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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 강혁이란 유명선수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면서 오랜만에 반가운 기사를 만나서 퍼왔습니다.
스포츠서울 기사 밑에는 제가 인터넷에서 찾은 98년 방콕아시안 게임 경기일지와 선수 개인기록을 덧붙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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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인천 남구청 야구장에는 야구 글러브를 낀 어린이 50여명이 모였다. 내년 1월 공식 창단을 앞두고 있는 인천 남구청 리틀야구단의 첫 소집훈련이었다.
"선수들 모두 집합~." 누군가 우렁찬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너희들을 가르칠 사람이다. 앞으로 나를 감독님이라고 불러. 알았지?" 아이들은 처음 보는'감독님'이 낯선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학부모들의 대화가 들렸다. "감독 이름이 강혁이래요. 전에 SK에서 뛰었다는데?" "그래요? 난 처음 들어봐."
대화를 듣던 기자가 슬쩍 끼어들었다. "두산 김현수는 아시죠?" 그러자 한 학부모는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선수예요" "저 감독이 선수 때는 김현수만큼 야구를 잘 했어요" 기자의 설명에도 학부모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인천 남구청 리틀야구단 감독 강혁(35). 그는 한때 KIA 이종범처럼 '야구 천재'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야구인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없었다. 야구를 하며 숱한 좌절을 겪은 강혁은 끝내 프로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2007시즌이 끝난 후 SK 유니폼을 벗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과거를 잊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강혁을 스포츠서울이 만났다.
◇소리없는 은퇴 후 시작된 지도자의 길
-2007년 은퇴 선언도 없이 야구계를 떠났는데.
사실 SK에서 방출되고 롯데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삼성에도 연락했었다.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부분의 팀들이 세대교체를 하는 시기였던 모양이다. 몸도 썩 좋지 않았다. 빨리 지도자의 길로 나서기로 했다. 작년부터 SK에서 운영하는 사랑나눔 야구교실에서 유소년들을 가르쳤다. 내가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던 남구청에서 리틀야구단을 창단한다고 해 감독을 맡게 됐다.
-유소년 야구 감독으로 자리잡을 생각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시작이다. 언젠가는 프로야구 지도자도 해보고 싶다.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내 야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백운초등학교 시절 야구부 이홍식 감독님이다. 감독님은 늘 운동을 잘 하는 것보다 인간이 먼저 돼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바른 생각을 갖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처음 야구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신일고와 한양대를 거치며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었다
노력을 많이 했다. 어려서부터 '1등'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 훈련도 남들보다 배로 했다. 주위에서는 내 재능이 뛰어났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노력이 더해지니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
-대학시절 역시 최고투수였던 연세대 임선동에게 2사 만루에서 고의4구를 얻어내 화제가 됐다.
3학년 때였는데 한창 잘 맞아 공이 수박만하게 보일 때였다. (임)선동이 형이 원해서 4구를 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혁의 전성기 때와 고교 후배인 김현수의 지금을 비교해 본다면?
(김)현수가 나보다 100배는 낫다. 나이도 어린데 마인드도 좋아 보이고, 타자로서 갖출 것도 다 갖췄다. 내 고교 후배라서가 아니라 현재 프로야구에서 타격은 김현수가 최고인 것 같다.
-야구를 하면서 최고의 순간은?
실업팀에 있었던 1997년 이탈리아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때 우에하라가 버티던 일본을 꺾고 은메달을 따낸 순간이었다. 내가 동점 홈런을 치고, (최)희섭이가 끝내기 홈런을 쳐서 이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야구 천재의 발목을 잡은 영구제명
-한양대와 프로야구 OB(두산 전신) 사이에서 이중계약을 맺어 프로야구 첫 영구제명이라는 불명예를 안고있다. 여기서 부터 야구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프로라는 큰 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따라 한양대에 진학하기로 했던 동기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나와 함께 야구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내가 프로에 가면 그 친구들은 대학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4년 후에 꼭 돌아오겠다며 OB 구단에 양해를 구했는데 갑자기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 영구제명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영구제명 때문에 한양대를 졸업한 후 프로에 가지 못하고 실업 현대 피닉스로 갔다. 실업에서 야구 실력이 쇠퇴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현대 피닉스로 간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업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경기 수준이 떨어지다보니 내 실력도 함께 하락하는 것 같았다.
-징계가 풀려 1999년부터 두산에서 뛰었다. 프로 입단 후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는?
1999년 후반기부터 뛸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뛴 것은 2000년부터였다. 입단 때부터 남들은 나를 특출난 선수로 여겼다. 주변의 기대는 높은데 막상 나는 이런저런 부상으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했다. 더 잘하려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다. 주위의 실망도 커졌고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게 됐다.
-SK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처음 SK로 갔을 때 강병철 감독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어깨부상을 입어 장기간 결장한 후 팀에 돌아와 보니 자리가 없었다. SK가 준우승을 차지했던 2003년에는 몸 상태가 좋아져 해볼만 했다. 1루에 (김)기태 형이 있었지만 지기 싫어 엄청나게 노력했다. 타율도 0.290대까지 올라갔고 예전의 기량을 점점 회복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벤치를 지키는 경우가 많았고 기껏해야 대수비로 출장하는 게 전부였다. 당시 조범현 감독님에게 '더 뛰고싶다'는 의사도 전달했고 심지어는 구단에 정식으로 트레이드도 요청했다.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그대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03년은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해다.
강혁은 2007년 은퇴 후 자신을 향한 야구계의 차가운 시선에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프로에서 성적이 신통치 않으니 재능만 믿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주위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나에 대한 이상한 얘기들 때문에 화도 많이 났고 이 바닥(야구계)을 완전히 떠날 생각도 했다"는 강혁.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 유소년 감독 일을 시작한 것도 야구에 대한 애정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는 "야구인은 야구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오랜만에 강혁의 환한 미소를 봤다.
※ 현대 피닉스는 어떤 팀?
강혁이 한양대를 졸업한 후 2년간 몸 담았던 실업팀 현대 피닉스는 야구계 전체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2002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로야구 팀 창단을 꾸준히 모색해 왔던 현대는 이것이 여의치 않자 94년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팀을 창단하게 된다. 현대 계열사 CEO출신이었던 이현태 대한야구협회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탄생된 피닉스는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올림픽 참가와 군문제 해결이라는 당근을 제시, 무차별 영입을 시도했다. 문동환, 안희봉(이상 연세대), 조경환(고려대), 문희성(홍익대) 등 당시 대표팀 선수들이 피닉스에 합류했고 현대는 영입 선수들에게 수억에 달하는 파격적인 거금을 쥐어주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로야구 신인선수들의 몸값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현대는 96년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다. 피닉스는 졸지에 현대 프로야구단을 위한 선수수급 기지로 전락했다. 이 과정에서 문동환, 조경환 등 소수만이 프로에서 제 실력을 발휘했을 뿐 안희봉을 비롯해 강필선, 김동호, 장재명 등 또 다른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후보를 전전하다 야구계를 떠나고 말았다. 특히 피닉스는 프로에 가는 선수들에게 처음 지급했던 계약금이 실제로는 대여금이라며 이자까지 붙여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선수들이 한문으로 작성된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 강혁 프로필
1974년 서울 출생
신일고~한양대~실업 현대 피닉스~두산(1999~2000)-SK(2001~2007)
1991년 이영민 타격상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1997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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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내일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이 같은 날에 선발로 출격합니다.
내가 그래도 국제용으로 유명한 놈이여~ 오스왈튼가 왈츤가 요즘 잘나간담시롱?
난 이때를 전후로 커리어 하이 살포시 찍어주고 점점 잊혀질 것이여~
A조 예선2차리그 12/11 - 한국 vs 대만 (5 : 4 승)
이 경기에서 현 메이저리그 3인방이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중간에 당시 최고 구위를 자랑하던 임창용이 끼긴 했지만,
김병현 - 서재응 - 임창용 - 박찬호가 이어던지며 5:4의 팽팽한 승부를 펼쳤습니다.
A조 예선2차리그 한국 vs 일본 (9 : 2 승)
일본전입니다.
역시 이병규가 만루홈런 포함하여 홈런 2발 날려주며 가볍게 9:2로 승리하였습니다.
왜 많은 전문가들이 해외에서 통할 몇안되는 한국 타자로 이병규를 꼽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대회였습니다.
준결승 12/15 한국 vs 중국 (9 : 2 승)
김병현이란 이름을 빛내게 해준 경기였으며, 김병현의 인생이 바뀐 경기였습니다.
이날 저뿐만 아니라 T.V를 시청한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김병현이란 이름 석자가 각인되었습니다.
아무리 수준이 떨어지는 중국이라지만, 손을 대지 못하는 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김병현이 보여주었죠.
8타자 연속 삼진을 포함하여 탈삼진 10개를 기록하며 말그대로 압도했습니다.
중국 타자들은 거의 눈감고 휘두르는 수준으로 뱃을 휘둘렀으며, 김병현의 공에 뱃을 제대로 맞춘 타자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결승 12/15 한국 vs 일본 (13 : 1 승)
박찬호를 위해서 개최된 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돋보인 대회였으며
스스로 대회를 마무리지으며 군면제 또한 따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최종 성적입니다.
타자
이 름 소 속 타수 안타 타점 홈런 타율
이병규 LG 25 14 12 4 0.560
박한이 동국대 23 10 3 1 0.435
박재홍 현대 22 10 12 3 0.455
김동주 OB 20 8 6 2 0.400
강 혁 현대전자 20 10 6 1 0.500
심재학 LG 14 2 2 1 0.143
백재호 한화 21 7 5 2 0.333
조인성 LG 17 6 6 0 0.353
신명철 롯데 19 7 4 1 0.368
진갑용 OB 8 2 1 0 0.250
장영균 인하대 7 2 2 1 0.286
홍성흔 경희대 7 1 1 0 0.143
강봉규 고려대 4 1 0 0 0.250
황우구 인하대 3 1 1 0 0.333
계 210 82 61 16 0.390
투수
이름 소속 이닝 안타 4사구 삼진 실점 자책점 방어율 비고
박찬호 LA다저스 13 2/3 9 3 9 2 2 1.32 2승
김병현 성균관대 10 2/3 7 2 15 4 4 3.38 1승
서재응 뉴욕메츠 07 1/3 2 1 6 1 1 1.23 2승
김원형 쌍방울 05 2/3 14 1 1 11 11 17.40
경헌호 한양대 04 6 0 4 2 2 4.50
최원호 현대 03 3 4 2 1 1 3.00
강철민 한양대 03 2 0 2 0 0 0.00 1승
임창용 해태 02 2/3 3 2 3 1 1 3.38
계 50 46 13 42 22 22 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