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부부가 강남에서 25평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26년이 걸린다는 신문 기사를 보는 순간 입안에 쓸개를 문 것처럼 씁쓸하다. 코스닥 주가가 미친 듯이 뛰어 오를 때는 전혀 생산성이 없는 벤처기업의 주가가 금세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거품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망해버린 어떤 코스닥 기업보다도 생산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강남의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이 내 사고의 기준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다.
언제나 일한만큼 얻는 법이라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강남사람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바 아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만 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강남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고 있다. 사람들의 들끓는 분노를 접할 때면 가슴이 철렁하게 섬뜩하다. 강남에서 휭휭하고 있다는 괴기담을 접하면서 도대체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자가 무슨 죄인인가 싶어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내가 누울 수 있는 그 조그만 땅덩이 하나에 가격을 강남 수준으로 환산해보고 나서 당황하는 내 심정은 결코 강남 쪽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50명이 넘는 한 과 졸업생중 채 다섯 명도 취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벌써 몇 년째 듣던 이야기다. 덕분에 대학원만 사람들이 미어지고 있다며 학력인플레이션 현상을 자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40만 청년 실업을 간신히 벗어나도 30대 중반에 명퇴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상이니 일찌감치 부모들은 그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식들을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성에 입사 하려면 영어로 면접관을 설득할 실력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가 되려면 아마도 한번쯤 해외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부모가 밀어줄 만큼 밀어준 사람들이나 삼성도 입사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누구는 삼성이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시대 주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 나와서 강남 어느 빌딩 숲으로 출근해야 할 것이며, 또한 강남 어느 아파트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속에 진입할 자신이 없다면 , 또 하나의 거대한 경쟁을 뚫고 해외로 나가 뿌리 없는 외로움을 감수하던지 아니면,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처다 보지 말라는 말을 생각하며 자족하며 살던지, 내 자식만이라도 저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자식을 위해 헌신을 하던지, 은거지락을 외치며 무시하고 살아가면 될 일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한번씩 보이는 신문기사에 약간의 상실감을 느끼게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제 내 나이 곧 마흔이다.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진부한 대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내겐 삶에 키워드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강남의 땅값이 혼란스럽고, 30대 중반이면 밀려날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세상이 혼란스럽고, 이런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야할 내 아이의 미래가 혼란스럽다. 그리고 제일 혼란스러운 것은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분노가 가장 혼란스럽다. 신문을 내던지며 전직 대통령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일갈하던 이의 분노와, 날마다 자기 목숨을 끊어내는 사람들을 만드는 사회를 향해 쏟아놓는 어떤 이의 일그러진 증오가 마치 깨어진 거울을 통해 보는 세상처럼 어지럽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에모토 마사루의 사진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가 물을 얼려 결정을 만들었다고 보여주는 사진들이 몇 장을 찍어 어떻게 추려 낸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는바 조용헌 교수가 명문가에 가서 그 자리에서 왜 명문가가 나왔는지 억지스럽게 꿰어 맞추던 명당론과 비슷한 결과론적 오류가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과 감사라는 말을 듣고 만들어졌다는 결정의 아름다움은 기실 감동적이다. 그 결정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라 인정받기에는 부족함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감사’ ‘고맙습니다’ ‘지혜’ 라는 글자 앞에서 이루어진 영롱한 6각형 물의 결정을 보고 느껴지는 마음의 평화는 진실이다. 마흔이 되어가는 내가 무엇을 가슴속에 새기며 살아야 하는지 그 사진은 말해주고 있다.
분노와 슬픔, 원한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극복하고 사는 것이 잘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내가 온갖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접하는 정보들로 인해 얻는 상실감과 혼란을 어떤 식으로 소화하고 극복 하느냐가 마흔 이후의 내 얼굴을 결정지을 것이다. 파장 에너지가 높아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종교적인 인물들이 사랑을 이야기 한 것은 말하기 쉬우니까 이야기 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랑과 감사’가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은 틀림없이 그 반대 감정인 분노와 증오를 감싸 안아 주고 이 혼란으로부터 나를,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흔 이후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삶에 키워드 하나를 마련했다. ‘범사에 감사하고 사랑하리라.’ 행복한 마흔을 위한 내가 올려놓는 첫 번째 돌맹이가 될 것이다.
첫댓글 세상살이가 힘드네요...맘은 있어도 안되는 세상...원망에 앞서 마음 붙혀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