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동역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기도하며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오리다보니 너무 좋아서 인지 할말이 너무 많아서인지 글 이 굉장히 깁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본문:사사기 3장 1절 -11절
루마니아의 목사님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14년이나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쓴 “지하감옥‘ 이라는 책 서문에 독방 생활을 하다가 풀려나는 날 아침의 기분을 써 놓은 이런글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햇수가 너무 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갇혀 있으면서도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아주 깊고도 특이한 황홀경 같은 것 이었습니다“
지하 독방에 갇혀 있었던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통의 시간으로 보낸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은혜와 기쁨을 깨닫는 시간들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우리 믿음의 선배도 고통과 역경의 시간들을 하나님 안에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에 원래 살고 있던 이방족속들을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1장2절, 3장4절) 말씀하시며 모두 쫓아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온전히 순종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방인들과 함께 살게 되고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많은 고초와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그것을 백성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심을 “남겨두신 열국(2절), 남겨두신 열국으로”(4절)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몰아내지 못해서 열국들이 남게 된 것인데 사사기를 기록 한 믿음의 선배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무슨 의미입니까 비록 이스라엘이 좇아내지 못했기에 그 열국들로부터 노예처럼 살아야했고 온갖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그 고생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하남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셔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존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지나고 보니 ‘남겨진 열국’들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우리 믿음의 선배는 자기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열국들을 남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는 그 고통이 정말 싫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 그 고난이 죽도록 싫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고난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내게 만약 “남겨둔 열국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하나님을 떠났을 것이며 하나님 없는 자행자지 하는 삶을 살아갔지 않겠습니까? 남겨진 열국들이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남겨진 열국 ”때문에 힘들어 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한 방법입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는 나를 만 드는 연기된 축복입니다.
왜 고초와 괴로움을 당해야 했는지 그 남겨진 열국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통해 살펴봅시다 (5절)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사이에 거하여” 라는 말을 유심히 봅시다.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사이에 거해서는 안 됩니다. 거할 곳이 따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사이에, 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문화 사이, 물질, 명예 사이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더욱이 세상적인 생각 사이에 거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1편1절)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과 말씀 사이에 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시1:2)
우리는 지금 무엇 사이에 거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디사이에 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열국사이에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 거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집니까? 6절을 보십시다. “그들의 딸을 취하여....자기의 딸들을 .... 그들의 신을 섬겼더라. 완전히 혼합이 된 것이지요,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요즘 ”연합“과 ”혼합“이라는 말을 혼동하여 같은 뜻으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연합과 혼합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다릅니다. 하기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세상을 구원하가 위해서는 세상 속에 들어가야 하며 그러기위해서는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혼합을 연합으로 빙자하여 합리화를 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신 손자병법을 들먹이며 세상과 혼합되어 살면서도 연합을 위한 것임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책임져야하는 것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이에 거하여(열국사이에) 그들과 동화되는 혼합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혼합되어버린다면 이미 세상을 구원할 힘은 상실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상식인 물고기가 바다 속에서 살아 있을 때는 절대로 짠물이 물고기 살에 베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짠 바닷물이 물고기 살에 스며듭니다.
세상에 거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 했다는 것 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정체성이 없는데 어디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나오고, 죽은 사람이 세상을 책임질 능력이 있겠습니까? 몸은 열국과 함께 있어도 내 마음 중심만 하나님께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수련회에 가서 은혜 많이 받았고, 화요모임, 목요찬양을 다니고 있으니 되었다고요, 천만에요 우리는 그렇게 자신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내 자신을 너무 믿지 마세요. 내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동성애자들이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말씀대로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기도원에서 혼자만 산다면 몰라도 라고 반문하십니까? 그래도 나 정도로 살면 괜찮게 사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하며 상대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남들은 온갖 짓들을 해도 괜찮고 누가 욕하지 않는데 하면서 그것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며 상쇄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2:24-24) 인간은 정해진 자유 안에 살아야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제한된 자유를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한된 자유 안의 자유를 자유 하면서도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뭡니까? 거룩과 순결입니다. 내가 거룩과 순결한 삶을 살면 내 행동에서 힘이 나옵니다. 내 말에 능력이 있게 됩니다.
열국들 사아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7절에서 말씀합니다. 남겨진 열국들 사이에 거한 당연한 결과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계실 리 없습니다. 진노 하셨고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정복자의 손에 넘어가게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가만 계셨다면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 입니다. 하나님이 외면 하셨다면 그들은 이미 유기된 자들이라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내가 범죄 했음에도 하나님이 그냥 계신다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에도 별일 없다고 하나님도 내 상황을 이해 하셨을 거야 하는 주관적인 착각으로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침묵을 종이호랑이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이미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버려진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내가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서기를 인내하고 계십니다. 결코 가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첨단을 걷고 있는 우리나라, 이 죄의 관영함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침묵이 더 큰 메시지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선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의의 베옷 입고 올리는 중보기도 때문에 인내하고 계시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린 모양 입니다. 9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부르짖음 앞에 외면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간구를 결코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 나의 탄원을 들으시고 반드시 구원자를 세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특심함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를 세워 주십니까? ’그나스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입니다 그분이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보지 못할까봐 십자가 위에 세워져 계셨습니다. 그것도 내려오게 되면 내가 못 볼까봐 못 박혀 피와 땀을 다 쏟으시면서도 아픔을 인내하며 세워져 계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그곳에 마냥 계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우린 구원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세워지고 계십니까? 쾌락에 세워지고 무관심에 세워지고 물질에 세워지고 내 욕망위에 세워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져야 할 차례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장12절) 골고다란 말의 뜻은 해골이라는 의미 입니다. 곧 죽음이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죄로 죽었고 음란으로 죽었고 부정과 부패로 죽었습니다. 거짓으로 죽어있고 속임수로 죽어있습니다. 자살을 부추키는 악한 영에 의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골고다가 되어 있는데 그곳에 세워져 있을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십자가위에 세워져 있을 하나님의 아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 곳에 세워져야 할 차례가 아니겠습니까? 왜냐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워질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고요? 그럼 지금부터 준비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책임질 자로 세우시길 원하시면서 그냥 세워지기를 방관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푸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이기니라. 여호와의 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사야 61:1-2, 눅 4:18-19, 행 2:17-18)
이 약속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약속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옵소서 주님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하셔서 세상을 구원 할 자로 세워지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주의 동역자들이 되길 주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목사님...글을 남기셨네요...매번 메신저올 때마다 제가 바빠서 제대로 얘기 못해 늘 죄송합니다.
오늘 대화 유익했구요...앞으로 자주 글 좀 올리세요~
^--^* 목사님께서 나눠주시는 글에 늘 새힘을 얻습니다~!! 거기서 건강히 잘 계시는지.. 여긴 이제 봄입니다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 그립습니다.
목사님 뵙고 싶네요 제게 주어진 환경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 건강하세요 ^^
목사님 잘 지내시고 계시니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화이팅!!
으아~~ 목사님.. 다시금.. 저를 다그치시는 말씀.. 감사감사.. 요즘 정말 타협해가며 살아가고 있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