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00
4월21일[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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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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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YKWDOUKPf4
서울대교구 김경태 마르티노(가락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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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영적인 새로운 현존양식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오늘은 부활 팔부 축제 내 월요일, 엠마오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무고한 죽음으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져 각자 집으로 향하던 두 제자들 사이로 끼어들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빵을 나누고, 삶을 나누었던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현존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신 예수님이셨는데, 그리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철저한 외면과 배신을 당하면서 죽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던지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평안하냐?”
구원자로 오신 자신을 그토록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결국 그토록 험악한 꼴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인간세상을 향해 던진 첫 마디가 “평안하냐?”였습니다.
그분의 어조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간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들 걱정뿐입니다. “평안하냐?”는 한마디 말 안에는 이런 예수님의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그간 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들이 많았느냐? 실망도 많았겠지? 내면의 두려움도 컸겠지? 이제 안심하여라.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다정한 어조로 ‘내 형제들’이라 칭하면서 미리 용서를 베푸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친히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분께서 위기에 처했을 때 외면하고 떠나간 부당한 제자들이었지만, 조금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제자로서 그릇된 행동 앞에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잘못이 하늘을 찌를 듯 크다 하더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의 행동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꿈에 그리던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내면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또 사라지실지 모르는 예수님, 그분이 떠나고 난 뒤 남게 될 허탈감, 실망감이 두려워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꼭 붙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을 잡았겠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 이기적인 욕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를 살리신 예수님, 그래서 목숨 바쳐 사랑했던 예수님을 또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셔야 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좁은 인간관계의 사슬을 끊고 더 많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비상하셔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종전의 현존방식을 탈피하십니다. 그분은 이제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인류를 상대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나만의 예수님, 여인들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 만민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낡은 방식으로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예수님 추종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전처럼 돌아가시거나 사라지시거나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영적인 새로운 현존양식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제든지 다가오시는 사랑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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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6PjPSDnn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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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가 가는 길로 마주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마주 오시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평안하냐?”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마주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인들의 길을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그분께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사들을 보았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라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기뻐 복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아직 기회가 있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가기만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기회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뵈올 기회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렇다면 ‘갈릴래아’란 장소로의 이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단순한 지리적인 장소의 이동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여인들의 상태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두려워서 감히 그분께 다가올 생각도 못하고 미심쩍어하였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반면 여인들은 이미 천사들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보고는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만나면 두려워 도망을 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사해와는 다르게 물을 받아들이면 다시 내보내어 흐르는 호수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가득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부활에 대해 확신하며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이들이었습니다. 이 수준이 되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부활 체험은 하나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합당한 이들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나타나신다면, 잘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상을 주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태를 긍정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많은 분들이 보셨을 영화 ‘기생충’입니다. 이 영화에서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은 부유한 박 사장 집에 차례로 위장 취업합니다. 처음에는 아들 기우가 명문대생으로 속여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딸 기정은 미술 치료사로, 아버지 기택은 운전기사로, 어머니 충숙은 가사도우미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사장 가족은 의심 없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박 사장 가족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사람에 대한 깊은 경계심이나 분별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택 가족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나름의 '호의'와 '보상'(일자리와 신뢰)을 베풉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기택 가족은 이 '쉽게 얻은 상' 앞에서 감사하고 성실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대담하게 거짓을 꾸미고 박 사장 가족을 기만하며 그들의 공간을 잠식해 들어갑니다. 박 사장 가족의 무분별한 신뢰와 호의는 기택 가족의 양심을 일깨우기보다는, 그들의 탐욕과 기생적인 본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겉으로 보이던 평화는 깨지고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선한 의도였을지 모르는 '상'이,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졌을 때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은 비단 현대 사회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 왕과 그의 아들 압살롬의 관계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를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살해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 왕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를 용서하고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진심으로 회개하기는커녕, 아버지의 관용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세력을 키워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성급하고 무분별한 '용서'와 '복권'이라는 상은, 압살롬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죄악과 비극(반역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주어진 과분한 '상'은 때로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상태가 ‘갈릴래아’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다윗의 삶은 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 그는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이 일에 충실하기 위해 배운 돌팔매질은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조금씩 믿음을 성장시켜서 사울의 부하로 있으면서도 충실하여 결국 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나 밧세바와 죄를 지으며 그는 다시 하느님의 총애를 잃습니다. 예언자 나탄을 시켜 하느님은 그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갓 태어난 아들이 죽는 비극, 아들에게 쫓겨나고 쫓기는 비극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죄의 상태에서 바로 용서가 주어졌다면 그는 하느님께 기생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릴래아란 받아들이는 은총에 대한 효과가 발생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만큼 성실히 살며 복음을 전하려는 착한 뜻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하.사.시.를 읽고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신학교에서 성체를 영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은총은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요행을 바라지 말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다면, 열심히 믿음을 키워가고 그 믿음을 전하는 연습을 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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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는 부활 대축일 지나고 나서 ‘엠마오’를 다녀왔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출발이 부활 대축일 다음 월요일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저는 성모님의 발현 성지를 다니면서 성모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느꼈고, 새롭게 본당 온 지 1달 만에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올해에는 수녀님과 부주임 신부님이 엠마오를 다녀올 수 있도록 제가 남기로 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과달루페 성지를 다녀오겠다고 합니다. 문득 ‘엠마오’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엠마오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엠마오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그곳이 엠마오입니다. 비록 제가 어딘가로 떠나지 않더라도, 지금 이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곳이 엠마오입니다.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2017년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형제님입니다. 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형제님의 증상은 조금씩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계단을 오를 정도의 근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근력만 남았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는 근력밖에 없었지만, 형제님의 의지는 강했습니다.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형제님은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말로 조명을 조절하였습니다. 몸도 거의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살아있고, 영혼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의 ‘존엄’도 사라지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새기신 ‘존엄’은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놀라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제 사람의 뇌 속 생각을 읽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손을 움직이고,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 돕는 시대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같은 기술이 이미 사람의 뇌에 칩을 이식해서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 과학의 발전을 어떻게 보실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과학에 사명을 주신다.’ 그 과학이 고통받는 이들의 침묵을 들어주고, 움직일 수 없던 이들의 생각을 세상에 연결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듣지 못하는 이의 귀를 열고, 말문을 여셨습니다.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 기적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칩 하나가, AI 로봇 하나가 한 사람의 ‘침묵’을 ‘말’로 바꾸고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술의 발전 앞에서 무조건 반대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사랑과 존엄의 길로 이끌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칩을 통해 움직일 수 있고, AI 로봇이 손과 발이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손을 통해 실현되는 기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거라.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왜 하필 ‘갈릴래아’일까요? 그곳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든 이를 치유하시고, 마귀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셨던 곳입니다. 고통받는 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셨던 곳, 그분의 사랑이 ‘표징’으로 드러났던 첫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 속에서, 다시 갈릴래아로 가거라." 거기서 다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갈릴래아는 오늘날 고통받는 이의 병상일 수도 있고, 뇌에 칩 하나 심을 희망으로 버티는 이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사랑의 능력, 치유의 힘, 존엄의 회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오늘날, 침묵 속의 환자에게 다가가고, 기술과 인공지능을 통해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갈릴래아의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먼저 가 계신 갈릴래아로. 그리고 거기서 고통의 얼굴 속에 숨어 계신 주님을 다시 만나고, 그리고 그분을 위해, 다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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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놀라운 부활 사건과 이를 둘러싼 서로 다른 두 반응이 나옵니다. 한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기쁨과 믿음의 증언이고, 다른 한쪽은 진리를 왜곡하려는 수석 사제들과 군사들의 음모입니다. 이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묵상하면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28,7)라는 소식을 듣고 기쁘면서도 두렵다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신비이면서 희망과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몸소 나타나시어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위로를 건네실 뿐만 아니라,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28,10)라고 하시며 이제 그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졌음을 알려 주십니다.
반면에 경비병 몇 사람은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습니]다”(28,11).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기보다는 감추려고 군사들에게 돈을 주며 제자들한테서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말하기를 지시합니다. 경비병들은 불의와 부정에 굴복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데 함께합니다.
이 두 장면은 진리와 거짓 사이의 대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세상은 종종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가리려고 거짓을 앞세우지만 그 진리는 주춤하기는 해도 절대로 멈추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의 거짓으로 흔들릴 때가 있겠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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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8,8-15: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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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의 기쁨은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모두의 기쁨입니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8-15)
1) 경비병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에 있었던 실제 논쟁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부활은 안 믿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서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시신을 훔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 주장을 진실이라고 믿을까? 유대인들의 주장은 증명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의 주장은 증명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원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논쟁 자체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2) 이제 신앙인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또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빈 무덤’만 내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답은 하나뿐입니다. ‘삶’입니다. ‘나의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새 생명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답게 현세의 삶보다 내세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나의 삶’이, “부활 신앙은 진리다.” 라고 증언합니다.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어떤 물적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우리는 부활을 살아야 한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은 신앙인의 ‘신앙생활의 목적’이기도 하고,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감화되어서 믿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논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삶입니다. 삶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4) 10절의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라는 지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활동을 시작하셨던 곳으로 가라는 뜻인데,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마음으로, 즉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로 해석되기도 하고,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로도 해석됩니다.
이 말씀을 ‘가난한 이들’에게 가라는 지시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어떤 차별도, 또 역차별도 없어야 합니다.
5) 루카복음을 보면,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는 지시가 있고, 사도들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마태 28,16).” 라는 말이 있고,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고,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1,12).
이렇게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그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세계 각지로 흩어져 가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6) 부활을 믿는다면, 믿는 대로 살아야 하고, 그 ‘믿음의 길’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고, 함께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냥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착하게 살아서, 나 혼자서라도 구원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부활한 다음에 내가 있는 곳에 나 하나밖에 없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 행복,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만 제대로 이루어지고,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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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하나의 길>
마태오 28,8-15 (여자들에게 나타나시다, 경비병들이 매수되다)
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오직 하나의 길>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길이신
당신께서
내시는 길
길이신
당신께서
가시는 길
길이신
당신께서
앞서시는 길
길이신
당신께서
부르시는 길
길이신
당신을
따라가는 길
길이신
당신이
되어가는 길
길이신
당신께서
보내시는 길
길이신
당신보다
앞서가는 길
길이신
당신을
알리러 가는 길
오직
하나의
길이신
당신과
함께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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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자>
어느 어린이집에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에 대한 설명을 하고 발씻김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5살 된 한 어린이가 너무 슬프니까 예수님은 죽어도 수녀님은 죽지 말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려 수녀님도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답니다. 혹 수녀님이 죽으면 그 아이의 상처와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 수녀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코로나19를 핑계삼아 세족례를 생략한 전례를 거행한 곳도 많은데 어린이집에서 만찬예식과 세족례를 했다니 감사합니다.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두려움을 이겨 수 있는 기쁨이 되고,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거짓말이 됩니다. 전해 받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부활은 달라집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 인생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 마음을 울리던 그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징표들을 알아볼 줄 아는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열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분이 주시는 희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하고 걸어가기로 합시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기억은 찬란한 빛이어야 하며 그 빛은 영원한 그 파스카를 향한 우리의 신뢰 어린 발걸음을 인도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출처 :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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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님]
<무덤이 비었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복음서는 빈 무덤으로 예수의 부활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죽은 다음 날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을 살피러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빈 무덤으로 인해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황하고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다. 복음서는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가서 무덤이 빈 것을 알렸을 때에도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달려가서 무덤이 빈 것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곧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만으로 얻을 수 없다. 부활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 사건이다.
빈 무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는 천사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빈 무덤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선포될 수 있다.
"빈 무덤 자체가 부활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믿지 않으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믿는다. 이것은 하느님이 일깨워 주신 깨달음이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부활의 순간에 몸소 옆에 있었다거나 부활의 과정을 눈으로 본 사람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듯이, 또한 아무도 빈 무덤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분께 대한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제자들은 이런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하고 적대들을 반박하며 설득하기 위해 빈 무덤이라는 현상을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다. ......"
예수의 무덤이 역사적으로 비어 있든 비지 않았든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분의 새로운 생명에 대한 믿음을 좌우할 수는 없다.
부활사건은 빈 무덤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활 신앙의 근본은 '빈 무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빈 무덤을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만나라고 외치는 것이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5절)
성서에서 무덤 이야기는 중심에는 무덤이 비었다는 것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신앙고백적 선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예수는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다.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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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마지막 사건들을 보여 줍니다. 마태오 복음 28장 16절에서 시작될 마지막 이야기의 배경은 갈릴래아입니다. ‘소식을 전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아팡겔로’는 세 번 사용되어(28,8.10.11 참조) 오늘 복음을 연결시켜 줍니다.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의 복음은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던 두 무리, 곧 여인들과 경비병들을 대조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된 듯합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로 이룬 승리와 희망의 소식을 전하러 제자들에게 달려갔지만,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에게 실패와 절망의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수석 사제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주장할 것을 우려하였고(27,64 참조), 이 우려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제자들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의도했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꾸밀 때 손실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비병들을 돈으로 매수하기에 이릅니다. 수석 사제들의 지시를 받아 무덤을 지키고, 그들에게 보고를 하며 뇌물도 받은 사실은 그 경비병들이 수석 사제 아래 속한 성전 경비병임을 알려 줍니다.(27,65 참조)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을 설명하는 징표가 될 수 있다면, 반대로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세상 속에서 떠도는 의미 없는 소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을 마무리하면서 후자의 가능성, 곧 현재를 향한 부정적 전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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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 곳곳이 전쟁 중입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팔레스티나, 그리고 크고 작은 분쟁으로 많은 희생자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안다면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외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명의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고 진정한 정의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평화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종교는 두려움이나 분열을 가르치지 않고 화합과 일치 그리고 관용을 가르칩니다. 특히 두려움을 조장하는 종교 그리고 그런 사람은 사랑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은 관계를 마비시키고 서로 간의 신뢰를 위협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원수까지 사랑하면서 폭력의 근원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두려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순히 국가 간의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힘으로 억압하고 또 일치를 방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말만 옳다면서 남의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예수님께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고 그때 평화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다양한 부류를 오늘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여자들이 있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경비병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은폐하려는 수석 사제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여자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갈망하던 여자들에게만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에 반해 경비병과 수석 사제들은 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라고 거짓말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힘으로 경비병을 매수했고, 그리고 경비병들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따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거짓과 욕심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통해 진리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며, 주님을 만나 큰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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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덕현 야고보 신부님]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출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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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과 제자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갈릴래아는 만남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육적인 눈으로 그분을 만났지만 부활 이후의 갈릴래아는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죽음에서 돌아오신 분을 이제는 영적인 분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호수는 치유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호수 근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배 위에 오르신 모습이 아직 우리 눈에 선합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에는 치유의 은총이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 몸과 마음의 치유를 얻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을 교육하던 장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육하셨습니다. 특히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장면은 백미입니다. 믿음의 힘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갈릴래아 호수로 부르십니다. 시작점이었던 그곳에서 부활을 시작으로 다시 하늘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부르십니다. 또한 함께 식사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죄의식과 두려움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시며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완성하십니다. 주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의 징표가 되신 것입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우리도 갈릴래아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났던 곳으로, 주님을 느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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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좋은 습관)
사람은 누구나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게도 여러 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바꾸고 싶은 나쁜 습관도 있지만 좋은 습관도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습관 중 좋은 것 하나는 이것입니다.
‘생각은 걸으면서 하라.’
생각할 것이 있거나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숙고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저는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면 생각이 숨을 쉬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말입니다. 반대로 앉아서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요지부동’일 때가 많습니다. 긍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흐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걷습니다.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위해서 말입니다.
무언가 막힌 것 같다면…. 답답함이 가슴을 누르고 있다면….걸어보세요. 걸으면서 생각해 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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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마태오 28.9)
빈 무덤을 보고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불안, 부활에 대한 희망과 초조함이 함께 뒤섞인 감정을 안고 달려가던 ‘여자들은’ 길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뜻밖에 만났지만 직관으로 주님을 알아차렸던 ‘여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현존 앞에 압도당하였습니다.
말씀을 민감하게 듣고 공감하는 역량이 풍부한 여성성으로 ‘여자들’은 주님께서 건네신 ‘평안하냐?’는 한마디 말씀을 듣고 온몸과 마음으로 기쁘게 응답하며 서슴지 않고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역량은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그 역량은 우리를 더 깊은 곳에서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 일치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여자들은’ 그 역량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자신과 주님을 길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여정 길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어디를 가든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민감성과 공감하는 여성성의 역량을 되살려야 합니다.
자신의 일에 매몰되어 사는 우리는 서로 듣고 공감하는 역량을 잃어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속삭이는 말씀을 자주 흘려보냅니다.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시어 또다시 건네시는 사랑의 말씀을 우리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거저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개인적으로 마음과 마음의 대화를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두운 무덤에서 나와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평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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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너무나 특별하고 의미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이 어부로 평생을 살아온 고향입니다.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들을 처음 만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물과 바람마저 복종시키시는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 삶의 흔적들과 여러 추억들이 서려있는 그곳으로 예수님은 몸소 당신 제자들을 부르신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그 초대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체포되시는 스승님을 내버려둔 채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부끄러운 과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잔뜩 겁에 질려 그분 곁에 있어드리지 못했던 죄송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기에, 아니 처음부터 당신을 배반한 그들을 괘씸하게 여기시거나 관계를 끊으신 적이 없기에, 여전히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다정하게 부르시며 그들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계시기에, 주눅들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기쁜 마음으로 갈릴래아로 달려가 주님을 만나면 되는 것이지요. 거기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승과 제자라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주님과 함께 일하는 협력자이자 사도라는 수평적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는 않지만, 그분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통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바뀌지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주님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흔적들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각각의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면, 내가 사는 그 자리가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래아’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참된 부활신앙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를 진리라고 믿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삶과 세상을 주관하시는 참된 주님이 되셨음을 믿습니다. 둘째, 그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향해 가는 구원의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보살펴 주심을 믿습니다. 셋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난 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에 얽매이는 삶에서 하느님께 속한 삶으로, 비난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하게 될 부활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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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습니다.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아,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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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그분을 뵙는 일, 이보다 기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신,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고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주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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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삽시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시편 16,1)
12.3 비상계엄으로 인한 4개월 정도의 내란상태가 끝나니 나라가 안정되어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에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동안 불안과 두려움에 지냈고 가짜뉴스도 참 많았습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힘든 세상, 그 분별의 지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참되고 바른 삶을, 즉 진국의 진짜 삶을 살 때에야 가능합니다.
이에 관해 생각나는, 또 어제 읽은 좋은 글귀도 나누고 싶습니다. 참된 삶, 바른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모두가 제가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찬동하는 내용들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의 ”어느 자리에서든 주인이 되어라. 서 있는 곳 모두가 참되다.” 어느 환경, 어느 자리에서든 참사람되어 참되고 바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백제본기에 나오는 한자성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와 조선의 미를 뜻하는 멋진 말마디입니다. 역시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이러할 것입니다.
“Ever Old, Ever New”, 즉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다”는 뜻으로 언제봐도 실증이 나지 않는 매력적인 경우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참되고 바른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이러할 것입니다.
복자 골룸바 마르미옹 아빠스는 “지배하기보다는 유익이 되어라(Mugis prodesse quam praesse)”는 베네딕도 규칙(64,8)을 실천하며, 세계 1차 대전시 수도원을 벨기에의 응접실이라 불릴만큼 수많은 이들의 ‘영적 피난처’로 만들었습니다. 마르미옹은 사제생활 초기부터 시편 한구절을 인생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시편 41,1).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유일한 목표였고, 그가 인도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권고한 목표였습니다.
이번 베네딕도회 오틴리엔 연합회 신임 총재 아빠스로 뽑힌 하비에르 아파르시오 신부의 인터뷰 내용 일부도 소개합니다.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적가치나 실천은 무엇인가요?”
-“여러 소임을 맡아 다양한 장소에서 살아오면서, 저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수도자로서 깊이 배웠습니다. 필요한 곳에 머무는 것, 곧 ‘현존’과 ‘경청’입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기도생활과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시나요?”
-“이 질문은 자주 받습니다. 여행과 책임진 일이 많기에 기도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들 생각하시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분주하기에 저는 고요함과 침묵을 위한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시간이 종종 참된 기도의 순간이 됩니다. 저는 제게 영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이 기도생활을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깁니다.”-
“오랫동안 실천해 오신 기도나 묵상방식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시편139,1), 이 구절을 자주 되뇝니다. 여행중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마주할 때 이 기도는 저를 지탱해 줍니다. 이 기도는 신뢰의 기도이며, 제가 누구인지를 넘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어느 현자의 ‘삶의 지혜’에도 공감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루틴(routine;일상의 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말해요. 평소처럼 밥을 먹는 것, 잘 때 자는 것, 그렇게 루틴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어려운 일상을 견디는 데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구요. 산책도 하고 디져트도 먹고요. 이런 것들이 비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요. 위러한답시고 쓸데없이 길게 얘기 하는 것보다 밥을 먹든, 탁구를 치든, 일상의 루틴을 함께 하는 게 좋다고 봐요.”
“시가 지닌 힘은 무엇일까요?”
-“가장 안전하게 ‘미칠 수’ 있는 형식이 아닐까해요.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 중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시가 가장 경제적인 방식이라고 봅니다.”
영혼의 활력소가 되어 참된 삶, 바른 삶을 살게 하는 좋은 시의 힘이요, 특히 성서의 시편을 능가하는 시들은 없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참된 삶, 바른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소개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문제입니다.
주님의 여제자들은 천사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 소식을 듣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명심할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도 체험도 주도권은 온전히 주님 은총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주 오시면서 여자들에게 “평안하냐?”하신 다음 그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형제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 밖에서 멀리 방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래아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공에 제한되지 않기에 당신을 사랑하여 찾는 누구나의 갈릴래아에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참된 삶, 바른 삶을 사는 이들은 결코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히 쉬오리니,
내 영혼을 지옥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썩도록 당신 성도들 아니 버려두시리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당신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 16,8-11)
이런 시편 묵상 은총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진짜뉴스 주님 부활의 기쁨을 맘껏 누리며 각자 삶의 제자리, 꽃자리 갈릴래아에서, 참된 삶, 바른 삶을, 꽃같은 하루 꽃같은 삶을, 파스카 주님의 꽃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시편16,2).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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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소의 재발견>
어제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 얘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고, 다음에 제자들이 와서 같은 빈 무덤을 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빈 무덤인 것만 확인하고 또 막달라 마리아가 한 말이 사실인 것을 믿지만 무덤에 없는 자기들 스승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오늘 그 예수님을 찾아 나섰고 결국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다 끝난 것이라고 보기에 찾지 않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사랑할 일이 남았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막달라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주님 부활을 목격한 첫 증인이 되는데 주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나 여러분들이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부활 증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라는 것이 아니었고,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언하려면 갈릴래아에서 뭔가를 하고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성소 발견 또는 성소의 재발견, 이것이 아닐까요?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 여기서 나눔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성소의 재발견,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또 우리의 성소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묵상하는 우리입니다.
어제 부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못 드렸네요.
오늘이라도 부활 인사 드립니다. 부활의 기쁨을 늘 간직하고 또 이웃에게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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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ㄴ)
<갈릴래아?>
오늘 복음(마태28,8-1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경비병들이 매수되는 말씀'입니다.
천사가 알려주는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여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달려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경비병은 일어난 이 일을 수석 사제들에게 알리고, 그들은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수석 사제들이 시킨 대로 합니다.
'갈릴래아?'
갈릴래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장소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갈릴래아는 바로 '우리들 삶의 자리'입니다.
내가 머무는 '생활 주변'입니다. '나의 가정, 사무실, 작업대, 운전석, 부엌 싱크대, 시장, 길거리, ...' 입니다. 이곳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갈릴래아'입니다.
그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삶의 자리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외된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기사'(마태25,31-46)에서 '그들이 바로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바로 갈릴래아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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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안하냐?(마태 28, 9)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짙어지는
연두빛의
소중한
봄날입니다.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새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기쁘게 맛보길
바라십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활은
평안을
드러냅니다.
평안은
무너뜨릴 수 없는
일상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실천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맡겨드립니다.
오늘
이 순간이
가장 좋은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일상을
밝히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가장 좋은
행복이십니다.
행복은
부활의
일상 안에
있습니다.
부활의 길은
다시 만나는
일상의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가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소중하고
특별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무조건적인
평안입니다.
더 없는
평안을
축하하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평안을
기쁘게 나누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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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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