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 출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냐크의 소설『의사 지바고(Dcotor Zhibago) 』는 자국 내에서 출판이 금지됨에 따라, 1957년 이탈리아 출판사가 판권을 사서 출간하자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이윽고는 이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데...뭐 출판부터 노벨상 수상까지 후딱 해치운 모양새인데, 화가인 파스테르냐크의 아버지가 아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을 보면 알만 하기도 하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벨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뭐 일종의 신드롬(syndrome)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듯 『의사 지바고』라고 예외랄 수 있을까? 해서리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자 마자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번역하여 경쟁적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중 어느 출판사의 책은 제목을『박사 지바고』라고 달았다는구만 글쎄.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지바고는 의사이자 시인으로 나오는데 웬 박사? 하긴 뭐 의사가 박사 학위 따는 건 여반장(如反掌)이라니까 똑똑한 지바고야 당연히 박사 학위 정도는 갖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사실 외국인이 쓴 글을 우리 말로 번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게다가 감정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고 축약, 상징어가 난무하는 문학 작품을 우리 글로 옮기는 건 자칫 오역(誤譯)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는 100m 달리기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 소리와 같아서 어느 출판사가 먼저 책을 내놓는가에 회사의 사활이 달려 있다는 거다. 촌각(寸刻)을 다투는 출판 경쟁으로 놀랍고도 웃지 못할 많은 해프닝이 일어나는 곳이 출판계라는 얘기들도 있더만...
내가 보기에 서양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학문적(interdisciplinary) 능력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서양의 글을 읽어보면 글을 쓴 사람의 지식이 여러 학문에 걸쳐 있고 그런 지식들이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호 연관성을 유지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수재로 이름난 L모 서울대 교수는 영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전공 분야의 많은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역작(力作)을 써 보겠다고 했다는데...해서리 자신의 관심 분야에 해당되는 영어권의 이름 있는 책들을 열심히 읽어갔는데 결과는? L 교수는 영어로 책을 쓰겠다는 당초의 결심을 포기하고 얼른 짐을 싸서 귀국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영미권의 문학서적은 물론 철학서적, 사회과학 서적을 막론하고 이 책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구약, 신약 포함)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건 뭐 그쪽 책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우리들의 경우 더욱 골치 아픈 건 그 책들 속에 많은 분야의 전문 지식이 시도 때도 없이 언급되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내재되어 있으니 한 분야만 죽도록 파고든 한국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들의 서양 문학에 대한 이해를 제한하는 게 영어와 한글의 구조 차이, 특히 관계 대명사(relative pronoun) 활용 유무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옛날에 공부할 때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글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문장들을 모아 하나로 묶은 절(clause)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문장(sentence)이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게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우리 글에서는 많아도 너무 많은 '다'(종결어미)가 모여 하나의 절(paragraph)을 만드는 데 비해, 영어는 아무 데나 다리(관계 대명사)를 걸침으로써 방대한 양이 들어있는 하나의 문장에 마침표가 달랑 하나 뿐이란 거 웃기지? 믿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유튜브에 접속하여 소설 낭독 사이트를 열어보시라.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단언컨대 5초에 한 번은 반드시 '다'란 종결어미를 읊는다는 거다.
얼마 전 미국의 연주단체 Voices of Music가 연주한 고전음악들 몇 곡을 골라 영상으로 만든 적이 있었는데, 선정 곡들 중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17세기에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작곡가이자 기교파 바이올린 연주자인 마테이스(Nicola Matteis)가 작곡한「Ground after the Scotch Humour」란 곡 때문에 골치를 엄청 앓았다. 아둔한 두뇌에 짧은 지식이 고작인 내게 이 곡의 제목을 우리 말로 옮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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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이스의 모음곡들 중 다른 작품들은 그 제목들을 잘도 소개해 놓고 있더만, 이 음악에 대해서는 딱 한 군데의 블로그에서 검색할 수 있었는데 제목을 '스코틀랜드 유머에 의한 그라운드'라고 번역해 놓았다. 스코틀랜드 유머에 의한 그라운드라...도대체 무슨 뜻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번역은 오역(誤譯)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영국 스코틀란드 지방의 문화, 작곡가의 특징, 그리고 음악적 전문용어 이해 등이 두루 통섭(統攝)되어야 이 음악의 제목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게 음악엔 꽤 문외한이지만 나의 건방진 결론이다. 그렇다고 나의 번역이 옳다? 그건 나도 모르지만 누군가 갤카 주시면 기꺼이 배울 마음은 있으니...
스코틀란드 지방의 유머(Scotch Humour)는 짧은 문장으로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이른바 촌철살인(村鐵殺人)의 경구가 많다고 하고, 그라운드(Ground)는 음악적 용어로 다른 말로는 그라운드 베이스(ground bass) 또는 바쏘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라고 하여 곡의 저음부 음형을 반복 연주하면서 확장해 나가는 악곡 형식이며, 작곡자는 다른 곡들에서도 고도의 기교를 살리면서 경쾌하면서도 반복적인 멜로디를 즐겨 썼다고 한다. 그리고 'after'라는 전치사는 '따르다', '좇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니까 「Ground after the Scotch Humour」는 결국 '스코틀란드 지방의 유머를 좇은 반복 연주곡'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하는데, 실제 연주를 들어보면 경쾌한 분위기에 더해 어느 영역의 가락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건가? 공연히 주제 넘게 오역(誤譯)의 사례를 찾았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면서도 제대로 번역했다는 자신감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으니 자기 꼬락서니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는 바보라니...에궁! 왜 사누? 디져라 디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