당시 청나라였지요. 서양에서는 근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은 이때 시작됩니다. 청은 차를 팔고, 영국은 모직물을 팔았지요. 하지만 자급자족이 강했던 청에게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 영국은 아편까지 팔게 됩니다. 청은 빠르게 중독됩니다. 하지만 영국은 거기서 멈추지않고 1840년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치룹니다. 완패한 청은 영국의 요구대로 무역을 확장합니다. 1861년 근대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내부 세력도 점점 등장하지요. 그것이 양무운동입니다.
이때 옆나라 일본도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메이지 유신...
청나라의 양무운동에 비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근대화 속도가 아주 빠르게 또 성공적으로 흘러갑니다. 저는 이 배후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때부터 근대화 또 냉전시대까지 세계사는 엉뚱하게 흘러가는 그 계기가 됩니다.
조선도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근대화 조약은 바로 강화도 조약입니다. 먼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서구 열강을 등에 옆고 조선에게 강압한 조약이지요. 그 후로 서양의 많은 열강들과 무역을 시작합니다. 치외법권을 획득한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등을 차례로 개항 시킵니다. 조선의 쌀과 금을 싼 값에 취하고, 영국산 면 제품을 비싼 값에 수출하는 그런 대외무역 독점의 계기가 됩니다.
그당시 "별기군" 이라는 일본군이 이끄는 신식군대도 만들어 졌었습니다. 기존에 존재했던 조선의 구식군대에겐 차별적 대우를 하는 등, 1882년 군란을 야기할만한 충분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밀린 월급으로 겨우 받은 쌀에는 모래와 쌀겨가 섞여 있었던 것이지요. 이 군란을 계기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근대화 진행의 개화파와 명성황후 일가 그리고 별기군을 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1882년 임오군란입니다.
점점 대립은 커져만가고 고종은 청나라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간사한 일본은 이것을 계기로 일본 공사관과 별기군이 다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조선에게 큰 보상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이며, 금전적 보상과 함께 일본 경비병 들일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청나라도 더욱 조선을 간섭하고, 과거 영국이 그랬던것처럼 강압적 항구 개방을 요구합니다. 마침 청은 그당시 프랑스와 청불 전쟁을 하고 있었고 조선에 있던 군대 일부를 철수 시킵니다.
1884년 갑신정변
김옥균 박영호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등으로 이루어진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기로 했으나 그것의 무산으로, 1884년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립니다. 급진 개화파 그들은 지금보니 프리메이슨의 손동작을 모두 취하고 있었네요. 이렇게 예전 시절에도... 사실은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문에도, 영국의 권리장전에도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단두대도 그들이 고안해낸 산물이라고 하지요.
이렇듯 시국은 너무나 혼란하고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도 복잡 미묘해진 틈에, 명성황후는 또다시 청나라에게 군대를 요청했고 급진파들은 일본의 배신을 맞습니다. 이들은 기반이 약하고 결국 제국주의 지원에 의존하는 잘못된 방향 설정으로 끝내 개혁을 실패하거나 일본 제국주의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슬프게도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그당시 일본과 청나라를 조정하는 배후는 바로 프리메이슨... 순진한 개혁파로 하여금 정변을 일으키도록 유도했지만, 또 고의로 쿠데타를 실패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다시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복권되어 또 쇄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을 싫어하고 오늘날의 북한을 우린 주적이라지만, 정작 이 모두를 조정하고 끊임없는 대립과 반란을 일으키며, 침략과 전쟁을 부추기는 그 배후 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괴와 학살을 꿈꾸는자들 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이 있었지요. 그것 역시 배후는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세력... 바로 그들입니다. 일본을 등에업고 그들의 상징, 십자군 깃발을 달고 온 것이었습니다. 검정색 제복의 사제들이 뒤를 따랐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신부가 이끄는 그들... 성직자이자 임진왜란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입니다. 바벨론시대부터 전쟁이라면 일가견이 있던 자들이니까요. 무척 역사가 깊죠?
그 후로 청은 국정 간섭을 더욱 강화했고, 일본은 임오군란 때처럼 비슷한 핑계로 돈을 또 요구합니다. 1885년 청과 일본은 이렇게 텐진조약을 맺죠. 청과 일본은 군대 주둔의 문제로, 한나라의 군이 조선에 들어오면 그 나머지 나라의 군도 조선에 주둔하여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그런 제 멋대로의 조약이었습니다.
이렇게 급진적 대 혼란을 겪고있던 조선은 위기의식을 느꼈음에 틀림없죠. 양반, 천민의 계급사회였기에 그들의 부정부패도 여전히 커져만 갔고, 농민들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전라도는 그때도 풍부한 곡창지대로 많은 쌀과 곡물이 재배되는 곳이었죠. 이렇게 힘들고 지칠대로 지친 농민들은 겨우 죽창으로 무장해 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전라도는 항쟁의 도시였었네요. 이것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반봉건 운동입니다.
고종은 또다시 계속되는 이 혼란으로 청의 군대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텐진조약 이후로 청의 군대가 들어오면 또 일본 군대도 자동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였죠. 가여운 농민들은 그들과 싸울 아무런 명분도 특별한 도구도 없었습니다. 곧 정부와 합의를 이루지요. 모두가 선량하니까요...
이 일이 마무리되고 청의 군대는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일본은 조약을 어기며 계속 군대주둔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자꾸만 분쟁과 갈등, 어떤 항쟁등을 유발하는 세력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는게 제 소견입니다. 심지어 일본은 이 농민운동이 끝나지 않았으니 청나라에게 함께 조선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청은 거절하죠. 그러자 일본은 경복궁에 기습작전으로 쳐들어가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토록 강압합니다.
이때도, 진주만 태평양 전쟁때도, 러일 전쟁때도 일본은 참 간사하게도 늘 언제나 기습 공격, 기습 전쟁으로 재미를 본 민족입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은 시작됩니다. 이것이 1894년 청일전쟁입니다. 전쟁을 하는 중에 일본은 조선안의 청 나라의 모든 것을 지우려합니다.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재하려했죠. 그래야 조선을 독점 할테니요.
친일에 의한 1894년 갑오개혁... 물론 계급제 타파, 과거제 폐지, 공사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등 사회적 개혁도 시도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실과 행정을 분리한 입헌군주제의 실시, 양반 신분제 타파, 능력 본위의 평등사회 건설등을 지향한 근대적인 것이었으나, 경제 개혁면에선 부분적인 것에 그쳤고, 또 근본적인 토지개혁의 주장은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의 침략을 더욱 용이하게 한 개혁이된 것이지요. 조선은 일본의 독점 영향권으로 확실히 들어가게 됩니다.
당연히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 메이지유신의 대 성공.. 그동안의 패권국이었던 청나라를 이김으로 일본은 동 아시아 패권을 쥐게 됩니다.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의 많은 것을 약탈해 가죠. 서양 제국주의들이 식민지 쟁탈전에서 해왔던 그 모든 악행과 탈취를 일본이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력이 점점더 커진 일본은 요동반도까지 치고 올라가 드디어 러시아에게도 접근하게 됩니다. 기세등등한 일본의 계획은 만주까지도 빼았으려 했지만, 이를 눈치챈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을 다시 청나라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삼국의 간섭으로 어쩔수없이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해야겠다는 맘을 먹습니다. 더이상 청은 조선에게 힘이 될수 없었고 더욱 악랄해지고 세어진 일본을 견제할 방법을 찾아야 했을 테니까요. 점점 친러화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에 불안함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 이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합니다. 고종 역시 살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에 친러의 힘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맙소사 !!! 너무나 모든 정세가 혼란하기만 했기에.. 1896년 이것을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1년간 경복궁에서 나와있던 시기를 말하죠. 이렇게 친일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친러 세력이 커집니다.
아관파천, 고종이 지나간 뼈 아픈 길...
러시아를 아직 칠수없는 일본은 한발 물러나게 되고, 고종은 다시 돌아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뒤 정부를 새로 재정비합니다. 연호는 광무, 국왕을 황제로 칭하게 되죠. 이 시기의 농업, 상공업의 근대화 정책을 그래서 광무개혁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해야했기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의 힘을 합친 것처럼 영국과 동맹을 맺습니다. 대영제국 영국은 패권1위였죠. 당연히 커다란 영토의 러시아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것이 싫었기에 일본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이렇게 1902년 영일동맹이 이루어집니다.
러시아도 일본도 모두 대한제국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일본은 서서히 러시아에게 전쟁을 치려고 명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1위의 땅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쟁에 유리하기만 했을까요? 정답은 아닙니다. 너무 큰 땅, 먼 거리로 모스크바에서 전장으로 도착하기가 한참 걸린다는거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까지 합니다. 군인들의 물자가 제때 도착되기만 한다면요 승리도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일본의 주 특기는 기습 공격, 또 러시아를 치기에도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군 물자 조달도 편리했겠죠? 1904년 일본은 또 러일전쟁을 쳤습니다. 이때 시베리아 철도는 누구의 방해였는지 모르나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승리가 일본 쪽으로 기우는게 느껴지는 순간이죠.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승리한 그때의 일본 배후가 사뭇 궁금해지는 시점입니다. 러시아는 발트함대까지 동원해 일본을 공격했지만, 일본도 무기의 준비가 무척 철저했기에 그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청일 전쟁때처럼 러일 전쟁때도 역시나 많은 돈과 보상을 원했습니다. 러시아는 우린 전쟁에 진것이 아니라, 내부적 사정으로 잠시 휴전하겠다 했습니다. 이것 역시도 누군가의 전략이었던 것이지요.
러시아도 근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였고 역시나 다를까? 항상 그것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처럼 비폭력 시위, 항쟁등이 계속 일어나 혼란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근대화 되는 과정과 또 반대하는 세력의 분쟁을 계속 부추기는, 그 무언가의 힘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나라도 비슷한 내부적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었구요. 1905년 피의 일요일... 노동자들을 사살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역시 악랄하군요.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도 힘들었습니다. 이렇듯 러시아와 일본은 미국의 중재아래 조약을 맺게되죠. 그중에 대한제국의 지배권에 대한 요구도 들어있었지요. 이것을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부르며 1905년의 일입니다. 이 조약으로 사실상 러시아, 미국은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지배를 허락해준 것입니다. 너무나 슬프네요. 제국주의 식민지화의 힘을 실어준 그 배후는 결국 영일동맹의 영국,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때의 미국과 러시아... 이렇게 요약 할수 있다면요.. 또 러시아, 영국, 미국을 움직인 그 배후세력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요? 한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어쨋든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은 많은 돈, 자원,노동력이 필요했겠죠? 우린 철저히 지배받게 된것입니다. 바로 식민지화가 공식화된 것이지요.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은 조약을 맺었고 우리의 외교권은 박탈 당하게 됩니다. 이토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일본 대사관이 만들어지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혁의 찬성으로 을사조약,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들을 을사오적 이라 칭합니다. 이로써 국권이 강탈되어 이씨 조선왕조 500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고 식민 통치 아래서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을뿐 아니라, 민족사의 일시적 단절을 초래하게 됩니다.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궁궐을 포위, 위협하였죠. 그러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끝까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서명과 옥새 날인도 하지 않았다는것...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므로 그의 승인과 서명날인, 비준은 조약체결의 필수요건이었는데요, 고종이 끝까지 거부하자, 일제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서명 날인한 조약문을 가지고, 마치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공포한 다음 이를 무력으로 강제 집행했습니다. 또 대한제국의 외교관·공사·영사제를 모두 폐지, 이후 일제 통감부가 중심이되어 즉각 고문경찰제도를 실시,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 이완용 내각을 수립해 통감부 밑에 두게됩니다.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고종은 을사5조약을 황제 자신이 승인하거나 서명날인하여 비준하지 않았기에 이 조약 체결은 무효이며, 따라서 일제의 국권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불법이란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특사를 파견합니다.
헤이그 특사파견
이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1907년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 이와 동시에 서둘러 한국을 완전히 빼앗을 목적으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를 통감부에 이양케 합니다. 또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법을,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죠.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로 두기위해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를 폐지,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도 강제로 해산했습니다.
일본은 더욱 대륙 진출을 꿈꾸게 되었고, 만주와 더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국으로의 세력 확장을 시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것의 첫 시작점이 되어줄 조선과 대한제국을 그토록 오랫동안 아프게 침략과 지배를 일삼으며 근대화를 빌미로 식민지화 했던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사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일본 그들만의 힘이었을까요? 더이상 우리 민족은 바보스럽지 맙시다. 제국주의의 식민지화, 냉전시대와 6.25 한국전쟁까지... 그 배경은 그 진짜 배후세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렇듯 훗날, 민족해방운동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그 운동 방향을 놓고 민족 개량주의 노선과,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들 두 세력은 국내에서 신간회 활동을, 국외에서는 항일 운동을 벌이면서 때로는 대립, 때로는 합작하는 형태로 변화 합니다.
미국 독립선언 서명
이미 일본 또 미국은 영국으로 부터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으로 프리메이슨이 장악되어 있었고, 중국은 양무운동 지원을 통해, 러시아는 러일전쟁을 앞세워 그들 전략의 큰 틀이 세워진 것입니다. 세부적인 전술은 조선과 일본의 경제력 격차를 주게하여, 일본을 통한 한반도 병합을 시행했다는 겁니다. 왜 이런 시각의 역사적 관점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것일까요? 작은 섬나라 일본을 그토록 호전적이며 청일, 러일 대승... 대한제국의 몰락, 태평양전쟁, 2차 세계대전 등등.. 계속된 근대화 속에서 식민지 쟁탈전과 세계전쟁을 야기토록한 그것은...
그리고 우린 왜 계속된 쇄국정책을 해야했을까요? 그 배경 역시 그들의 작전 전술이었다면? 병인 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신부님 9명을 죽였고, 탈출한 일부는 중국에 정박해있던 로즈 함대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 제독이 7척의 군함을 끌고 강화도로 오게 됩니다. 공식적인 사과와 교섭을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이 거부했죠. 강화도에서 전투가 있었지만 제독이 퇴거 하면서, 각종 보물, 외규장각 도서등만을 갖고 떠나게되는 사건입니다. 좀 엉뚱하죠? 오히려 그들은 흥선 대원군의 조정 입지를 더욱 크게 해주는 결과를 줍니다. 일부러 살살~ 전쟁 시늉만 한것이지요. 이것이 병인 양요...
어쩜 그들은 늦은 근대화의 이유였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일부러 원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더욱 늦은 개항, 근대화에서 멀어지게하는 이유를 만드는거죠. 대원군은 본이 아니게 그들의 전략군이 된건지도 몰라요.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빠른 개방을 유도했고, 조선이 이를 앞설것을 우려했을수 있다는 설입니다.
1858년 영국,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등 프리메이슨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은 완전히 그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막부 시대를 청산하고 조선은 쇄국, 일본은 개방... 이란 전술을 이루게 되지요. 본격적인 산업화와 근대자본주의 체제로의 진입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민들의 반발로 대원군의 국내입지가 또 어려워지자, 이번엔 나가사키 항의 미국 로저스 함대 5척을 다시 강화도로 보내어 병인양요보다 좀 더 큰 전쟁을 합니다. 5년전 대동강에서 불탔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공식사과를 요구했지만, 또다시 거부하자 살살~ 전쟁 시늉을 합니다. 미국 전사자는 겨우 3명에 그친... 또 이것으로 전쟁에 졌다며 인정하고 철수한 것이 너무나 엉뚱합니다. 대원군은 전국 도처에 영웅처럼 척화비가 세워지고 쇄국정책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줍니다. 모두 의도된 시나리오처럼요... 가여운 조선...
메이지 유신 시절의 사무라이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명치왕부터 영국의 왕실과 교류시키며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가입시켰습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일본의 국기, 일본 화폐에도 미국의1달러 지폐와 같이 그 상징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건국을 시켜주면서 팔레스타인 영토를 줄때도 국기를 별모양으로 쓰도록 조건을 달았었지요.
식민 사관과 독도 분쟁등은 요코하마 프리메이슨에서 치밀하게 전개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역시, 미국을 공격하게한 세력도 (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사실 굉장히 헛점 투성이의 실패를 위한 전투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을 유도하기위한 명분인 것이죠.) 그들입니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미국은 승전국으로... 그들이 운영하는 FRB에선 열심히 전쟁비 조달용 달러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래서 항상 전투나 세계 전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부가 달러 찍으면 FRB에서 채권을 발행하여 계속되는 국가 채무를 지게 하는 패턴인 것입니다.
일왕 히로히토 2차대전 항복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패전국이 된 일본은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을 합니다. 8월15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일본 식민지 국가들도 자동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항복을 하자마자 또다시 기획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었지요. 이미 프랑스 혁명때처럼 러시아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고, 왕정을 무너뜨렸고, 공산주의 국가를 만듦으로 자본주의 미국과 대립구도를 더욱 강화 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공산 혁명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노동자와 농민을 너무 탄압하고 돌보지 않은 나머지 굶주림을 못이겨 일어난 자연 발생적 반 정부 폭동이었고, 그것이 공산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라 알려져있지만,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1814년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할때,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장교들은 일루미나티 사상과 접하게 됩니다. 귀국 후 이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엔 두 개의 프리메이슨이 탄생하게 됩니다.
미.소 이 두 거대 나라를 완벽히 컨트롤하면 모든 것은 그저 쉬울 뿐 일테니까요. 2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군 무기를 모두다 소진 못한 탓에 남아도는 무기들이 넘쳐나고 있었던 겁니다. 또다시 빠른 시간내에 어떠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해야했던 상황인 것이죠.
625 한국전쟁...
한반도에 2가지 전략을 세웠다 합니다.
1) 단계는 한국을 공산화 시켜 영원히 소멸. 2) 단계는 1)이 실패했을 경우의 수, 즉 3.8선을 기점으로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주도하여 전쟁을 일으켜 소멸. 그 작전 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엔 같은 민족 끼리 내전을 하게 만들어 남한을 공산화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바로 이틀 후에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사전에 상당한 준비와 기획이 있었다는 것이겠지요.해방 직후 공산계 프리메이슨인 여운형과 박헌영이 일본 총 독부의 지시에 따라 비밀결사 형태로 움직이다, 해방 직후 바로 남로당을 기반으로 공산화를 하려했다는 그 전략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슬프네요.
여운형 일당은 국민들에게 땅을 꽁짜로 나눠주겠다며 이승만과 김구 중에서 지도자를 삼겠다고 선동하여 폭발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토지를 무상개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준다는 그런 거짓 선동으로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공산계 프리메이슨 여운형의 제의와 그 공산화 의지를 알고 모두 거부 하게됩니다. 공산주의는 절대 안된다고 말이죠... 그리고 미군도 이를 거부하여 결국, 해방 직후 남한을 적화 시키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2단계 계획이 실행된 것입니다. 바로 3.8선 중심으로 북한, 남한.. 소련, 미국의 주둔으로 신탁통치를 하는것 입니다.북쪽은 러시아 군대 대위출신의 김일성 (러시아에서 육성한 프리메이슨 요원이었습니다.)을, 남쪽은 미국에서 육성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게 됩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렇게 좌 우... 두가지 이념, 이원구조를 두어 각각의 대표 세력의 육성을 통한 컨트롤과 필요에 따라서는 서로 전쟁과 같은 대립을 의도적으로 유도케 하는것 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이될 김일성, 아들 김정일
우리는 이 속에서도 자주적 독립국가를 이루기위해 계속 노력했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으나, 당시 국내의 미 군정은 임시정부에게 냉소적이었죠. 귀국인원을 10여 명으로 제한했으며, 임시정부 요인이 아닌 개인자격으로의 귀국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이에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은 1945년 11월 23일이 되어서야 이뤄졌고, 여기에 국내의 혼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내각정책은 계승되지 못하고 해체되게 됩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지도 이념인 자유주의와 삼균주의 ( 정치·경제·교육적 균등 )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되어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 8월15일)의 기초가 됩니다. 9월 9일은 북조선 인민공화국도 수립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3.8선에 의한 이원구조로 한 나라는 두개로 쪼개집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통치 합의로, 비밀 조직의 작전은 수용된 것이지요. 김구 선생의 중경임시정부가 미 군정에 의해 거부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누구를 욕하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이 되는 것일까요? 이승만 뒤엔 미국이, 김일성 뒤엔 소련이... 누가 이것을 막을수 있었겠습니까?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
한달안에 한반도 소멸작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한달이 넘으면,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올 것이기에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되어, 북한이 한달 안에 남한을 접수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지요. 바로 통일 인민정부... 당시 소련군사 고문단인 라주바예프의 6.25 전쟁 보고서에 그대로 나와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만약 실패로 돌아 갔을 시, 장기전으로 들어갈 경우엔 휴전을 취해 다음 기회를 모색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소련은 김일성과 북한군 전력화를 구체적으로 논의했으며, 남침계획을 서로 공유하게 되죠.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지시합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 정부에게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만 무시됩니다.
제주4.3 사태, 여수와 순천에서는 군인들의 반란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북한 남침 전, 남한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기위한... 그간 조선시대때 부터 쭈욱 있어왔던 전략인 것이지요. 민란, 반란, 농민운동 등등 이런것을 주도합니다. 바로 남로당 요원들의 치밀한 기획인거죠. 소련이 북한에서 철수하자 결국 미국도 철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쟁 준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기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남한의 군사력 증강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그런 엉뚱한 논리였던 거죠.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을 내어주듯 미 극동 방위선을 일본, 필리핀 연결선으로 후퇴시킵니다. 이것으로 김일성은 남한을 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얻습니다. 이승만은 항의 했지만 그들은 미국, 소련, 북한을 조정하여 전쟁의 기운을 서서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애치슨 라인. 미국 극동 방위선의 선언.
드디어 전쟁 하루 전,
육군 간부들이 모두 새벽까지 장교구락부 완공 기념파티로 술을 마시고 만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2주전에 전후반 부대 지휘관은 모두 교체되어 지형이나 부대원에 대해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갑자기 전후반 장병 절반을 휴가보낸 사실등 굉장히 의도적인 느낌이 들어나는 부분입니다.
또한 작전 지도도 모두 회수, 포탄과 트럭, 중장비도 수리를 이유로 입고시키고 없었다는 점, 분명 내부 스파이 장교가 있었다고 하죠. 그를 이용한 사전 교란 작전인 겁니다. 이것과 비슷한 패턴은, 태평양전쟁때 일본의 진주만 폭격때도 미군에게 비슷한 상황들이 연출됩니다. 전쟁 하루전 음주가무의 댄스파티를 열어 모두 엄청 취해 있었고, 일부는 휴가를 냈고, 기강이 해이해져 있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 또한 전쟁 중장비등을 수리등의 목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둔다는것, 모두 늦잠자는 주말 이른 새벽에 기습으로 전쟁 친다는 형태... 그들이 주로 써왔던 전략 전술임을 우린 잘 알수 있습니다.
군사력만 비교해도 소련의 지원으로 철저히 준비한 북한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남한은 미약했습니다. 5년이나 준비한 북한과 늘 좌익우익 이념 싸움으로 혼란과 분열이 많은 남한... 이런 상황은 조선 시대때도, 대한 제국때도, 대한 민국때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직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혼란한 당파싸움과 같은 이념갈등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의 흐름과 국제 정세, 그 모든 세력의 배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한 민족끼리 미워하며 원망하며 대립하며 아직까지도 이런 바보같은 휴전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
1950년 6.25일 일요일 새벽, 드디어 남침을 강행합니다. 술에 취해 댄스파티를 즐긴 장교들과 절반의 장병들은 휴가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지상군을 배재한 해군. 공군 위주의의 소극적인 지원만을 맥아더에게 지시합니다. 맥아더 장군도 한국 전쟁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전투중 가장 이해할 수없는 전략과 전술을 계속 지시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미 지상군의 대거투입을 반대하는 것처럼... 특수부대인 스미스부대는 7월1일 부산에 드디어 상륙합니다. 맥아더가 힘을 발휘한 것이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너무 쉽게 수도가 함락되었고 어떻게든 전쟁을 지연시킬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1달을 버티면 유엔군들도 함께 해주기에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한강 철교를 폭파 시키게 됩니다. 또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 다부동 전투로 지연 작전에 몰입하게 되죠. 한강 철교의 폭파로 북한군의 남진 시간을 일 주일이나 지연 시킬수 있었습니다. 미군과 유엔군이 증원될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크 장군, 백선엽 장군의 제1 사단은 북한군 3개의 사단과 싸워 첫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500명이 증원군으로 참여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이로써 낙동강 방어선이 사수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케 됩니다.
프리메이슨의 핵심조직 CFR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IMF와 세계은행, 유엔을 산하 조직으로 두고 있으며, 정치와 금융을 모두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은 바로 이 CFR조직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전쟁이었습니다. " 한국은 미국 방어선(미 극동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 는 미국 국무장관이자 CFR회원이었던 딘 에치슨은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이 의도적 발언은 공산 프리메이슨이었던 김일성에게 전쟁 허가의 신호를 준 계기가 됩니다. 소련의 원조로 6월에 남침을 강행했던 것이지요. 또 유엔 사무처장 진젠코 라는 러시아인 한 사람에 의해, 6.25에 관한 소련과 미국의 모든 정보가 취합되고, 집행되었다는 놀라운 증언이 있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 후 전세가 밀리던 북한은, 소련 스탈린에게 군장비와 소련군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부 당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그 누군가의 전략이지 않았을까요? 마지막으로 합류된 중공군도 정상적 투입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대학살로 세계를 경악 시켰습니다. 처형, 사살, 또 가장 좋은 방법은 2차 세계대전으로 전사 시키는 것... 공산주의 대학살은 중국에서도 일어 납니다.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에게 패한후, 대만으로 탈출을 못하고 본토에 남아있던 옛 장개석 총통의 군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공산 혁명의 저해요소로 인정되어, 바로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군인 20만명을 제거해 버린다는 철저하고 잔인한 계획이었습니다.
소련의 냉혹한 독재자 스탈린의 무자비한 대학살. 그 역시 프리메이슨의 손 동작을 취하고 있었네요.
스탈린과 그를 추종하는 김일성
중국 모택동과 러시아 스탈린
3.8선 휴전 협정이 오늘 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미.소 냉전의 산물, 희생양 바로 한반도... 우린 아직도 195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을 이용해 전쟁같은 식민시기를 겪게했고, 또 북한을 이용해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까지 경험하게 했습니다. 우린 분단 국가입니다. 휴전 상태 그대로의... 그들에 의해 분단되었고, 또 그들에 의해 통일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슬픈 운명이네요. 일본을 통한 식민사관, 중국을 통한 중화사상, 기독교를 통한 종교사관 등등... 뿌리 깊게 내재된 우리 민족의 말살... 너무나 오랫동안 잔인했던것 같습니다.
그들은 늘 2가지 이념을 내세워 갈등을 유도합니다. 바로 그들이 취한 고도의 전술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하나는 남한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세우는 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둘째는 그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세력 (운동권 소위 좌파 세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데모를 많이하는 나라... 바로 70,80년대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김일성 주체사상도, 마인드 컨트롤을 연구하고 실험하며 의식화 기술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영국 혁명,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혁명, 러시아 혁명까지 모두 성공한 사례가 있지요.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의 종결로 25년 간의 냉전 구조가 완화 되었으며, 1990년 9월 12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제2차 세계 대전 전승국들이 ‘대(對) 독일 화해 조약’을 조인하며 독일의 통일을 인정함으로써 냉전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처럼 통합된 군사력이 뒷받침하는 세계 단일정부를 수립하자는 CFR의 목표에 다가서기 위한 또 다른 단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전쟁 터가 되어야 했던 한반도... 베트남 철군을 주장하던 존 F 케네디는 베트남 전이 필요했던 월스트리트 비밀조직 회원들과 불화가 심각해지며 바로 암살 당했다고 하지요. 20세기 최고의 재앙 히틀러는 그 비밀조직과 서구 금융가들이 만든 합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구요.
이젠 좀더 다른 관점에서 더 넓은 시야로 세계사를 바라볼수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저는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2019년 6월 25일 어느 날...
첫댓글 주말부터 이 글을 쓰는내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6월 이기때문에 한번쯤 상기하는 그런것이 아닌, 우리의 역사와 세계사, 국제 정세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좀더 디테일한 상황등의 이해와 지식 고찰이 필요한 시점인것 같아 제 나름대로 여러분께 이글을 올려 드립니다, 분명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아주 특별하고 지혜로운 민족 이었기에 그 많은 위기 속에서도 잘 버텨내고 왔을 겁니다. 이젠 좀 다른 관점에서의 역사도 바라볼 줄아는 그런 시각으로 다듬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세종이씨님, 감사합니다.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저 삼국시대로 돌아가고 싶어지네여.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근대화와 한국전 같습니다. 국민들이 이글을 모두 읽고 이념분쟁, 대립, 갈등, 좌파-우파 더이상 따지지 않았음 좋겠습니다. 맥아더 장군 참 멋집니다.
@바헤디드구스 3세기 삼국시대 영토보세요 영국 못지않다. 발해도 엄청 컸구~ 우리 후손들이 많이 잘못했네요. 이 글을 통해 많은 깨달음 얻고 갑니다. 보는 내내 저도 마음이 아파서... 같은 한 민족과의 전쟁.. 이런건 인간으로서 절대 해선 안될 악마와 같은 짓이죠. 가장 비극적인 역사같아요. 스탈린 옆에서 아양떠는 김일성 정말밉다.
최고의 명답이시네요. 세종이씨님, 태종 이방원의 후손이시구요. 세계사를 접하는 시각과 고찰이 남다른것 같습니다. 전 국민이 이글을 읽으신다면 좋겠어요. 우리가 왜 식민지를 거쳐 전쟁국으로까지 이어져야 했는지, 아직도 이런 답답한 분단국의 모습으로요. 오늘은 또 마이클 잭슨의 사망일 이기도 합니다. 그도 일루미나티가 희생 시킨 인물이지요. 오늘밤은 이 글과 마잭의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야 할것 같아요. 좋은 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callitpeace 저도 지금 i`ll be there 듣고 있어요. 6.25, 슬프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가엾고 눈물나고.. 우리 대한민국 힘내자. 역사도 이젠 좀 다른 관점으로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함이 옳다.
감사합니다.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를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지키지 못한, 오늘 날의 우리들이 반성 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이념의 분열만이 많았는지... 조장한 그 세력을 이제야 제대로 알것 같네요.
세종 이씨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대단한 글이네요. 애국심을 자극케 하는, 또 신선하고 바람직한 역사적 관점과 그 고찰인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을 만나게 되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대단한 글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혀 눈을 뗄수없게 무척 몰입하며 글을 다 읽었습니다. 한편의 대 서사시, 한편의 세계사 영화, 아주 우량의 대 백과 사전을 정독한 그런 기분이 듭니다. 오싹해지는 느낌마저 들구요. 세계사,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하고 세심한 통찰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세종이씨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무척 몰입해 정독했습니다. 계속 마음이 아파서.. 아무런 영문도 모른체 고생과 희생만을 당하신 우리 선조님들.., 잔인하고 잘못된 근대화 과정, 그리고 그 세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스탈린의 대학살은 정말 세계를 경악케 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프리메이슨 이였구요, 조지워싱턴, 프랭클린, 모짜르트, 몽테스키외 등등... 싸이코패스 최고의 악마는 히틀러 >스탈린
퇴근길에 너무 많은 감동과 깨우침을 주시네요. 최근에 읽은 글중 가장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대단한 역사 학자의 진솔한 대 서사시처럼, 근대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것 같습니다. 이렇게 포인트를 정확히 잡고 메세지를 알려주시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두고 두거 계속 가까이 해야할 메세지 같습니다.
삼국시대, 임진왜란,~ 조선~ 제국주의, 근대화~, 제1차2차 세계대전, 태평양, 한국 전쟁등... 시간 순차적으로 너무 잘 서술해 주셨습니다. 그들에 의해 분단 되었고, 그들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울음이 터져나올것 같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저도 세종이씨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종 이씨님 고맙습니다. 정성을 다한 너무 훌륭한 글 같습니다. 저도 세종 대왕님 존경합니다. 지금 분단된 한반도의 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실망 하실까요?
짝짝짝!!! 큰 깨우침 얻고 갑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어쩜 그들의 전략이었을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너무 소름이 돋았습니다. 갑신정변의 급진 개화파들의 배후도요.. 대단한 통찰력과 한 나라의 중세, 근대화를 지금 만나고 확인하고 다녀온것 같습니다.
격동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한것 같습니다.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의 역사가 또 근대화 되는 과정이 세계사 속에서 너무 많은 학살과 아픔을 동반한 것이기에... 차라리 저 삼국시대가 행복했을것도 같아요. 해방후 공산화 전쟁을 바로 준비했다니 소름돋구요.. 애치슨 라인 원망스럽다.
한국 역사와 근대화 세계사를 진부하지않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보물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슬프기도 또 소름이 돋기도 무척 신선한 역사 고찰의 글인것 같습니다.오늘이 그 날이여서 더 가슴으로 와 닿구요. 프란체스카 여사도 여기서 만나구요~
전쟁 증후가 있었는데도 댄스 파티에 휴가 보내고 중장비도 없고 지도도 없앴고... 군 내부의 스파이 세력이 대단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 전복세력만큼, 어떠한 경우라도 군대는 항상 전투태세를 유지해야하는 것이지요. 국방강화는 곧 국력을 대신 하는것 이기에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전투 태세에 있었다 할지라도 북한한테 모든것이 밀리는 상황, 한국전을 기획한 세력..모두 악마다. 스탈린=김일성=모택동= 모두악마
CFR출신 국무장관 딘 에치슨 그렇게 살지마라. 이미 넌 전쟁 난다는거 다 알고 있었을 듯 한데.. 최고의 꼭두각시, 김일성과 동급의 악마다. 저렇게 생겼었구나.
세종 이씨님 고맙습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소름 돋고 아프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 들만큼 몰입도가 높은 포스트네요. 저렇게도 아픈 조선과 대한제국을 구조해주고 싶다는, 우릴 끊임없이 괴롭혀온 무리 그 모두를 큰 형벌 내려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모든 잘못된 역사의 배경을 바꿔놓고 싶습니다. 그럴수 있다면 꼭 그러고 싶습니다. 태종도 세종도 맘이 아프실듯 합니다.
저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마음이 아파요. 과거의 영광으로 꼭 부흥하길 바랍니다. 삼국 지도 멋집니다. 발해도...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전 국민이 읽어야 할... 더 이상 분열이 없는 세상이 와야합니다.
대단한 글 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야 할 글 같습니다.
역사관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네요. 훌륭합니다.
너무 대단한 글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여러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드는것 같아요.
세종 대왕님을 역사 인물 중 가장 존경합니다. 지금 현 우리 나라 모습을 보신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말씀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