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에 보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 없는 참소식을 들으니 시비가 끊이는구나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며 스스로 귀의를 하소.
이 때 하늘의 구름이 자욱이 퍼지고, 신선의 음악이 하늘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부설은 그 자리에서 일념으로 단정히 앉아 허물을 벗고는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향기가 바다 위에 떠다니고, 꽃비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영희와 영조가 부설을 화장하자 빗방울과 같은 신령스런 구슬들이 나왔는데,
도반들을 이 사리들을 수습해 남쪽 산기슭에 묻은 다음 부도를 세웠다고 합니다.
다음은 부설거사가 남긴 팔죽시(八竹詩)다.
부설의 게송 가운데 지금까지 불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팔죽시(八竹詩)입니다.
봉래산 저 아래 구비 구비 골짜기마다 담긴 중생들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대자유를 누린 부설이 남긴 시구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했습니다.
| |
부설이 열반한 뒤 자녀인 등운과 월명은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모든 반연과 분별을 넘어 생사를 뛰어넘어 해탈자재한 이는 부설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설의 부인 묘화는 110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환한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비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면,
그 비와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고 전합니다.
또 아들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려 '등운조사'로 알려졌고,
월명은 월명암에서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지은이 및 출처 : 《정설전(淨雪傳)》《변산의 얼》
(부안군청,1982년) 정보제공 : 부안군 문화관광과
하늘에 그린 동그라미, 물에 그린 동그라미, 땅에 그린 동그라미
이 월명암은 바로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을 딴 곳입니다.
철산 스님은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가에서만 비전되어온 월명의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주었습니다.
부설이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 머슴도 따라왔던 모양입니다.
이 깊고 깊은 산골에서 젊은 여자를 구경할 수도 없었던 머슴은 월명이 성장해 아름다운 처녀가 되자 그를 못내 사모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늘 월명을 훔쳐보다가 월명이 혼자 있을 때면 다가가서 수작을 걸며 칭얼대곤 했던 모양입니다.
머슴에게 들볶이던 월명이 어느 날 오빠 등운에게 가서 상의를 했다고 합니다.
"머슴이 틈만 보이면 쫓아와서 자기 속사정을 좀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러자 등운이 "불쌍하지 않느냐"면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사람 소원을 어찌 매정하게 거절만 하느냐"고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월명은 머슴에게 몸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등운이 "네 마음이 어떻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월명이 하늘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허공에 그린 동그라미는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자 등운이 "그러면 됐다"고 안심했습니다.
한번 월명을 취한 머슴은 월명에 대한 구애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살자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도 월명이 대꾸하지 않자 "한번만, 한번만"하면서 따라붙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월명이 등운에게 가서 그 얘기를 하자, 등운은 "못 들어줄 게 뭐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월명은 다시 머슴에게 몸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등운이 월명에게 다시 "네 마음이 어떻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월명이 이번엔 물에다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물에 그린 동그라미는 잠시 파동을 그리다가 잠잠해집니다.
잠시 마음이 동요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등운은 "그러면 됐다"고 했습니다.
월명이 또 머슴에게 몸을 준 뒤 등운이 다시 물었을 때 월명은 이번엔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땅에 그린 동그라미는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제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머슴과 보낸 색의 감각이 아로새겨지고, 머슴이 월명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까지는 마장이 되지 못한 색이 이번엔 월명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세 번째 몸 내 주고 마음 흔들리자 머슴 아궁이에 밀어 넣어
그러자 등운은 월명에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머슴을 유인하라고 합니다.
월명이 유인하자 머슴은 아궁이로 다가왔고, 다시 월명에게 바짝 다가가 수작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등운이 뒤에서 머슴의 등을 발로 차 아궁이 속에 밀어 넣어버리고, 아궁이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등운이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는 산사람을 화장시켜 죽여 버렸으니, 이대로 가다간 무간지옥에 떨어질 게 분명하다.
이제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
바로 그 때부터 등운과 월명은 일체 눈을 붙이지 않고 수행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절한 수행을 통해 무심삼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염라대왕 앞에 간 머슴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등운이가 산채로 나를 죽였다"고 이실직고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저승사자들에게 등운을 잡아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저승사자들이 등운을 잡으러 왔지만, 등운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등운이 무심삼매에 들어있어서 등운의 마음 한 자락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라고 했습니다.
죄의 본성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죄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뒤 등운 뿐 아니라 월명도 불도를 성취해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그 몸이 한갓 실오라기만한 무게도 지니지 않은 허공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출가자인 부설을 주저앉혀 환속시켜서 자식을 낳게 한 묘화. 머슴과 살을 맞대며 운우지정을 나눈 그의 딸 월명.
그 모녀는 이렇듯 세속과 환락의 세상 속을 관통하면서도, 진흙속의 연꽃으로 개화했습니다.
세속의 욕망과 명리와 감각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인에게 묘화는 '신묘한 꽃'이며,
월명은 '어둠 속의 달빛'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망과 명리와 감각의 꿈에서 깨몽하게 하는 그 모녀의 삶이 법비가 되어 이 육신을 씻어주고,
취모검이 되어 분별과 망상을 베어버립니다.
그 미망을 떨쳐주기 위해 부설거사는 사부시(四浮詩)를 남겨놓았을까요.
이 시는 몇 년 전 입적한 청화스님께서도 늘 읊조리던 시구입니다.
|
부안 내소사 선원장 철산 스님이 월명암에서 부설거사 일족의 삶을 읽고 ~복사하였습니다,
대종사는 봉래정사에 머물 때 당시 주지인 백학명선사와 만나 교우를 가졌다.
원기 4년(1919) 7월에 혈인기도가 끝나자
정산종사를 월명암에 보내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있게 한 암자이다.
정산종사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스승을 가까이 모시고 싶은 마음에 3km 떨어진 석두암까지 내려가
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새벽에 다시 올라오곤 했던 信誠(신성)이 뭉친 곳이다.
후인들은 봉래정사와 월명암 사이로 난 길을 鼎山路(정산로)라고 부르고 있다.
낙조대에서 바라본 관음봉과 새봉 그리고 환상적인 연봉들,,,
월명암은 풍수에서 산진수회(山盡水廻)라고 하는 형국의 명당으로
이 곳의 지세는 달려오던 산이 멈추고 물이 휘감아 도는 형세이라는 것이다.
월명암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특별히 높다거나 낮은 봉우리가 없다.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대략 사백에서 오백 미터 정도의 일정한 높이를 지니고 있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세를 산맥이 물결치듯 흘러간다고 하여 오행상 수산(水山)으로 분류하는데
물이 휘감아 도는 형국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낙조대에서 외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섬이 바로 원불교 훈련원이 있는 하섬,
낙조대에서 외변산쪽으로 바라본 칠산 앞바다입니다,
월명암 낙조대에서 칠산(七山) 앞바다 너머로 지는 석양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자연은 가르쳐 준다.
허상과 망상에 젖어 불나비처럼 부귀(富貴)를 쫒아 자신이 헤매고 있은 것은 아닌지...
오른쪽 아름답게 떠있는 섬이 바로 하섬이다,
오염되지않고 고요함을 자랑하는 청정지역이다,
월명암은 쌍선봉 아래에 있다.
쌍선봉 정상에는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낙조대가 있는데
강원도 정동진(正東津)이 일출(日出)로 유명하다면, 쌍선봉은 낙조(落照)가 일품인 곳이다.
일출이 시작과 출발을 의미한다면 일몰은 종료, 끝마무리라는 의미가 있다.
호남 제일의 영지(靈地)로 알려진 것이 이런 절경 때문 만일까요.
세간과 출세간, 인간과 천상의 경계마저 넘어버린 부설의 일족과 그 뒤를 이은 도인들이 없었다면,
이곳이 어찌 어둠 속의 인간들에게 길을 비춰주는 달빛(월명)이 될 것입니까.
한편, 월명암이 위치한 쌍선봉은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혈인기도 회향처로 알려져 있다.
|
||
▲ 월명암 관음전. | ||
허공 중천에 어린 맑은 기운 따라
기미년 3월 조선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메아리칠 때, 영광 땅 길룡리에서는 새 회상의 초석이 될 방언공사가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소태산은 일경에 의하여 일주일간 경찰서에 연행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잠시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이는 일제의 수난과 방언공사로 인해 피로해진 심신의 휴양 목적도 있지만 장차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속 뜻이 더 컸다.
직소폭포,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태산이 영광 땅에서 '산 첩첩 물 첩첩' 2백 여리나 떨어져 있는 변산의 허공중천에 어린 맑은 기운을 본 것은 이때쯤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방언공사를 마친 소태산이 사산 오창건을 대동하고 수양처를 찾아 길을 떠나 처음으로 당도한 곳이 바로 월명암이었다.
낙조대에서 하섬앞 외변산을 배경으로,.,,
정말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절경을 연출하니 국립공원으로 손색이 없다,
변산은 바다를 끼고도는 외변산,남서부산악지대의 내변산으로 구분된다
내변산은 첩첩산중으로 최고봉인 의상봉의 높이가 509미터에 불과하지만 400미터급 준봉들이 겹겹이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 명소로는 의상봉을 비롯해,쌍선봉,옥녀봉,가인봉,선인봉등 기암봉과,직소폭포,선녀담,가마소등이있고,내소사절입구의 하늘을 찌를듯한 전나무숲이 장관이다
또한 월명암 뒤의 낙조대는 월명낙조로 유명하다
지금 이자리가 바로 월명낙조로 유명한 낙조대에 와있는데 저녁에 바라보는 월명낙조를 언제 다시 볼수있을까?
후일 소태산은 월명암에 대해 대종경 천도품 25장에 "내가 어느 날 아침 영광에서 부안 변산 쪽을 바라보니
허공중천에 맑은 기운이 어리어 있는지라,
그 후 그곳에 가보았더니 월명암에 수도 대중이 모여들어 선을 시작하였더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소태산이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당도한 첫 여정지요,
수양처였던 월명암은 당시 선학계의 거장인 백학명선사가 '봉래선원'을 개원하여 크게 선풍을 불리고 있던 때였다.
월명암에서 바라본 변산연봉들,,,
이곳에서 소태산은 약 십여 일간 머물며 같은 영광 출신(불갑사 근방 사람)이자 지기가 상통하는 학명선사와 교류를 나누고 후일을 기약하며 하산하게 된다.
월명암은 한국불교의 성지중 하나요,
대둔산 태고사, 백양사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수도도량으로 꼽힌다.
그만큼 영적인 기운이 뛰어난 기도 도량이며, 수행자들의 깨달음의 도량으로 불리고 있다.
산 아래 멀리서 바라본 월명암은 그 풍경마저도 마치 선정에 든 수행자처럼 깊은 침묵 속에 묻혀있다.
월명암에서 내려다본 봉래호수.
서해낙조(西海落照)
월명암 뒤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약 20분쯤 오르면
서쪽 산등성이에서 바라보이는 짙푸른 서해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누대(樓台)가 우뚝 솟아 올랐는데
이곳이 바로 낙조대(落照台)이다.
낙조대(落照台)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며
비록 서해안 곳곳에서 낙조를 구경할 수 있지만
변산 낙조대(落照台)에서 조망하는 황혼(黃昏)의 진경(眞景)은 가히 환상적이다.
황금색으로 물든 서해바다 가운데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의 섬들과
수평선 아련한 위도섬(蝟島) 뒤쪽으로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며 온 바다를 진홍(眞紅)으로 물들이며
온종일 그토록 찬연했던 태양이 그의 위세를 어쩔수 없이 엄자산(崦嵫山) 탕곡(蕩谷)에 접어야 하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자연의 순리에 나그네는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애련한 우수에 젖어 버린다.
이윽고 어두워지는 천지는 일시에 고요한 적막에 쌓이고
행여 우각봉 산마루에 초이레 초승달 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천재일우(千載一遇) 이만한 장관을 이곳이 아니면 어찌 그 진수(眞髓)를 볼 수 있으랴.
그래서 옛 선인들이나 노산 이은상 시인도 변산 팔경 서해낙조를 그처럼 찬하였으리라.
월명무애(月明霧靉)
하늘의 불 구슬을 엄자산(崦嵫山)에 보낸 후 일행은 월명암 스님의 법문에 숙연히 인생을 배우고
세속의 시름들을 씻어 버린 후 쌍선봉(雙仙峯) 득월대(得月臺)에 서서
만학천봉(萬壑千峰) 안개 속에 묻힌 자락에
어느덧 둥실 떠오른 월명야경(月明夜景)과 새벽 잠을 깬 온갖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봉우리마다
자욱한 운애(雲曖)가 용트림하는 산곡 일봉 일봉 위에 빠알갛게 동이 떠오르는 산 봉우리들의 미경(美景)을 모아서
월명무애(月明霧靉)라 하였다.
지포신경(止浦神景)
변산면 지서리를 옛날에는 지지포(知止浦)라 했다.
지지포에서 쌍선봉으로 향하는 등정(登程)은 숲속을 헤치며
가파른 산등성이를 숨차게 기어올라 산중턱에 이르면 얼마나 상쾌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중산마을을 휘감고 도는 쇠꼬랑날 봉우리에서 조망되는 서해바다는 만폭병장으로 발 아래 펼쳐지고
나는 이윽고 별유천지(別有天地)에 떠 있는 신선으로 착각을 하는 곳이다.
선인봉 전망대에서 한참을 여유로움을 즐기며 직소폭포가 있는 봉래구곡로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일명 기름밭골이라고도 합니다, 망포대와 주봉인 삼신산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기름밭골 계곡으로
크고 작은 소(沼)와 폭포를 이루며 지지포에 흘러와 서해에 이르는 계곡을 기름밭골(谷) 이라 이름하였으니
전하는 유례가 또한 기이하다.
즉 기름이란?
불(火). 등불과 관계가 되는 듯 한데 기름밭골 계곡에 등잔을 뜻하는 옥등계벽(玉燈溪壁)이라는 바위가 있다.
바위 밑을 흐르는 물의 잔영(潺影)이 바위에 투영(投影)되어 바위 면(面)에 등잔불을 켜 놓은 듯한 환상을 일으킨다.
가마소계곡의 가마솥과 비슷한 물 여울 현상이다.
다음은 부싯돌을 가져왔다는 성냥골 바위,
그리고 옥등계벽의 등잔(燈盞) 불빛이 미치지 못하여 항상 어둡다는 어둠골 등이 있다.
특히 이 계곡은 변산의 다른 계곡들과는 달리 갈수기(渴水期)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유일한 계곡이다.
가까운 사람들의 발길조차도 잘 닿지 않는 숨겨진 변산팔경 중의 하나인 지포신경은 바로 이 지포계곡과 주산인 망포대, 쇠꼬리랑 주변의 산수미(山水美)와 서해(西海)의 포구까지를 함께 어우린 해륙풍경의 진수(眞髓)를 말한다.
소태산은 2백 여리 먼 곳에서 월명암의 이런 영적인 기운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을 따라 찾아온 월명암은 필시 소태산과 한 생만의 인연은 아닌 듯싶다.
변산이 예로부터 불연 깊은 곳임은 물론, 소태산이 여래(如來)라고 인증하며 제자들에게 자주 얘기했던 진묵대사가 이곳 낙조대에서 득도하고 임란 때 불타버린 월명암을 중건한 분이 아닌가. 또 소태산이 그런 진묵의 후신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터다. 이러한 만남과 역사의 행간에서 많은 걸 상상해볼진대 변산은 소태산이 다생겁래로 왕래하던 필연의 땅이 분명하다.
![]() |
||
▲ 월명암 사성선원.(옛 봉래선원) | ||
부설 가족의 득도도량, 근대불교 고승들의 정진도량
부설거사, 그가 거둔 위대한 성취는 "금기를 깨는 용기가 아니라 식솔들을 모두 진급시켜 깨달음을 얻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행을 나선 길에서 그로 인해 말문을 연 한 벙어리 여인의 애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포기한 채 그 여인과 가정을 이루고 남매를 낳아 생활하면서 가족 모두 치열하게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설가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월명암에 소장된 〈부설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다.
이러한 전설과 함께 변산의 쌍선봉 아래 자리한 월명암은 1300년 전 통일신라 신문왕 때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으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 월명암은 학명, 용성, 행암, 고암, 해안 등 근대 불교의 걸출한 스님들이 정진 적공하던 이 도량으로 여러 후학들과 선지식을 길러낸 호남 제일의 선문(봉래선원, 사성선원) 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직전 소실된 후 거의 폐허가 되어 수행자의 발길마저 뜸했던 월명암은 1956년 원경스님에 의해 다시 복원되고, 이어 최근 10여 년 간 현 주지인 천곡스님이 많은 불사를 이루며 옛 명성을 되찾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루했지만 청정한 선기(禪氣)가 감돌던 옛 자취는 많이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곳이 여전히 월명암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당에 전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늠름하게 서있을 뿐이다.
30년 전, 교학대 시절 순례 차 찾아간 월명암 법당에서는 두 분 스승님의 향기가 느껴지곤 했었다.
불경을 보지 말라 하신 스승의 명을 받들고 경상마저 외면한 그 순정한 제자가 머물던 거처와 외면한 그 경상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던…. 하지만 이제 월명암의 그 풍경들은 점점 멀어져 간다. 사라져 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그 고즈넉하고 아련했던 경내의 풍경이 이내 그립다.
![]() |
||
▲ 월명암 마당의 전나무. | ||
제법성지의 모태 같은 곳
소태산은 기미년 8월 상수제자인 정산을 먼저 월명암으로 보내고 이어 12월(음 10월)에 월명암을 2차 방문하여 머물게 된다. 변산 시대를 그렇게 월명암에서 시작한 소태산은 맨 처음 송규와 오창건을 대동하고 쌍선봉에 올라 2차 백일기도 해제를 한다. 영산에서 법인 성사 후 2차 백일기도 해제를 앞당겨 마치고 온 터라 이곳에서 제 날짜에 맞춰 다시 해제식을 올린 것이다.
소태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재가불자의 거목인 창시자 부설거사의 불법과 생활, 성(聖)·속(俗)이 둘 아닌 행적과 사상 등을 접하며 어쩌면 미래시대의 새로운 불법의 모델을 삼았는지도 모른다.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를 주장한 소태산의 사상적 기반이 성속을 초월하여 일상의 삶속에서 도를 실현한 부설의 삶과 많이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래정사: 억새가 장관을 연출하는 석두암에서 기념촬영한장 남겨봅니다,
이곳은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가 원불교 교법을 재정한 곳으로 실상초당과 석두암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변산을 경치가 금강산처럼 아름답다하여 소금강 또는 금강산의 여름 이름인 봉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변산 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대종경 성리품 11장.>
~변산 아홉 굽은 계곡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는 것이 또한 없고 없는 것이요.
아니고 아닌 것이 또한 아니고 아닌 것이다,
---
소태산은 월명암에 머무는 동안 찾아오는 인연들이 많아지자 실상초당을 마련하여 2개월 여 만에 하산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머문 시간은 짧지만 월명암은 소태산이 처음으로 직접 불교를 접하고 불교의 혁신사상에 대해 학명선사와 많은 의견을 나눈 곳이며, 정산 송규를 보내 일 년 여간 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연구하게 한 장소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새 회상 교법의 기본 틀을 준비한 제법성지의 모태 같은 곳이다.
겹겹이 갈 빛 산봉우리에 묻힌 고요한 섬 하나, 그렇게 좌정한 월명암의 가을이 투명하게 깊어간다.
'산이 멈춰 서고 물이 돌아나가는' 명당 중에 명당이라 했던가. 범인의 눈으로 봐도 월명암은 분명 그 지기가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변산 8경 중 으뜸인 월명무애(月明霧靄)는 바로 그곳에서 바라본 골짜기의 물안개와 구름이 춤추는 듯한 황홀한 비경을 이른다. 그리고 그 비경만큼이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부설가의 성불이야기가 오늘도 수행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인장바위,
11시 50분에 남여치를 출발하여~ 16시 06분에 사자동 추차장에 도착합니다,
총 4시간 소요되었습니다,
모든 동문산우님께 감사드리며 다음 산행때까지 건강하길 염원드립니다,
잔잔한 배경음악 한곡
첫댓글 소태산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 기도하신 쌍선봉에서 나도 기도하여보았죠,=기미년 8월 상수제자인 정산을 먼저 월명암으로 보내고 이어 12월(음 10월)에 월명암을 2차 방문하여 머물게 된다. 변산 시대를 그렇게 월명암에서 시작한 소태산은 맨 처음 송규와 오창건을 대동하고 쌍선봉에 올라 2차 백일기도 해제를 한다. 영산에서 법인 성사 후 2차 백일기도 해제를 앞당겨 마치고 온 터라 이곳에서 제 날짜에 맞춰 다시 해제식을 올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