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계품에는 화엄경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법장은 이를 다섯 종류(非器)로 나눴다.
첫째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미한 세계를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으며, 이 경을 비방하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을 장식하는 사람들. 명예와 이익을 위해 설법하는 것은 삿된 업(魔業)임(違眞의 비기).
둘째 거짓으로 삿된 선(邪善)을 닦고, 사후에 인천(人天)의 과보를 얻으려 하는 이들. 보리심을 잊고 선근을 닦는 것은 마업에 지나지 않는다(背正의 비기).
셋째 자신의 사견에 따라 경문의 뜻을 해석하고, 높고 깊은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乖實의 비기).
넷째 넓고 큰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성문과 연각의 이승은 이 경의 가르침을 절대로 듣지 않는다(狹劣의 비기).
다섯째 오랜 세월 동안의 수행을 완성시키지 않고, 또한 초지(初地)에 들지 않은 보살(守勸의 비기). (카마타 시게오 장휘옥옮김, 화엄경 이야기 장승, 1998, 46쪽).
스즈키는 이를 20가지로 정리했다.
(1)선근이 다르기 때문.
(2)성문들이 부처의 공덕을 보지 못했고 그 공덕 안에서 스스로를 훈련시키지 못했기 때문.
(3)그들은 우주는 모든 부처들이 있는 모든 시방의 불국토로 가득 차 있다는 관념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
(4)그들은 부처들이 발산한 다양하게 경이로운 모습들을 찬양하지 않았기 때문.
(5) 그들은 윤회 가운데서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깨달음 이후에 욕망을 자각하기 못했기 때문
(6)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최고의 깨달음 이후에 욕망을 간직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
(7) 그들은 여래의 가족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
(8)그들은 일체중생을 그들의 보호 아래 둘 수 없었기 때문.
(9)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살의 바라밀들을 실천하도록 충고하지 않았다.
(10)아직까지 생사를 윤회하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가장 수승한 지혜안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
(11)성문들은 일체지로부터 나오는 모든 선근들에서 스스로를 훈련시키지 않았기 때문.
(12) 그들은 부처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모든 선근들을 완성시키지 않았기 때문.
(13)그들은 변형의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불국토의 출현을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
(14) 그들은 보살안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
(15) 그들은 이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비교할 수 없는 통찰력을 산출할 수 있는 선근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
(16) 보살을 구성하는 어떤 서원들도 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
(17) 그들은 여래의 가피력의 결과인 모든 것을 스스로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
(18)그들은 만물을 허깨비와 같고 보살들은 꿈과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
(19)그들은 보살의 가장 광대한 환희들을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
(20)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들은 모든 이 영적 상태들을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
석법장 선에서 화엄으로 우리출판사 1992, 111-112쪽
첫댓글 우리 카페도 그렇습니다.
깨달음에 갈증이 나신 분, 수행에만 집착하는 분, 정토왕생만 바라는 분, 내 소원 성취에만 관심있는 분들은 수없이 저희 카페를 떠납니다.
왜냐? 그런 부분을 채워주지 않거든요?
어떤 경전 몇 번 읽으면 깨달음이 온다
복 받는데는 무슨 무슨 경전이 최고다
삼천배, 만배하면 소원 성취한다
다라니 외우면 소원 성취한다...
우리 카페는 그런 것은 없어요
아라한들이 화엄경을 못 알아들은 것은, 자비가 없기 때문이 큽니다.
게다가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끝없는 중생공양을 노래하는 화엄경을,
저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 카페도 마찬가지.
겉으로는 이타행을 말하고 사홍서원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깨달음, 수행, 기복에만 관심있고 중생에 관심없는 분들은,
우리 카페에 있지를 못합니다.
관심이 그런 데 있지를 않거든요?
혹시 여유가 되신다면 힌두교나 상좌부 불교 수행에 대해서 잠깐 공부를 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이 분들이 깨달음에만 몰입해 있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겁니다.
반대로 저희 카페의 가르침들이 그런 것들과는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실 것 같아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불교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때
선정에 들고, 깊은 삼매에 들면 확실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긴 하지만요.
공 자리에 들어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생각도 번뇌도 허물어지는 경계에 들면 참으로 편안하고 지극한 행복감을 누릴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저는 지금 상상만 해도 즐겁고 행복할 듯 합니다.
그런데 선정에서 깨고나면요?
이것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아공을 체험하였다, 모든 것이 하나다, 일체가 무상함을 몸으로 느꼈다....는 것은 역시 또 하나의 사라지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이것도 제 착각일진 모르겠지만요.
나의 완전한 소멸이란
선정에 들어 나를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기보다,
애초에 깨달을 것도 깨달을 나란 없는 것이었구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완전한 소멸을 넘어
환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무였던 나를 통해
반야의 현현, 제불의 출현으로 나투는 것이겠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요.
내 행복이 우선인 분은 자기 깨달음이 최후처가 될 것이겠고, 그 깨달은 자리는 잘못된 곳이 아니긴 하지만 최후처도 아님과 동시에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진짜 불교에서 말하는 지복은 깨달은 곳이 활활발발하게 살아나서 춤추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또다른 관점이겠고요.
그런면에서 본다면 아라한은 한가지 관점만 바꾸신다면 범부에 비해 쉽게 대보살이 되실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위 말해서 짬밥이란게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