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운동을 준비하다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은 1918년 4월 13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된 조도전대학 동창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선생은 조도전대학을 대표하여 참가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선생의 우국심정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은 이 해 여름 <학지광>의 편집위원이던 최승만에게 직접 자신의 의도를 제의하면서 나타났다. 즉 선생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생은 이 제안과 함께 곧 비밀리 동지규합에 나섰다. 후에 거족적으로 일어난2.8독립운동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송계백, 이종근, 김도연,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되었다. 대표위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밀의를 하였다.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 그리고 결의문을 국문, 영문, 일문으로 작성하여 자필로 서명하고 일본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비밀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시키기로 하고 구체적인 추진계획도 수립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 발족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다
거사 전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위원들은 모두 모여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요. 또 언제 나오게 될지 모르니 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 주시오’하며 후배들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대표들은 반드시 기소(起訴)될 것으로 각오하고 국민의 일원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한번은 죽을 인생이니 이러한 숭고한 일에 목숨을 바친다는 일이 오히려 영광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추호도 변함이 없이 태연한 심경으로 거사에 임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2월 8일 동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많이 내렸다. 오전 10시경에 대표들과 학생들은 이미 마련된 독립운동 문서들을 각국 대(공)사, 귀, 중 양원의 의원, 조선총독부와 동경 및 각지 신문사, 잡지사, 그리고 저명인사, 학자 등에게 우송하였다. 동경유학생들은 학우회 총회를 이날 오후 2시에 YMCA에서 열겠다는 통지를 받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경 경시청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 오전부터 사복과 정복의 경찰이 주위를 서성대고 있었다.
동경 신전구 소석천정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라는 명목으로 동경유학생의 거의 모두를 망라한 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매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미리 짜여진 순서대로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재회를 선언하자마자 선생이 긴급동의를 청하면서 재빨리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급히 선언하였으며 만장은 박수로 환성을 울렸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정숙하면서도 비장한 음성으로 낭독해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