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릿고개가 시작된 것이다.
결혼 초부터 한 달에 두 번은 시댁에 가던 습관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주말은 다른 약속 없이 무조건
시댁행이었다. 어쩜, 친정과 가까이 사는 것이 남편에게 미안해 더 자주 방문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댁 방문은 어린아이들에게 자연을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식료품 절약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농사짓고, 텃밭이 넓은 시댁은 고개만 돌려 찾아보면 천지가 먹을거
리이기 때문이다.
미약한 우리 부부가 시댁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일뿐이었다. 남편은 트랙터를 끌고 논으로,
나는 넓은 차양 모자를 쓰고 어머님과 밭으로.
계절마다 할 일은 넘쳐났다. 또, 내가 한 만큼의 먹을거리도 생긴다.
봄에는 녹기 시작한 땅을 뚫고 나오는 냉이 달래 쑥을 캐고, 날이 더 따뜻해지면 마늘을 뽑은 밭에 고추를
다시 심는다.
여름이면 이른 감자를 캐고 심어놓은 고추, 상추, 가지, 오이, 토마토, 옥수수를 딴다.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하는 밭일은 고추와 상추 오이를 반찬삼아 먹는 점심으로 상쇄된다.
밭에 열린 먹거리들은 건강에 좋을지 모르지만, 수확을 위한 여름노동은 참 고되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면 뒷마당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밤. 대추. 떫은 감을 딴다.
고구마도 캐서 잠시 묵혀두면 맛이 배가 된다.
들깨를 베어 처마 밑에 세워 말린 후 마당에 펼쳐 턴다, 콩 역시 그러하다
판매를 위해 재배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 양이 많지는 않아 가족들의 손이면 충분하다.
추석이 다가오면 아버님이 수확하여 주시는 햅쌀 40킬로그램을 차에 싣고 오면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된다. 가을 노동 중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은 그 계절이 저물어 갈 때 수확하는 도라지 캐
기다. 도라지는 캐는 것도 일이지만, 손톱 끝을 물들여 가며 까는 것도 일이다.
겨울이면 동네 전체가 품앗이로 김장을 한다. 주말이면 오전 오후 두 집을 품앗이하는 경우도 있다.
으레 이웃하여 있는 시댁 큰 집과 동시에 하는 것이 일상이다. 한 겨울 식량이 되어줄 김치를 어려운
친정에도 한 통 가져다 줄 요량으로 열심히 속을 싼다.
11월에 하는 이 행사가 끝나면, 따뜻한 거실 한쪽 콩나물시루에서 키워먹는 콩나물에 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3월까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