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5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한
3,16-21)
whoever lives the
truth comes to the light, so that his works may be clearly
seen as done in God.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가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점점 성장하자, 대사제와 사두가이들이 함께 나서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밤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 주고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 백성을 가르친다. 무엇으로도 막거나 제압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이 사도들에게서 드러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어둠 속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사도 5,26). 독서의 이 마지막 한마디가 눈길을 끕니다. 지도층의 태도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당신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11,8 참조). 스테파노도 돌에 맞아 순교했고(사도 7,57-60
참조), 바오로도 돌을 맞았습니다(사도 14,19 참조).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돌에 맞지 않으려고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도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밖에 나와 다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사도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반면, 막강한
공권력과 힘을 가진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반대의 표적이 될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싶었지만 사도들에게
치유받은 병자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바쳐 가면서 지켜야 할 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처신의 이유와 동기는 시기심이었지(사도 5,17 참조)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관계없이, 복음 선포가 나에게 도움이 되건 손해가 되건 상관없이 진리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헤아리는 사람은 이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은
“이것이 안전한 길인가?” 묻지 않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물으면서 행동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바닷가로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태풍이 올라 온 것입니다. 태풍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민박집에 계속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 방파제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로 멋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친 파도의 모습, 특히 그렇게 높은 파도를 처음 봤기 때문에 그 광경이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우와, 멋있다. 아름답다.” 등의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지요. 한참을 이렇게 감탄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제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봐, 이렇게
파도가 높으면 해일이 올 수도 있어. 위험하니까 얼른 방파제에서 나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해일의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해졌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저는 수영도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방파제를 빠져나왔지요. 아름답고 멋있는 광경이 얼른 피해야 할 무서운 광경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떤 상태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참 많지만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변하는 순간, 부정적인 생각으로 큰
실망을 접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시적인 위로와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쫓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참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영원히 아름다운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당신을 쫓기를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상태는 과연 어떠할까요?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주님을 쫓는 우리들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변함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만 주님을 찾는 것으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께 신뢰를
두고 충실하게 살아가야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심판 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긴 심판이란 명료하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만을 믿고
있음이 명료하다면 굳이 심판받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심판 없이 즉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까요?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세속적 죄를 범하게 된다면 또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자주 죄를 짓는다면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심판 받지 않는
믿는 사람’은 단순히 믿는다고 입으로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 그래서 생활 안에서도 온전히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다시금 마음먹어야 할 것입니다. 심판 받지 않고 그토록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라도요…….
자신의 일은
미워하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라(성 아우구스티노).
약자를 떠미는
사람과는(‘좋은생각’ 중에서)
한 청년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청혼을 하기 위해 그녀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더니 집사가 나와 말하길, 아가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일에 놀란 청년은 왜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지 편지로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답장했다.
“나는 오늘 당신을
기다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우리 집을 향해 바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런데 당신은 얼마나 급했던지 마주 오던
걸인 여자를 떠밀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겠습니까?”
영국의 작가 찰스
햄이 겪은 일이다. 이후 찰스 램은 빈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랑은 놓쳤지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배웠다.
약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연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약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한없는 약자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관심을 끊어버리신다면
어떨까요?
나 역시 약자이기에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감히 선물 받기에
너무 벅찰 뿐
-이기정신부-
남녀가 사랑을
고백할 때는 신중을 기하며 참 강한 표현을 하더군요. 사랑의 이벤트로 한쪽 무릎 꿇고 금이나 다이아 반지를 전해주지요. 그 반지를 아주 소중히
늘 간직하고 행복을 확인하면서 기뻐합니다.
하느님도 사랑의
이벤트로 구세주 예수님을 인간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보석과 비교도 안 되는 자신의 속을 그대로 말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우리
인간으로선 감히 선물 받기에 너무 벅찰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반영억신부-
저는
사제 수품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할 성경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재능보다
태도 >
-전삼용신부-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각지의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통된 특징을 조사했고 또 장래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재목들을 미리 찾아다니며 과연 정말로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지도 조사했습니다.
연구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워크는 마침내 4가지 성공 요인을
찾아내었습니다.
첫째는
지능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높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이었습니다.
타고난 지능이
있더라도 지식의 습득을 게을리 하는 삶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기술이었습니다.
지식을 올바로
응용할 수 있어야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올바른
태도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아무리
앞의 3가지 요인이
타고났더라도 태도가 엉망인 사람들은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성공했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요인이
평균 이하더라도 태도만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워크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성공은 90%
이상 태도가 영향을
끼친다고 발표했습니다.
[출처:
김장환 큐티
365,
나침반
출판사]
신앙도 마찬가지고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이 뛰어나
감동적인 설교로 잠시 신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있어도 그 복음선포자의 삶의 태도가 밑받침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런 강의는 결국 허무함만을
남깁니다.
제가 복음화국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방법들만을 찾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을 쓰고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스템과 교육을 개발하고 적용하면 복음화가 잘 진행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쇄신해가야 하는 요구가 더 절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들을 천사가 구해줍니다.
그리고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성전은 그들을
가두었던 이들이 손만 뻗으면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보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잡히면
다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전혀
머리를 쓰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시간동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복음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복음선포
내용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선포 하는 이들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박해받고 미움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고통을
피하게 해 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선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베드로처럼 다시 돌아가 순교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완전한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때가 차자
모두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악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활시켜 주신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해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죽음을
회피하려고 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피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피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원하면 그리스도처럼 당당히 그 죽음을 향해 가야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을 팔아넘기려는
가리옷 유다에게 당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시간과 능력과 기적까지 갖추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바치려는 자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피하셨다면 세상에 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천사를 보내신
이유는 필요한 때면 당신께서 구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먼지로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복음 선포자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 뜻에
끝까지 순종할 수 있는 선포자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복음의 선포
기술이나 능력,
방법들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갖추었는지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양승국신부-
한
며칠 화사한 꽃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달콤한 봄비가 내립니다. 온천지가 완연한 봄기운으로 기지개를 활짝 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젠 예전같이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훈훈하고 따뜻한 봄바람입니다.
꽃비도
맞고 봄비도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비가 되어 내리는구나! 세상 방방곡곡 그 어떤 지역,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골고루 풍성하게 내리는구나!”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니코데모의
내면에는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주님 체험이 부족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한 하느님 자비 체험, 골수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온 몸으로 느꼈던 절절한 은총 체험이 니코데모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이성으로만 자꾸 이해하려하니 이런 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에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복음 3장
8절)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장 9절)
참으로
묘한 것이 바람입니다. 물론 기압골이나 대기상태, 지형이나 태풍의 영향에 따라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이 바람입니다. 느낌은 있으나 절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백번 깨어나도 성령의 그 감미로운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묘하고 신비스런 성령의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때로 뜨겁게,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하느님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임하십니다. 그 결과 육으로만 살아가던 한 인간 안에 참된 내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고스란히 한
인간 안에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 안에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1장 19~20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간 측의 신앙 고백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육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질과 육체의
쾌락만을 최고로 여기고 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조건적인 하느님 사랑, 대가 없는 예수님 사랑, 거저 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의
중요성을 설파해야 되는 신앙인의 삶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사라져버린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확신 갖고 믿음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우리들 삶의 원리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부활은 당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우리 각자를 향한 강렬한 초대입니다. 새 인생을 출발하자는 초대, 영적인 삶, 위로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보자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도움을 주고
있는 ‘복음화
학교’가 새로이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가톨릭 회관
5층에 새로이
강의실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일반
건물에서 세를 얻어서 지냈습니다.
올해는 복음화
학교가 시작된 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명동의 가톨릭 회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복음화 학교가 더 많은 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단체가 25년을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단계의 과정을
마치려면 1년
6개월가량 매주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분들이 만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도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지난
3월 한국의
주교님들께서 교황님을 방문하였을 때,
교황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죽음 위에 세워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장은 모두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하는
기도가 적어지고 있으며,
다른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신앙이 삶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복음화 학교는
신앙은 실천이며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임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평신도들의
열정을 존중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의 권위와
독선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자들은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사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을 충실하게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서
성사를 집전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직책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평신도들이 25년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을 격려하셨고,
치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복음화 학교가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을 본받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더욱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빛과
어둠의 싸움
-주님의
전사(戰士)-
-이수철신부-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적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삶이
영적전쟁입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 요약되는 영적전쟁입니다.
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영적전쟁중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하여
끝기도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는 마치 하루의 전쟁이 끝난 듯 해방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빛과
어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리의 내면이요 사회현실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빛과 어둠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읽은 기사도 어둠의 현실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실감있게 와 닿았습니다.
'제5회
세계군축의 날을 맞아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이 "우리 세금을 무기 대신 복지에"라며 군사비 축소를 요구했다.
이들은
1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예산낭비성
무기와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 4대를 사는 8800억원의 예산이면
국공립
어린이집을 1400개나 지을 수 있고,
국제법으로
금지된 무차별 살상 무기인 확산탄(집속탄),
차기다연장
로켓 시스템을 포기하면 그 3조 3415억 원의 예산으로
경상남도
학생들에게 30년간 무상급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5년
한국의 군사비는 37조 4500억으로 정부 예산의 14.5%이다.
군사비
액수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다.
반면에
2014년 한국의 GDP대비 사회복지비 비중은 OECD28개 나라중 꼴찌다.‘
이것이
우리 무지와 어둠의 현실입니다.
사회
곳곳에 어둠의 현실은 빛을 압도하는 느낌도 듭니다.
어둠을
이기고 빛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절망을 이기고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과연
나는 빛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의 전사'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주님은
빛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평생 도반(道伴)이자 전우(戰友)인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하나될수록 우리 역시 주님의 빛으로,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빛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어둠입니다.
어둠이
빛을, 죽음이 생명을, 거짓이 진리를, 불신이 믿음을, 미움이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궁극엔
빛의 승리, 생명의 승리, 진리의 승리,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부활로 이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의미하는바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사도행전은 빛과 어둠의 대결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들이
빛에 속해 있다면 대사제와 동조자들은 어둠의 세력을 대변합니다.
어찌
하느님을 믿는 대사제가 악의 어둠에 속해 있을 수 있는지 신비입니다.
누구나
무지(無知)에 눈멀 때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봅니다.
다음
장면이 빛과 어둠의 대결을, 궁극엔 빛의 승리, 주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 공영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 성전에 들어가 가르쳤다.‘
그대로
주님의 승리, 빛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어둠의 세력이 강하다 해도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전사들끼리 형성되는 전우애(戰友愛)입니다.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미사에 참석한 이들 중
아는
수도자들을 만났을 때 마치 전쟁터에서 만난듯 반가웠다는 한 수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영적전우애의 체험인 것이지요.
제가
때때로 특별한 카톡의 사진을 나누는 것도
영적전쟁중인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순수한 목적 하나입니다.
어제도
벗꽃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의 사진이 아름다워 많은 형제자매들과 나눴습니다.
"활짝
핀 벗꽃 파스카 축제예요. 예수님 아우가 오셨어요. 넘 좋아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늘 선물이 되어 주시네요.“
"와,
신부님, 감사합니다. 제게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진을
보니 마음이 힐링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감사의 응답이었습니다.
하여
면담성사때도 위로와 격려로 주님의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데 온 힘을 쏟게 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힘겹게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주님의 도반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전우애를 두터이 해 주시고,
당신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20) -오상선신부-
세상의 많은
범죄는 주로 밤에
일어납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요 재충전의
시간인데 밤은 악이 활동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밤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지만 왜 진실이 밝히
드러날 수 없는 걸까요? 악을 저지른 어둠의
자식들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어둠의 세력에
동조하여 진실을 그냥
묻어버리자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더이상 어두운 무덤
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요즘 날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빛이 나기를
빕니다. 그 빛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어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길 소망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지요? 빛의 자녀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절절한 사랑
-기경호신부-
누구든 고귀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어떤 이는 늘 부족함이 없고, 또 어떤 이는 늘 목마름 속에 살아가는 것일까? 그 간극에 우리의 냉정함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어주고 나누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행위에 ‘충분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3,16)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사건, 피조물 곧,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접하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폭이
넓다.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한없는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극에 달했다. 곧,
‘외아들’이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장 귀한 것,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씨앗을 말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은 당신 전부를 남김없이
이렇게 건네주셨다.
16절에서 사용된
‘사랑하시어’와 ‘내주셨으니’는 모두 과거형이다. 곧, 이는 육화와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3,16) 하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시려는 그분의
절절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분사형의 ‘믿는’이라는 동사는 신앙의 계속성을 말해준다. 곧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항구하게 믿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3,18). 사랑은 사랑이신 분을 향한 결단이요,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 없이는 자신을 올바로 알 수도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모두를,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보고 싶은 사람과 보기 싫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구별 없이 사랑하여야 한다.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항상.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한없이. 어디서 사랑할
것인가? 어디에서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통째로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귀감이며 창조적 원형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베들레헴에서 골고타 산상에 이르는 절절한 사랑. 그 사랑은 ‘생명 전부를’ ‘무조건’
‘끝까지’ ‘인간의 죄나 처지에 관계없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보편적,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 삶의 방식이자
존재 이유요 삶의 방향이요 목적이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남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맡기는
사랑’이며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절망적인 순간에도 허탈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마치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져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갔듯이 쓸쓸한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 전부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한상우신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꽃으로
피어나는 생명은
결코 누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약한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을 가능케 하는
건 생명의
참빛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나를 받아들이기에 너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모두를 살게합니다.
삶을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삶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속에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삶은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알게되는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하느님을 믿는 것에서
시작되며 믿음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주님의 빛
속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외아들을
믿는
믿음은 심판이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생명은
생명
속에서 믿음을
향하기에 지금
이순간도 생명으로 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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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