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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년의 삶 향기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토끼
나를 철들게 한 나의 어머니 !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어머니는
다섯 살이던 저와 아홉 살이던 누이를
끌어 앉고 기막혀 하셨을겁니다.
전쟁 고아였던 나의 어머니...!
9살 어린 나이의 피난길에
가족 모두 여의고
주저 않은 시골 마을에서 살게 되었고
찢어지게 가난한 2대 독자집에 시집와선
30살도 되기 전에 청상과부 되신 분.
들은 얘기론
피난 전 살던 곳은 서울 같으며
제법 부유한 집의 딸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난길에 폭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진 후에
눈떠보니..
가족모두 주검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도 큰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을
마을의 성당에서 거두어 주셨던가 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겨울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지금까지도 제 가슴 속에
아픔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4살위의 누이 주검이 되었던 그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해
나보다 네 살 위의 누이...
앓아누워도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주검이 된 가엾은 누이 앞에서
기막히고 미안해 차마 품에 않고 목 놓아 울지도 못하시고
이틀 낮밤 하염없이 바라보다 흐르든 눈물마저 말라버렸던 어머니!!
늦은 밤 이웃집의
지게 빌려 누이의 주검 지고 나가시며
어린 나에게는 울지 마라시며 입술 깨물고 나가시던 나의 어머니.
하나 남은 자식 어떻게라도 키우기 위해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 혼자된 여인이 가난한 시골에서
어린 자식을 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 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어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건강하고 밝은 표정의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성치 않은 절뚝이는 다리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아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얻으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를 위해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서점에서 외상으로 참고서를 사다가 공부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저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음식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제가 동네 아이들의 놀림에 참지 못하고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치셨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엄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다 장에 내 팔고,
여름이면 들일에서 날품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 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그 시간들이
저를 영글게 하고 철들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어머니의 존재 차체가 있어
얼마나 든든했고 다행이라는 걸 몰라서
어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를 욕하며 저를 보면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는 동네 사람들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시절 반항적이었고,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가 미워서
나를 놀리거나 무시하는 아이들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어머니 속도 무지 상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어린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린 제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어머니
가난한 시골의 과부같지 않은
단아한 외모와 차분한 인품을 가지신 어머니
제가를 해도 하셨을 것인데...
저를 어떻게든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로
하나 남은 자식 어떻게라도 키우기 위해
그렇게 불쌍하게 사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가난한 시골마을
힘든 하우스일 마다하지 않으셨고,
당신 허리 상할 줄도 모르고...
당신 다리 상할 줄도 모르고...
당신보다 더 무거운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하신 분...!!
밤마다 나 들으실까 이 악물고
고통 참으시며 신음 소리 삼키시던...
날 위해 고생 하신 서러운 어머니...!!!
그런 어머니 도우려고
중학교 입학하고 신문배달 시작한 날...
돌아오니 방 한가운데 회초리 들고
눈물 흘리며 앉아계셨던 분...!!!
"어미만 불쌍해 보이면 되지..너까지 불쌍해지면 우리에겐 뭔 희망이 있니?" 라고 하시곤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시며 회초리 치시던
나의 어머니...!!!
그날 이후...
가난하여 도시락도 제대로 사가지 못하는 없는 놈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공부를 잘하는 것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골 학교였지만..
전교 일등을 도맡아 하면서부터..
저를 놀리는 친구들도 없어졌고...
저를 보면 혀를 차는 동네 어른들도 없어 졌습니다.
시골 학교에 나오는 장학금이란 장학금은 모조리 받으며,
어머니 어깨를 어쓱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 대부분은
인근 큰 도시의 명문 학교로 진학 하였습니다.
가난했던 저는
도시로 나가 실업계 고교로 진학하려 하였지만,
도시로 나가 자취할 돈도 없었고
어머니의
없는 놈은 공부라도 해야 한다는 성화에 못 이겨
고향의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도
시골에 홀로 남은 지라
1등은 도맡아 하였지만..
선생님들은 경쟁자 없이 홀로 공부해야 하는 저를 무척이나 걱정하시면서도
도와주시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공부할 문제지나 참고서들을 구해주셨고
장학금도 주선 해주며
도시 명문 학교의 시험지나 학원의 문제지를 가져다가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도 힘들거나 나태해질 땐
언제나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상기 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제가
철이 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만에 서울대 진학을 기대했던 학교와 마을의 기대를 이루지 못하고...
가난 때문에 서울의 명문 대학도 갈 수 없어
지방의 국립대를 진학 할 수밖에 없었던 저를
서러운 어머니는 고시합격 한 듯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대학진학 후에도
저는 저대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으로 저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 하였겠습니까?
한번은 자취하는 제게
(말이 자취지 코딱지 만한 방에 3명이 살던방 ㅡ 어머니 오셔도 하루 주무시고 가지도 못할 작은방)
김치와 쌀을 갖다 주시겠다고 올라오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어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아침 7시 차 타구 나왔더만,
10시두 안 돼 도착허더라.
한 3시간은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 그릇 먹었다. 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 한 구석이 아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게 내가 아침 드시고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안 했어!
엄니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어머니는 화가 난 아들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어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 통 두 개가 들어있었고,
가방 안은 김치 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 국물로 한 가득이었습니다.
“내가 엄니 때문에 미치겠네.
김치만 비닐봉지에 꼭 싸서 가져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 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어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어쩌까.
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겄다.
내가 언능 수퍼 가서 봉다리
얻어 올라니까 기달려라, 이?”
어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 통을 봉지 안에
넣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김치 안 먹구 사나,
버스 안에서 김치 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어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안절부절 하셨을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머니는 김치 전해 줬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시며 들고 오신
가방 안쪽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꼬깃 접은 1만 원 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건네주신 1만 원 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저는
얼른 매표소로 뛰어가 차표를
끊어다 드리고 배웅해 드렸습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 안에서
얼마나 소리 죽여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1만 원 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저는 유학을 갔고.
어머니의 아프다는 소식에 1년 만에 포기하고 돌아 왔지만.
대기업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래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어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어른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와 장으로 구경도 나가고,
어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도 사 드렸습니다.
처음 어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어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콜라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
이런 것이면 몇 접시라두 먹겄다.”
저는 어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어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날
고생으로 일찍 늙어셔서
하얗게 서리 내린 어머니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 거, 맛있다고 하는 거,
한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들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하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고 죽으면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데.”
저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잘생긴 아들도 낳았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칠순도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저를
길러 내셨던 어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가슴이 미어짐니다.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나이보다도 많이 늙어신 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어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저도 지금은 성치 않은 몸인지라...
제가 아플 때
죽을지도 모를 저의 남은생보다도
남은생 마음 아파하며 지내야 할 어머니의 모습이
더 저를 무섭게 하였습니다.
꽃으로 태어났으나
전쟁이라는 격랑을 만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어머니의 서러운 인생...!!!
남은 시간까지 만이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은 서럽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는걸..
극복해야 할 목표라는 걸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면 극복된다는 걸
가르쳐 주신 어머니!
몇 대를 이어온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는게 저의 희망이었습니다.
결혼 후 가난한 환경에서 시작하는 삶을 주지 않기 위해
5년이 지나서야 아이를 안겨준 남편이고...
서러운 가난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동생도 낳아 주지 않은 못난 아버지이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가을날,
서러운 어머니 손을 잡고
오래 전 너무나도 서러웠던
유년의 가난들을 뒤로하고 웃어며
아름다운 단풍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옴겨온글=
첫댓글 우리세대 어머님들은 고생많았던 옛날을 회상하는것 같군요 ... 정원씨 글 조아요
정원님! 글 잘읽고 갑니다 늘 좋은날 되세요^^ 우리 어머니 처럼 나도 훌룡한 어머니가 되고싶네요 많이 노력해야겠지요...
다들 건강히죠? 산행에 돋참을 못해 많이 미안하고 가고자 맘 먹어도 민패될새라 망설여져서... 살빠져 가벼워지면 꼭 가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