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12월 31일...
25년 고향생활을 접고 상경한다.
모 설계사무실에 취직을 했다.
자취생활이 익숙한지라 낯선 서울이지만 큰 어려움 없었다.
주말마다 나를 반기는 술과 친구들이 서너명 있었던 탓에 외롭지 않았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가요방을 다니는것도 2년이 지나니까 조금씩 질리기 시작했다.
2년간 회사일도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여 사표를 냈다.
그때부터 가요방 동료와 건국대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직장보다는 자유로운 탓에 의욕이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족구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노점상도 경기를 타는지라 6개월 하다가 접었다.
실내포장마차, 이삿짐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다시 직장을 구하고 가요방 동료와 천호동에 같이 살게 되었다.
무대를 바꾸어 주말이면 집 앞 모 나이트에 단골로 출입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하고 점점 깨닫게 되었다.
술, 담배, 여자, 당구, 포카 ... 지긋지긋했다.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운동을 하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아서 탁구를 다시 시작했다.
동료와 매일같이 밤이면 탁구장에서 땀을 흘렸다.
조금씩 내 몸과 마음의 찌든 때가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회사에서 FBB를 접하게 되었다.
족구동호회도 있을까 해서 찾다가 이 카페를 발견했다.
2000년 12월 21일 ...
그때 비비 회원수는 150명 정도였다.
첫모임에서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두 번째 모임부터는 적극적으로 모임에 동참했다.
모임을 나가고부터 탁구장 월 회원권은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았다.
나이트클럽 출입은 일요일 모임 컨디션 조절을 이유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술을 더더욱 마시지 않았다.
미천한 실력에 술 마시고 허우적 댄다면 족구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치우고 성균관대 시멘트 바닥에서 족구를 즐겼다.
2000년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나로선 너무도 안타깝기만 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시간에 원래 민감한 버릇이 있는 나였기에 항상 족구장에 남보다 먼저 도착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족구에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따스한 봄이 오자 나는 완전히 족구에 젖어 주말이면 족구만 하게 되었다.
사람들과 점점 익숙해지다가 1주년 행사도 추진하게 되었고 부득이하게 총무도 맡게 된다.
영호형은 첫 만남부터 내 주위를 맴돌다 지금은 가장 절친한 인생의 선배가 되었다.
서로의 과거를 떠올려보니 영호형과 나는 닮은 게 너무도 많았다.
대부분 족구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 영호형이 내 주위를 맴돈 건 여동생(신선해)을 보기 위했던 것이었다.
영호형은 여자를 족구동호인중에서 제일 좋아한다.
영호형의 특성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참 많이도 닮았다.
둘 다 총각이었던 시절 평일엔 족구이야기 하려고 만났고 주말엔 족구하기위해 만났다.
한때 나는 족구기술교본을 카피해 출, 퇴근시 지하철에서 읽고 다닐 정도였다.
족구에 도움 되는 것이라면 뭐든 했다.
주말 보라매공원에서 족구 할 때면 킬러 황주수형님의 킥하나 수비해 보는 게 나의 소망이었다.
당시 나는 열정으로는 주전이었으나 실력으로는 후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주수형님처럼 일찍 족구에 접하지 못한 것이 또 한번 아쉬움으로 남았다.
주수형님을 알고 보니 나의 같은 부대 고참이었다는 게 참 공교롭게 느껴졌다.
지금도 만나면 여전히 나를 아우로써 잘 대해주시고 실력 또한 훌륭한 선배이시다.
보라매와 함께 운동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족구에 눈을 뜨게 되었고 스케치도 하며 내 나름대로 분석과 연구도 하게 되었다.
흥미를 잃을 수가 없었다.
그건 중독이었다.
나의 중독 된 열정이 강형님 눈에 띄어 2001년 가을 뜻하지 않게 오대산 전국족구대회에 서울시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구경만 해도 가슴 벅찬 일정이었다.
오대산대회에서 처음으로 최강부 경기를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구경을 했다.
그 당시 서울연합팀은 기아의 임영훈 선수가 공격, 태양의 신경우 선수가 세터였다.
그런데 수비는 초짜배기 나와 비비에서 나보다 간이 더 작은 스카이(봉수명)였다.
그때 태양의 경우형이 간 없는 스카이와 나를 보고 “너거는 어디서 왔냐? 족구하면서 첨 보는 애들이네” 라는 말이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경우형이 첨볼 수밖에 전국대회 생전 첨이니 ...)
울산 현대자동차와의 경기가 기억에 남는데 초짜 수비수인 스카이와 나를 보고는 김종명(당시주전킬러)선수는 백경환(당시후보)선수에게 “야 경환아 니가 대충해라”고 말하곤 사라졌다.
경우형과 영훈이형, 스카이와 나는 이를 물고 싸웠다.
스카이와 나는 최강부 경기에 뛰는 것만으로도 영광 그 자체였다.
첫 세트 14대 11까지 앞서다가 내리 5점을 주고 패했다.
당시 영훈이형의 근육통만 아니었으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
사실 스카이와 나는 수비 몇 개 하지도 않았는데 앞에서 너무도 잘해줬다.
세터인 경우형은 스카이와 나에게 화이팅 없다고 계속 야단쳤다.
스카이는 원래 비비에서 화이팅 없기로 소문났고 간 없는 나는 당시 얼어서 목소리가 안나왔는데 야단치니까 둘 다 아예 입이 막혀버렸다.
정신없이 경기는 진행되고 ...
비록 2:0으로 패했지만 나의 족구인생에 잊혀지지 않을 게임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찬마 사무처장님과 족구마담 포스코 용석형을 알게 되었고 곽대성 선수가 고향 1년 선배인 것도 알게 되었다.
경기 후 저녁에 식당에서 최강부 최고킬러 곽대성 선수가 나를 먼저 아는척했다.
흐뭇했다.
나는 모르는데 본인은 나를 안다고 했다.
어찌되었던 대성형의 후배란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요즘도 고향가면 대성형과 용석형은 꼭 만나서 소주한잔 한다.
족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나는 작년 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족구를 하지 않았으면 절대 만날 수가 없었다.
보라매공원에서 FBB 1주년 행사 때 여우회원의 선배로 함께 참석한 사람이 지금의 와이프이다.
우연이었는데 그것은 운명이었다.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모임은 분주했다.
다름 아니라 결혼식 날 경주에서 포스코 최강부와의 교류전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 일에 앞장 선 분은 강형님이었다.
2002년 3월2일(토) 보라매에서 모임을 하고 회원들은 밤새 경주로 왔다.
나는 결혼전날이라 술을 진하게 하고 새벽에 회원들 얼굴 잠깐 본 기억이 난다.
강형님,바람형,들소형,황제형,불새,신선한,손킬머...(영호형,태영형은 당일 날 본 듯하다)
3월 3일 나의 결혼식이 시작되자 회원들의 눈빛은 빨리 기념촬영 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기념촬영이 끝나자 회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족구를 한판이라도 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식을 마치고 경주황성공원에 가서 포스코 최강부와 비비의 멋진 경기를 구경만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단 한 세트만이라도 뛰고 싶었는데 ...(장비 등등 나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봄이 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족구에 충실하게 되었다.
나는 체력이 떨어질까 봐 그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
결혼 후 10달간 혼자 있었기에 주말과 평일 밤 꾸준히 족구를 했다.
수요일마다 대림구장에서 밤족구 하면서 팀웤을 다지고 개인연습도 했다.
그리하여 2002년 12월 춘천에서 우리는 일을 낸다.
전국최강전 일반부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비비회원 모두가 노력하고 고생한 보람이었다.
시상식은 2002년 한해가 뿌듯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당시 와사비가 대구창공을 꺾고 예선통과 한 것이 우리에겐 큰 힘이었다.
회원들의 격려로 나는 비비 초대회장을 맡게 되고 유능한 총무(이상엽)를 옆에 두게 되었다.
무리 없이 이어지던 모임이 연초에 위기를 맞게 된다.
우리의 터전이었던 보라매공원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청천벽력과 같았다.
공원조성공사로 우리가 족구 하던 자리는 굴삭기가 지나 다녔다.
족구장이 없어서 한 해 동안 여기저기 참으로 많이 옮겨 다녔다.
노량진공원, 남산족구장, 안양천 고수부지, 계양족구장, 대림족구장...
전용구장이 없다보니 회원들의 열정도 조금씩 식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엽이와 힘을 모아 회원들 열정이 더 식지 않도록 최선 다했다.
봄에는 금산의 김현우 선수를 개인적으로 초청하여 친선경기도 가졌고 (주)키카 와의 스폰서건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구장답사를 여기저기 다녔고 안양천에서 할 때는 모임 전에 1시간씩 땅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곳저곳 모임장소를 옮기다 보니 참가 회원수는 더 이상 늘어나질 않았다.
서글펐다.
장마가 끝이 나고부터 나는 구장확보에 더욱 신경을 세웠다.
회장 맡으면서 전용구장 하나만큼은 꼭 확보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찬마 사무처장님의 조언으로 구연합회를 찾게 되었다.
당시 상엽이는 바쁜 회사일에도 불구하고 구로구청 문화체육과를 드나들었다.
일단 구로구 연합회장님을 만나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가지고 구로구 연합회장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첫 만남부터 나는 비비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족구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원씨(구로구 연합회장)와 소주를 한잔하고는 나의 언성도 높아졌고 얘기도 길어졌다.
족구하면서 배워온 것들은 그날 다 말했다.
김종원씨는 일단 긍정적으로 나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추후 통보해 주기로 했다.
나는 그의 소식을 기다렸다.
며칠 후 구장확보가 가능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정말 기쁜 순간이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다.
와이프는 밤새 울었다고 한다.
와이프한테는 전용구장 확보를 위해서 한번만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전용구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미래 초등학교에서 모임한지가 한달이 지났는데 비비 분위기가 다시 예전처럼 살아나고 있다.
다들 알겠지만 서울시 구대항전에는 비비가 구로구와 연합하여 출전하는 조건으로 운동장을 얻게 되었다.
김종원 형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요일 모임은 구로구연합팀과 비비가 함께 구로미래라는 명칭을 사용키로 했다.
초대회장님이신 종원형님은 운영비 쓰라고 찬조금 100만원을 나에게 주셨다.
부회장님도 50만원을 주셨다.
모두가 고마울 따름이다.
전용구장을 아끼고 보존하여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이 장소가 비비가 다시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올해 대회에서 큰 성적은 비롯 내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솔직히 전용구장 확보 못했으면 내년에 회장 한해 더할 욕심이었다.
구장 확보할 때 까지 비비 회장 하려고 했다.(와이프는 죽이려 들겠지만 ...)
차기회장 영호형, 총무 황제형이 내년에 모임 재밌게 해주리라 믿는다.
학창시절 가출이 잦아 논산훈련소 있을 때 아버지가 인간 만들겠다고 아는 분 빽 써서 나를 공수부대 보내어 그 시절 정신 차렸는데 서울에 와서는 족구를 만나 정신 차리게 되었다.
족구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FBB를 만나 결혼도 했고 내년이면 또 한명의 족구인도 태어난다.
초창기 서울생활 ...
가요방, 노점상, 나이트, 지겨운 여자들 ...
이제 서서히 잊혀진다.
모든 게 족구 때문이다.
족구는 언제나 즐겁다.
족구는 나의 희망이다.
내년엔 더욱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다.
올 한해 몸도 약한 상엽이가 고생 많았다.(상엽아 연말에 ...)
총무한테 영양제라도 한통 사줘야겠다.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 물을 주고 잘 가꾸어 내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비비가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여우회원, 앞일꾼 그리고 대한민국 족구 동호인 여러분 한 해 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강훈이 당신이야기인줄알고 읽었더니 아니구만
글세!나도 허헣허허허
공감되는 내용들이 있어서...요.... 읽으시느라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