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집게
김정수
내가 잡기 전에 세탁기가 먼저
옷의 구석구석을 염탐하고 탐문한다
주머니 속의 종이와 동전과
구겨진 통증은 사전에 알뜰히 제거된다
옷은 팔과 팔, 다리와 다리를 맞대고
부여잡고 거세게 저항해 보지만 통째로
옷을 돌려 현기증을 유발하는 세탁기의
폭거에 결국 사지를 축 늘어뜨린다
사라진 머리를 찾느라 약간의 털이 뭉친다
한데 엉긴 털과 먼지가 한쪽에 모인다
요즘 세탁기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조용한 소음이 세탁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벽을 넘지 않는 독서의 막간으로 숨을 죽여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소리 없이 세상은 돌고 돌아
욕조 옆으로 흐린 물이 흐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햇볕을 헐거운 손아귀에 잡아두는 일
나는 뜨거워진 손으로 젖은 그늘을 부여잡고
어둠 속에서 쏙쏙 빠진 얼룩을
투명하게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쥐고 있는 내 어깨 위가 가장 늦게 마른다
느린 골목
늦은 산책을 하는데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앞서 걸어갔습니다.
한쪽으로 심하게 기운 걸음으로
손에 손을 의지해 중심을 기울이고
한 손에 약봉지를 꽉 그러쥐고
골목에 떨어진 능소화를 피해 걷는데
생을 놓친 꽃들의 황홀에
뎅강, 목이 잘린 골목이 발아래 뒹굴었습니다.
태양의 그늘도 추월할 수 없는 생의 속도
식후 30분, 한 회씩 분할된 목숨은 흔들림 없고
평생이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한 위험인가요.
마주 잡은 노부부의 손을
섣불리
지나칠 수 없어
더 느린 보폭으로 길의 주름 늘려가는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좁은 골목이 통째 느려져
다시 출발선에 선 듯 느른하여
뒷모습만으로도
앞모습이 화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