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계신 곳 예수의 모범적 기도문은 "하늘에 계시는..."으로 시작한다. '하늘'의 통상적 개념은 '땅'의 대립어이며, 고대인들의 생각에는 땅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고 하늘은 하느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곳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예수도 이 같은 우주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하늘 높은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님'이라는 칭호가 생겨났고 언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ㄹ'이 탈락되고 하느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언급된 '하늘'이라는 명칭은 땅에 대비되는 영역을 언급한 것이지 상징이나 비유로 사용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고대인들의 '신'개념을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하늘 공간 어디에도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늘 개념을 바꾸었다. 그들은 우주가 아닌 영계(靈界)를 가르친다고 둘러댄다. 또는 하늘이 여러 층의 겹으로 이루어져 우리가 직접 쳐다보는 하늘은 sky이며, 더 높은 곳의 우주 공간은 space이며 우주 바깥의 하늘은 heaven이라고 누군가 설명했다. 이 설명은 하늘 어디에도 천사나 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온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그들은 신을 사물, 특히 인간 존재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거하는 장소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우주 외에는 어떠한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계'(Spiritual World)라는 용어는 인간의 생각 속에서만 만들어진 영역이다. 이를 칸트는 '지적 직관'이는 용어로 표현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성 직관'이 필요하다. 즉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오감'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소위 '텔레파시(Telephathy)'나 '영감'이란 것은 우리의 오감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며 '지적 직관'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객관적 인식이 아니므로 믿으라고 우기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없다고 단정할 만한 객관적 증거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 성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도 고대인들의 통념적 우주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비록 유능했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위대함'과 '의로움'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용어 이상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 문제는 우리의 상식을 깨고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는 문제이다. 하느님은 이 자연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하늘'은 자연을 대표하는 단어이며 따라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자연 전체에 걸쳐 존재하신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신학관은 도움이 된다. 그는 에베소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암시하는 말씀이 들어 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개정) 바울이 생각한 장소 개념은 특정한 곳이 아닌 우주 전체인 것이다. 우리의 선입관은 하느님을 사물이나 개체와 같은 같은 존재자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주 어느 곳이나 모두 하느님이 계시는 장소로 받아들이기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물이 아니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만물이 곧 하느님의 변용(變容)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이 자기 모습을 인간이 또는 사물이 인식할 수 있도록 현상화 하신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서 표현한다면 하느님은 '물 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감각할 수 없고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통하여 현상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칸트는 '가상체'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물 자체'를 '초월적 객체'로 표현하고 인간의 감성이 포착할 수 없다는 의미로 'X'라는 미지수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칸트의 논증을 따라가면 인간이 신을 알 수는 없지만 그 현상인 자연의 모습을 인식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결국 하느님을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질서와 원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방법이며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