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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내가 행한 일은 믿으라 하심
요 10:34-42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 10:34-42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도 ㄱ) `내가 너희에게 신이라' 하였다.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한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버지께서 구별하여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하느냐? (ㄱ. 시118:25-26) 37)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라. 38) 그러나 내가 행하거든 나는 믿지 못하더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들은 또다시 예수를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피하신 뒤 40) 요단강 건너 요한이 처음에 침례주던 곳 가까이 가서 거기에 머무르셨다. 41)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와 `요한은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이분에 대해서 한 말은 모두 참말이었다.' 하고 서로 말하였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하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지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곳으로 가십니다.
신이라 하였노라(34-38)예수께서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시 82:6). '너희는 신들이며'라는 말은 '재판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시 82:1).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신들은 재판을 위해 임명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공정한 심판을 행하지 않았고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만일 시편 82편에 나오는 자들이 신들이라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보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스테일렌'입니다. 이 단어는 분명한 공식적 임무를 맡기거나 권위를 주어 보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받은 분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를 거부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39-42)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잡으려 합니다. 그들은 이미 돌로 치려할 정도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십니다. 공생애 초기에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은 곳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렸던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중요한 결단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겁니다. 결코 유대인들을 무서워했거나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 것과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에 비해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예수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성이 그 땅 가운데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적용: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처음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힘드십니까? 당신의 첫 세례를 기억하십시오. 첫 사랑의 자리를 기억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삶의 요소들은 바뀌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이것들과 우리의 관계다.’-몰리 바스. 재능과 상처가 무엇이건, 삶의 상황이 어떻건 삶의 핵심 문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누구도 대신 열어줄 수 없는 회피하고 싶은 내면의 문이 있다. 가치 있는 일들로 몇 년 동안 주의를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용기를 내 우리 앞에 놓인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떤 문턱도 넘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신념과 영적인 진리가 대립될 때가 있습니다. 율법을 맹신하고 진리인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 과오를 범한 유대인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영생을 허락해 주신 주를 믿는 자의 참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신앙의 걸림돌
요 10:30-42 / 임덕순 목사
대형 수해가 나거나 온 국민이 누군가를 도울 일이 생기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모금운동을 하는데, 그때 사람들은 TV가 생중계하는 현장으로 봉투를 들고 줄을 서서 기부금을 넣습니다. 그리고 신문마다 1면에 어느 회사 사장은 몇 억을 하고 어느 단체 대표는 몇 억을 기부했다고 액수에 따라 활자를 달리하면서 보도를 해줍니다. 구호물품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도 구제물건을 쌓아놓고 현수막을 걸고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과 얼굴 내는 보람에 착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다 선한 일을 하고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 일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하는 구제와 봉사 전체보다 교회들이 모르게 하는 구제와 봉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교회만 선교를 위해서 해마다 많은 비용을 사용하지만, 우리교회는 신문에 한줄 낸 적이 없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는 작은 일을 하고도 큰 칭찬과 격려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름 없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 없는 천사” 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신 뒤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는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드러내지만, 주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는,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고, 나는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룰 뿐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는 그가 행하신 위대한 일 보다는 자기가 누구이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더 적극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가 행하는 능력이 그 증거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중에 어떤 일이 문제가 되어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은 네가 행한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다. 네가 사람이면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신봉하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신적권위를 부여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온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신성모독이 된단 말이냐, 내가 만약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를 믿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를 믿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선한 일을 했습니다. 마6장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검정을 바르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도 네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그들의 좋지 않은 관습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주목받는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활용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하셨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누가 착한 일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좋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이 내게 이런 능력을 주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선을 넘었습니다. “내가 한 이 큰 일을 봐라. 내가 창조주 아버지를 닮지 않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나는 똑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안색이 변하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까지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왜 그렇게 발끈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반발하였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이 좋아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서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반쪽 신자들이 오늘 교회안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좋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각지 않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어났고 인정합니다.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이건 정말 신이 도우신거야,”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45년 갑자기 광복을 맞이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온 국민은, 신 불신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만세~” 라고 애국가를 지어 부를 때는, 왜 우리나라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가느냐고 토 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라고 말하면 금방 안색이 변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 거냐고 반발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은혜는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발끈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믿고 있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까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표면적 이유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은 말로만 공경했지 사실은 자기들의 유익과 취향에 따라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도 겉은 성경을 중심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곁에 등장하시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정치나 경제나 종교생활에서 자기들이 주인노릇 해 왔는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간섭과 지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는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느꼈던 감정은 특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문제도 함께 상의해서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계획과 비밀을 아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만의 특별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을 아들에게 모두 전수해 준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보면, “아,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이구나” 하고 금방 알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부자관계는 서로 얼굴 표정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렸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는, 이것이 내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술과 능력을 전수받은 아들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표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면, 이제는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살 수가 없고, 그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일부러 부정한 것입니다.
막12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와 망대를 건설한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이 때가 되어도 주인에게 세를 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하인을 보내어 세를 내라고 하자, 세는 내지 않고 심부름 간 종만 때려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이번에는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존중하리라고 생각했더니, 농부들은 반대로 했습니다. 막12:7절에 보면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들만 없애버리면 이 포도원은 영영 우리의 것이 될 것인데 왜 아들의 말을 듣겠느냐, 아들을 죽여 버리자.”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배척할 것을 미리 비유로 예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우리 마음대로 못사니까 저를 죽여 버리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이것은 2000여년 전에 유대인들에게나 있었던 옛날 이야기일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정도를 인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날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상의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데 계시면서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축복이나 주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 가까이 오셔서 내 삶을 간섭하시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친밀한 부자관계가 되어 매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면, 내 모든 재산과 취미와 인생계획을 그분이 마음대로 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내 인생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믿음의 깊은 데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이유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런 지혜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전수해 주시려고 부르신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복을 주려고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할 것 같은 생각만 들어서 아버지와 가장 친밀한 아들로 살아갈 결심을 못합니다. 매사를 내놓고 아버지와 상의하고 순종할 결심을 못합니다. 그 대신에 세상에서 보고 들은 방식으로 성공해보려고 하니까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고 절망스런 환경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기는 싸우되 세상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주시는 지혜와 기술로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도와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에서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봐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도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좋아하고 자랑도 간증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듣는 순간, 너무 부담스러워합니다. 혹시 내 생각과 계획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대인들처럼 태도가 돌변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보호와 도움만 받기 원했지, 하나님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왕이고 싶은데 왜 남이 나를 간섭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말고도 우리를 얽어매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슬에 매인 채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그것이고, 남들이 내게 한 말들도 우리를 얽어맵니다. 누구는 어떤 사람의 협박에 묶였고, 누구는 어떤 사람의 비난과 저주에 묶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만 하면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그 말이 마음을 묶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생각 없이 쏟아놓은 말 한마디에는 벌벌 떱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자기 욕망이 걸림돌이 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이유없는 반항감정이 걸림돌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점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초라한 인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삶, 그의 온유한 모습, 그의 겸손, 모든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사53:2-3에서 이사야는 예수님은 이런 외모를 가진 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의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예수님을 보고 ‘저렇게 약한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야, 나와 똑같잖아’하며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는 데는 걸림돌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나의 하나님이야’ 라는 생각이 걸림돌이 되어 2000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와 오늘 이 시대에 살며 죄지은 내가 무슨 상관이나 있겠냐고, 그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어떻게 내 죄사함이 되겠느냐고 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을 걸림돌로 삼기도 합니다.
또한 이 시대 교회가 존경스럽지 못한 점도 걸림돌이 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해 주기만 해도 오랜 구습에 찌든 사람들이 이 새로운 삶을 사는 단체에 관심을 가졌고 돌아왔습니다. 구한말에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 하여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구박받던 여자들의 인권도 인정하였고, 축첩도, 노름도 못하게 하고 술 담배도 금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신선한 모임인 교회에 충격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의 단체처럼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한 건물에 몇 개씩 들어서 있는 교회의 종탑을 보면 교회가 영업장소라고 오해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들은 도처에 깔려있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타락한 생활을 욕심껏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 교회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를 시시한 분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바른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외모를 보고서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나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라. 소경인 채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뜨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나면서부터 40년이 넘도록 일어서 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뛰고, 나병환자가 즉석에서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누가 주신 능력이겠느냐?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아니시면 이 놀라운 능력을 누가 전수해 주셨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놀라운 일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둘째 걸림돌 때문입니다.
그 둘째 걸림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동안 내가 주물렀던 내 인생을 주인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이유와 같았습니다.
이 걸림돌에 걸리는 사람들은, 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미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만 사모했지, 하나님이 내 삶 전체를 주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아버지와 상의하자고 하시니,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서 두려워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있나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걸림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지금까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 내 마음대로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래서 순종하는 신앙,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걸림돌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누리며 날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지혜와 방법으로 담대하게 오늘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 김홍도 목사
지난 번 미국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설교 준비하는 중에 오늘의 이 제목을 보고 제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당신 지금까지 말씀 중심의 건전한 목회를 해 왔는데 왜 목회 말년에 이단 소리를 들으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절대로 그 제목으로 설교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지마는,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중에 결코 성경말씀에 이탈된 내용이 아니며 나아가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신이 된다"는 뜻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박태선이나, 자기가 예수라고 하는 문선명이 말하는 의미의 '신'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영접하여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과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잃었던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신의 성품을 가진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이 말씀은 시편 82편 6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만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재판해야 될 재판장들이 불공평한 재판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드러지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작은 신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 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장 14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곧 영원한 생명이 되신 분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어느 집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 호적에 입적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아닌 개를 갖다가 양자를 삼아 호적에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라야 사람의 호적에 올릴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성을 받은 사람, 즉 작은 신이 되어야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의 후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장 22절) 하시며 그룹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다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가 되시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예수님과 같이 신성을 소유한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도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영영 떠나버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신성을 잃어버리고 짐승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영생을 얻고 신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자녀,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1. 거듭나는 것은 작은 신으로 태어나는 것 (요한복음 3장 3-6절)
"거듭난다" 혹은 "중생(重生)한다"는 것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셨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두 번 세 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이 자연 인간으로 모태에서 태어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난 다음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며, 이 말씀은 제일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작은 신으로 태어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신의 성품을 받아 작은 신이 되는 것 (베드로후서 1장 4절)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한 말씀에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은 영어로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우리 인간이 신의 성품을 받아 영생하는 작은 신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신의 성품"(divine nature)을 받아들여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고욤나무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물을 잘 주며 가꾸어도 고욤나무 열매밖에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욤나무 가지를 잘라 내고 감나무를 가져다 접을 붙이면 줄기나 뿌리가 고욤나무라도 감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멸망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수양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그의 피를 흘려 우리에게 생명의 진액을 흘려주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생명과 신성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3.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작은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말씀하자 영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상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예수님만의 아버지, 예수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영생을 얻고 신성을 받아 작은 하나님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작은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이 맏아들이 되심은 우리가 작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곧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예수님과 같게 만드시려는 계획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도 작은 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확인한 다음에 고백한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을 주님과 하나님이 되신다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예수님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므로 독생자께서 맏아들이 되셨다고 하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즉 작은 신들로 만드셔서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사이 어미의 유전자(DNA)를 새끼의 세포에 접합시켜서 어미와 똑같이 양이나 소를 복제하는 기술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인간 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생명자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좌우간 인간도 똑같은 모습의 인간을 복제하는데 하나님께서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셔서 저를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X·DNA를 심령에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작은 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DNA인 X를 접합시키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5. 주의 재림 때 주와 같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작은 신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치 무정란과 병아리가 될 유정란이 겉으로 봐서는 분별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병아리로 부화되는 날, 분명히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라도 아직은 멸망의 자식들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1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받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던 성도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올라가듯이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들림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작은 신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당신도 작은 신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당신은 반드시 작은 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해야 맞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멸망 받을 아담의 후손이 마지막 아담 예수님과 같은 신성을 가졌고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