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TAL SIN - 에필로그 -
글쓴이 TIRPITZ
에필로그 - 바티칸. 현재.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나이든 목사의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 두 분은 그렇게 제 기억속에서 길을 걸어가셨죠. 그리고 세티는 두 번다시 학교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티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
"저는 떠나면서 그들을 다시 보겠다고 했지만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 후 5년간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에드윈 목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다는 듯이. 그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말문을 태연하게 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그들을 보기위해 부랴부랴 바티칸에 왔을 때는....... 아드리안 추기경님만이 저를 맞이해 주시더군요."
에드윈 목사는 이야기하는 내내 쥐고있던 나무 십자가를 내려다보았다.
"프릿츠 주교님은 전쟁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암살되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그렇게 가버리실줄은 몰랐습니다..... 아드리안 추기경님도, 가브리엘 신부님도 지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티조차도.... 저보다 먼저 가버렸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안타까움과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그는 슬픔을 그대로 감추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비치고 있었다.
"지금은 그들 중에서 가장 못난 저만이 남아 이 이야기를 기억할 뿐입니다. 이젠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는 저라도 아무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신부님께 이 이야기를 털어놓아 마음이 편하군요... 말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잊어버리기엔 너무....."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있던 젊은 사제는 말없이 빙그래 미소지었다. 에드윈 목사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지금도 그 분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제 기억에는 너무도 생생해서 지금 금방이라도 저 모퉁이에서 나타날 듯 싶습니다."
이 말에 옆에 있던 젊은 사제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올 때 그는 말했다.
"네..... 그렇게까지 기억해주시니.... 저로선 고마울 따름입니다."
".....?"
에드윈 목사는 벌떡 일어섰다. 아까전까지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신부는 어느세 바람이 한번 불어올 때 그의 눈앞에서 그대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목사는 바람이 나무들을 스치고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한순간의 세월을 날려버리는 듯한 바람은 그의 옆을 스치고 다시 지나갔다.
알 수 없는 나뭇 잎들이 우수수 그 바람을 따라 저 편으로 날아가 사라진다.
그것을 보면서 에드윈 목사는 십자가를 꽉 쥐었다. 그의 눈가에 머무는 주름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중얼거렸다.
"편안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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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약력 ]
알렉산드로 테르센 폰 프릿츠 Alexsandro Tersanne von pritz (1914 ~ 1944)
독일 함부르크 출생. 아버지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계 독일인. 20세에 사제의 길로 들어가 23세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정식 사제 서품을 받았다. 얼마되지 않아 1936년 최연소 주교로 추대 된다.
그러나 1940년 평소에 앓아오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그리스 메테오Meteora에 위치한 한 수도원에서 요양하던 중 1941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드리안 추기경을 비롯하여 나치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던 독일의 콜란드 폰 프라이징 주교, 샴 체퍼 신부 등 몇몇 독일계 사제들과 더불어 나치의 반 유대 정책을 비롯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나치즘이 전국을 이미 장악하고 있던 1942년 8월, 나치에 의해 다른 사제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 뻔 했으나 주교만은 당시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있던 일부 군인들에 의해 구출되어 바티칸으로 돌아온다.(한편으로는 그의 형이 히틀러 친위대 출신 장교라서 구출한 사람들이 SS였다는 다른 말도 있다)
그러나 자신만이 구출된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던지 그는 이듬해인 1943년 다시 고향인 함부르크로 넘어가 히틀러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그의 신상이 매우 위험한 것을 알아차린 아드리안 추기경으로부터 직접 바티칸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 받았으나 거절하고 아직은 그 당시까지 평화로와던 드레스덴으로 옳겨가 암묵적인 반나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히틀러의 극단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광신도처럼 완전히 빠져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항상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협박과 대다수 사람들의 외면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와 뜻을 함께했던 다른 사제들의 수용소에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그러나 전쟁이 중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태도는 오히려 일반인보다는 군인들에게 먼저 점차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찾아와 기도해주는 모습에 그를 따르는 군인들이 생겨났고 그것조차도 독일 정부에게는 은근한 부담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이유였던지 그는 1943년 10월. 생일을 맞은 그의 오랜 친구를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의문의 괴한에게 저격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처음에 독일 정부는 그가 폴란드계 프랑스인 레지스탕스 청년에게 저격당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전후 사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게슈타포 소행으로 거의 밝혀졌다)
그 전에 수차례 아드리안 추기경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다가 30세라는 너무도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은폐하려는 독일정부의 의도에 의해 그는 사고사로 처리되었고 교회 묘지에 자리를 마련할 틈도 없이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고 그의 비문에는 이름과 사망년도 외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체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그 사실을 1944년 3월까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그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공식적으로 독일 정부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이미 패전기에 접어든 독일이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대로 연합군에게 항복한 이후 벌어진 내부적 문제,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교황 피우스 11세와 히틀러간에 암묵적으로 이뤄진 상호 불가침 조약에 대한 민감한 이해 관계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정식으로 사건에 대한 조사와 공동 묘지에 묻힌 그의 유해를 가져오는 건 1949년에 가서야 시작되었다.
평소에 친분을 쌓고 있었던 아드리안 추기경이 무엇보다도 그의 유해를 데려오길 원했지만 전쟁으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어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묘지에 대한기록을 찾는데만도 수 년의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주교는 죽은지 8년이나 지난 1951년이 되어서야 바티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드리안 추기경이 죽기 3년 전, 가브리엘 신부가 죽기 바로 3달 전의 일이다.
그의 생이 너무 짧아서였을까, 무엇보다도 많은 활동을 한 그였지만 정작 유품으로는 단 한 권의 일기장만이 남아 그의 일생에 대한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아드리안 바실리 폰 아드리안Adrian basili von adrian????? (1914?~ 1954?)
독일 베를린 출생이나 18세 이후 국적은 프랑스로 되어있고 2차 대전 발발 후에는 이탈리아로 되어있다. 가족 사항과 사제 서품 시기는 확실치는 않음. 지금까지 추기경들 중에서는 최연소에 추기경이 된 사람이다.
프릿츠 주교와 마찬가지로 1941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나치를 주장한 몇 안되는 독일계 사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놓고 히틀러를 [정신 이상자], 뭇솔리니를 [바보]라고 불렀고,
그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되어 1941년과 42년, 각각 베를린과 작센에서 게슈타포(혹은 그를 지지하는 청년 극우파라는 추측)에 의한 세 차례 암살 시도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1941년 8월 베를린에 독일 주교 회의가 있었을 때, 게슈타포는 그가 탄 차를 전복시킴으로서 그를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추기경은 간발의 차로 위험을 피했고 이에 게슈타포는 다음해 작센에서 건물에 폭약 설치 예정이었다고 하나 당일 어이없게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무산.
결국 게슈타포는 극단의 조치로 근거리 총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총탄은 어긋나 추기경은 가벼운 상처만 입게되었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기고만장한 나치라도 찔끔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히틀러 정부는 1942년 4월, 비공식적으로 "대외적으로 위험에 처한 독일 정부에 반하고 국민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선동자" 라는 죄명을 씌워 그에게 독일 영구 추방령을 내리게 된다.
(이 추방령은 그가 죽기 4년전인 1950년이 되서야 해지되었다)
그리고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스 12(파첼리)세도 바티칸으로 돌아온 그를 반강제로 잡아두고 당신의 안전을 위해 바티칸을 벗어나는 날에는 파문--이라는 극단적인 경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추기경이 "모두가 죽기 직전인 그때엔 나가도 되겠지요."라고 독설적으로 대답했다는 유명한 뒷말이 전해진다.
1943년 7월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사직한 후, 파시스트 당도 해체되고 10월 프릿츠 주교가 피살되자 아드리안 추기경은 프랑스로 넘어가 프랑스 독립 활동을 지원하였다.
뒤늦게 안 교황이 그를 파문하려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실제로 행동에 옳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추기경의 건강은 갑자가 악화되었고 한때 베를린의 대주교이자 친구였던 체사르 오르세니고가 강제적으로 그를 데리고 1949년 바티칸에 돌아왔고 추기경의 건강은 일시 회복기를 맞았으나 6개월도 못되어 회의 도중 쓰러진다.
이 배경엔 전에 그에게 독일 정부의 은밀한 독극물 투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후 그는 두 번다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체 일체 외부와 단절하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며, 책을 저술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가 쓴 책들은 자신이 본 종교와 그리고 그것들이 미래에 나아갈 방향에 관한 것이었고 그 중에는 현재까지 계속 들어맞는 놀라운 내용이 상당수 있기에 지금까지 미공개라는 소리가 있다.
그는 그렇게 1954년까지 6권의 책을 남겼다. 그리고 7번째 책을 완성하는 단계에 있던 이듬해 1월, 그는 그의 서재에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필을 하던 중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나이 37세였던 것으로 추정.
무슨 이유였는지 교황청은 그의 죽음을 7일이 지난 후에야 공식 발표했다.
그가 완성하지 못했던 책은 끝내 미완인체로 남아있고 그가 쓴 책들은 바티칸 미공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날드 에어 에드윈. Ronald Air edwin (1916 ~ 2003)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 출신. 23세에 목사가 되었고 평생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이다. 초반에 각 종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저술해서 독일에서 발간한 책과 일기가 있다고는 하나 2차 대전의 영향으로 그 내용과 그 자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알 길이 없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세티 카르시아프 테클라와 함께 케나다 벤쿠버로 건너가 그곳에서 결혼했고 두 아이를 두었다.
1960년부터 유럽과 미국을 꾸준히 오가면서 당시 서로 좋지 않았던 두 종교 사이를 좁히려 노력한 그는 1950년 아드리안 추기경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때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 거주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아드리안 추기경과 그는 생전에 매우 친했다고 전해진다. 가브리엘 신부가 죽은 후에 자신도 죽음이 임박함을 느낀 추기경은 그에게 각별히 호의를 배풀었고, 소문으로는 에드윈 목사는 그가 할 수 있는데까지-- 바티칸에서 비밀 문서가 보관된 곳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에드윈 목사는 그 안에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어딘가에 기록하지도 않았다.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지 50여년에 지난 후 카톨릭에서 대회년이었던 2000년에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몇몇 사제들에 의해 특별히 바티칸에 초청받기도 했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꾸준히 사회 복지 사업에 힘쓰던 그는 2003년 3월. 미국 아이다호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타지 사람들까지 그의 문앞에 가져다 놓은 꽃들이 꽃밭을 이룰만큼 수북했다고 한다.
세티 카르시아프 테클라.(? ~1977?)
이탈리아 밀라노 출생. 18세까지 로마에서 살았다. 에드윈 목사와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했고 두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작은 마당에 평생동안 꽃과 나무를 키우면서 살았고 그녀가 꾸민 화단은 아직도 남아있고 그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이웃을 돕기위해 시작한 작은 모임은 지금은 한 주(州)에 백 여명이 넘는 고정 회원을 가지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세티는 1977년(?) 백혈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로마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미국에서 떠난 직후부터 가브리엘 신부가 숨을 거둘때까지 지속적으로 편지는 주고받았다고 한다.
전쟁 중에 한번 편지 왕래가 끊기기 전까지 프릿츠 주교와 아드리안 추기경에 대한 안부인사도 섞여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프릿츠 주교가 죽었다는 것을 그녀는 들은 적이 없었을텐데 전후 다시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는 프릿츠 주교에 대한 말은 한 줄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고나서야 로마에 돌아왔고 유언대로 화장되어 로마의 떼베르 강에 뿌려졌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루아에 대해서는 생사 여부를 알 길이 없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독일로 갔다는 기록이 마지막인 걸로 보아 전쟁 중에 사망하였을 거라는 추측만이 있다. 세티가 미국에서 평생 써 온 책상 위에는 그녀의 사진이 항상 놓여있었다.
가브리엘 신부(? - 1951) 본명 불명. 이거 갈수록 작가의 기억이...=_=
바티칸의 수많은 성직자들 중에서 그만큼 비밀스러운 여러 가지를 알고있었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도서관과 기밀 서류 담당이었고 때문에 거의 모든 문서들을 읽어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짧은 생을 산 프릿츠 주교와 아드리안 추기경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프릿츠 주교가 전쟁이 나자 독일로 가서 활동할 때까지 따라가 옆에 있었다. 때문에 그는 다른 사제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고초를 겪는다. 그는 1944년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들어있던 그에게 수용소에서 얻은 병은 치명적이었던지 전쟁이 끝난지 6년이 지난 1951년 9월. 그는 결국 원인 모를 병을 이기지 못하고 60에 가까운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임종시까지 옆을 지켰던 아드리안 추기경은 그가 숨을 거두자 "주교님도 먼저 가시더니 당신마저도 나를 두고 가시는군요. 그 다음은 저 입니까?" 라고 말하면서 그답지 않게 공개적으로 슬픔을 표현해 주변 추기경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했다고 한다.
(그 말대로 추기경도 그 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다.)
그것을 볼 때 그의 죽음이 젊은 추기경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앞당겼으리라는 추측이 나올만큼 가브리엘 신부는 프릿츠 주교와 아드리안 추기경에게 알게 모르게 아버지와 같은 버팀목이었다 라는 것이 지금까지 그에 대한 평가이다.
평생 가브리엘 신부는 기록하거나 옛 문서들을 해독하고 보관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그가 해석하거나 옳긴 고문서들은 셀 수 없을 정도라고.
아직도 바티칸 도서관에는 그가 쓴 일기 형식으로 프릿츠 주교와 아드리안 추기경이(놀랍게도) 현 지구상에 있는 종교들에 대해 거리낌없이 대화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나 정확히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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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결이군요. 뭔가, 엄청난 것을 건너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완결이라니 참, 감격의 물결이(…) 재미있게 봤구요,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