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8절을 보시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인데 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까? 복음이 말 그대로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면 사람들이 환영하고 좋아하고 그래서 복음 전하는 자를 잘 대접하게 될 것인데 왜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함께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복음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는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사도가 로마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으로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서신을 보낸 후 얼마 후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처음 전할 때에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삼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서신쯤에는 그러한 열매들이 도처에서 나오고 교회들이 더욱 부흥하고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하는 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디모데후서 전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늘에 소망이 작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럼으로 오히려 하늘에 대한 소망이 더욱 뚜렷하여 지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 어두움의 세력에 갇혀서 어두움을 사랑하고 살기 때문에 복음의 빛이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 낮에 사도행전에서 바울사도의 복음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보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이 더 많고 강경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처음에 듣고서 좋아했는데 그래서 바울을 따랐는데 나중에 바울을 배신하고 대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디모데 후서에서만 살펴보겠습니다.
1:15-18절입니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의 다 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을 버린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자가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버렸지만 그러나 그 중에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하고 감옥에 있어도 부지런히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2:17절입니다.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이들은 바울의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자들입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과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적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처음을 복음을 들었던 자들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버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외부에서 온 세력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4:9-11절입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마는 바울과 동역하다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떠난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바울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누가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볼 때 바울 사도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러나 처음에 좋다고 따르던 자들이 많이 떠나 가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럴까요? 도대체 복음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처음에는 따르다가 나중에 배반하여 떠나버리는 것입니까?
복음이란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기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아 보입니다. 나의 행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거절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공짜라는데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더 깊이 들어 가보니 이전에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다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러다가는 망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는 살지 못하겠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함께 공부하는 목사님들의 대부분이 가장 심한 반대가 아내로부터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목회해가지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는가 하는 반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회에 대한 비전과 야망이 있었는데 복음이란 것을 듣고 나서는 죽어야 된다고 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공을 위하여 지금 고생을 견디자고 하면 참겠는데 아무리 보아도 장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겨우 밥만 먹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사모가 만약 그곳에 공부하러 가면 이혼하고 가라고 하여서 결국 도중에 돌아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이 좋습니까? 처음에는 조금 의아해 하다가 조금씩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기에 십일조의 부담도 주일성수라는 부담도 없어서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예수님만으로 감사하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함께 하신다면 세상에서 망해도, 부자가 되지 못하여도, 자녀가 공부를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그런 것을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세상의 것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바울사도가 편지를 보내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따라오다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배반하고 떠나는데 디모데는 신실하게 복음의 일군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각별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부터 보겠습니다.
1:1-2절 인사말입니다. 바울의 사도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디모데 전서에서 성도를 가족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그리고 있기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배반하고 떠나는 중에 디모데에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1:3-5절입니다. 그리고 밤낮 간구하면서 디모데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은 디모데의 믿음이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들 같은 사람을 보고 싶어서 빨리 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디모데에게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에게 있더니 너도 그러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거짓 없는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위선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위선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연보를 하거나 봉사를 하여도 누가 보던지 아니 보던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6-7절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안수를 받을 때의 받은 은사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은사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란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의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의 복음의 사도가 되어서 그렇게 많은 능력을 행하면서도 지금은 쇠사슬에 메어서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여서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메여도 복음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능력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복종을 하고 감히 대적하지도 못하면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것을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복음을 싫어하기에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바울사도도 역시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복음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세상 사람들이 다 환영하고 좋아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배척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7-20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바울과 디모데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복음으로 핍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은 좋지만 핍박을 싫다고 합니다. 고난은 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복음을 따르다가 나중에 얼마든지 배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좋다고 따른 것은 무엇입니까? 거짓 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의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기뻐함은 오직 복음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는 전거도 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디모데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1:9-18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2002. 11. 27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1)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14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 아름다룬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마다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있습니다. 자연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가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울의 모든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 역시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지켜야 할 아름다운 내용을 오늘 보고자 합니다.
9-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부르심은 같은 내용입니다. 부르신 것이 구원이요 구원이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한 부르심의 효력으로 인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결코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다고 하든지, 무엇을 안다고 하든지 간에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든 세상의 해석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의미 있어야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자기에게 의미가 없으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자기의 기준에 아름다움과 추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고 있는 아름다운 내용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취향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선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여기 실까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게서는 선하고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선이고, 보시기에 싫은 것은 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과 악의 기준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에게도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자기에 보기에 좋은 것을 선이라고 하고 싫은 것을 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인간의 기준에서 선하다 악하다. 보기에 아름답다 추하다 하는 기준을 가지는 자체가 이미 범죄 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진선미를 추구하고, 아무리 고상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 반역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원하는 아름다움과 좋다는 것들이 하나님께 악한 것이 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이 보기에 어떠하였겠습니까? 대단한 역사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만들어낸 거대한 탑이 보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현장에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현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모든 인생들이 하는 일들이 결국 바벨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시사 프로그램에서 새 아파트에 입주할 사람들이 실내장식을 새롭게 한다고 천 만원가까이 들어간 장판 벽지 등을 모두 걷어내고 칠 팔천만원 들여서 새롭게 공사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더 보기에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겠지요! 자기 주거환경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갈 자기의 가죽도 주름살을 편다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있습니까?
이런 부분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름답다, 고상하다, 선하다고 하면서 온 세계 인류가 다 한마음 한뜻이 되는 가치기준이 있다고 하여도 역시 하나님보시기는 모두 타락하고 반역한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청 뒤에 국수집이 여러 곳이 있지요! 지난주에 한번 가보았더니 완전히 다 부수어져 있었습니다. 왜 부수어 버렸을까요? 불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수집의 사람들의 형편이 어떤지 그런 것은 상관없는 것입니다. 왜 불법으로 건물을 지어서 불법으로 장사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국수집을 지은 사람들이나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등산하고서 출출한데 사고 맛있게 국수 먹을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요! 국수 파는 사람들은 세금내지 않아도 되고, 그러나 시에서 보면 불법이기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철장권세를 가지고 오신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람들이 좋다고 하던, 아름답다고 하던,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것들은 부수어지고야 말겠구나 하면서 국수는 먹지 못하였지만 말씀은 묵상하면서 왔습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누가 십자가를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흉하고 끔찍스럽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술이 좋아서인지 이제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반지도 목걸이도 차안에도 예배당 안에도 십자가를 얼마나 멋있게 만들어 놓았는지 아름다운 형상물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십자가가 자기를 죽이는 줄을 모르고 자기를 살리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주는 부적쯤으로 생각하니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아름다운 것이란 모두 주님께서 하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면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욕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들이 다 들어있기에 이러한 심성에서 나오는 구원욕구는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본능이기에 아름다운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시 9-8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붙들려 있기에 스스로 그 권세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한들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학개서를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 부정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고기를 부정한 보자기에 샀으니 고기가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시체를 만진 자가 거룩한 예물을 만지니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정하게 된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하게 된 자가 무엇을 한들 부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 다른 차원에서 공급되지 않고서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영원한 때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행위가 들어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주님홀로 일하셔야 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계시를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들은 시시하고 배설물 같은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움 것을 보게 되면 전에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들은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내용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쇠하고 부패하여갑니다. 인생도 가치관도 예술도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것들도 모두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이 아름다운 복음을 위하여 반포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나누어지는지를 15-18절에서 이름을 거론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지킨 사람들은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하였고 로마에 있을 때에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모든 삶의 우선순위와 목표가 어디로 향하여 있습니까? 주님의 이 아름다운 일을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 고상한 것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습니까? 이런 것까지도 주님께서 허락하심을 믿고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12절입니다. 주님을 의뢰하고 의뢰한 것을 그 날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디모데후서 2:1-13 일향 미쁘신 주님 2002. 12. 8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디모데가 많은 증인 앞에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들은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뿐만 아니라 또 충성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전적으로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우리 모두가 주의 복음을 들었다면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원화 시키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역자는 전적인 사역자고 나는 일반직업 가졌으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늘 신앙으로 살아야하고 나는 적당하게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직업으로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부르심이란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았고, 또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는 계시의 전달자역할을 하기에 특별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듯이 교역자나 성도나 간에 신분적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원리중의 하나가 만민 제사장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다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목회를 하고, 성도들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자아의 실현이거나, 부의 축적이거나, 세상의 성공이 목적이라면 부르심을 입은 자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목사의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여야 하고, 성도는 자기 직업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전하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말씀을 봅시다. 이 복음의 말씀을 누구에게 부탁하라고 합니까? 충성된 자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충성된 자는 신실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것은 지도자나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우리 안에 신실치 못함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실한 자를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군인입니다. 3-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 부름을 받았기에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메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군사로 모집한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의 군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목적이란 너무나 분명합니다. 부르신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의 현장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업의 현장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류광수씨가 가장 잘 사용하는 말이 직업은 부업이요 전도하는 것이 주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 일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돈을 법니까? 과연 주님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까? 심각한 질문을 이 연말에 한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경기하는 자입니다. 5절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입니다. 그 당시에도 올림픽 같은 경기가 있었기에 아무리 경기를 위하여 잘 준비하여도 법대로 하지 않으면 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기의 방법대로 하는 것처럼 복음을 증거 하는 자가 복음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방법은 언제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래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의 도의 선포를 통하여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농부입니다. 6절입니다. 수고하는 농부라고 합니다. 농부가 얼마나 신실하고 부지런하여야 합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농부를 보자면 가장 많이 노동하고 가장 적은 수입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적자가 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농사꾼이라면 그저 농사짓는 일이 천직인줄 알고 신실하고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의 세 가지 비유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충성됨과 신실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신실하고 충성되게 자기 부르신 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군인처럼, 경기에 다른 사람들은 심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칙을 쓰는데 미련하게 경기규칙대로 하는 미련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뻔한 농사를 위하여 부지런히 농사지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신실하게 증거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 드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을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역시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서 돌아서서 미련하고 어리석게, 충성되고 신실한 자로서 복음에 참예하는 자들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농부가 신실하게 농사를 지으면 열매를 얻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이 일하는 자가 제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9:23-27절입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군사로, 경기하는 자로, 농부의 자세로 신실하게 충성되게 복음의 증인이 되는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복음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사는 복음에 참예되는 것, 이 것만이 가장 큰 열매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도 자기가 전파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함이라고 합니다. 이정도로 복음에 참예함이 복이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복음에 참예함이 방향과 목표가 되어 있습니까? 그 방향과 목표를 향하여 바르게 달음질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으로 기쁨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신실하고 충성되게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역시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결국 우리 스스로의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결코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명령문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지키지 못하였지만 신약의 명령문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우리가 지켜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체입니까? 성령이 주체입니까? 내가 주체라면 내가 열심히 하는데 성령이 내가 잘 안되는 일을 도와주어서 일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체가 되어야 일하시면 언제나 인간이 왜 안 되는가를 드러내시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는 아니요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겸손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기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가 간에 주님의 명령은 주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들을 우리가 스스로 지켜나가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신실하지 못하고 충성되지 못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실하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말씀입니까?
7절을 봅니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주님께서 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복음입니다.
8절을 봅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즉 디모데가 생각하여야 할 내용이 바울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증거 하는 것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누가 하시고 누가 이루어 내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충성되라고 하시면서 군인과 경기하는 자와 농부처럼 신실하고 충성되게 주님의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말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비록 바울 자신이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환난과 핍박 가운데 낙심치 아니하고 더욱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음은 주님의 택하신 자들이 함께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1-13절을 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라고 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미덥다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이 미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요, 주를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주와 함께 죽을 자가 있습니까? 누가 오래 참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주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주님의 요구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마는 것입니다. 애서 외면하는 것입니다. 뭐 다른 그런 거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 하면서 자기를 합리화 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부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 기쁜 소식은 주님은 일향 미쁘신 분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늘 한결같이 미덥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택하신 자들을 그들의 신실함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한결같은 신실하심, 일향 미쁘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주님을 우리가 알수록 믿어지고, 그럴수록 걱정과 염려에서 감사와 찬양을 바뀌어 질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4-26 합당한 그릇 2002. 12. 11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ㄱ)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ㄴ)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사람들마다 자기의 꿈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한 꿈들 중에 남의 종이 되겠다는 꿈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남의 종이 되어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생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며 사는 사람이라도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지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대로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기만성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어릴 때 현재의 이런 모습으로 되어 있기를 꿈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환경과 자기의 무능함을 인하여 오늘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되어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자식만은 이렇게 키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하고 남보다 앞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라고 합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나는 이러한 역할을 하겠습니다. 저러한 역할을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큰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들이 있습니다. 금이나 은처럼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가지고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이단들과 다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엄히 명하여 이단들과 다툼이나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한 이단과 다툼은 유익이 조금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로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근본 진리를 흔드는 자들과는 상종도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요한이서 1:10-11절을 봅니다.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교훈이란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이단들과 다툼이나 변론이나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이단들을 말하고 있습니까?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말은 망령되고 헛되어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나아가 독한 창질의 썩어짐 같다고 합니다. 악한 종기가 계속 번지는 것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 가운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부활이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로 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그렇게 길게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다 몸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이 증거 하는 복음도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지나갔다거나 부활이 없다는 자들과 아예 다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른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옳게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봅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 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면 이단들의 유혹에 의하여 믿음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말씀의 전후를 보시면 꼭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19절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무너뜨릴만한 이단들의 활동이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무엇인지를 구약의 두 곳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6:5절과 이사야 52:11절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아시는 자기 백성에게 도장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견고한 터 위에 있는 것이니 이러한 자들은 불의에서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서 떠나는 자가 인침을 받은 자요 이단에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이상한 논리를 봅니다. 믿음을 무너뜨릴만한 이단들을 경계하라고 하셨다면 너희가 이단에 빠지는 것은 너희 책임이니 주의하라 나는 모른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인 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친 자를 누가 감히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불의에서 떠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원래 하나님의 아시는 자가 아닌데 불의에서 떠나는 것을 보고 인 친다는 것이 아니라 인친 자이기에 주님의 불의에서 떠나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단과 비진리가 아무리 날뛰어도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합당한 그릇이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을 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이란 디모데가 젊기에 젊은이로서 나오는 격정과 명예심 조급함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합니다.
주를 부르되 깨끗하지 않은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른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따라 부르는 것이겠지요! 목회자가 자기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목회를 하면서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하는 욕심들은 감추어 두고서 우리교회가 세계제일의 선교하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가 되자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마치 십일조 천만 원씩 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되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부르지 않고 정말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혼자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가는 자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도 누구와 교제하여야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지 교제하여 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을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치적거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좇아가는 것입니다.
월요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강의도 듣고 식사도 하면서 교제를 하였습니다. 열분 정도 모였는데 그중에 저희 교회가 규모면에서 제일 큽니다. 저도 아직 젊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정욕이 왜 없겠습니까? 야망도 있고 욕심도 있습니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목회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자주 납니다. 건물도 그럴듯하고 사람도 몇 백 명 정도는 되었으면 하는 생각들이 납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교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러한 것이 욕심임을 알고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과 주를 깨끗하게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여 목회가 크게 성공하는가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깨끗한 그릇이란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결정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함께 핍박을 받는 길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용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하는 것이 마땅한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모두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다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다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삼가되 마땅히 주의 종이라면 다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변론이 일어나면 말로라도 다투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역하는 자란 진리를 아직 몰라서 거역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은 또 아닙니다. 종이란 마땅히 이러하여야 합당한 그릇이 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오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징계하면 혹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할찌니라고 합니다. "혹"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도 한 사람이 회개하고 진리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게 하시고 돌이켜 주셔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땅히 증거 해야 할 진리를 증거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의 종이란 조급하거나 다투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깨워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절제하고 온유하고 가르치기를 아무리 잘하여도 내가 돌아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돌아오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가 합당한 그릇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까? 마지막으로 점검을 한번 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죽어 있던 자들입니다. 마귀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나고 마귀에게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 내시고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있다면 내가 전에 마귀에서 붙잡혀 있을 때 원하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받은 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디모데후서 3:1-9 말세 2002. 12. 18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올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광고문구가 '부~자 되세요.'였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말을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어도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교회당 바로 옆의 김밥 집에도 이 간판이 걸려 있고 어느 교회당 건물에는 현수막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자 되세요.'라는 것을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세상이든 교회이든 아주 노골적으로 돈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이러한 모습이 말세에 고통 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벌써 말세가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세 그러면, 666, 바코드, 대 환난, 적그리스도, 휴거 같은 말이 연상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을 말세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로 살고자 한다면 지금이 고통 하는 때며, 위태로운 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세나 종말에 대한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을 말세의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이것을 알라고 합니다. 그 목록이 무려 19가지인데 이 목록을 보면 인류의 역사가 이러한 죄악을 증거 하고 있는 것인데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목록들이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 나타날 일입니까?
성경에서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전부 말세로 봅니다. 우리의 시간관념으로 말세를 생각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시한부 종말론 자들처럼 그날과 그 시를 계산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한 기간으로 본다면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운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세란 우리의 시간관념으로 보지 말고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이미 말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시면 지금이 고통의 때이요, 위태로운 때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말세의 징조들에 대하여 목록을 살펴봅시다. 무려 19가지의 목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가 자유로운지 한번 점검을 해보면서 조사를 해봅시다.
1)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구는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조사해보면 아무리 살펴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는 인류역사상 계속되어 왔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간의 진리와 선의 기준은 자기 사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고통 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고통의 원인도 자기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한 없이 인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게 보자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삶의 현장은 말세인 것입니다.
2)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니 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디모데전서 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믿음으로 삽시다. 그러면 당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가 한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과 돈을 사랑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씀의 고발을 받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봅시다. 건축헌금 다 돌려 받으셨습니까? 게시판에 보니까 건축회계집사의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건축헌금 해 놓고 건축이 안 될 것 같아서 돌려주는 경우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우리 교회는 잘한다는 자랑거리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글 중에 한 단어를 제가 삭제하였습니다. '아낌없이' 라는 단어입니다. 정말 아낌없이 건축헌금 하였습니까? 물론 아낌없이 하신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에 대비하여 과연 아낌없이 하였습니까? 이러말 하면 목사니까 하는 마음이 또 들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목사의 생활비도 많이 받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 믿음으로 삽시다. 하면서 그런 것들에 저의 생존을 건다면 목사 그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문제도 밀어붙이면 되겠지만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돈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도 말세를 사는 지혜로운 일이라고 봅니다. 이 목록에서도 자유로울지 우리의 양심을 말씀의 거울로 비추어 봅시다.
3) 자긍하며, 자긍은 자기의 긍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4) 교만합니다. 자긍이 결국 교만으로 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전부 자긍심을 가지도록 키우고 있습니다. 유치원에서도 학교에서도 학원도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학원 자기 학교에서 서울 대에 얼마나 진학하였는가를 자랑스럽게 내어 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5) 훼방합니다. 자긍심을 가지고 교만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훼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훼방이란 윗사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훼방은 자연스럽게 6) 부모를 거역하며 7) 감사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거늘 오늘날 감사를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지만 풍요하게 되니 오히려 불평과 원망이 더 많아 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물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한이니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성경 한권으로 30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찬송 한번 마음껏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만 보아도 성경이 그냥 나뒹굴고 있는 지경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함께 찬송하며 예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어려운 시기가 와야 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차 극심한 환난이 와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것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지금이 말세인 것입니다.
8) 거룩하지 아니합니다. 거룩이란 구별됨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임재하심을 따라 사는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 적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하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빛으로 썩어짐 가운데 소금으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썩어지고 망할 것을 추구하여 가는 데 비하여 우리는 영원과 영생에 관한 것들을 말하고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9) 무정하며, 애정이 없는 것입니다. 도시화의 특징이 무정한 것입니다. 바로 옆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웃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의 피를 나눈 형제라면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귀한데 얼마나 무정한지 우리 스스로 알지 않습니까?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이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아 놓고, 자기에게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을 향하여는 이를 갈면서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통한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가장 원통하겠습니까?
11) 참소하며, 이 단어를 직역하면 "마귀들이며"라고 됩니다. 마귀의 주특기가 참소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려면 한 목록을 가지고 열 시간을 하여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록만 살펴봅니다. 12) 절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 배반하여 팔며, 16) 조급하며, 17) 자고하며, 18)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목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말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통 하는 때이며, 위태로운 종말의 때 인 것입니다. 시급하고 위기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세의 현장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그리워하며 뒤를 돌아다보는 롯의 아내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3:5절입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의 현상으로 살고 있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온다고 하여도, 예수 믿는다고 하여도 이러한 말세의 특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돌아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정이나 애정이나 혈통이나 다른 세상적인 끈들과 관계들 때문에 돌아서지 못하면 함께 말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주님 제 자신이 이러한 죄악들이 끊임없이 튀어 나오는 죄인입니다. 제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남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입니다. 하면서 회개하며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아니하고 피하게 되면, 평생 예배당에 들락거려도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말세의 한복판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고통과 위기를 모르고 거짓 평안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6절을 봅니다. 저희 중에 라고 합니다. 돌아서야 할 사람들 중에 어떤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을 여자들을 유인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어리석은 여자들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단에 빠지는 여자들이게 하는 말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자들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이들이 여자를 유인하는 것은 비 진리로 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자들이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그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여자들은 항상 배우기는 하지만 자기 욕심 때문에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배운다고 하지만 결국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복음의 진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욕을 좇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5절을 봅니다. "봉독"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사욕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심에 관심이 있기에 부탁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3:7-9절을 봅니다. 이 어리석을 여자들이 항상 배운다고 하나 자기 욕심 때문에 결국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모세시대 때에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있었듯이 지금 복음을 전하는 디모데에게 대적하는 자들이 있을 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견고히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에는 다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정말 좋아하고 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내가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을 하고 있는지 점검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 나의 사욕을 쫓는 길이라면 회개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결국은 다 드러날 것입니다. 진리를 따랐는지! 나의 사욕을 따랐는지! 이 말세의 한복판에서,,,,,,,,,
디모데후서 3:10-17 성경은 2003. 1. 1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1)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오늘이 2003년 새해 첫날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하면 오늘이 새해 첫날이 아니라 말세중의 말세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잠시 봅니다. 디모데후서 3:1-4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저는 이 말씀을 보니 정말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고 있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빨리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졸업학점을 못 받았고, 제대일수가 모자라는 것인가 봅니다.
이런 말세의 특징들을 지난번에 보았습니다만 또 하나의 큰 특징이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6절에 보시면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에서 떠나게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자기욕심이 이끌려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13절을 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기 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무엇을 배우고 확신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디모데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디모데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넓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고 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의 마음의 욕심에 이끌려서 그렇게 되고, 또 무지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몰라서 속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속이기도하고 속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속게 되면 얼마나 속상해 합니까? 돈거래를 하다가 속임을 당하고 인간관계속에서 속임을 당하고하면 정말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속은 것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속지 말아야 하는 진리에 대하여서는 별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하는 문제는 생명과 진리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귀에게 속고 있으니 세상의 사소한 문제들로는 난리법석을 하면서 생명과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시큰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우고 확신하여야 합니까?
성경과 바울사도의 교훈과 가르침입니다. 이때의 성경은 구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교훈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이기에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동등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의 서신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든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한 말이니 성경과 동등하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 속고 있고 속이는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을 증거 하는 자들은 완성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자에게 마음을 열어 말씀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로, 바울의 교훈과 가르침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행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일과 어떠한 핍박 받는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나니 라고 합니다. 바울의 교훈이 바로 주님께로부터 받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받은 말씀과 그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행실과 여러 가지를 디모데가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행실과 핍박과 오래 참음과 인내를 말합니다. 때로 돌에 맞아 죽은 것과 같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자신이 능력있게 잘 극복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11절 끝에 보시면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가르침과 교훈입니다. 물론 바울이 증거 한 모든 복음의 내용이 모두 교훈과 가르침에 들어갑니다.
둘째로, 모든 성경입니다. 15-16절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성경이란 구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서도 능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몽학선생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러하고, 성전이 그러하고, 안식일이, 십일조가 다 그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와 새로운 언약을 기록하는 것이며, 모든 시가서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약까지 완성된 시대에서 성경은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교훈을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어려서 성경을 잘 보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더 젖에 대한 사모는 본능적으로 강한 것입니다. 주지 않으면 울면서 보채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절입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까? 참으로 우리 스스로의 의로는 누더기와 같아서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통감하고서 주님의 보혈로 입혀주신 그 의의 옷을 입었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 본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주 예수 외에 소망이 없는 자라는 것이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무엇을 하게 되어 있습니까?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가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젖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하라는 말씀은 거듭난 것이 구원인데 무슨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이 있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바늘구멍만 하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이란 하늘만큼 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갓난아기가 젖을 먹고 이유식을 먹고 딱딱한 음식을 먹듯이 성도의 자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체험하며 먹고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1-14절입니다.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이라는 증거를 하면서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너희가 때가 오래 되어서 남을 가르쳐야할 때가 마땅히 되었는데도 말씀의 초보도 안 되어서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하는데 그래서 단단한 식물을 먹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다가 실패도 하고 다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어서기도하고 하면서 선악을 분별하여야하는데 젖을 먹다가 더 이상 먹지 않으니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정말 그러한가 하면서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벌써 배불렀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다 안다는 식입니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는 식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말씀에 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홀가분한 것 같더니 점점 더 깊이 들어가려니 결국 내 죽으라는 이야기이니 멀찍이 따라 가고 싶은 것입니다. 도망을 갈려니 지옥이 두렵고 제대로 가려니 내가 부인되어야 하니 적당히 하다는 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없게 되면 쓸데없는 일들,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속는 줄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게 만들기 위하여 속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정당하고 바른말을 하였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무투표를 묻겠다고 하니 다들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시비를 걸려면 말씀에 시비를 걸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 되었습니까? 이렇게 시비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목사도 정신을 차리고 더욱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고 싫으니 사소한 것에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실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오기도 하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와서 상대를 해보니 말씀을 친히 주신 분에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러자 무어라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까?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가 하면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8-19절을 봅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1)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 보고는 금욕적으로 사니까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들의 관심사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각주에 다르게 번역이 됩니다. 지혜는 그 자녀들에게 옳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예수님을 옳다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또 저를 변호하는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마귀에게 속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관심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가를 늘 살피시기 바랍니다.
다시 디모데후서 3:15-16절을 봅니다. "봉독"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갈수록 더 단단한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잘못된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고, 어그러진 것이 바르게 되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8 의의 면류관 2003. 1. 8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1)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서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는 내용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4:6절에 보시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관제란 제물을 바칠 때 그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제물위에 부어지는 관제와 같이 부어지는 것은 제단에 드려짐을 말하기에 자신이 떠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자신의 죽음 앞에서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기를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엄히 명하는가 하면 4: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 '그의 나타나실 것'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을 할 때는 중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서 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도라면 마땅히 인정할 최고의 권위로 명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권위는 없을 것입니다.
우선 이렇게 서술된 권위를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모든 성도의 최종결정이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모든 권세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확정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하는 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권위를 동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권위를 동원하여 부탁하고 명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전파를 하라는 것을 위하여 이렇게 엄청난 권위를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만이 성도인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세계를 말씀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모든 우주와 만물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유지되고 주님의 뜻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다 말씀을 통하여 계시가 되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와 경륜이 다 말씀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파하면 말씀자체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히브리서 4:12-13절을 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자체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서야만 우리의 모습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장하고 위선하고 있는 모습들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말씀에 죽고 사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을 증거 하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말씀의 선포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사람의 눈치를 훨씬 많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을 증거 하는 자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한다면 말씀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8-10절을 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한다는 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의식하며 하는 말씀선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을 보고 배우며 왔지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아무른 부담 없이 기쁜 소식으로 들려 왔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여 주면 언제나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다는 것은 환영할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명백한 증거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건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 한다는 사람들이 말씀을 증거 해보고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그 반응을 살펴가면서 취사선택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고 말씀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며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4:3-4절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봉독"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말세의 특징이 노골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무시당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나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도 귀가 가려져서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스승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말씀을 증거 하기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말씀 전파하는 것을 항상 힘쓰고 오래참고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합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말씀 앞에 책망을 받고, 말씀을 사모하는 시대는 언제나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관심과 초점을 맞추면 언제나 타락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책망을 받고 경책을 받아서 돌이키기를 좋아합니까? 아니면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귀를 즐겁게 하고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을 좋아합니까?
에스겔 33:30-33절을 봅니다. "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32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상황입니다. 포로로 잡혀 왔으면 정신을 차릴 만 하건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향하여 인자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에스겔 선지자를 말하면서 그에게서 무슨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서 들어보러 가자고 합니다. 모이는 모습은 꼭 하나님의 백성처럼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니 그들의 입술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그 마음은 이욕을 좇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좋다는 것은 입술뿐이었습니다. 속으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다가 말씀 증거 하는 자에게 이로운 말이 나오면 조금 더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받는 자들은 당장 알아듣습니다.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자유하게 하는 말씀은 잘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종교적 본성을 건드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종노릇하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좋지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말씀 앞에서 자기 이욕이 먼저라는 것을 고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증거 하니 사람들이 에스겔을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노래는 좋은 오락거리이지만 예언자의 말씀에는 생사가 달려 있는데도 하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선지자를 보내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아예 말씀을 증거 하지도 아니하면 말씀이 조롱을 받지 않을 것인데 왜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는 것입니까? 물론 그 가운데서 자기 백성이 있어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이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에 즉 심판이 임할 때에 그들이 한 선지자가 가운데 있었던 줄 알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33:29절에 보시면 심판을 행하심으로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의 성취는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는 귀를 귀 울이는 자가 별로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보다는 교회를 어떻게 하면 키우는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교회성장 세미나에 한국의 유명한 교회의 목회자들이 강사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교회성장 세미나의 방법론이 아니라 바른 말씀을 배워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른 말씀을 배우면 교회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모인다면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 함께 말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사욕을 좇지 않도록 경계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면 할 수록 이 세상의 죄악의 관영함과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 주님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딤후 4:7-8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쳤기에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그 의의 완성을 확증하게 되는 그날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 시에 주님께서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의의 면류관입니다. 의라는 면류관을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어야 하나님과 함께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도 같은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누리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고 말씀을 바르게 받으면 반드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반응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후서 4:9-22 유익한 자 2003. 1. 15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의와 생명의 권세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살던 곳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포로로 있다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장유를 얻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다시금 육체의 기회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원론 중심으로 보게 되면 광야에서 죽은 자는 천국에 들어갔는가! 못 갔는가! 하는 문제로 말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는 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0:1-13절을 봅니다. "봉독"구약의 이러한 사건들이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경계하기 위하여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 간음, 주를 시험함, 원망 이러한 것들을 싫어하십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분을 믿고 그를 경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아 나와서 그 자유를 자신들의 육체의 기회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구원의 방향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신약의 성경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8:31-36절입니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기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자유하게 하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3:7절에서는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자유하게 하시는 자들에게 주의 영이 임하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는 자유 함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강제가 없고, 종교성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설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자유를 가지고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아 방종하거나 나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자원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절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의 멍에란 다시 율법아래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내용이 2절에서 12절까지 있습니다. 그 다음에 13-14절을 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ㄱ)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자유를 주심은 육체의기회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모든 율법이란 이웃사랑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셔서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는 반드시 자기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자임을 알기에 이웃에 대하여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 자유하게 함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방향을 놓쳐버리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 세상을 사랑하고 복음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들으면서 율법적 속박과 종교성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쪽으로 나가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청소된 집에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와서 처음보자 더 악한지경이 되어버리는 꼴이 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주를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육체의 기회로 삼아 버렸다면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마지막이 가까지 온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떠날 기약이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바울사도에게 끝까지 남아서 유익한 자가 있었는가 하면 많은 사람이 떠나버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심한 대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주님께 대하여 어떤 자인가를 한번 돌아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어 속히 자기에게로 오라고 합니다. 오면서 겉옷과 가중종이에 기록된 책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겉옷을 말 그대도 감옥에서 추우니 겉옷을 가져오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두루마리 책을 포장한 것을 말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죽에 기록된 책이란 양피지 두루마리로 된 책으로 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자세한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바울사도에게로 속히 오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주님을 만나고서 평생 복음을 증거 하였는데 그 말년이 참으로 쓸쓸해 보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를 담임하였다면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복음에 목숨을 걸고 전한 바울에게는 남은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끝까지 바울에게 남은 자는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물론 각 지역에서 믿는 자들은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10절을 봅니다.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하면서, 데마를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합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왜 그 지역으로 갔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떻든 지금 바울 사도에게 남아 있는 자는 누가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게 된 이유가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바울을 따르다가 도중하차 하여 바울이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하고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고 하다가 서로 헤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마가는 다시 복음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마가가 자기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보시면 처음 변명 할 때에 함께 있던 자들이 지금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바울의 핍박을 보고서 다 도망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말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대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4:14-15절입니다. 구리 장색이란 구리로 무엇을 만들어 파는 기술자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친 것입니다. 대적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대적한 것입니다. 15절에서 저가 우리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도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심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62:12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주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에게 유익한 자가 있는가 하면 떠나 버린 자가 있고 또 대적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 자신의 이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주님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주님께 유익한 자가 있는가 하면 떠나버리는 자가 있고 대적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유익한자란 디모데나 누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끝 인사에 나타나는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역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데마처럼 처음에는 바울을 따르다가 그만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또 알렉산더 같은 대적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이렇게 구별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유익한 사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그렇게 세 부류의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인 되는 사람은 챙기고 돌볼 것입니다. 그러나 손해가 되는 사람은 멀리하고 싶을 것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역시 관계도 그렇게 맺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우리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이기적인 이익과 만족에 따라 이합집산하거나 사람을 골러 만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진리에 따라 만나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이란 바울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워주기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유익 한가 아니가 하는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의 최종적인 심판을 바울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6-18절을 봅니다. "봉독" 알렉산더와 같은 대적도 주님의 심판에 맡기고, 자기를 떠난 자들에 대하여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사도를 배신하고 떠나도 그것을 허물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바울도 인간인데 섭섭하고 원망이 나왔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바울 곁에서 강건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날지라도 주님께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힘을 주셔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 중에 사자의 입에서 자기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함에도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방해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이나 죽음의 위협이나 감옥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메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때에 사람들이 배신하고 대적하는 것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심판하지 아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주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 유익한 자입니까? 아니면 한 때는 복음이 좋다고 따라 나섰지만 가다가 보니 바울처럼 되는 것이 싫어서,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떠나버린 상태입니까? 아니면 알렉산더처럼 복음의 대적 자가 되어 있습니까?
원하기는 한때 바울을 떠났으나 다시 복음에 유익한 자가 된 마가처럼 다시 주님 앞에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의 눈치나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시는 주님 앞에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향성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디모데 후서를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복음에 유익한 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저희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거하여 그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