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사랑하기는 해요?
- 나에게 도대체 왜 이래요?
- 다른 여자 생긴 거야?
“아니.”
내 대답은 한마디로 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자들이 다 똑같았다. 나는 사랑받는 법을 모르는 만큼 사랑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녀들이 아무리 물을 뿌리고 땅을 갈아엎고, 비료를 쏟아 부어도 나는 이미 말라죽은 나무였기에 빨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나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없겠지. 아마, 없을 거야.
문득 한참 예전의 일이 하나 생각났다. 나는 한때 선인장을 키워본 적이 있었다. 내 첫 여자 친구가 내 생일날에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래, 그래. 처음에는… 처음에는 잘 자라주었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에도 딱 맞았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물을 주면 알아서 크고, 살아주었으니까. 일 년 정도, 우리는 그럭저럭 잘 보냈다. 그리고
깨졌다.
너무나도 허무한 이유로, 우린 한 순간에 남이 되어버렸다. 그 땐, 그 땐 그것이 왜 그렇게 괴로웠는지. 나는 한동안 술에 빠져서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알코올에 휘둘려 행인과 시비가 붙어 얻어맞거나 경찰서에 끌려가기 일쑤였고,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경찰서로 찾아온 부모님에게 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정말 말 그대로 ‘어미 애비도 못 알아보는 놈’ 이었다.
병신새끼
지금 내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그건 병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방황 하며 일 년을 고대로 허공에 쏟아 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 땐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있는 것이라고는 말라 죽어버린 선인장 한 그루 뿐. 나는 그 때 선인장이 말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선인장을 끌어안고 속으로 눈물을 수없이 삼켰다. 힘을 잃은 가시가 손을 파고들어도 더욱 더 세게 쥐었다.
밤, 밤, 밤. 진득하게 녹아서 흘러내리는 밤. 달이 일그러지고 구름이 배회한다. 바람이 불어서 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갑갑해.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시린 바람이었지만 내 가슴에는 미풍조차도 되지 못했다. 부슬, 부슬, 부슬……. 참 조용하게도 비가 내린다. 달빛 한 올 떨어지지 않는 새카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도저히 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싸늘한 겨울날에 비가 내린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서 창틀에 팔을 괴고 몸을 기대었다. 바람을 타고서 요리조리 휘날리는 물방울들이 내 뺨을 쓸어내리곤 바닥으로 떨어져 원목마루의 나뭇결을 그 나약한 손길로 어루만진다.
바람의 손길이 그래도 제법 매운지 창틀에 빗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다. 녀석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내 귓등을 간질이고 그리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보인다. 손에 잡힐 듯이. 내 얼굴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내 머리카락을 할퀴는 바람이, 내 앞에 선히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성나 보이는 검은 먹구름들이 모두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손을 뻗었다. 최대한, 최대한 저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최대한, 최대한 저들에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지만 잡기위해, 손 안에 넣기 위해 아무리 손짓을 해도 저들은 내 손아귀 안에 잡히질 않았다. 내 손짓은 무의미하게 허공만 가르고 있을 뿐. 잡힐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건 물방울 조각.
잡고 싶지만, 너무나 붙잡아 두고 싶지만 도저히 잡을 수가 없는걸.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돼? 정말로 포기해야… 되는 걸까?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내가 과연 물을 먹지 못해서 고사한 것인지, 아니면 내 스스로 뿌리를 잘라버린 것 인지.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확인 못 해봐도 뭐 어때, 해봐서 후회만 안 남으면 될 것을.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진서라는 두 글자가 외부 액정 위로 떠오른다. 드디어 돌아온 건가? 일찍 올 거면 좀 일찍 온다고 좀 말이나 해주지. 웃음이 삐져나온다. 그래, 우선은… 우선은.
첫댓글 멋지다. 좋구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