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중국 황산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황산의 안개 낀 산길을 뒤로하고 다시 나의 고향 영산포로 향하는 길이었다.
공항에서 용산역까지 가야 했는데, 전철 시간으로는 KTX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조금만 서둘러 주십시오. 기차를 놓치면 오늘 고향에 못 내려갑니다.”
기사님은 백미러로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말없이 속도를 올렸다.
차창 밖 서울의 빌딩 숲이 뒤로 밀려나듯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내 등을 떠밀 듯 시간은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겨우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나는 여행 가방을 끌고 플랫폼으로 뛰었다.
기차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몸을 실었지만 나주까지 가는 표는 이미 매진이었다.
결국 송정까지 내려와 형의 도움을 받고, 황산 여행을 함께했던 친구의 도움까지 더해져서야 겨우 고향 시골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의 고향은 여전히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멀리서 세 마리 진돗개의 짖는 소리가 어둠 속 논둑을 타고 메아리쳤다.
도시에선 듣지 못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는 경계와 반가움, 그리고 “왜 이제 왔느냐”는 투정 같은 것이 함께 섞여 있었다.
나는 밥그릇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사료를 채워 넣고 새 물을 갈아주었다.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향의 밤 속으로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시골의 아침은 도시처럼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새들이 눈을 뜨고, 바람이 깨어나고, 풀잎 끝 이슬이 햇빛을 기다리며 천천히 하루를 연다.
나는 세 마리 진돗개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영산강 둑길 옆 자전거 도로에는 노란 꽃들이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많이 피어 있었다.
꽃들은 마치 강바람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의 “찌르릉” 소리마저 영산강 물결과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엄마 진돗개는 풀어 놓고, 여섯 달 된 새끼 두 마리는 줄을 묶은 채 걸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어찌나 힘이 센지, 오히려 내가 끌려다니는 형국이었다.
나는 문득 알래스카 설원 위를 달리는 썰매개들을 떠올렸다.
녀석들은 아직 세상을 다 배우지 못한 아이들 같았다.
이쪽 냄새를 맡다가 저쪽으로 뛰고, 갑자기 풀숲으로 몸을 던지며 나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장면이 있었다.
한 마리가 오줌을 누거나 대변을 보기 위해 멈추면 다른 한 마리가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그들만의 질서와 배려가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인간 세상도 저러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잠시 멈춰 서 있을 때,
누군가 삶에 지쳐 숨을 고를 때,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 주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따뜻할까.
우리는 동네 샘터에 들렀다.
개들은 혀를 길게 내밀고 물을 마셨다.
나는 손으로 바가지를 떠서 녀석들 머리 위에 물을 살짝 부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뒷산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다.
나는 늘 그렇듯 부모님 산소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다녀왔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인사를 드렸다.
아침 이슬은 아직 산길에 가득했다.
개들은 산을 오를 때는 천천히 걷다가도 내리막 낭떠러지 길만 나오면 화살처럼 달렸다.
순간이었다.
두 마리가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갔고, 나는 줄을 놓치지 않으려다 그대로 몸이 끌려갔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복숭아나무 가지에 부딪쳤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손을 머리에 가져가 보니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얼굴을 지나 목으로, 셔츠 안으로 그리고 반바지 밑으로 번져 내려갔다.
복숭아나무 가지 하나가 꺾여 있었다.
그제야 내가 크게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피를 손으로 누른 채 개들을 다시 묶어 두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좀 병원 데려다 줄 수 있냐…”
응급실은 분주했다.
접수창구 직원은 내 주민번호 대신 외국인 여부를 먼저 확인했다.
“보험 처리 안 됩니다. 카드나 현금 결제 하셔야 합니다.”
나는 잠시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외국인이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의료진은 곧바로 움직였다.
어떻게 다쳤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구토는 있었는지 빠르게 질문했다.
그리고 곧바로 CT 촬영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국 의료 시스템의 속도를 다시 느꼈다.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공허함도 함께 느껴졌다.
아무도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누가 의사인지, 누가 간호사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왜 CT를 찍는지, 무엇을 확인하는지, 결과가 어떤지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그들은 분명 성실했다.
열심히 움직였고, 필요한 처치는 정확히 했다.
내 머리에는 열 개의 스테이플이 박혔고, 눈 위 상처는 봉합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환자를 돌보는 것은 같은 것일까.”
나는 뉴욕 병원에서 일한다.
미국 의료는 비싸고 복잡하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환자 앞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무엇을 왜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환자의 눈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읽으려 노력한다.
한국 응급실에서는 sympathy는 느껴졌다.
다친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empathy,
환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함께 느끼려는 공감은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환자가 많아서일까.
너무 시스템에 익숙해져서일까.
아니면 이 사회 전체가 너무 빨리 움직이기 때문일까.
나는 응급실을 나서며 컴퓨터 앞 직원에게 말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뉴욕 병원에서 일합니다.”
그 직원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병원비는 약 400달러가 나왔다.
약값은 별도였다.
주말 가산까지 붙어 있었다.
나는 계산서를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뉴욕 병원이 떠올랐다.
비싸다고만 생각했던 미국 의료가,
그날따라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세 마리 진돗개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이했다.
아침에 나를 넘어뜨렸던 녀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았다.
나는 머리에 열 개의 철심을 박은 채 다시 영산강 바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람도 결국 상처를 입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몸에 남는 상처도 있고, 마음에 남는 상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누군가 곁에서 기다려 주고,
다시 물 한 바가지를 떠 주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존재가 있다면,
인생은 아직 견딜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