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유운 전(柳雲傳)
○ 유운은 을사생이며 자(字)는 종룡(從龍)이다. 신유년에 진사(進士)하고 갑자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대사헌이었는데, 파직되어서 고향에 돌아갔으나 정권을 잡은 자가 모해하여서 사건이 예측할 수 없었다. 술을 한없이 마시다가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
○ 척언 : 종룡 유운은 성품이 호탕하여서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0세에 과거에 올랐는데 장원 다음이었으며, 25, 6세에는 벌써 3품에 올랐다.
일찍이 충청 어사(忠淸御使)가 되어서 처음 공주에 들어갔는데, 반드시 얼굴이 절묘한 기생이 천침(薦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워서 기다렸다. 고을 원은 어사는 딴 사신과 달라 잘못하다가는 서리 같은 위엄을 거스르게 될까 두려워서 감히 기생을 보내지 못하고, 다만 통인(通引)을 보내어 호위해서 자도록 하였으므로, 밤이 새도록 기다렸으나 사람 자취조차 없었다. 이른 아침에 떠나면서 절구(絶句) 한 수를 침병(寢屛)에 적었는데,
공산 태수는 위엄만 겁내었고 / 公山太守㥘威稜
어사의 풍류는 알아주지 못하네 / 御史風流識未曾
빈 사관에 미인 없이 긴 밤을 새우니 / 空館無人消永夜
남쪽으로 온 내 행색이 중보다 담박하여라 / 南來行色淡於僧
하여서, 듣는 자가 크게 웃었다.
○보유 : 일찍이 공산 병풍에 적은 시를 보니, 호방하여 얽매인 곳이 없음은 천성이 그런 것이었다. 첩을 두어 사람 두었으므로 정암(靜庵)이 공도(公道)로써 책망하였다.
하루는 취해서 기생과 함께 초헌(軺軒)을 타고 갔다. 정암이 이 소문을 듣고 곧 쫓아가서, 부모가 남겨 준 몸을 조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더럽힌다는 뜻으로 크게 책망하였다. 공이 빙긋이 웃으며 답하기를, “상말에, ‘개가 물었던 꿩을 성황신이 먹는다.’ 했소. 저것들이 비록 창녀들이지마는 어찌 나를 더럽히겠소.” 하였다. 정암도 웃으면서, “종룡은 보기 드문 선비이나, 다만 여색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 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행검을 닦지 않는다 하여 충청 감사로 좌천되었다. 일찍이 여울에 있는 돌을 두고 시를 짓기를,
밉구나, 너 여울 가운데 돌이여 / 惡爾灘中石
비쭉한 것이 숨었다가 다시 흐른다 / 槎牙隱復流
돌기둥 되어서 서지 못하고 / 復爲砥柱立
공연히 뱃길만 방해하네 / 空作礙行舟
하였다.
과만(瓜滿 임기가 만기된 것)이 되어서 체임(遞任)하게 되었는데, 대관(臺官)이 청해서 그대로 유임시키고 바꾸지 않았다. 이때에 앞서 각 도 고을에 여악(女樂)을 폐지하였다.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은 공이 직산현(稷山縣) 누(樓)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벌였다는 말을 잘못 듣고, 국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이 앞장 섰으니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체임하도록 논박하였다.
그러나 옥당(玉堂)에서는 차자(箚子)를 올려서, 공이 그렇지 않고 또 사실 없이 떠도는 말로써 방백(方伯) 같은 중신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구원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공이 이연경에게 분함을 품었을 것이라 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어서는 사직하는 소를 한 번 계(啓)하였는데, 사화를 구원하기가 급해서 집의(執義) 윤세림(尹世霖), 장령(掌令) 이겸(李謙)ㆍ임추(任樞), 지평 조광좌(趙光佐)ㆍ신변(申抃) 등과 함께 모두 사은(謝恩)할 것과 대관이 서로 만나는 예[會禮]를 잊고, 복합(伏閤)해서 논계하기를, “사건이 만약 반역일 것 같으면 공명정대하게 처단할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이 일은 비밀이라 하니, 이것은 간사한 자가 비밀리 논계한 것입니다. 대저 비밀리 한 논계라는 것은 종사(宗祀)를 위태롭게 하는 조짐입니다. 까닭에 전일 이줄(李茁)이 비밀리 논계했을 때에, 대관이 그 퍼져 나가는 폐해를 논했으므로 전하께서도 명백히 아시었을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는 모두 어질고 착한 사람이니, 진실로 몸소 다스림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이 벌써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의리상 직사(職事)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서 간사한 사람의 마음을 쾌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은 평소부터 물망이 없다고 탄박(彈駁)하여 이빈(李蘋)을 후임으로 하였다. 이빈은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다가 올라와서, 공이 사은숙배도 하지 아니하고 문득 논쟁(論爭)하여서 사체(事體)를 잃었다고 논박하였다. 이리하여 파직되어 안성(安城)에 우거하였다. 신사년 가을에 형세를 관망하여서 권세에 따랐다는 것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해 겨울에 남곤(南袞)이 대간을 부추겨서 당파로 몰아 올린 소장(疏章)에 공의 이름이 4번째로 적혀 있었고, 정암ㆍ충암(冲庵)ㆍ김대성(金大成)은 모두 이미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공은 화가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미치리라 의심하고 분해하면서 죽을 작정으로 술을 한없이 마셨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 하였다. 적가(嫡家)에는 자녀가 없었다. [한국고전종합DB]
[참고자료 1] 유운柳雲 (1485년(성종 16) ~ 1528년(중종 23))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종룡(從龍), 호는 항재(恒齋) 또는 성재(醒齋). 증조는 유효반(柳孝班)이고, 할아버지는 유양손(柳良孫)이다. 아버지는 사지(司紙) 유공좌(柳公佐)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14년(중종 9)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15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과 술만 마신다고 하여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이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南袞)에 의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남곤 일당에게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대간들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전하께서 다시 광조를 쓰시어 임금과 신하가 옛날과 같으면 신등이 마땅히 직에 나아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청컨대 신들을 죽여서 간인(奸人)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조광조를 구원하고자 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향리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죽었다.
시풍이 호탕하여 한때 명성이 높았다. 편저로는 『진수해범(進修楷範)』 2권 2책이 있는데, 이 책은 1519년(중종 14) 옛 경전과 사첩(史牒) 및 구류제가(九流諸家)의 설을 섭렵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에 필요한 문구를 뽑아 간행한 것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daum백과]
[참고자료 2] 이연경 李延慶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 · 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도사 이수원(李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방의문(房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해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 ·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 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충주 북촌 인근에 거주하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 · 강유선(康維善) · 심건(沈鍵)은 이연경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daum백과]
[팔경논주]
유운은 조광조당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량과 출신 이연경으로부터 논박을 당하였다. 그러나 구금된 조광조에 이어 대사헌이 되자말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구원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남곤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 공으로 정광필, 이장곤 등과 함께 기묘록에 올랐다.
『기묘록 보유 상권』은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기묘당적』 본문에 김정국이 나중에 별도로 쓴 『사재척언』 의 <유운 전>을 가져다 붙이고, 이어서 안로(1516 ~ 1586 ~ ? )가 다른 사람의 글과 자기의 생각을 <보유>, 보충하여 덧붙인 책이다.
『사재척언 思齋摭言』은 김안국의 아우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명종 말년에 지은 책이다. 다수의 시화, 견문, 사대부의 일화, 야사, 소화를 기록하여 기존의 필기류를 계승하면서 당대의 시사를 함께 조명했다. 특히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한 내용이 많아, 기묘사화에 대한 초기 사림파의 의식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안로는 왜 『사재척언 思齋摭言』에 있는 유운이 충청 어사(忠淸御使)가 되어서 공주에 간 날 밤에 있은 기생 기다린 이야기를 <척언>이라 하며 붙여 놓았을까. 김정국이 유운의 ‘御史風流識未曾’란 구절의 시를 인용한 걸 보니, 유운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거나 시를 읽고 물어본 것 같다. 객지의 밤을 보내는 혈기방장한 남자의 기심과 욕망을 풍류라는 말로 색칠할 수 있겠지만, 그냥 야담으로 마칠 거리이지 『사재척언』에 기록해 놓을 것까진 없고, 『기묘록』에 보유, 보탤 일은 아니다.
<척언>에도 기생 이야기가 있지만, <보유>에도 기생과 술 이야기가 있다. 특히 유운이 ‘죽을 작정으로 술을 한없이 마셨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란 말을 보탰다. 안로가 유운을 보는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관기가 있어 공무 출장 중인 고관에게 수청을 드는 관습이 합법적이었고, 양반이 첩을 여럿 둘 수 있었으므로 그냥 읽고 넘길 수도 있지만, 안로가 구태여 글로 남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기생과 술 이야기는 한갓 여담이지 공개적으로 자랑할 게 못 된다. 하물며 글로 남겨 후세에까지 전할 게 못 된다. 유운을 기묘록에 올린다면, 현장에서 대사헌이 되자말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구명하려고 한 간언만 써놓아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말로만 구명한 유운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사림파와 그 후손들에게는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다. 하여튼 ‘柳雲’, ‘버들 구름’ 이름 두자는 역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