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중학교 시절은 싸움에서 시작하여 가출로 끝났다.
초등 학교 3년 다닌 것이 고작인 '짧은 가방끈'으로 동네에서 왈패 노릇을 하던 형이 '서울가면 운이 터서 금송아지 생긴 다나'라는 노래 구절에 흘려 나이 열다섯에 천운의 꿈을 안고 떠났다 거지꼴로 며칠 만에 되돌아온 뒤에, 한달동안 얼굴 넙걱한 동네 미장원 시다와 강아지 연애를 하다가 어느 날 판자를 주워다 뚜덕뚜덕 망치질해서 구두통을 만들어 어깨에 걸고 재상경을 결행한 지 한 해가 가까웠다. 한 해 월반을 하기는 했지만, 초등 학교를 그럭저럭 졸업하는 아이들에 견주어 세 살이나 더 많았다.
초등 학교 졸업식 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는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이가 많았던 탓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줄곧 일 들을 놓치지 않았고, 따라서 졸업식 때 도지사 상을 받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하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쪽 생각은 달랐다. 우선 내가 5학년 2학기 때 전학해 온 뜨내기인데다가 세 평짜리 난민 주택에서 사는 홀아비의 아이였기 때문에 도지사 상을 받으려고 기대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생각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상이 사친회장의 아들인, 계집애처럼 살색이 뽀얗고 보드라운 정미소 집 아이에게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판가름나자, 아버지 대노하여 나더러"졸업식에 가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거니와, 나도 이 등 상을 받는 것은 굴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는 학교 교정에서 들려 오는 '빛나는 졸업장을 받는 언니께' 라는 합창이 잔인하게 고막을 후벼팠다.
내 나이 열다섯 살이었으므로 이제 나도 내앞길을 가릴 수있어야 했다. 어렸을 적 사돈 집에서 꼴머슴을 살 때에는 새경으로 쌀 열 가마니 받는 장골 상머슴이 되는 게 소망이었지만, 머리가 여물고 나자 생각이 바뀌어서 중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집형편으로 보아 어림 반 푼어치도없는 생각이이었다. 피난민에게 주는 수호미가 유일한 소득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꽤 똑똑한 녀석으로 보이는 아들놈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기에 딱했던지, 일흔이가까운 아버지는 자존심을 꺾고(또 아흡 가운데 밑으로만 셋 남은 자식을 모두 농투성이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임이 두 형의 행적을 통해서 밝혀진 바도 이고 해서), 어느 날 젊은 시절 친구의 아들이 교장으로 있는 시골 중학교에 찾아갔다가 일 등으로 입학을 하면 학비를 면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왔다.
자신이 없었지만, 아무튼 시험은 보고 볼 일이었다. 시험 문제에는 지금 일본 수상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도 들어 있었다. 알 턱이 없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합격자 발표날에 두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중학교에 가려고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내려 장터 거리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웬 조그마한 녀석이 길을 가로막았다.
"니가 윤구병이 맞제?"
"그래. 내가 윤구병이여."
"너 이 등으로 붙었다더라."
억장이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졌다. 이제 중학생이 된다는 꿈은 말짱 헛것이 되었다. 나는 정신 없이 그 소식을 알려 준 꼬마의 멱살을 붙들었다.
"내가 일 등으로 붙었건 이등으로 붙었건 니깐 놈이 무슨 상관이여!"
그 아이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기껏 기쁜소식을 알려 주는 호의를 베푸는 자기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우리는 서로 엉켜서 뒹굴었다. 꼬마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코피가 터지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기 때문에 싸움에서 졌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나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길고 되돌아 화물 열차에 매달려서 집으로 오는 동안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힘이 쭉 빠진 상태로 눈두덩이까지 부어서 집에 돌아온 막내아들을 보고 아버지느 말이 없었다. 나중에야 이등으로 붙었다는 이야기를 듣도 아버지는 다시 집을 나섰다 또 한 번 자존심으 꺾어야 할 판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국수 한 그릇씩 먹여 돌려 보내 물의를 빚으셨다는분, 그 이듬해 소상날, 보다 못한 고모님이 큰 산을 넘오 머슴에게 지우고 머리에 이고 삼십 리 길을 떡을 해 가지고 왔다가 문 앞에서 쫓겨나 그 한을 두고두고 조카들에게 푸념으로 들려 주게 했던 분, 친정에 신행을 온 새댁이 동네에 떡을 돌릴 적에도 그릇을 비워서 돌려 보내지 않는 분, 그런 분이 막내아들 때문에 다시 손아랫사람인 교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아무려나 아버지는 입학금을 면제하고도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왔다. 그 대신에 조건이 있었다. 학비를 전액 면제받으려면 학과 잠수가 평균 95점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학을 해야 하는데, 통학권을 끊을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조무래기 범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삼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서 오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철도청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열차를 공짜로 타는 온갖 재주를다 익혔다. 열차사 역에 도착할 때, 맨 뒤칸이 멎는 지점에 서서 한눈으로 승무원이 탄 위치를 파악하고, 이미 표조사가 끝난 칸에 타기, 표 검사가 있을 때 뒤칸으로 자리옴기기, 그래도안 되면 변소에 숨기, 다음 역에서 내려 표검사가 끝난 칸에 옮겨 타기, 절대절명의 순간에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 그러나 온갖 재주를 다부려도 꼼짝없이 잡히는 때가 한 달에두세 번은 있었다. 화물차를 개조해서 만든, 피할 구석도 변소도 없는 찻간에 올라 탔다가 차장을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개개 귀를 잡아당기거나 차표에 구명을 뚫는 찍게에 머리통을 맞아 혹이 생기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끝났으나, 어떤 때에는 다음 역에 인계괴어 몇 시간씩 닦달당하는 때도 있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반은 우격다짐으로 고향 마을에서 서당훈장을 자칭하고 나서서 당분간 통학을 면하게되었으나, 그것도 겨울 동안 잠깐뿐이었다. 보릿고개가 닥쳐오자, 굶으면서라도 한문 공부를 하겠다는 갸륵한 학동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용두질을 배웠다. 초등 학교 사 학년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이광수의(어머니)나 박화성의 (찔레꽃)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는 뭐가 뭔지 내용을 알수 없었다. 중학교 이 학년이 되자, 전에모르던 것이 차츰 이해가 되고,특히 동네에서 굴러다니던 정비석의 연애 소설은 나를 무섭게 흥분시켰다. 좁은 단칸방 한이불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면서 용두질을 해도 아버지는 모르는 척해 주었다.
학교 생활은 아나도 재미가 없었다. 입학 성적은 좋다는 이유만으로 반장이 되었으나, 민주적인 학급 운영 방법을 몰랐다. 나는 권위주의에 가득 차서 거드름을 피우고, 명령과 지시를 일삼았다. 특히 청소 시간에 꾀를 피우거나 뺑소니치는 아이가 있을 때에는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 등 잔인한 방법을 써서'기합' 주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느 날, 거센 반발을 받았다 . 초등 학교 다닐 때 애송이 였더 내 '똘마니' 하나가 어느 겨를에 몸집이 집채만해지고, 얼굴이 여드름투성이인 거인으로 자라 있었는데, 나는 그몸집 속에 예전이나 마찬가지로 겁쟁이가 들어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라. 그런데 웬걸! 내가 길길이 뛰자, 그 녀석은 내코 앞에 거대한 가슴을 들이밀면서
"너 맞장 한번 떠 볼래?"
하고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역기로 단련되었다는 완강한 팔뚝에 겁이 났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반장의 권위는 끝장이었다.
"너 이따가 청소 끝나면 혼자 저기 뒷산으로 와."
나는 아랫배에 한 것 힘을 주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막상 산에는 그 애를 만났을 때, 그 아이는 눈깜짝할 사이에 더 우람한 거인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갑자기 칭얼대는 강아지로 둔갑해 버렸다.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소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지려는 순간, 만사가 끝장이었다, 내 코에서는 코피가 터졌다.
'체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는 마구 덤벼들다 코피를 보고 주춤하는 그 애에게 코피를 닦을 동안 기다리라고 말하고, 개울물에 코를 씻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늦여름 살모사처럼 독이 올라서 그 애에게 껑충 뛰어 올라 두발로 허리를 감고 무조건 코만 때렸다. 그 애의 코피가 터지자, 나는 재빨리 물러서서 그 애가 코뿔소처럼 덤비는 것을 손을 휘저어 멈추고, 우선 코를 닦고 나서 다시 붙자고 했다. 그리나 그 순간, 이미 내가슴에서 일기강천의 상산조자룡은 오간 데 없어지고, 다시 어리친 강아지 새끼 한 마리가 꼬리를 감춘 채 낑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코피를 씻고 있는 그 애를 남겨 두고 줄행랑을 놓았다.
이 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사춘기가 왔다. 내 볼두덩에 거뭇거뭇 털이 돋아 났다.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가득 차서 내마음은 깊은 혼란에 빠졌다. 내 마음 속에 우상이 생겼다. 동네 약국 아들이이었는데, 나보다 한 살 밑이었지만, 나보다 헐씬크고 의젓하고 풍채와 인물이 좋았다. 그 아이는 바둑과 장기를 잘 두었기 때문에, 나는 그애가 모든 점에서나보다 더 낫다고 믿어 버렸고, 이 믿음은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애를 내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고, 실제로 편지를 할 때에는형이라고 불렀다. 그애가 살고 있는 집은 옛날 우체국 관사였는데, 향나무와 그 밖에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득 찬 정원이 있었다. 그 집에 놀러 갔다가 나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위인 그 애의 누나에게 반해 버렸다. 내 춥고 어두운 마음에 눈부신햇살이 펼쳐지고, 맑은 강물이 흘렀다. 나는 그분만을 위해서 이제까지의 내 죄 많은 삶을 청산하고, 순결하게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용두질을 당장 그만두었다. 그 동안 그 짓으로 느꼈던 감각적 쾌락이 불결하기 짝이 없었고, 그분이 그걸 알면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죄 의식에 가득 차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나는 내 친구 누나를 누나라고 불렀는데, 날마다 누나에게 편지를 쓰고, 수업 시간에 창 밖으로 구름만 지나가도 누나 생각으로 애틋해지고, 집에 돌아오면서 그 동안에 쓴 편지를 누나손에 쥐어 주고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바람처럼 달아나 버리곤 했다. 또 격에 맞지 않게 나중에 자라서 누나와 함께 살게 되면, 보리밭이 앞에 펼쳐진 산언덕에서 누나는 뜨개질하거나 책을 읽고, 나는 바이올린을 켜는 몽상에 잠기는 버릇이 들었다. 비록 난민 주택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지만, 나는 '소공녀'였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는 달리 '소공녀' 나 '소공자' 같은 허황한벼락부자나 귀족이 되려는 꿈을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그릇된상상력을 길러 주는지 깨치지 못했다. 또 어려서부터 걸망을 뜨거나 짚신을 만들어 신는 법을 익혔고, 모심기, 논매기, 꼴베기, 등짐 같은 힘든 농사일이나 노동에서 잔뼈가 굵었음에도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못하는, 농촌 풍경을 배경삼아 외국 악기인 바이올린을 켜는 사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 의 상상 속의 배우자를 고운 옷을 입고 한가하게 책을 읽는 것으로 그리는 자신의 가치관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하기야 그 때까지만 나는 농사일을 하거나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나 이웃 어른들이 훌륭한 사람들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 때만 해도 넥타이를 매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면장갑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었고, 행여 선생님이 가래침을 함부로 뱉는 행위나 똥오좀을 누는버릇의 비위생성을 이야기할라치면, 변소에서 똥오줌을 누는 이일보다는 고샅이나 밭에다가 오줌을 누거나 똥을 한 무더기 싸 놓고 흙을 파서 묻거나 가랑잎으로 덮던 자신의 비도덕적이고 치욕스러운 꼬락서니가 떠오르고, 병균이 우글우글한 가래침을 아무 데나 뱉고도 태연하던 무지몽매한 시골 할아버지들의 경멸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곤 했으니까. 또 변소나 부엌을 청결하게 하고 방 안과 마당 청소를 깔끔하게 하던 '왜정 시대' 문명화된 일본 사람의 예를 들면서 '엽전' 은 별수 없다는 감명 깊은 화고담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면, 재와 똥을버무려 쌓아 놓은 오줌으로 질척거리는 우리네 '측간'이 떠오르고, 노래기와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부엌과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힌 툇마루와 땔나무나 지푸라기로 어지러운 마당이 부끄러운 치부가 드러나듯이 까발려졌으니까. 나는인구가 밀집되고, 햇빛이 잘 들지 않은 도시의 골목길에서는 가래침을 함부로 뱉거나 똥오줌을 아무 데서나 누는 것이 주민들의 건강을 위엽하는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한 행위가 도지만, 널따란 시골의 툭 트인 공간에서는 가래침을 아무 데나 뱉어서 햇빛이나 바람이 말려 주거나 빗물이 씻어 주는것보다는 더 위생적인 처리 방법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 도 없었다. 그러니 똥을 밥주무르듯이 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똥오줌을 더러운 것으로 멀리하기보다는 어려서부터 친숙한 것으로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변소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음의 합리성을 어찌 깨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집 안에 변소를 두는 것이 더 비위생적이라는 이의를 어떻게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친구 누나는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본디 책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 동안 내나이에 걸맞지않은 풍속 소설까지 포함해서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책에는 좋은 책도 있고, 나뿐 책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좋은 책을 읽도록 이끌어 준 사람이 그 누나였었다. 나는 누나가 빌려 주는 책을 걸신들린 것처럼 읽었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책들은 나에 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나는(데미안)을 읽고, 나의 우상인 친구를 데미안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위선자인 피스토리우스와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기로했고 그 중에서도 구름을 가장 사랑하기로 했다. 헤세의 눈을 통해서 보는 저녁 노을은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산책을 시작했다. 영산강가를 거닐면서 강물에 비친 구름과 달에 넋을 잃기도 하고, 갈대 숲을 스치는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도 했다.
나의 우상인 친구와 이별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도시로유학 간 친구가 일요일에 집으로 찾아왔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서 였다. 내가 그 친구 집에 갈 때, 나는 늘 과일이나 미숫가루를 얻어먹곤 했다. 밥상을 받을 때에는 가짓수도 많거니와, 감칠맛 나는 반찬들 때문에 회가 동했다. 그러나 우리집에서는 그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별수 없었다. 꽁보리밥과 소금에 너무 절여서 소태 맛이 나는 김치 한가지가 밥상에 올랐다. 나는 그친구에게 반찬은 없지만,같이 먹자고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안 먹겠다고 했다. 밥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파랗게 질렸다. 상상도 할수 없는 모욕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상을 고스란이 덮어 두고,친구와 역전으로 내려 갔다. 마친 주머니에는 몇일 전에 산에 가서 장끼를 덮쳐 잡아 식당에다 팔아서 받은 돈이 있었다.
그 친구를 식당으로 끌고 가서술이나 같이 마시자고 했다. 마음 속으로 이별하는 친구와는술을 마시는 게 제격일 것 같았다. 친구가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마음 속에서는 격렬한 분노가 부타 올랐다 . 그러나 내색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나만 마실 테니까, 넌 보고만 있어"
나는 술을시켰다.
"아주머니, 막소주 한 되 주이소."
"안주는?"
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험악한 내 얼굴 때문에 다른 말은 못하고 탐탁찮게 물었다. 안주 값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맨술로 주이소."
그 경우에는 '깡술' 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그 당시에 내 어휘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뒷병에 담긴 술을 주전자에 가득 부었다. 그리고 김치 쪼가리가 담긴 접시를 디밀었다. 나는 물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거푸 들이켰다.
김치 쪼가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치 물 마시듯 하네."
친구는 얼어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고, 아주머니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아마 그 술을 다 마시는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자 이제 나가지."
나는 친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날이 어둑해 지자, 친구는 기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오늘 밤 자고 가지 않을래?"
친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돌아서는 친구의 잘생긴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오늘은 니 얼굴이 대리석 같다잉."
친구를 돌려 보내고 나서 나는 달빛이 눈부신 옛 초등학교의 교정을 걸었다. 플라타너스 잎사귀에서 부서지는 달빛에 파르무레한 설울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우리 집 널마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무릎을 칠 때 느꼈던 격렬한 통증을 빼면.
그날 이후로 나는 몹시 앓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밤새 게워 내고 노란 위액까지 더 나오지 않자, 헛구역으로 날을 밝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는 것이다. 밤새 아버지는 말없이 구톳물을 닦아내고, 이튿날 저녁 늦게 정신이 든 망나니 아들을 보고도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그 뒤로 한달이 넘도록 술이라는 생각만 떠올라도, 누구 입에서 술이라는 말만 나와도 배 안에 있는 곳이 모두 입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점점 학교 생활이 싫어 졌다. 시험을 볼때마다 모든 과목에서 평균 95점을 맞아야 한다는 압력이 질식할 것 같은 중압감으로 내 의식을 짓눌렀다.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을 때에는 손에 들고 있던 교과서를 벽에다 집어 던졌다.3학년이 되자 걷잡을수 없어 졌다. 3월부터
나라가 온통 뒤숭숭해지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와 현수막이 내가 사는 시골 장터 거리에까지 물결 쳤으나, 그것은 내 삶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교실에서 선생님들에게 괴상한 질문을 던져서 당황하게 하거나 동급생들을 낄낄거리게 만드는 버릇이 붙었다. 전교에서 1등을 하던 성적이 학년에서 일 등으로 떨어졌고, 드디어 그 성적마저 지키지 못해서 다른 학급에 있는 아이에게 일 등이 돌아갔다. 담임 선생님은 광분을 했다. 특대생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싸리나무 줄기를 한 아름 안고 와서 반 학생 모두에게 매질을 시작했다. 물론 맨 먼저 불려간 사람은 나 였다. "네가 공 부를 게을리하니까 모두 본받아서 우리 반 평균 성적이 다른 반에 뒤떨어졌다."는 말과 함께 선생님은 내 종아리를 사정없이 싸릿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나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종아리에 부딪쳐 꺽여 나가는 싸릿대가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내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나서야 담임 선생님은 매질을 멈추셨다.
"다음부터는 공부 열심히 해"
호통을 치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나는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곧 선생님들께 어려운 시절이 왔다. 4.19혁명의 도도한 물결이 우리가 다니는 시골 중학교에까지 범람한 것이다. 고등학교 이학년 선배 가운데 키가 작달만하고 깡마른 학생이 있었다.학생회장 선거 때 입후보자로 나온 다른 선배들이 운동장 가운데 놓인 교단 위에 올라서서 반공 웅변 대회 때 보던 과장된 팔짓과 뱀 개구리 삼키다 목에 걸린 것같이 부자연스러운 음성으로 내용 없는 미사여구를 쏟아 놓는 것과는 달리, 이 선배는 전혀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거나 교탁을 부서져라 하고 두들기는 볍 없이 얌전한 자세로 마치 일상적인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투박한 사투리를 그냥 써 가면서, 저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 동안 학교가 얼마나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었는지. 자기가 당선되면 전체 학생들을 위해서 학교에 무슨무슨 요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입담 좋게 이야기했고, 드디어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어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선배 일당이 일을 저질렀다. 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 울리는 비상종 소리에 등이 떠밀려 우리는 모두 삽시간에 운동장에 모였다. 학교 창고에 간직된 학도 호국단 시절 총검술용으로 제작된 목총을 들고 설치는 선배들의 살기등등한 표정이 곧 많은 학생들이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운동장으로 나온 선생님들과 교장 선생님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학생회장 선배가 교단에 올라섰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부정 부패와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선언문이 낭독되고, 뒤이어 이승만 독재 정권에 빌붙어서 독재 정권의 비호에 앞장섰던 '어용' 교장(나는 이 때 어용이라는 망을 처음으로 익혔다.)과 '정치'교사, 그리고 '무능' 교사의 이름과 그들의 죄상에 대한 고발과 탄핵 내용이 열거 되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주 학생회의 이름으로 4.19혁명 이념에 따라 '여용' 교장과 '정치'교사와 '무능' 교사를 몰아 내자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자는 제의가 있었고, 이 제의는 목총을든 선배들이 한손에 목총을 높이 치켜든 채 부르는 만세 삼창에 따라 모든 학생이 두손을 높이 들어 만세 만세를 외침으로써 통과되었다. 덩달아 만세 부르고 있는 '정치' 교사의 아들과 '무능' 교사의 아들이 높이 치켜든 손이 눈에 들어왔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다음주 월요일에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고등학교 간부 학생들로 이루어진 '혁명 위원회'는 곧 기능이 정지되었다. 왜냐 하면 월요일에 약속이나 한 듯이 '혁명' 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하나 같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곧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용' 교장이 역 앞을 배회하는 깡패들을 동원해서 '과격 정치 학생' 들을 등교 길에 붙잡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팸으로써 사태를 역전시켰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종례 시간에 벌떡 일어나 담임 선생님을 물어뜯듯이 노려보면서 그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대답을 회피했다. 나의 이 오만무례하고 방자한 언동은 우리 반에 어용 무능 교사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다. 나는 "혁명"의 절정기에 만세를 부르지 않은 유일한 학생이었으므로 '과격 정치 학생'들과 한 패거리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 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이후부터 나는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초등 학교 사 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학비를 가지고 오지 않은 학생은 수업 시간에 모두 집에 돌려보내라고 명령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지식하게 그 말에 복종했다. 나는 출석부체 학비가 미납된 것으로 적힌 학생들을 불러세워서 교실 밖으로 내쫓았다. 곧 물의가 일어났다. 학부형들이 학교에 찾아와 교장 선생님에게 항의를 했다. 담임 선생님은 발뺌을 했다. 자기가 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교장 선생님 앞에서 증명하기 위해서 반장인 나를 불러 내 교탁 앞에 꿇어앉혔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시간이 지나도 자리에 돌려보낼 생각은 안 했다. 오줌이 마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오줌을 누러가겠다고 하면 또 화를 내실 것이었다. 참다참다못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고, 수치심과 분노로 몸을 떨면서 울었다. 담임 선생님은 오줌이 마려우면 일어서서 누고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또 마구 화를 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나는 누나에게 학교는 감옥이고, 선생님들은 간수라는 이야기를 편지에 공공연하게 썻다.
나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이번에는 내가 '데미안' 이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나는 조그마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어용' 교장 축출 기도 사건 때 만세를 부르지 않은 유일한'반동'이었다는 접도 작용했지만, 주먹을 쓰는 선배들의 인정이 더큰 몫을 했다. 어느 날, 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일찍 수업이 끝난 고등 학교 교실에서 우리 반 교실 복도로 방차하게 힘껏 소리를 높여 쿵쾅거리면서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교실뒷문을 열어젖히고, 발자국주인들에게 호통을 했다.
"남의 반 수업이 있는데, 조 조용히 다닐 수 없어?"
호랑이 콧수염을 뽑은 격이었다. 동급생들도 함부로 그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드는 '어깨' 들에게 시비를 걸었으니 무사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길목을 지키고 있더 '어깨' 둘이 나를 학교 강당 옆으로 끌고 갔다. 아니, 끌고 가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따라갔으니까, 끌려가지는않음 셈이었다.
"너 이 새끼, 선배들한테 그게 무슨 놈의 말버릇이이야?"
'어깨' 하나가 으르렁거렸다.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조용히 다니면 되잖아."
속으로 잔뜩 겁을 먹고 있었지만, 옆에서 동급생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뻗장대면서 어깃장을 놓았다.
"야, 이 X만한 새끼 좀 보게? 너 같은 놈 때문에 학교 기갈이 안서. 너 맛 좀 봐라."
주먹이 날아왔다. 덩치도 덩치려니와 중과부적이었다. 나는 되로록이면 매 맞는 면적을 줄이려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렸다. 둘이서 소나기처럼 주먹과 발길 세레를 퍼붓더니, 이윽고 날이 맑아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때? 이제 정신이 좀 들었다.
"흥!"
나는 독 오른 살모사가 되고 고개를 빳빳하게들고 코웃음을 쳤다. 이 오만무례한 반응은 선배들을 무섭게 흥분시켰다. 나는 미처 방비를 갖출 틈도 없이 그야말로 인사불성이 되로록얻어터졌다. 그러나 그렇게 맞으면서도 나는 빈말로나마 잘못을빌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자, 나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내 새로운 친구는 수시로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나는 달래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드디어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냈다.우리는 이제 어른이었으므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줄 알아야 했다. 그 점에서는 내가 선배였다. 6·25이후에 사 년 동안 동네 청년들과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닐 때부터 나는 호박잎을 신문지에 말아 만든 호박잎 담배를 피운 경험이 있었다. 풀 냄새와 종이타는 냄새로 혓바닥이 갈라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송이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열심히 붕어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 담배였다. 페티 페이지나 코니 프랜시스 같은 미국 유행가 가수의 노래와 함께 양담배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흘러들던 때였다. 카멜, 말보로, 쿨, 러키 스트라이크, 윈스턴, 살렘, 나는 그 중에서 박하 냄새가 나는 살렘을 좋아했지만, 친구들이 계집애나 피우는 담배라고 깔보는 투로 타박을하는 바람에 내색을 할 수없었다. 술도 마셨다. 그 때에는 동해 바다가 오징어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오징어를 나라 밖으로 빼돌리지 않았지 때문에 값이 무척 샀다.
나와 내 새로운 친구는 교복 뒤 호주머니에서 두 홉짜리 소주를 꺼내고, 오징어를 찢어서 술판을 벌렸다. 술기운이 알딸딸해지면, 그 친구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 하나 해 줄까?"
하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뻔했다. 하도 많이 해서 이제는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상관 없었다.
"응"
하고 내가 대답을 하면, 그 친구는 억양 바꾸지 않고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옛날에 잉, 우리 동에에 잉, 사인이가 살었는디 잉, 홀엄씨(홀어머니) 아들이었제 잉, 둠벙에서 물을 품어서 잉, 고기를 잡는디 잉, 물이 째질째질해지면 잉,(손으로 쑥떡 먹이는 시늉을 하면서) 요만한 까미지(가물치)도 잡고 잉, 요만한 잉오도 잡았어야. 그란디 잉, 사인이가 잉, 배가 고파서 잉, 한쪽에서 잉, 송사리 같은 잔챙이만 줍고있다가 잉, 미기(메기) 한 마리를 잉, 얼릉 잡아서 잉, 구덕에다넣었제 잉, 그렁께 잉, 순임이 아부지가 잉, 그것을 보고 잉, '사인아, 그 미기 칸만(가만히) 안 놔 둘래,칵 뻘창 뿌래분다(뻘을 뿌려 버린다) 잉, 허더랑께."
우리는 술기운에 달아오른 빨간 얼굴을 마주 보면서 낄낄대며 쑥떡을 먹였다.
그 무렵에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두 권 있었다. 하나는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밑에서)였고, 또하나는 톨스토이의(인생 독본)이었다.(수레바퀴 밑에서)는 누나가 빌려준 책이 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그 책에 나오는 주인공 한스 기벤트는 내 삶의 길을 예시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한스도 나처럼 홀아비의 아들이었다. 한스가 들어간 곳은 수도원 학교였지만, 역시 나처럼 이 등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나 기계 공장에서 나사를 깎다가 드디어 삶의 환멸을 느끼고 자살을 했다(그 당시에 나는 해세의 생가고가는 달리, 공장에서 기계 부속품을 깎으면서 느끼는 고통의 체험이 궁극적으로는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너무나 이른 나이에 체험했던 혹심한 육체 노동이 나의 의식을 병들게 했는지 모른다). 인생이 나에게도 수레바퀴와 같았고, 드디어 어느 날엔가는 그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는 곳이 내 운면 같았다. 그 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한번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자린 그루터기에서 많은 곁가지를 내 뻗친다. 그러나 그 가지가 자라서 다시 나무가 되는 법은 결코 없다." 라는 말이 깊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열여덟 살이 넘도록 현재와 같은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오욕이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 순수성마저 잃지 않는 길은 이 죄 많은 세상을 하직하는 길뿐이라고 여겼다. 어디를 둘러보나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구두통을 메고 서울로 올라갔던 형은 종로 오가에서 펨푸 노릇을 하고 있었고, 단기 하사로 군대에서 제대한 형은 장터로 다니면서 하던 책장사를 때려 치우고, 깊은 실연의 상처를 안고 서울로 올라가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둘 다 제 앞가림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노쇠해 갔다.
..
자살에 대한 갈망을 성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톨스토이의<인생독본>이었다. 나는 날마다 <인생독본>에 나오는 도덕적인 격언을 읽고, 그 격언에 따라 살기로 작정했다. 길가에 쓰레기가 있으면 말없이 주워서 버리고, 동네에 사는 꼬마를 우물까지 데리고가, 까마귀가 '아저씨, 아저씨' 할 만큼 때가 덕지덕지 앉고, 갈라 터져서 피가 흐르는 손과 발을 물에 불려 돌멩이로 문질러서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제까지 무심히 밟았던 풀 한 포기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즐겨 간장에 찍어 반찬으로 먹었던 멸치들이 그물에 걸려 올라올 때 헐떡거리면서 몸부림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채식 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 배추, 상추 같은 것이라고 해서 잎이 잘리거나 뿌리뽑히는 아픔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깊은 곤혹감에 사로잡혔다.
나는<인생독본>에 나오는 '이레째 이야기'를 무엇보다 더 감명 깊게 읽었다. '이레째 이야기' 가운데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이야기 둘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손수레꾼 이야기였다.
손수레에 야채를 싣고 다니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사내는 야채를 흥정해 놓고 돈을 가지러간 동네 부인을 기다리느라고 길가에 손수레를 멈추어 놓고 있었다. 마차들이 자기 때문에 길이 막혀서 밀리기 시작했다. 손수레꾼도 자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야채 값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교통 순경이 왔다. 와서 무조건 손수레를 빼라고 이야기했다. 야채 장수는 자기는 야채를 사간 부인네가 이 동네에 산다는 것만 알뿐이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와서 돈을 받을 길이 없으니까, 돈을 가져올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게 해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러나 교통 순경은 자기의 임무를 게을리 할 생각이 없었다. 옥신각신하다가 야채 장수가"에이XX,재수 없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순경의 귀에는"에이XX놈, 재수 없게 구네."로 들렸다. 순경은 참을 수가 없었다.당장특수공무집행방해죄에공부원신분모독죄로야채장수를연행하였다.조서가 꾸며지고, 재판이 벌어졌다.
그 동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야채 장수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번도 경찰서에 잡혀가 본 적이 없었고, 남의 재판이나마 방청해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를 변호해야 할지 몰랐다. 재판정에서 자기를 변호하고자 이야기하는 말마다 본인의 뜻과는 달리 교통 순경의 고발을 강화해 주는 효과를 냈다. 야채 장수는 유죄 판결을 받고, 몇 개월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손수레와 손수레에 실려있던 야채 걱정만 했다.
감옥에서 나온 손수레꾼은 다시 야채 행상에 나섰다. 그러나 옛날에 단골이었던 부인네들은 전과자인 이 야채 행상을 마치 전염병을 옮기는 벌레처럼 끔찍하게 여기고 손을 내저었다. 야채 장수의 몰골은 점점 추레하게 바뀌었다. 마누라도 자식들도 곁을 떠났다.
어느 겨울날,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다못한 야채 장수는 다시 감옥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 일부러 교통 순경에게 가서 길을 막고 겁먹은 소리로 조그맣게
"에이XX놈, 재수 없게 구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교통 순경은 조용한 목소리로
"나이도 지긋하신 어른이 그렇게 상소리를 하면 되나요? 날씨도 추운데 그만 집에 돌아가시죠."
하는 말과 함께 저리로 가버렸다. 야채 장수는 그 순경의 등뒤에다 절박한 목소리로
"왜 날 안 잡아가우?"
하고 외쳤다. 그러자 순경은
"아저씨 같은 분 다잡아가다가는 나라 살림 거덜나게요?"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이야기 줄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기억된다(어쩌면 내 기억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무서운 삶의 진실로 육박해 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넋을 잃었다. 내 삶이라고 해서 이 야채 장수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성 프란체스코와 레프라는 사람 사이의 대화였는데,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인생독본>에 들어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성자(聖者)가 되려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 우주를 지배하는 우주 마왕이 되더라도, 온 누리의 재산을 독차지하는 왕재벌이 되더라도, 온 세상 말을 다 알아듣고, 이 우주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말을 이해하는 척척박사가 되더라도, 거기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노라, 헐벗고 굶주려서 동사하기 일 보 직전에 누구에겐가 잠자리와 죽 한 그릇을 부탁할 때 그 사람이 매정하게 거절하더라도, 그 거절하는 말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일 때, 그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이 가슴에서 솟아나느니라. 이 비슷한 사연이 담긴 글이었다. 그래, 나는 성자가 되리라. 순수성을 상실한 몸으로 자살을 꿈꾸기보다는 잃어버린 순수성을 고통 속에서 되찾는 것이 더 나은 길이다. 나는 프란체스코가 될 결심을 했다.
나는 아침 저년으로 영산 강가에 나섰다. 영산강은 내 삶의 강이었다. 땔나무를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더워진 몸을 이 강에 식혔고, 이 강물이 스민 실개천을 막아 물을 퍼서 고시를 잡아 밥상에 올렸다. 이 강둑에 뚫린 게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집게발로 사정없이 물어뜯는 털게와 드잡이질을 하면서 게를 잡았고, 개펄에서 배를 밀면서 망둥이와 놀았다. 이제 아침 안개에 잠겨 있는 영산강은 내 달아오른 넋을 식혀 줄 서늘한 눈을 가진 애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내 밖에 있었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내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갈대 숲을 스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영산 강물에 잔물결로 흩어졌다. 나는 헐벗은 탱자나무 생울타리 사이에 노랗게 익어 있는 탱자를 가지려고 가시에 손을 찔릴 필요가 없었다. 내 몸은 탱자가 되어 가시 사이에서 편안하게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밀물이 되어 실개천 시냇물과 몸을 섞고, 썰물이 되어 개펄 실지렁이와 놀았다.
나는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학교는 이제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내 시선은 능 창 밖을 향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일부러 학교에서 기차역으로 두 정거장이나 떨어져있는, 삼십 리 길이 넘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 집 뒷산에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저녁 노을에게 빌었고, 헐벗은 나무의 긴 그림자에게도 빌었다. 초겨울 하늘에 돋아 오르는 별들에게도 빌고, 부엉이 소리에게도 빌었다. 나에게는 내 길을 인도해 달라고 빌 절대자가 따로 없었다. 새벽 세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천수경을 읊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부처님에게 내 넋을 의탁할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처됨의 의미를 몰랐다. 부처가 설산에 간 행적이 죽음과 맞서는 길이라는 것도 몰랐고, 설산이 고통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예수님에게도 내 몸을 의탁할 수가 없었다. 예수가 시련을 겪었던 광야가 죽음의 땅인 사막이라는 것도 몰랐고, 사막에서 단식한다는 것이 고통을, 줄음을 온몸으로 수용하려는 모진 넋의 단련이라는 것도 몰랐다. 나는 애가 그처럼 탐닉했던<인생독본>을 쓴 톨스토이가 왜 그 많은 땅들을 농노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눈보라치는 아침에 먼 길을 떠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르면서고 그들이 갔던 길을 가려고 했다.
나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 때가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누나였지만, 이번에는 누나도 도움이 되지 못 할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누나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누나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어요. 나는 이제 누나 곁을 떠나야 해요.'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다짐하고,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떠 올렸다. 나는 밤마다 집에서 빠져 나와 헐벗은 감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나는 마음 곳으로 간절히 빌면서 오랜 시간 차가운 밤 공기 속에 앉아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학년 말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학년말 시험이 있는 날 내가 집을 떠나는 날로 정했다. 나는 차곡차곡 집 떠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담임 선생님께 그 동안 불만이 많았지만, 떠나는 즈음에서 속 썩여드린 일만 눈앞에 떠올랐다. 마음 속 깊이 사죄를 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교장 선생님께도 썼다. 그 동안 공자로 학교를 다니게 해 준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누나에게도 썼다. 누나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소중함을 깊이 간직하는 다른 길을 왜 찾을 수 없었는지, 저미는 가슴으로 썼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려고 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는 '피눈물'이라는 말이 수사학적인 과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알려준 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베개를 적신 그분의 벌건 눈물을 통해서 '피눈물'의 의미를 알았다. 6.25난리에 장대 같은 자식 여섯을 보내고, 나머지 두 자식도 서울에서 드난살이를 하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보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에게 그나마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막내의 가출은 견디기 어려우실 터였다. 그러나 이 길은 막다른 골목에서 내가 찾아 낸 유일한 활로였다. 나는 못난 자식이 가는 길을 막지 말아 달라고 썼다.
학년말 시험이 있기 전날 밤, 나는 내가 늘 무릎을 꿇었던 감나무 밑에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감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매서운 한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빌 때, 가끔 느끼는 기쁨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마음 속에서 기쁨이 샘솟아 오르지 않았다. 나중에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려오고, 무릎이 딱딱한 땅에 배겨 통증이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내가 고대하던 축복의 순간은 기어코 오지 않았다. 나는 추위에 뻣뻣해진 몸을 일으켰다. 메마른 마음이었다.
드디어 시험 날 아침이 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한껏 밝은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보고았다.
"눈이 내리고 있네요."
"그래, 시험 잘 봐라."
내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는
"왜 책가방은 안 가지고 가?"
하고 물었다.
"시험 공부 충분히 해서 책가방은 안 가지고 가도 문제없어요."
나는 점심 그릇도 챙기지 않고, 외투 깃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외투는 깃이 넓은 연초록 빛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어떤 옷감 공장에서도 그런 대담한 색상의 옷감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누구나 한눈으로 그것이 미국에서 온 구호 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이런 옷가지마저 걸치고 있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이 옷도 때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 아무 눈에도 띄지 않는 우중충한 미조 담보 색으로 바뀌리라. 나는 집을 나서면서 눈 속에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월출산과 영산강에 작별의 눈을 던졌다. 나도 이제 저 산과 눈 속에 파묻히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