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리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 철책이 보이는 월정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울에서 가자면, 경원선의 종점인 신탄에서 내려 4킬로미터쯤 걸어가야 한다. 「제2의 운명」에서 상허는 '철원역에서 기차를 내려 철길을 따라 서울 쪽으로 약 5리 걸어 용담마을에 이른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코스를 밟을 수 없다.
이곳은 6·25동란 당시 처절한 격전지였다. 쌍방간에 벌어졌던 전투의 잔해인 듯이 월정리 표지판 너머로는 잡초가 무성하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쓰인 이정표만이 살풍경을 드러낸다. 그 한편에 남한에서는 최북단 역이라는 월정리 역사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인형의 집처럼 작고 아담한 역이다. '밤이 이윽해서는 그가 월정리역에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차표 사는 것을 보았다'는 단편 「사냥」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월정리역은 6년여 전에 옛 모습 그대로 복구되었다. 그렇지만 원산 방향의 이정표만을 간직한 채 끊겨 있어 차표도 살 수 없고 검표원도 만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분단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 일대를 관광지로 꾸미는 과정에서 복원된 역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철마의 외마디처럼, 월정리역도 언젠가는 열차와 승객으로 붐빌 날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부터 철원평야를 따라 옛 철원읍을 밟아 나가자면, '봉우재', '떡전거리', '서문거리', '율리리', '선왕댕이', '밤까시' 와 같은 문학현장을 만나게 된다. '떡전거리', '서문거리'는 현대의 철원읍이고 민통선 밖에 있다. '밤까시' 마을은 민통선 안에 있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상허의 소설 「촌띄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옛 철원읍은 상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옛 도읍에 서 있던 크고 작은 건물들은 전화에 휩쓸려 모두 사라졌고, 어깨가 떨어져나가고 뼈대만 앙상한 노동당사 건물만이 황량한 풍경을 빚어내는데, 건물 왼편에는 철원 경찰서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촌띄기」에서 장군이가 순사에게 끌려가 구류를 당했던 장면이 떠오르지만, 어린아이의 키를 넘을 정도로 무성한 잡초는 건물의 형체마저 짐작할 수 없게 한다. 노동당사 건물 뒤로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바로 봉우재다. 파란많은 한 작가의 일생이 적요한 풍경 속에서 허망히 교차하는 순간이다.
상허는 이곳에서 1904년에 태어나 6세가 될 때까지 자라다가 아버지를 따리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아버지 이문교(李文敎)는 구한말 개화파에 관여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문교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조선을 개화하여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에 상응하는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던 인물이지만, 대분분의 개화파처럼 일제의 침략 의도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까닭에 의병들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아야했다. 상허의 자전소설 「사상의 월야」에서 그려져 있듯이 이문교는 개화파라는 이유로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산속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가족들은 의병들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갖다 바치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결국, 이문교는 가솔을 이끌고 러시아의 해삼위(지금의 블라디보스톡 부근)으로 이주하는데, 이때가 1909년이었다. 그렇지만 얼마후 이문교는 병으로 죽고, 3년 뒤인 1912년에는 상허의 모친 안씨마저 산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태준이 양친을 다 잃고 고아가 되어 용담으로 되돌아온 것이 그의 나이 9세 적. 고아로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까닭에 주변의 동정과 괄시를 받으면서 어렵게 봉명학교를 졸업하는데, 그래도 남다른 강인함과 성취욕을 지녀서 졸업식장에서는 졸업생을 대표해서 상장을 받기도 하였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원산으로 향한 것이 중학 졸업하고 15세가 되던 해였다.
논과 밭으로 변해 버린 용담, 율리리의 옛 터 앞에 섰다. 용담의 행정구역상의 명칭인 율리리(栗梨里)는 전쟁전에는 38선 이북에 있었지만 전쟁 후 수복되어 현재는 '미입주 지역' 으로 분류되어 출입이 허용될 뿐이다. 「실락원 이야기」에 나오는 기와집 터도 눈에 어림잡히나, 상상 속의 그림일 뿐이다. 멀리 보이는 어슴푸레한 산줄기만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금학산'이다. 해발 947미터의 산으로 모양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철원의 굴곡을 한 눈에 내려다본 증인인 셈이지만, 산천은 늘 그렇듯이 말이 없다. 이런 현실을 예견하기라도 했듯이, 일찍이 상허는 수필 「용담이야기」에서 이곳을 한폭의 수채화로 담아 놓았다.
용담은 금강산과는 먼 곳이지만 그와 한 계통인 듯하게 수려한 산수는 처처에 승경(勝景)을 이루었고 뒤에는 나지막한 두매봉재가 조석으로 오르기 좋은 조그만 잔디밭길을 가지고 있다. 앞에는 언제든지 구름을 인 금학산이 창공에 우뚝하니 솟아 있는 아름다운 촌, 손을 씻으려면 웃골과 백학골에서 흘러나오는 옥수천이 있고 수욕이나 천엽이나 학수질이 하고 싶으면 선비소 한내다리, 쇠치망, 진소, 칠송정 모두 일취일경이 있는 촌, 그곳이 바로 용담이라는 것이다. 또 단편 「무연」에서는 여기서 보냈던 유년의 한때를 아름답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외조부를 따라 낚시를 자주 다녔는데 가 본 곳이 주로 '쇠치망'이란 조그만 늪이었다. 쇠치망은, 금학산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칠송정' 이니 '선비소'니 여러 소를 이루며 흘러내려 오던 물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그것이 다시 흘러 차고 맑은 '한내천'과 합수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상허는 여기서 외조부와 낚시질을 하다가 그것이 갑갑하면 외삼촌들을 따라 선비소로 가 그물놀이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상허는 이곳을 떠나 공부와 세상살이로 도화지를 떠돌면서도 늘상 이곳을 그리워했는데, 마치 주재소의 감시로 청운의 꿈을 등지고 이곳을 떠나야 했던 「실낙원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이곳은 상허나 정신적 유토피아나 다름 없었던 셈이다. 「제2의 운명」에서 주인공 윤필재가 실연의 비애를 안고 새로운 운명을 시작한 곳이 용담이고, 심천숙이가 불행했던 과거를 잊고 새출발했던 곳도 이곳 용담이었다. 「고향」에서 주인공 '현'이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현해탄을 건너면서 가슴 설레며 그리워했던 곳 역시 여기였다. 말하자면 용담은 이태준에게는 정신의 고향이자 고달픈 삶의 귀향처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화에 휩쓸려 그 흔적조차 묘연한 땅이 되고 말았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셈이다.
논과 밭을 가운데 두고 산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는 산세가 예전의 풍광을 짐작케 하지만, 주인잃은 풍경이 되어 쓸쓸함만을 자아낼 뿐이다. 밭으로 변해 버린 터를 뒤로 하고 발길을 서울로 돌린다.
2.
이태준의 유년기 추억이 얽힌 고향 마을은 흔적도 없어졌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살던 집의 모습은 여전히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뒷날 자수성가한 이태준은 자신이 자랐던 철원 용담의 옛집을 서울에 그대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 성북2동 동사무소 바로 뒤편에 이웃하고 있는 고급 빌라들 사이에 끼어 그 고풍스런 자태가 이채로운 1백여 평 남짓한 한옥. 상허는 이곳에 있던 초가를 헐고 그 터에 지난 기억을 더듬어 고향의 옛집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1933년, 그러니까 상허가 30세가 되던 해에 지어진 것이니까 가옥의 연륜은 이미 60년을 넘긴 셈이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한 지 3년이 되던 당시 이태준은 장녀 소명과 장남 유백을 두고 있었고, 22세에 「오몽녀」로 등단한 이래 「산월이」, 「봄」, 「실락원 이야기」등을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하면서 이화여전에 출강하고, 박태원·정지용 등과 어울려 구인회를 조직하는 등 기반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남다를 애착을 갖고, 고향의 뿌리 하나를 옮겨 놓는 심정으로 이 집을 지었으리라.
기와를 얹은 담장이 양편에서 호위하고 있는 고즈넉한 나무 대문이 이제 세월의 잔잔한 때를 입은 채 낯선 방문객을 맞는다. 나무 대문 안쪽으로 널찍한 마당, 그 오른편에 아담한 기와집 한 채가 衁자형으로 놓여 있다. 섬돌 위로 누마루가 높직하다. 일제시대 때 지어져, 요즘 웬만한 한옥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가옥의 풍취를 보여준다. 전면에 붙은 부채모양의 '문향루(聞香樓)'라는 현판이 시선을 끄는데, 그곳이 바로 상허가 집필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소설 「무연」에 등장하는 용담집에는 '문향루'가 아니라 '호상루(濠想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호상루 현판이 달려 있던 용담집은 누마루 밑을 돌면, 연당이 놓여 있고, 밤이면 개구리들이 어찌나 시끄럽게 울던지 외조부는 잠을 잘 때는 늘상 하인을 시켜 돌을 던져 울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연당을 옮겨 놓은 듯, 이곳의 마당 한편에도 조그마한 우물이 연못처럼 꾸며져 있다.
마당 한편에는 예전에 상허가 서재로 따로 쓰던 초당이 있었던 모양인데, 6.25 때 허물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자취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감나무와 사철나무들이 심어져 뜨락의 풍광을 보기 좋게 꾸며 주고 있다.
신기한 것은 상허가 섬돌 밑에 심어 놓은 난초가 해마다 피고 지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낡은 책장과 함께, 난초는 옛 주인의 숨결을 잊지 않고 토해내는 모양이다. 「난」이라는 수필에서 이태준은 책이 지리하거나 붓이 막힐 때 난초 잎을 닦아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난초는 그만치 심경을 가라앉혀 주며, 그렇기 때문에 양란이양신(養蘭而養身)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까닭에 아직도 난은 잎을 틔우는 것인지. 가람 이병기로부터 사란(絲欄) 한 분(盆)을 받고 즐거워했다는 이태준이 지금껏 꽃망울을 틔우는 난초를 본다면 어떠한 심정을 가졌을는지.
마당 한 구석에 웬 비석 하나가 놓여 있어 보니, 이 한옥이 '서울시의 지방문화재 11호'라는 안내문이었다. 전통한옥이라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앞으로도 한동안은 상허의 문학적 산실인 이 집이 원형대로 보존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 준다. 작가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나 기념비 하나 변변히 없는 현실에서, 철원 민통선안에 생가를 복원시키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이 집을 보존한다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상허는 이 성북동 집에서 그를 대표하는 「달밤」 「촌띄기」 「손거부」 「가마귀」 「복덕방」 「패강냉」 「영월영감」 「밤길」 「토끼이야기」 등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써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대부분 상허의 안정된 생활을 반영하듯이 간결하고 치밀한 문장과 빼어난 분위기, 인물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달밤」에서 보이는 황수건에 대한 애상적인 묘사와 비감어린 분위기는 이 시기 작품을 대표한다. '황수건'은 '태고 때 사람처럼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눈'을 가진 인물이다. 바보스럽고 못난이지만 '나름의 깊은 고뇌를 지니고 있다. 이 인물을 작가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쓸쓸한 달밤을 배경으로 제시한다. 그로 인해 애상적인 분위기가 빚어지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식민치하의 우울한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황수건의 모습은 마치 식민치하의 우리 민족과도 같은 셈이다.
이처럼 작가는 현실의 암울함을 배경으로 하여 무력하게 몰락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비감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당대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기법을 구사한다. 이런 기법이 그의 전 작품에 일관되게 유지됨으로써 인물의 독특한 성격이 돋보이며, 그로 인해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허는 이곳에서 월북 직전까지 살면서 꾸준한 작품활동을 했는데, 집을 지을 당시에는 고향을 닮은 이 집에서 해로하고 작가로서 한평생을 마감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가족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상상 못했을 터이다. 도망치듯 떠나 버린 옛 주인을 기다리듯. 지금까지도 가옥 등기대장 상의 소유자는 이태준이다. 얼마 전까지도 그의 질녀, 이애주씨가 이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씨의 장녀가 관리를 맡고 있다.
이 집은 보존 상태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동사무소 옆에서 있는 안내문처럼 여전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치 월북 작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반영하듯이, 안내문에는 '이태준'이 아니라 '이태현의 집'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것이 만약 표기상의 실수라면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3.
'시의 지용, 소설의 이태준'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소설가였던 상허였으나, 그의 이름은 불행하게도 꽤 오랫동안 남한 땅에서 지워져 있었다. 고향 주민들에게조차 그의 이름은 생소했다. 순수문학의 기수로 불리 울 만큼 그가 남에 남긴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념적 색채가 없는 순수문학 작품들이다. 그래서 그의 월북은 당시 문인들에게조차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의 해방전 이력을 더듬어 보면, 그가 표나게 어떤 사상성을 지녔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다. '내 취미에 맞는 인물을 붙들어 가지고 스케취나 공부하면서 제작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려 왔다. 그래 불우선생, 황수건이(「달밤」의 주인공), 안영감(「아담의 후예」의 주인공), 색시, 손거부, 복덕방 영감들 따위 사상적 사고라거나 현실 기구와 관련한 구성이라거나 그런 것을 피할 수 있는 이미 운명이 결정된 인물들을 택해 거의 시를 쓰는 즉흥기분으로 쓴 것이다' 라고 스스로 술회했듯이 이태준 소설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는 것은 간결하고 치밀한 묘사, 서정적 분위기, 선명한 인간상 등이다. 「달밤」, 「색시」, 「손거부」, 「복덕방」, 「아담의 후예」 등 상허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모두 이런 특성을 보여준다. 이태준이 순수 문학자로 평가되는 것은 이런 이유인 셈이다.
더구나 이태준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첫째도 문장, 둘째도 문장, 셋째도 문장이라는 식으로 소설에서 문장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문장이 구어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가공되지 않았다면 한낱 기록일 뿐이며 참된 소설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장이란 말과는 달리 저절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배워야 하며, 또 작가의 치밀한 계획과 선택과 조직이 필요하다. 예컨대 소설의 문장이란 끊임없는 가공과 정련이 요구된다. 이런 생각에서 이태준은 하나의 단편을 완성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기를 되풀이했고, 그 결과 그의 소설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명문으로 정평이 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문학관과 문장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었던 까닭에 이태준이 해방후 좌익에 가담하고 월북한 것은 최태응의 말대로 커다란 '문학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월북을 두고 좌익에 이용당했다느니, 묘혈(墓穴)을 자청했다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 인간의 행위가 어느 날 돌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이미 내재되어 있던 속성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이라면, 이태준의 월북을 단지 '충격적인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태준의 월북은 내재된 특성이 해방이라는 특수한 국면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상허 소설의 또 다른 특성을 이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지사적 사명감을 통해서 확인된다.
구한말 개화의 꿈을 간직한 채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에 대한 이태준의 흠모는 「사상의 월야」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두루 발견되거니와, 그것이 이태준 소설의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고향」에서 발견되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단호한 분노라든가, 「꽃나무는 심어놓고」에서 보이는 일제의 기만적 농업정책에 대한 서정적인 비판, 「패강냉」에서 보이는, 일본식으로 변화된 현실과 전통의 소멸에 대한 주인공 '현'의 분노 등은 모두 작가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 또 소박한 산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청춘을 바치겠다는 소박한 꿈마져 용납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반감을 그린 「실락원 이야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신문기자를 다룬 「순정」 역시 작가의 또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태준을 단순한 순수 문학자라고만 볼 수는 없는데, 그가 해방후 좌익에 관여하고 월북한 것은 이러한 특성이 중요하게 작용한 때문이다. 「해방전후」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이태준은 해방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침묵만으로 일관하는 것은 비겁하며, 어떤 식으로든 신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전에는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행동했으나, 이제는 일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민족 자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임화 등의 조선문학가동맹 핵심들과 어울리면서 급기야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백철의 회고에 의하면, 이태준은 처음에 임화와는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 말기, 임화가 「신문학사」를 쓰고 지나간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가까워졌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해방후 상허는 임화 등과 함께 문학건설 본부의 선두에 섰고, 임화의 추천으로 월북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소련 여행 티켓의 유혹을 받은 것이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작가적 결벽성을 갖고 있는 그가, 남한의 과도정권의 부패성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도 한 동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를 몸소 체험했던 평론가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후의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태준의 판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허의 월북은 임화나 한설야 등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혼란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지사적 사명감에서 이태준이 월북을 결심했다면, 임화나 한설야 등은 식민지 이래의 이념을 쫓아서 월북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태준은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런 성향에서 백철의 회고대로 남한 과도정부의 부패를 목격하고 미지의 북행길을 재촉한 것이다.
월북 후, 이태준은 소련파의 후원을 받으면서 소련을 다녀오고, 전쟁 기간 중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하여 미군에 대한 적개감을 고취하고 인민군 전사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작품을 써 이전과는 사뭇 다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미군에 대한 원수를 백배천배로 갚자는 결의를 서술한 「백배천배로」, 겁 많은 병사가 용기 있는 전사로 변화되는 과정을 그린 「누가 굴복하는가 보자」, 미군들의 잔학상을 폭로한 「미대사관」, 야전병원 간호장 김옥실의 인간애를 그린 「고귀한 사람들」, 나이어린 소년단원들의 투쟁상을 통해 미군의 잔학상을 폭로한 「네거리에 선 전사들」, 빨치산 대원인 김칠복이 고향에 잠입하여 처자식의 참상마저 외면한 채 냉정히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는 과정을 그린 「고향길」, 해방 후 문맹퇴치 과정을 그린 「호랑이 할머니」등은 모두 이런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여 1955년 소련파 숙청과 더불어 함경도의 탄광촌으로 추방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파 간첩 김진계의 구술 기록에 의하면, 1969년 당시 이태준은 원산 부근 마천령산맥에 있는 장동탄광에서 사회보장으로 두 부부가 외로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회보장이란 여자는 55세, 남자는 60세가 넘으면 노동법에 의해서 정부의 보조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김진계가 장동탄광에서 남파 훈련을 받던 도중 우연히 낯익은 노인을 만나, 혹시 '작가가 아니냐'고 물으니, 노인이 머뭇거리면서 '이태준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평률리 민주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에서 이태준의 단편집 「달밤」이나 「가마귀」를 읽어보았고,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진계는 그 말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쓰느냐고 물으니, 이태준은 쓸쓸한 표정으로 '쓰고는 싶소만.....'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그때 이태준의 나이가 65세였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어언 91살인 셈이다.
김진계는 1954년 어느 날 이태준의 모든 책들이 도서실에서 사라졌다고 덧붙이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미 1954년에 이태준의 문학적 생명이 끝난 셈이다.
숙청 당시 이태준의 죄목은 '구인회'활동의 반동성과 전쟁기 소설의 친미적 성향(?)이었다. 남다른 심미안과 문장관을 지녔던 문학인이 탄광촌의 한 모퉁이에서 비운을 안고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진 셈인데, 이태준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실종 문인이 된 것이다.
4.
이태준의 부활은 최근 남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87년 월북 작가의 해금과 함께 남한 문학사에서 실종상태에 있던 상허의 작품들도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월북 작가들에게 관심이 높았고, 관련 자료도 상당량 소장하고 있었던 깊은샘 출판사의 박현숙 사장은 별러 왔다는 듯이 이태준전집을 출간하였다. 또 해금되기 전부터 몇몇 연구자들은 이태준의 문학사적 가치에 주목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일부는 학위논문으로 학계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1988년 「이태준연구」라는 첫 연구서를 펴낸 민충환교수(부천전문대)는 상허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수많은 연구 보고와 저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다가, 연구 실적이 전무한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연히 인하대 최원식 교수의 소개로 일본의 '조선학보'에 실렸다는 장장길과 삼지수승 등의 연구 논문을 접하고는 경악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월북 문인을 금기시하고 있던 사이에 어느덧 일본에서는 상당히 깊은 연구가 진척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차 자료를 찾아 나섰던 과정에서 겪었던 웃지못할 일화는 월북 문인에 대한 당시의 편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된다. 남한에는 상허의 직계 가족은 없었기에, 상허의 7촌 되는 이동진씨(기업인)를 찾아 나섰다가 겪은 해프닝이다.
노인(상허의 누님)은, 상허 선생의 키가 컸고 얼굴이 잘생겼으나 몸이 약해 당신께서 곰국을 자주 끓여 주셨다는 등의 얘기를 들려 주셨다. 이때 며느님, 즉 이 사장의 부인이 외출에서 돌아오며 옆눈으로 힐끗 나를 보더니 "저 사람은 누구예요?" 하고 시어머니에게 차갑게 물었다. "학교 선생님인데, 뭐 이북 간 이태준에 대해서 연구하신다고 찾아오셨단다." 노인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뭐요? 이북 간 이태준요? 어머님, 지금 정신이 있으세요 없으세요? 아범이 이제 겨우 밥술이나 먹게 되었는데 무슨 해라도 입게 된다면 어쩔려구....." 며느리는 화난 목소리로 늙은 시어머니를 한참동안 힐책하더니 이윽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태준인지 뭔지 우린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 그리 아시고 썩 나가 주세요." 며느리는 문을 가리키며 나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서며 혼잣말처럼, "북에서 내려온 사람인지 누가 안담, 흥!"하는 것이었다.
-민충환, 「이태준 소설의 이해」중에서
그를 남파공작원 쯤으로 오인한 것이다. 이런 일이 80년대 중반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것이니, 분단의 장벽이 가로놓인 현실에서 월북 작가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지난한 여정이었는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감에 따라 사정은 달라졌다. 이태준 전문 연구자들이 학계에 등장할 정도로 그의 문학적 지위를 복권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15명의 소장 학자들이 머리를 모아 「이태준문학연구」(깊은샘)를 출간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 지난 1994년은 상허가 세상에 태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상허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의 모임인 '상허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고향 철원에 문학비를 건립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일만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이동진씨가 회장으로 있는 철원군민회와 상허문학회가 공청회까지 열어가며, 기념비 건립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철원이 접적 지역이고, 대북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마을 유지들의 견해가 대부분이였고, 심지어 '빨갱이 비석을 세우기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조의 의견도 있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던 것이다. 문학비 하나 세워 놓는 일이 이럴지언정, 생가의 복원은 통일 후에나 바라볼 수 있을 것인지.
상허를 아끼는 이는 '이태준을 읽어버리는 것은 대문장의 매몰이요, 이태준을 모르고 한국문학을 안다고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그는 문학사에서 첫 손꼽힐 만큼 탁월한 작가이고 문장가였다. 그러나 분단의 차가운 현실은 그의 이름을 여전히 꽁꽁 묶어두고 있다.
이태준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비록 월북을 하고,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작품을 써서 한때는 남한의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도 했지만, 그의 사상적 거점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였다. 구한말 개화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애국심을 가슴 속에 늘 간직하고 살았으며, 그런 심리에서 해방후 과감히 사회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준의 행적은 한 개인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짧은 시기에 엄청난 역사의 굴곡을 체험해야 했던 우리 민족 전체의 불행인 셈이다. '역사 바로잡기'가 한창인 오늘날까지도 이태준이 분단과 완강한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역사의 대상과 폭이 의외로 광범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통일이 절실한 이유는 이런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를 문학적으로 조명하려는 작업이 지금도 중단되지 않고 있으니, 멀리 이북땅에서 쓸쓸히 노년을 마쳤다는 상허가 지하에서나마 이 사실을 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를 삼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