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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지 9년째인 최경환은 기아로 이적,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습니다. |
-요즘 근황부터 알려 달라.
▶12월 초에 서울에 아버님 제사가 있어서 서울에 올라왔다. 오전에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오후에는 모교인 성남 고등학교에서 후배들과 함께 훈련을 했다. 부산에 내려가서는 실내연습장에서 타격 연습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그리고 6일 기아 타이거스 단체 훈련이 광주에서 있다. 3일간 훈련을 하고 10일경 괌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괌에서 20일, 그리고 일본으로 옮겨 40일 등 60일 캠프라 내가 야구를 하면서 가장 긴 스프링 트레이닝이 될 것 같다.
-계약은 만족스럽게 체결했는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내년에 좋은 성적을 내고나서 연봉으로 보상을 받기로 했다. 일단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만족한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데 선수 생활을 오래 하는 편이다.
▶1972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이제 서른일곱이 됐다. 아프고 부상이 있어 그만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몸도 되고 체력도 되는데 그만두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한다, 몸 관리를 잘 해서 마흔까지 뛰고 싶다. 우리 야구 현실이 서른만 넘으면 노장 취급을 하니까 그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인데 그것을 극복하려면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잘 하면 (계약)연장이 되는 거니까 프로는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
-국내 복귀가 벌써 꽤 됐다.
▶2000년에 LG에 입단했다, 2년 뛰다가 자유계약선수로 풀려 두산으로 가서 4년 있었고, 그 후에 롯데에서 2년 등 8년이 지났다.
-가는 곳마다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마이너리그 때 습관이 된 것이 운동장에 나갈 때 열심히 뛰고 치고 나서는 전력질주 하는 것이었는데 팬들이 그것이 특이했는지 열심히 뛰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다. LG에 있을 때는 별명이 ‘전력질주’였고, 두산으로 옮겨서는 ‘허슬 초이’로 바뀌었다, 좌우명이 있는데 ‘올웨이스 허슬(Always Hustle)’이라고 ‘늘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인데 항상 모자에 그 문구를 써놓고 뛴다. 항상 열심히 뛴다는 점에서 어느 팀을 가도 팬들이 좋아해주신 것 같다,
-요즘은 미국 야구도 그런 선수들이 많지 않은데.
▶레드삭스 마이너리그 시절에 데이빗 엑스타인(최근 토론토와 1년 450만 달러에 계약)이라는 친구랑 아주 친했었다. 둘이서 이닝이 바뀌고 수비를 나갈 때마다 누가 빨리 뛰어나가다 내기를 했었다. 늘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것이 좋다.
-특히 두산 팬들이 많은데.
▶두산에 있을 때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다. 전성기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성적도 좋았고, 팀도 내가 있는 동안에 4강, 3위, 준우승까지 했다. 이종욱이라는 좋은 외야수가 나와서 밀렸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후배가 나와서 자랑스러웠다.
내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두산의 ‘허슬두’라는 마크가 나 때문에 생겼다는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 롯데로 트레이드 된 후에 첫 게임이 잠실에서 두산과의 경기였는데 첫 타석에 딱 들어서는데 두산쪽에서 내 테마송(산타나의 스무스)을 틀어주고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을 때 정말 감동을 받았다. 당시 박명환이 투수였는데 감동이 컸던지 숏 땅볼로 물러났다.(웃음)
-롯데에서는 많이 뛰지 못했는데.
▶감독님과 코드가 안 맞았던 것 같다. 성적을 내려면 베테랑들을 많이 기용해야 할텐데 초반에 성적이 안되자 어린 선수들 위주로 운영을 하셨다, 그래서 난 주로 2군에 많이 있었다. 솔직히 속상했었다. 충분히 잘 할 수 있는데, 내 몫을 하고 실력발휘 할 기회가 없었다. 당연히 기록도 형편없고 홈런도 두개인가 밖에 없었다. 대타로는 타율이 3할6푼이 넘었는데도 기회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FA로 풀리자 기아의 조범현 감독이 불러주셨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멤버도 좋아진 것 같고, 잘만하면 우승도 노려볼만 하다고 본다.
-서재응도 복귀하는 등 기아에 해외파가 유난히 많다.
▶재응이랑 희섭이, 그리고 포수를 보다가 1루로 전향한 권윤민도 있고 나까지 4명이 됐다.
![]() 1995년 언론을 장식했던 최경환은 국내 타자로는 최초로 미국 야구에 도전했던 선수였습니다. |
-미국 야구 시절 이야기 좀 들어보자, 미국 프로에 진출한 것이 95년인데 어떤 인연으로 가게 됐는지.
▶92년에 경희대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뽑혀 한미선수권을 하러 미국으로 갔다. 그 때 펜웨이파크에서 경기를 했는데 미국 대표팀 왼손 에이스 투수에게 첫 타석에 2루타를 쳤다. 당시 에인절스의 극동담당 스카우트 총 담당이신 레이 포인트빈트씨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상당히 빠르고 1,2번을 쳤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 같다. 그 때 미국에서 뛰고 싶지 않느냐는 제안이 왔다.
-곧바로 계약을 하지는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꿈도 미국 야구에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대학은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두로만 계약을 하고 2년을 기다려줬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 때 바로 갔더라면 조금 더 메이저리그가 가깝지 않았을까,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서도 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4살 때 가니까 루키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더라.
-처음엔 에인절스로 깄는데.
▶당시 포인트빈트씨가 에인절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갔는데 에인절스에 대해서는 너무 기억이 좋다. 그런데 96년에 포인트빈트씨가 레드삭스로 옮기면서 나도 레드삭스로 현금 트레이드가 됐다.
-우리가 95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에인절스 소속으로 진짜 시골에서 지냈었는데.
▶그때는 아이다호의 시더래피즈에 있는 커널스에서 뛸 때였다. 메사에 있는 루키리그에서 한달을 뛰었는데 4할이 넘으니까 아이오와의 보이즈에 있는 로우 싱글A로 가라고 했다. 거기서 다시 한달을 뛰면서 2할9푼9를 치니까 다시 미들 싱글A팀인 미드웨스트리그의 커널스로 갔다. 온통 옥수수 밭만 있던 곳이었다.
그 해에는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시즌이 끝나니까 팀에서 하와이에서 열린 윈터리그로 보냈다. 그리고 비자가 끝나니까 잠깐 한국에 왔다가 팀에서 또 호주에 있는 골드코스트리그로 보내줬다. 거의 1년 내내 야구를 했다.
-시더래피즈에서 만났을 때 4명이 작은 아파트에서 살던 기억이 난다.
▶나는 루키리그와 로우싱글A를 거쳐 늦게 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나마 방에서도 못 자고 마루가 내 차지였다. 당시 우리 돈으로 월급이 80만원 정도였고 생활하기 정말 힘들었다. 때론 50센트가 없었고, 돈을 빌리려고 해도 미국 애들은 잘 빌려주지도 않아서 밥을 굶고 잔적도 많다. 우리 돈으로 500원이 없어서. 배고픔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다. 포스트 시즌에는 이미 아파트를 나왔기 때문에 클럽하우스에서 며칠은 잔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나니 그 고생들이 살면서 참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레드삭스로 가서는 쉽지 않았는데.
▶에인절스 있을 때가 정말 좋았다. 나를 유망주로 점찍어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그런데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스프링 캠프가 모두 끝나고 나서 96년 4월에야 트레이드가 됐는데 보스턴 팀은 워킹 비자도 모두 사용한 상태라 나를 멕시코 팀으로 보냈다. 그래서 96년에는 몬토레이 술탄엑스라는 팀에서 한 시즌을 뛰었다.
-덕분에 스페인어는 배웠겠다.
▶다행이라면 거기서 스패니시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제 영어나 스패니시는 거의 불편함이 없이 할 수 있다.
-97년에는 어땠나.
▶그때는 정식으로 스프링 트레이닝을 마치고 하이 싱글A인 사라소타 레드삭스에서 뛰었다. 그 때 (김)선우와 (조)진호도 함께 있었다. 거기서 98년까지 뛰었고, 99년에 다시 멕시코의 레드삭스 자매결연 프로팀으로 임대가 됐다. 99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는 팀에서 자꾸 나를 돌리는 것 같아서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현금 트레이드로 LG 유니폼을 입게 됐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멕시코 리그까지 거쳤는데 돌이켜보면서 혹시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하는 점들이 있나.
▶만약 다시 태어나 미국 야구에 도전한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가고 싶다. 너무 늦게 간 것이 후회가 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보스턴으로 가면서 일이 꼬였다. 첫 해에 늦게 가면서 멕시코로 보내졌고 팀과 얼굴을 익히고 나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에인절스에 계속 있었더라면 조금 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마이너리그 3년, 멕시코리그 2년하고 끝났다.
-언어의 장벽이 높았을텐데.
▶늘 사전을 가지고 다녔다. 어려운 단어가 있으면 스펠링을 물어 단어를 찾아 뜻을 파악했다. 둘째 해부터는 전자 사전을 사서 조금 더 수월했다. 내 경우는 룸메이트들이 모두 미국 애들이나 남미 애들이었기 때문에 영어밖에 쓸 수가 없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고 늘 동료들과 영어를 하면서 빨리 늘었다. 미국 친구들에게 정확한 영어를 배우고 문장을 아예 외워버리면서 익혔다.
![]() 에인절스 산하 시더래피즈 커널스 1995년 팀 포토. 앞줄 우측에서 두번째가 최경환. |
-타자로는 최초로 미국 야구에 도전했는데 미국 야구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린 선수들이 가기 때문에 일단은 결정할 때 윗분들과 주변의 조언을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내 프로도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 돈을 생각한다면 가지 말라고 하겠다.
만약 미국에서 야구를 하겠다는 꿈이 있다면 언어 소통이 첫 번째다. 문화와 음식 등에 빨리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리고 꼭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이 한명은 있으면 좋을 것이다, 부인이든 애인이든 부모든 친구든 에이전트든 가까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려움을 버텨내는데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혼자 갔던 것이 아쉬움이 많이 남고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외로움, 향수 그것이었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가 또 있었다는데.
▶아버님이 편찮으셨던 것이 또 다른 큰 이유였다. 갑자기 대장암이 발견되면서 이미 간까지 전이됐다는 소식에 급히 귀국을 결정했다. 결국 2000년 12월에 1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내가 두산에서 잘 뛰던 모습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 때 30대 초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나의 우상이셨다. 영어도 아버지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르쳐주셨다. 야구도 아버님께 배웠다. 아버님도 배문 고등학교 야구 선수 출신이다. 김인식 감독님의 1년 후배셨다. 그런데 선수 시절 사고가 발생해 운동을 그만두셨다. 밤에 스윙 연습을 하시는데 꼬마가 지나가다가 배트에 맞아 눈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나면서 죄책감 때문에 야구를 그만두셨다고 했다.
6살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시 구하기 힘들던 왼손잡이 글러브를 구해주셨고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기 시작했다. 야구도 아버님이 포항의 출장소장으로 가시면서 거기 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
-당시 아버님을 여의고 야구도 잘 풀리지 않았었는데.
▶2000년 1군에서 뛰고 겨울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해는 계속 2군에만 있는 등 홀로서기가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2군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안 접었다. 2군에서 3할6푼 넘게 치며 타격 1위인가를 했고 도루도 20개 가까이 했다. 그래서 마무리 캠프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바로 그날 발목 인대 부상을 당했다, 그러자 LG에서 FA로 풀렸고, 1주일 후에 두산에서 연락이 와서 계약을 했다.
-미국에서도 어려웠고 한국에 와서도 쉽지 않은 과정을 많이 거쳤다. 작년에도 36세의 나이에 2군에서 뛰는 등 힘들었는데 계속 야구를 하려는 이유가 뭔가.
▶아직 야구에 미련이 남고 더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경기를 해봐도 어린 선수들과 기량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둘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질 않고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워 꿈을 못 접겠다.
-이제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고 주전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무엇이 최경환을 계속 뛰게 만드는가.
▶원동력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장 큰 것 같다. 야구가 너무 좋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 자체가 너무 좋다, 야구장에서 뛰면서 얻는 그런 희열은 돈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한 시즌을 정말 잘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미련 없이 놓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 못해본 것 같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은가.
▶몸 관리를 열심히 해서인지 숫자상으로는 서른여섯이만 체력 테스트를 하면 20대 후반으로 나온다. 술을 원래 잘 못하고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만둔다는 것은 억울하다. 외국 선수들도 30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고 마흔이 넘어서 뛰는 선수들도 많다.
-야구 선수로서의 마지막 목표라면.
▶이제는 주전으로 풀타임을 계속 뛰겠다는 욕심은 솔직히 없다. 그러나 힘 닫는 데까지 팀의 우승에 일조를 하고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로 남고 싶다. 수비도 훨씬 눈을 뜨는 것 같고, 전문대타요원으로도 자신이 있다. 3~4년 더 현역 생활을 더 하고 은퇴하면 후배들을 지도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또 미국과 남미 쪽과의 인맥도 많고 하니 야구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또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겐 큰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좋은 활약을 많이 못 보여드렸기 때문에 하늘에서나마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려하면 아버지가 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님에게 꼭 좋은 시즌을 한번 보여드리고 은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