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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조건
우리의 가장 큰 필요 중 하나는 겸손함을 얻으며 겸손함 안에서 걸어가되 점점 더 깊은 단계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두 번째 필요조건이다. …
세 번째 조건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삶 가운데 다루어지지 않은 죄 때문일 수 있다.
네 번째 조건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포기했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시는가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조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께 말씀하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되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우리의 문제가 아닌 그분께 맞추도록 해야 한다. 나는 눈부신 아름다움과 위엄과 영광 가운데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을 마음속에 그리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얼마 만큼의 시간을 드려야 하는가? 단지 우리 문제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이든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을…. 베드로는 “합시다" 모임의 회장이었다. 그는 항상 그의 생각을 서슴없이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감동받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려 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어떠한 방법이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에는, 우리 영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마음과 생각 가운데 평강이 있게 마련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만일 마음 가운데 이러한 확신과 평강이 없다면 당신이 받은 인상을 행동에 옮기지 말라, 기다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일 수 있다. 또한 당신의 영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을 동반한 강한 증거 외에는 다른 어떤 증거가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당신에게 가르쳐 주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 3:15)는 말씀을 기억하라.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응답을 늦추시는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1. 가장 먼저는 우리가 잘못된 질문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좋은 질문이긴 하나 올바른 때에 물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2. 만일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혹시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먼저 응답하고 싶으신 더 중요한 일이 있지는 않은지 그분께 물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그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단순히 요청하라. …
3. 혹은 하나님께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4. 당신의 삶 가운데 혹시 불순종한 것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밝혀 주시도록 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
5. 또한 우리가 우리 위에 세우신 권위로부터 이탈하여 있고, 그래서 그 질문을 묻는 것이 우리의 권한을 넘어선 것일 수도 있다.
6. 아니면 지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우일 수 있다.…
7.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당신이 지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라. 듣기를 원하는 방법을 요청할 수 있다. …
8.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을 때까지 응답을 늦추실 수 있다. …
9.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하실 때가 있다. …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께 구하며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시편 37편 5절을 행동에 옮기라, 묻기를 그치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라.
“맡기라”는 히브리 말로 “던지다” 라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 문제를 드리고 그분의 때에 당신을 깨워 다시금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씀드리라. 당신이 하나님께 던진 것을 받으실 것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믿으라. J.D. 주석에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신뢰하면 저가 응답하시리라”고 되어 있다. 개역 표준(RSV)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리라” 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제 책임을 지시고 당신에게 가장 유익할 그 시점에 다시금 그 문제를 끄집어내실 것이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인내심을 갖고 부지런히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이 마침내 과부의 신원함을 들어 주는 것은 그 과부가 응답을 받기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갖기를 권고하는 말씀 중에 나는 이사야 21장 12절을 좋아한다.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다시) 돌아올지니라.” 많은 기도들이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빨리 포기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약속에 기초하여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가를 보기 위해서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이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실 것을 알고, 믿고, 선포하는가? 우리는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31:8)는 말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실제로 그의 얼굴을 감추시는데, 이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침묵으로 시험받은 후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낮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사8:17).
*하나님은 이 질문에 한 가지로 분명한 대답을 하고 계신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욥 3).
교만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속이는 영에 묶이는 모든 경우, 그 밑에는 교만이 있다.
사탄의 방법 중에 속이는 영을 보내어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만큼 교묘한 것은 없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없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알 수는 있다. 그때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섞은 제안을 우리에게 해 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속임수의 성질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눅4:9-11). 이 성경 구절은 시편 91편 11절(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을 정확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질서를 떠나 자기 생각으로 추측하며 행동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교묘히 주입시키고 있다.
*교만의 죄는 우리의 가장 큰 적 - 마귀는 아니다 – 이므로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의 어느 곳에 교만이 숨어 있는지 보여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날 것이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오리의 교만은 스스로 깨닫기 가장 어려운 죄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쉽게 그 죄를 발견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밝혀 주실 수 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고 씌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역대하 6장 30절에 나와 있다.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신명기 28장의 처음 열네 구절은 순종할 때 주실 축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불순종에 따른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쉰세 구절이나 할당하고 있다. 왜 불순종과 관련된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4배의 비율로 강조하신 것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경향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종에 따른 상급에 대해서는 쉽게 믿는 반면, 불순종에 따른 형벌에 대해서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 즉 해로운 것을 멀리하고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명기 28장 58절은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함으로 초래되는 결과를 알아야 할 목적이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예레미야 5장 4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심판)을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벌하실 때는 그 징계가 우리의 계속적인 불순종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전제된 것이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발로다. 무조건적인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열쇠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 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모든 행동과 약속의 기초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좌절과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는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촉구하심에 대한 불순종이 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미 밝혀진 진리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중요하고 또 그 보상이 크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은 보다 위대한 일을 해야 하는 순종보다 어쩌면 눈에 잘 띄지 않고 작은 일에 순종하는 것에 더 큰 감동을 받으신다.
예수님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이나 어린아이를 팔에 안고 축복하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중요했다.
우리가 지금 현재의 일에 순종할 때까지는 미래의 약속 - 계시되었든 아니든, 혹은 부분적으로만 되었든 - 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계속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큰 사역의 문을 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의 더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길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눅 16:10).
그 일의 결과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 외에는 그 일이 왜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작은 일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은 종종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음성에는 불순종하고 대신 사람의 말에 순종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울에 대한 간결한 판결이 내려졌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삼상 15:26).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한때 여호와의 집에서 놀랍게 쓰임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에게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그가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암암리에 명령하셨다. 그때 나이 많은 선지자가 거짓말을 하며, 그에게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젊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와서 떡도 먹고 물도 마시라 했다고 말했다. 그 젊은이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나이 많은 선지자에게 순종했다. 그리고 그의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었다(왕상 13:24).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놀랍게 쓰임 받았는가에 감동되지 않으신다. 만일 현재 우리가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다면 말이다 …
* 1.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2.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드려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산을 뒤흔들며 밀납처럼 녹게도 할 수 있고, 땅으로 그 앞에서 들리게도 할 수 있는 그분의 임재 속에서 두려워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매우 슬프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분의 성품과 방법에 대해 계시해 달라고 구하며 그렇게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분을 예배하며 다른 이들을 중보하는 그 시간에 그분은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이는 시험을 통과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행동을 멈추도록 하면서 했던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반응에 더 민감한 것을 의미한다. 잠언 8장 1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도 아들을 살리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마지막 말 속에 들어 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불법이란 말은 권위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즉, 길들여지지 않고 절제되지 않으며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멋있는 사역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주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분의 주인 되심 아래 복종하지 않는다. NIV 성경은 23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악행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리 떨어지라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해 무조건적인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분명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아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순종치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을 수도, 혹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 역시도 할 수 없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통하여 사실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매일 그분께 우리는 이제 죽었으니 우리 대신 이 자리에 서서 우리의 모든 것을 맡아 달라고 아뢰며 나를 통해 그분의 방법대로 그분의 삶을 사시도록 초청하고 신뢰할 때 비로소 어떤 영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다윗 왕이 했던 선포에 이제 우리도 동의할 필요가 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역주: 직역하면 “주를 떠나서는 나의 복이 아무것도 아니나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동의해야 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영(zero)이다. 영은 가운데 구멍이 있는 동그라미고 우리가 바로 그렇다. 원의 바깥 둘레는 각 사람을 나타내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다. 바울이 말한 것에 또한 우리는 동의해야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으니 곧 우리에게 없는 것이 예수님께는 있다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다. 다음 구절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해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역주: 저자가 인용한 The Message에서 발췌한 것을 직역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런즉 내 자아가 더 이상 내 중심이 아닙니다. 이제 당신이 보기에 혹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옳게 보인다는 것이 내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난 더 이상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이제 내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