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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6-1364)선생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 』 古記云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紀元前37年)
※ 二世 檀君 扶婁 在位五十八年 ※ 三世檀君 嘉勒 在位四十五年
※ 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 六世 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이암(李嵒,1297~1364)은 고성 이씨 9세 손으로 증조부 이진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 학사 진현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는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한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전수 받은 손자가 바로 행촌 이암선생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니산 보제사에 들어가 학동 초당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하였다. 이암은 1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경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관리하는 비서성의 교감에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원나라가 원래 송나라에서 비장하던 4천 권의 책을 보내왔고, 이암은 비서성의 낭과 주부로 승진하면서 그 모든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렇게 책에 묻혀 10년을 보내던 중, 충숙왕 10년에 류청신과 오잠 등이 국호 고려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일개 성이 되고자 하는 청원을 원의 조정에 제출하였고, 원으로부터 원나라의 삼한성으로 한다는 칙령이 내려온 것이다. 이에 이암은 고려가 바로 천자의 나라이므로 결코 중국의 여느 제후국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고하며, 고려의 위호를 낮추자는 간악한 무리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청한 것이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이 무렵 고려의 왕권과 국권은 밖으로는 원의 내정 간섭으로, 안으로는 원과 결탁한 간신배의 횡포로 그 위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후 충혜왕이 등극하고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는 난세 속에 이암은 강화도에 귀양을 갔다. 어린 시절에 수학했던 강화도에 죄인의 신분으로 다시 왔을 때 이암의 나이는 36세 였다. 이암은 그곳에서 주역을 연구하고, 천문, 풍수, 지리에 관한 책을 섭렵하였다. 3년 후 유배에서 방면되어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무르게 되는데, 이 때 이암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명과 범장을 만나 한민족사 회복을 위한 사서 집필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은 그곳에서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전수받은 고서적들을 바탕으로 이암은 나중에 환단시대의 道學을 논한 [태백진훈]과 [단군세기]를, 복애거사 범장은 [북부여기]를, 청평거사 이명은 [진역유기]를 썼다.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된 다음 해(1340), 이암은 복직하여 44세의 나이에 도승지와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왕명의 출납을 맡은 추밀원의 중책을 맡으면서 단숨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암은 왕의 총애를 바라지 않고 왕의 정치적 파행을 바로잡는 데 힘을 쏟았다. 그 후 또 한 차례의 유배와 복직을 겪은 후, 공민왕 때에는 철원군에 봉해지고(1352) 서연에서 경서와 예법에 관한 시독을 맡게 되었다. 이암은 다음 해에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여 강원도 청평산으로 들어갔다. 청평산에는 소전거사로부터 비서(秘書)를 같이 전수받은 이명이 살고 있었다. 이암은 은거한 지 5년이 되던 해(1358)에, 개혁정치를 이끌어 나갈 경륜 있는 원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공민왕이 이암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공민왕은 이암을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에 임명하였다. 17세에 급제하여 무려 50년 동안 여섯 임금(26세 충선왕~31세 공민왕)을 모시며 격동의 삶을 살았던 이암은 67세에 관복을 벗고 야인이 되었다. 그 해 2월에 강화도로 들어가 홍행촌에 해운당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홍행촌수(홍행촌의 늙은이)라 불렀다. 이암은 여생을 [단군세기] 완성에 모두 바쳤다. 이암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식을 갖춘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또한 그의 서체가 여말선초의 국서체가 될 정도로 최고의 명필가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라의 안위를 뒷전으로 미루고 사리사욕에 급급하던 권문세가들과 달리, 재물과 권세를 탐하지 않고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켰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지어 고조선 2,096년 역사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서문에서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피력하였고 국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구국의 길임을 토로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참된 삶은 무엇인가하는 인간론의 명제를 명쾌한 필치로 풀어 냈다. 또한 신교의 우주론을 천지인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신교 사상의 정수를 뽑아 신교의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논리 정연한 구조로 정리된 [단군세기]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만고의 명문이다.
※ 十二世 檀君 阿漢 在位五十二年
※ 十七世 檀君 余乙 在位六十八年
※ 二十九世 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 三十八世 檀君 多勿 在位四十五年 ※ 四十七世 檀君 古列加 在位五十八年 ※ 초대단군 왕검 재위93년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熊씨의 왕녀이며 신묘(辛卯,BC.2370)년 5월2일 인시에 밝달나무(檀木)밑에서 태어났다.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14세 되던 갑진(甲辰,BC.2357)년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裨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 하도록 하였다. 무진년(戊辰年 BC.2333) 제요도당(帝堯陶唐)때에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엇다. 이를 단군 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 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BC.2333) 바야흐러 신시(神市)의 다스림이 시작 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며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고조선)이라 이름했다. * 조선: 단재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은 숙신(肅愼)이라 하고 "만주원류고"에서는 숙신의 옛이름은 주신珠申이라 하고 주신은 소속 관경管境을 가리키는 만주 말이라 했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니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닦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사람의 마음도 살 필수 있으리라. 다른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 뜻에 잘 맞출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곳에도 잘 쓰일수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 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 함이니라.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들,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워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 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앗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너희들, 호랑이(虎族)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사랑 할지니라. 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너희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 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 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덮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뿐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하라. 너희는 이로서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五加)의 무리 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때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 하도록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엿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애 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수가 없었다. 제帝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BC2283)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 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년(BC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우司共과 만나게 하엿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 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 하였다. 또 회대淮垈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穴口; 지금의 강화도 * 三郞城 ;경기도 강화군 길삼면에 있는 고성의 이름이 삼랑성이다. 일면 정족산성 鼎足山城 .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은 성이라 한다. 참성단과 함께 단군 유적의 하나이다. * 塹城壇 ;강화도에 제천단祭天壇이 있다. * 塗山 ; 중국 안휘성 懷遠縣을 흐르는 淮河의 동쪽 강변,일명 당도산當塗山. 일설엔 하나라 우왕이 도산씨塗山氏의 여인에게 장가든 장소라고 "오월춘추"는 적고 있다. 사실은 단군의 태자 부루가 하나라 우왕과 만나 물을 다스리고 산을 다스리는법과 오행치수의 이론을 전수시켰다는 이른바 도산의 회맹 會盟으로 널리 알려진 땅이다. 이 땅에 대해서는 중국쪽의 정사에도 하나라 우왕과의 관련사실을 대서 특필하고 있으니 그때 우리 쪽의 문화가 이 회담을 통해 중국쪽에 넘어간 것 같다. * 幽州와 營州 ; 幽營이란 유주와 영주를 뜻하는데, 유주는 요임금의 12주의 하나 이외에도 같은 이름으로 여려곳이 있다. 순舜임금때 기주冀州 동북의 땅을 갈라 유주라 하니 동북 유매의 땅이란 뜻이다. 영주營州는 옛 요임금 12주의 하나. 순임금은 청주靑州 동북의 땅을 갈라 영주라 하였다. 지금의 하북성으로부터 요녕성 및 한반도에 미치는 땅이라고 종래엔 설명 하였으나 이는 큰 잘못이다, 여기 조선은 하북성의 해안에서 요녕성에 걸처서 있는 조선(고조선)을 가리키는 조선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고조선)은 현재의 한반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착각하는데서 오는 잘못이다. *우순虞舜 ;제순유우帝舜有虞를 말한다. 이른바 중국사의오제五帝의 하나이다. 그가 동이족이라고 "맹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였다. "離婁章句 下""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 하시고 명조에서 죽의시니 제풍.부하.명조는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단군의 제후라는 이 기사는 따라서 그다지 놀라운 기사도 아니다. 경자 93년 (BC2241) 단군께서 버들 궁궐에 계셨는데 흙 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檀木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애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기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은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眈浪에가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멀리 퍼져 나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아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15일 단군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 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 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 단군님의 기: 단기檀旗라고 했으니 "기"는 깃발이며 조기弔旗를 뜻한다. ※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원년(辛丑,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품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 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려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 심는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그 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神市)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參佺참전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뿐 마음 과녘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 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마음.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 한배검이시여, 한배검 이시여. 임인2년(BC2239), 단제께서는 少連소련 大連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석 달 동안을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 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 무릇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 소련,대련; 동양고전상에는 단순히 고대인의이름으로만 적히고 "예기"에서는 :少連大連善居喪 "이라고 있을 뿐이다.즉 소련.대련은 상을 잘 치뤘다고 하여 효자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三日不怠 三月懈朞年悲哀 三年憂東夷之子也삼일불태 삼월해기년비애 삼년우동이지자야"라고 주해를 달았으니 우리의 조상임에 틀림없다. 소련,대련은 어쨋던 중국 고전이 말하는 하늘이 낸 효자,곧 (天從之孝천종지효)라고 효의 대표요 상징처럼 취급하는 인물이다.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하는 유교교리에서 볼 때 소련.대련의 효는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계묘(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 까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하엿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10년(庚戌,BC2231)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한였다. 임자12년(BC2229)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 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렸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身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 칠회력: 최초의 달력 * 업주가리: 오늘날 민속으로도 울타리 안에 업주가리 라 하는 볏짚 무더기가 있어 제물을 바치며 치성을 드린다.
※ 3세 단군가륵 재위45년 기해 원년(己亥,BC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神)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九韓)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神)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以神說敎)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天神)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에는 종훈(宗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佺戒)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환(九桓)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 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정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니 곧 붕어하시어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치우는 청구에 우뚝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희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환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眞韓)은 나라안을 진압하고 마한(馬韓)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다가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五訓)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 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 9세 단군 아슬 재위 35년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3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 51년
※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 31세 단군 등올 재위 30년 ※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 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 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 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하늘엔 아침해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 55년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 없이 옥에 갖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 하였다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의 천조후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 행촌 이암이 이글을 쓴 연대가 고려 31대왕 공민왕 12년 서기1,363년이다. 단군 조선은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계해 58년(B.C 238 ) 고열가 단제의 조선 폐관 까지 2,096년간 지속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