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너에게 편지를 쓰다(Remake)
원작가/원작제목/원작번호 - 원작가님의 요청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remake by 새끼늑대
"반장님, 이거 아무래도 놓친 것 같은데요?"
"그딴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도로 봉쇄하고 찾아 봐! 그 새끼 도주할 때 차도 없었어."
"반장님! 지하철을 타는 척만 하고 근처에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것 같습니다."
"언제?"
"대충 한 시간 전인 것 같습니다."
"한 시간이면…… 젠장. 인근 도시에 다 연락해! 이 미친 살인자 새끼, 당장 안 잡으면 상부에서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형사들이 필사적으로 수색했지만 범인의 검거에는 실패했다. 상대방은 용의자가 아니라 확실한
범인,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살인자였다. 그것도 자신의 애인의 손목을 그어 살해한. 아마 자살
로 보이게 만들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는 살해된 지 반나절 만에 발견되었고, 그녀의 주변
에는 애인인 범인의 지문과 발자국 등이 잔뜩 발견되었다. 경찰들은 신속하게 출동했지만 남자의
집에는 황급히 도주한 흔적만이 잔뜩 발견되었다. 그 이후로 경찰들과 남자의 숨 막히는 추격전
이 시작되었다. 남자는 영화에 나오는 기가 막힌 도주범은 아니었기에 경찰들에게 쉽게 발각되었
다. 하지만 늘 재치 아닌 재치로 번번이 도망쳤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추격전이 계속되자 경
찰은 계속 추가 인원의 투입을 망설였고, 결국 남자는 완전히 잠적해버렸다. 경찰들은 언론의 질
타에 황급히 수배전단을 뿌리는 등 남자를 추적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경찰의 안이한 대응
에 언론들의 원성이 높아져만 갔고, 그에 비례해 남자의 악명 또한 높아져갔다. 자신의 애인을 살
해한 그 살인자는, 이제 마치 연쇄살인이라도 저지를 기미가 충분한 정신이상자로 언론에 알려지
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갈 무렵.
.
.
.
"4년이 지났는데…… 빌어먹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4년 내내 도망쳐 다녀왔지만 이번만큼 힘들긴 처음이었다. 4년 전까
지만 하더라도 그는 도주라고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무작정 뛰다보면 경찰들을 다 따돌릴 수 있
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고, 그는 번번이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행운들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4년 후인 지금, 그는 자신이 도주의 대가가 된 것이 아닐까 생
각해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너무……,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아까 그 택시! 택시 타고 간 거야. 씨팔, 당장 그 택시 수배해!"
……도망을 잘 친다. 그 생각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경찰들이 본 택시는 자신이 지금 도
망칠 곳과 반대되는 지점에 자신의 조카가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집까지 좀 태워주라며 돈을 줬
기 때문에 가는 택시였다. 택시기사는 내가 번호판을 꼼꼼히 보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 장소로
꼭 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조카대신 뒤따라온 경찰들만 잔뜩 있겠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자신이 숨어있는 골목 구석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택시, 쫒지 말라고 해."
"예? 반장님 그 새끼가 그 택시를 탔는데요?"
"자네 같으면 백방 잡힐 거 알면서 택시를 탔겠나? 그 자식, 지금 이 근처에 숨어있어. 아마 경찰
들이 다 그리로 갔을 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겠지. 일단, 애들 몇 명 풀어다가 여기 근처 다 수
색하고, 아니면 그 방향으로 간다. 절대로 급하게 쫓을 필요 없어. 잡기 쉬운 곳으로 몰아가면 알
아서 잡혀. 이제 언론들도 잠잠해졌으니 느긋하게 잡으면 되."
"아, 예!"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도망을 잘 치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 다른 형사들이 <최 반
장님>하고 부르는 저 사람 때문에 근 1년간 숨어 지냈던 곳이 발각되었고, 또다시 이렇게 피가 마
르는 도주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막다른 골목, 지저분한 폐품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
몸을 숨긴 터였다. 밖에는 형사들이 쫙 깔렸고.
어떡하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물론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경찰들은 자신을 찾
지 못할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들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것이 가끔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경
찰들은 아마 PC방이나 근처 유흥업소 등을 뒤지겠지. 누가 그 잔인무도한 살인자가 이런 곳에 숨
어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살인자라……."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이어 그는 무릎을 세워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웅크
린 자세가 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결정했다. 몇 시간만 여기 있으면 경찰들이 떠날 것이
다. 물론 여기는 계속 경계가 강화되겠지만. 자신은 아까 택시가 갔던 곳으로 다시 도망치면 된
다.
결정을 끝낸 그는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진 않았지만, 자신이 들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에 그는 불편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나 곧 죽을 거야."
"……알아."
"나 사랑해?"
"응."
"그럼……."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그는 말도 안 된다며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
.
.
"안 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위는 어느새 노을이 져 붉게 변해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
보았다. 피에 젖어있는 것 같이 붉은 손. 그는 주먹을 쥐고, 털썩. 쓰러지듯 앉아 몸을 웅크렸다.
"바보 같은 자식아……."
너한테 난 언제나 바보였지.
"멍청한…… 쓸모없는 자식아……."
네 인생에 난 걸림돌일 뿐이었지.
"한심한…… 자식…… 아……."
널 지켜주지도 못하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널 지켜주지도 못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
의 부탁을 거절했어야만 했는데. 스스로 눈을 감을 때까지 내가 옆에서 대신, 아주 조금이라도 대
신 아파해줬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난……,
"으흑……."
그의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숨 막히게 울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
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소리 없이 통곡했다. 눈물의 비탄함은 고요함으로 바뀌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그는 계속해서 안으로만, 안으로만 집어넣었다.
한참 후, 흐느낌이 멎었다. 그는 벽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최소한 6시간은 지났을 것이
다. 그는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이쯤 됐으면 경찰들은 자신의 속임수를 눈치 챘을 것
이다. 아니, 다른 경찰들은 몰라도 그 <최 반장>이라는 인물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남쪽으로 가
는 척 한다. 사람들은 남쪽으로 달려가려 한다. 하지만 어떤 인물은 그 것이 속임수라 생각하고
북쪽으로 간다. 그리고 나중에 진짜로 남쪽으로 갔다며 분통을 터뜨리며 다시 남쪽으로 갈 것이
다. 하지만,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분통을 터뜨리며 남쪽으로 올 때 북쪽으로 간다면? 마주쳤
을 때의 위기만 잘 넘기면 이 추격에서 아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1년간은 조
용히 숨어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나섰다. 상처는 없었지만, 그는 걸음을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고통
때문이었다. 상처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다.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아련함은…… 그를 견딜 수 없이 아프게 했다.
.
.
.
"다들 아까 지나온 지역부터 30Km내의 인근 지역 도로 다 검문 강화하라고 해! 검문 없는 곳은
당장 시작하고!"
"어, 최 반장님. 왜 그러십니까?"
"젠장. 속았다. 이 녀석 아까 거기에 짱 박혀 있었어. 택시를 보내고, 반대로 도망치는 척 했어.
그런데 진짜로 택시를 타고 갔던 거였어."
"어…… 그럼 일단 그 택시부터 수배해볼까요?"
"그래. 빨리!"
최 반장은 그렇게 외치고 분통을 터뜨렸다. 얄팍한 꾀에 속아 넘어가다니…… 그러다가 문득 그
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잠깐!"
"왜 그러십니까?""너무…… 아냐. 이건 너무 뻔해."
"예?"
"아직 수배령 내리지 말고, 택시는…… 일단 택시는 수배해봐."
"예."
최 반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놓치는 기분이었다. 영화에서 말하는 형사의 직감. 물론 직감대
로 수사하는 족집게 형사들도 수두룩하지만, 최 반장은 경력이 꽤 되었어도 여태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감이 안 좋아.
"이봐, 박 형사."
"예, 반장님."
"자네 같으면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가 자기 애인을 살해한 아주 개 같은 새끼란 말이지. 그렇
다면 자네는 보통 어떤 곳에 숨겠나?"
"예?"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수색한 곳 말일세. 대충 '어디어디에 숨을 것이다'라고 예상하고 수색하
지 않았나?"
"어, 뭐 그렇죠. 그런 범인들이 있을 곳 이래봐야 뭐 PC방이나 성인 오락실, 유흥업소나……."
"그런 곳이 아니면?"
"예?"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말이야. 숨어있던 장소가 발각되어서 황급히 도주했는데, 그 녀석이 택시
로 속임수까지 쓰고 나서 그런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미리 봐두었던 데가 있었다고 쳐도 뻔할
뻔자야. 아무리 대충 수색했어도 여기 형사들이 그 동네 한두 번 돌아다녔겠나? 백방 그런 곳엔
숨지 못했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최 반장은 어느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최 반장을 보고 박 형사라는,
40대가 다 되어 보이는 형사는 묵묵히 최 반장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최 반장
이 소리쳤다.
"어쩌면 우리랑 길이 엇갈렸을 거야! 좋아. 돌아가지 말고 아까 가던 곳으로 쭉 가. 그리고 그 근
처에 병력 다 풀어 놔. 젠장. 그 새끼 아마도 내가 택시를 쫓길 바라고 거기 어디 이상한 곳에 짱
박혀 있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갈 생각이야."
"어, 확실 한 겁니까?"
박 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고는 후회했다. 최 반장은 수사에 있어서 무조건 확신이 있
는 쪽으로 밀고 나간다. 죄송하다고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최 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죄송…… 예?"
"빌어먹을. 이번만큼은 확신이 안 선단 말이야. 어차피 반대로 도망쳤다 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
어. 이거, 이러다가 놓치면 언론에서 또 들고 일어 날 텐데."
최 반장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확신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렸
다.
"나 그 새끼 못 잡으면, 이번 결혼식 미룬다."
"예?"
"그딴 새끼가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나만 속 편하게 결혼을 해!"
박 형사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뒤로하고, 최 형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을이 질 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맑았지만, 어둠이 찾아오자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들었다.
눈이라도 올 날씨였다.
.
.
.
"끝이구나."
그의 입에서 힘없는 말이 나왔다. 경찰이 사방에 쫙 깔려 있었다. 그리고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그냥…… 잡힐까?"
그래도 그로선 그다지 손해 볼 것 없었다. 어차피 이 도주는 물리적인 도주가 아니다. 막연히 그
녀와의 추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그런 도주였을 뿐…….
"어차피 평생 도망쳐도…… 공소시효가 끝나도…… 계속 떠돌아다닐걸?"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동안 작은 도시를 쳐다보았다. 택시기사에겐 볼일이 급하다며 산 속으로 들어왔지만, 그
는 다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저 멀리 검문소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대로 산 속으로 들어
가리라 마음먹었다. 이 산 어딘가에 절이 있다. 오면서 표지판을 잘 봐두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
다. 그는 그런 자신에 실소했다. 그는 어느새, 정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도망자가 되었다.
"하하……."
정작 도망가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하…… 하하…… 하아……."
내가 도망치려 하는 건 벌이 무섭기가 아닌데…… 단지, 단지-
"흑……."
내가 저지른 '죄' 그 자체가 무서울 뿐.
그는 무릎을 꿇었다. 풀썩. 이미 삭아버린 낙엽들이 들썩였다.
그리고 그는 오열했다.
본때 있는 울음이었다. 그는 울음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땅을 치며 울었다. 미친 듯이 울었다.
가슴 속에 담겨진 것이, 그 무언가가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추억이 그의 눈물에 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나…… 오래 못 살 것 같아."
새벽 3시. 갑자기 걸려온 그녀의 전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다급하게 그녀의 집 앞으로 뛰어갔
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암이래."
그리고 웃는 그녀. 그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암? 아니…… 그래, 그러니까 병원에 가서…… 일단 입원부터……."
"3개월 전에 말기라고 진단받았어. 나 1년을 못 넘긴데."
"그럼…… 그럼 왜 진즉에……."
"……미안. 숨기려고 했는데. 그냥…… 그냥 나 혼자서…… 나중에……."
그는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혼자 떠나려고 했겠지. 자신과 이별하고. 자기 자
신을 나쁜 여자로 만들고 나서. 하지만, 하지만-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했다.
"미안…… 무서웠어."
"뭐가?"
"니가 나 정말로…… 싫어하게 될 까봐…… 그리고…… 혼자 쓸쓸히…… 그렇게 죽는 게……."
그는 울었다. 그녀도 울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
.
.
펜대가 망설임에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확고한 의지를 담고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펜촉
은 하얀색 종이 위에 검은 흔적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하나의 글을 이루기 시작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편지…… 내가 유치하다고…… 쓰기 싫다고 했었는데. 그래도 가
끔 써줬을 때 너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래, 참 오랜만이지? 거기 날씨는 어때?>
그는 잠시 펜대를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
를 돌려 펜을 잡았다. 잠시 시야가 흐려졌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아찔
함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다급해졌다. 손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는 계속 편지를
썼다.
<여기처럼 추워? 여긴, 한동안 눈이 그치질 않았어. 온통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어. 지금도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 덕분에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신세야. 그러고 보니, 넌 참 눈
을 좋아했었는데…….>
그 때, 그의 귓가로 찢어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한번 비틀거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다가갔다.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펄펄 나고 있었다. 그는 주전자를 들어 미리 준비해둔
머그컵에 물을 부었다. 연기가 마치 춤추듯, 아련하게 피어났다. 물을 다 부은 그는 주전자를 떨
어뜨렸다. 뜨거운 물이 튀었지만 그는 그다지 내색하지 않았다.
"후우우-"
그는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뜨거운 커피가 그의 얼굴로 따스한 김을 뿜었다. 그는 하
얀 김 속에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과연…… 맛있을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러자 다시, 아찔. 그는 이번
엔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미
소를 지으며 담요를 끌어올렸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축축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다
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그래. 넌 기억력이 좋아서 기억하겠지. 내가 처음으로…… 너에게 고백하던 날. 눈을
좋아하는 너이기에…… 눈이 온다는 기상예보를 믿고 고백했는데, 비만 억수같이 내려버렸지. 그
래도 결국 넌 내 마음을 받아줬지만 말이야……. 그때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던 그 순간을.>
다시, 커피 한 모금. 특이체질이었던 그는 절대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마시고 몇 시간만 지나
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는 마시지
도 못할 커피를, 맛도 못 볼 커피를 그렇게 많이 끓였었다. 그녀에게 주기 위해. 그는 지금 처음
으로 자신의 커피를 맛보고 있었다.
"이렇게 맛이 없었나……."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다시 편지를 썼다. 글씨가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
던 그는, 곧이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럴 거라 예상 했었는걸……."
펜촉이 다시 하얀 편지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사랑하던 순간들…… 난 그 순간들을 매일 기억해. 도시 여기저기에 우리의 흔적
들이 남아있겠지……. 난 그게 못 견디게 괴로워. 그래서 난 도망쳤어. 너의 유서를, 너의 마지
막 말을 찢어버리고. 하지만 함부로 버리진 않았어. 꼭꼭 씹어서 먹었어. 내가 무슨 염소도 아니
고. 하하…….>
그의 눈꺼풀로 눈물이 영글어졌다. 조용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안 그래도 흐렸던 시야가 더
욱 흐려졌다. 마치 빗속에서 앞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눈물방울이
떨어져 편지지를 적셨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편지지 중 그의 손목이 닿아
있던 부분은 이미 붉게 물들어버렸다. 그는 이제 손이 덜덜 떨림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 그는 그
다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그는 계속해서 편지를 썼다. 사각사각하는, 펜촉과 종이
의 매끄러운 입맞춤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자신을 그리워하지 말라며…… 그러면서 떠나갔지.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어. 지금
도…… 4년이 지난 지금도 난…… 난 니가 너무 그리워. 아아…… 그때, 그때 너의 부탁을 거절했
었더라면…… 지금…… 물론 지금 넌 내 곁에 없겠지만, 내가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아
니, 널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이 슬퍼지는 그런…… 그런 안타까운 결말이 나진 않았을 텐데…….
그래, 사실 우린 세월 앞에 나약했었어. 넌 겁쟁이였어. 하지만, 넌 그래도 괜찮았어. 하지
만…… 널 지켜줘야 할 나까지 겁쟁이였어. 그래…… 우린 너무 어렸으니까.>
달그락. 머그컵이 쓰러지고 뜨거운 커피가 책상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미 그 것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온 몸이 차갑게 굳어갔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힘없이 늘어진 자신의 팔을 움직였다. 펜촉은 무의미
한 선들만 그렸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네가……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비웃을까. 그렇게…… 그렇게 한심하던 나였는데. 널 아직 그
리워 한다는…… 4년이 지난 지금에도…… 멀쩡하게 살아달라는 마지막 너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
한 이 바보 같은 나를…….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툭, 데구르르. 그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펜이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쿵. 그는 편지지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4년간…… 너와 이별한 후의 시간은…… 널 잊는 시간이 아니라…… 혼자서 계속 널 사랑하던
시간이었…… 어. 그래…… 이거…… 이거 하나는 알아 둬……."
눈이 감긴다. 영글어졌던 눈물이, 똑, 하고 그의 편지지에 마지막 얼룩을 남긴다.
"아직도…… 널 사랑해…… 대…… 답 없는 메아리라 하더라도. 내 심장에 담아두기에 난 너
무…… 너무 지쳤…… 어. 약속…… 못 지켜서 미안…… 우리…… 만날 수 있…… 미안하…… 사
랑……."
띄엄띄엄, 그 뜻을 알 수없이 힘들게 이어지던 말이 끊겼다.
그리고 집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
.
.
눈이 쌓여 딱, 따닥 하는 소리를 내며 대나무가 부러지던 시골 마을에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그
리고 그 대나무 숲을 뒤로한 작은 폐가. 물어물어 도착한 폐가 앞에서, 최 반장은 입에 담배를 물
고 있었다.
"자살이 분명한데요. 꽤 오래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
최 반장은 대꾸하지 않고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다 문득, 최 반장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독한 놈……."
"그런데 이놈이 그놈 맞습니까? 왜, 그-"
"그래. 4년 전에 자기 애인 죽이고 잠적한 놈."
"그 때 언론에서 난리가 났었는데……. 결국 4년만에 이렇게 보내요. 아, 반장님은 2개월 전에 거
의 잡으실 뻔 했다고 들었는데요?"
"걸어서 50Km를 도망친 놈이야. 그것도 차들이 다닐 수 없는 야산이나 시골로만. 그런 걸 무슨 수
로 잡아?"
"대단한데요? 그럼 현장 보러 들어가시죠."
"음."
툭. 최 반장은 아직 장초인 담배가 아까운 듯 한 모금을 더 들이킨 다음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
고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주워온 가스버너 근처엔 주전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로 물이 마른 자국도. 작은 방에 들어서자, 악취가 진동을 했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죽은 범
인의 근처엔 커피와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하나같이 코를 감싸 쥐고 있었지만 최 반장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손목을 그었군."
"아, 예. 자기 애인을 죽인 수법과 동일하죠. 허 참."
"……그렇군."
"그런데 뭘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거…… 감식을 해봐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원, 완전 피범벅이 돼서야……."
"신경 쓸 것 없어. 내용이야 뻔 하니까."
"예?"
"뭐, 죄를 뉘우친다 정도의 유서겠지. ……별다를 거 있겠나? 자, 나가자구."
"아, 예. 그런데 말입니다, 반장님. 도대체 자기 애인 왜 죽인 겁니까? 단순히 우발적인 말다툼
치고는 너무……."
"몰라.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는데."
"네?"
"그 여자, 암 말기였어. 죽었을 때는 6개월을 채 못 넘겼을 거야. 치료도 거부했더군.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고."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최 반장과 형사는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차로 가던 최 반장은 갑자기 걸음
을 멈추었다. 아까 자신이 버린 꽁초가 아직 앞부분을 빨갛게 물들이며 타고 있었다.
"어쩌면…… 그 남자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
최 반장은 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 돌아섰다. 그의 시야에 폐가가 보였다.
어쩌면…… 그래. 통화기록만 봐도 알 수 있어. 여자가 사망했다고 추측되는 시각으로부터 고작
15분 전, 남자에게 전화를 했었지. 그리고 남자는 자살한 여자를 붙들고…… 그리고…….
최 반장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못내 속이 답답한 듯,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
었다.
최 반장의 뒤로, 흰 담배 연기가 봄바람에 섞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The End-
.
.
.
..
원작의 묘미를 전혀 못살린 것 같아서.. 원작가님께 죄송하군요ㅠ_ㅠ
이 것이 첫번째 리메이크 작입니다. 두 번째 리메이크 작으로는..
하늘빛무지개 님의 사랑중독증<--을 리메이크 할 예정이구요,
세 번째 리메이크 작으로는... 반공윤님의 다시 만날때, 우린<--을
리메이크 할 예정입니다.
혹시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해보고 싶으시거나... 혹은 리메이크한 것을 보고싶은
글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ㅎ
어쨌든.. 이번 작품으로 인해 저의 글솜씨가 얼마나.. 극악한지를 자각했습니다.
앞으로 리메이크 열심히해서, 글솜씨를 더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상 남.자. 인 새끼늑대 였습니다~(많은 분들이 절 여자라고...) 전
이제 또 학원으로~ㅠ_ㅠ
p.s. 원작가님의 요청대로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카페 게시글
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새끼늑대] 너에게 편지를 쓰다(Remake)
새끼늑대
추천 0
조회 342
07.02.11 19:51
댓글 21
다음검색
첫댓글 아....... 찡하네요. 작가님의 실력이 받춰져서 더욱 찡한 소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원작도 보고싶은데. 후후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ㅎ 원작은.... 작가님의 요청에 따라;;
ㅎㅎㅎㅎ 저도 님이 리메이크해서 쓰신거 보니까 원작도 보고싶어요.............재미있을것같아요.....진짜 잘쓰셨어요..어머.................다음에는 제꺼 리메이크하실텐데.........비교될까봐 무서워요...ㄷㄷㄷ//ㅠ_ㅠ...엉엉...님 너무 잘쓰셨으면 울어버릴껍니다................ㅠ^ㅠ....
하하;;;;; 열심히.. 잘 써야죠 그래도=_ =ㅎ
ㅠㅠ님아 너무 잘쓰신다..
감사합니다^^ㅎ
감동 ㅜㅜ 기대했던것보다 더욱 잘쓰셨다는..다음 리메이크도 기대^^
감사합니다~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추천해주면 리메이크 할게요^^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원작을 읽으셨구나아.. 그럼 비교되서 어쩐다냐..ㅠㅠㅎ
재밌어요..음...슬프기도 하고.....좀 으리으리 하기도 하고요. 원작도 보고 싶군요^^다음 리메이크소설 기대할게요
넵 감사합니다^^ㅎ
리메이크 재미있어요 ㅎㅎ 잘보고갑니다아 ~ 아,은근히 제가 예전에 쓴 소설들도 신청하고 싶어졌다는 ; 다음 작품 기대할게요 ~ ㅎㅎ
네~ㅎㅎ 신청하고 싶으신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신청받습니다^^ㅎ
와, 멋지네요.!!! 이런 글을 읽으니까 저도 신청하고 싶다는 으컁컁; 그러나 비교될까봐..........으히히[소심소심] 아무튼 잘봤어요!
신청하고 싶으시면 신청하세요~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원작을 보셨구나..=_ =ㅎ 감사합니다~
문체가 깔끔하시네요.^^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정말 빨려들어가는것 처럼 읽었습니다. 슬프지만 살짝 소름이 끼치기도 해요.. 원작을 먼저 못보고 이소설 부터 봤는데 원작도 읽어보고싶군요. 소설 잘 읽고 갑니다^^
넵~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