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녀와 나무꾼>을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1
-집짓기의 놀이와 떠남의 연극성
1. 연극적 상상력, 놀이의 상상력
연극 속의 시간 길이, 실제 삶 속에서의 시간 길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적 리얼리티를 경험한다. 노모가 선녀를 훈련시킨다. 머리에 물동이 위고 물 긷는 작업, 자칫 물동이가 떨어진 것 같다. 지상에서의 삶의 법칙이 쉽지만은 않다. 비틀거리는 선녀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 아슬아슬함을 자아낸다.
선녀가 집 한 바퀴 돌면서 몸놀림이 달라진다. 음악 선율 경쾌해 진다. 물 긷는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못해 달인에 가깝다. 집 한 바퀴 도는 무대 동선 거리는 불과 몇 초의 거리다. 배우의 반응 연기는 며칠 기간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게 연극적 리얼리티이다. 짧은 시간의 이미지 급변, 관객은 폭소를 주체 못한다. 희극성 및 해학성을 향한 익살 이미지 빚어가기, 연극 <선녀와 나무꾼>(박정의 작, 연출, 학전블루 소극장)은 우리시대 극 창작의 화두가 다름 아닌 놀이 기호와 상상력 작업임을 극명하게 상기시킨다.
우리시대만의 놀이극 코드와 우리 고유의 패러디 처방, 동시에 연민과 비장미 유발을 통한 서정 작법, 과연 이런 극 문법은 어떻게 실현되어 있는가.
인간 삶의 구조나 사랑 함수마저 알 길 없는 선녀, 바로 그녀가 사랑에 눈뜨면서 벌이는 해프닝, 작가 박정의는 예측 불허의 익살 이미지와 희극 코드를 통해 코미디극의 묘미를 자연스레 빚어간다.
선녀와 나무꾼의 신방 살림, 노모 공양의 예의범절을 알 길 없는 선녀, 이는 신방 살아가기 구조에서 익살 그림으로 펼쳐진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노모, 선녀의 눈에 노모가 절대적 방해물이다.
비좁은 오막살이 구조물 내부, 신혼 사랑의 맛을 알아가면서 벌이는 해프닝, 신랑인 나무꾼과 선녀, 사랑에 눈멀어 버린 두 형상들, 각자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남녀, 기막힌 나머지 할 말을 잃는 노모, 이들의 사랑 소통 공간에 노모는 방해물일 뿐이다. 간섭, 감시만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모, 재빨리 차단막을 설치하는 자, 차단막을 치우려는 자, 실랑이를 벌이는 두 여자, 차단 막대를 높이려는 선녀, 차단막을 낮추려는 노모, 어린애 장난을 방불케 하는 실랑이 그림은 코미디극의 묘미로 이어지면서 관객의 폭소는 연이어진다. 인간만의 사랑 방정식, 지상에서의 삶의 방정식, 이를 전혀 몰랐던 인물, 엉뚱한 정서와 의외의 반응, 코미디 색조의 상상 놀이, 기발한 익살 이미지 설계 발상이다.
선녀가 옷을 잃고 당혹해하는 그림, 노모에게 이끌려 들어오는 과정, 인간의 옷에 낯설어하고 인간의 집에 적응하지 못해 빚어지는 해프닝, 이는 집짓기 비유 그림과 맞물리면서도 즐거움, 깨닫기의 묘미를 동시에 경험케 한다.
인간 삶의 문법을 익히도록 요구하는 어머니(고재경 분), 거부와 당혹스러움을 주체 못하는 선녀(이상희 분), 옷 입기, 남자인 나무꾼 바라보기, 집안에서 적응가기, 호미를 들고 일하기, 물동이를 위고 물을 긷기, 적응을 강요하는 자, 낯설어하는 자, 그 줄다리기 작업, 그 길항 연극성, 예기치 않는 반응과 선녀다운 엉뚱함, 답답해하며 무너지는 노모, 실소와 해학의 재미가 우러나온다.
인간 삶 살아가기 방식에 낯설어하는 과정, 이는 집짓기 그림에서 구체적인 연극성을 얻어낸다. 집짓기 작업에의 동참, 이는 인간 삶 살아가기에 대한 비유이다. 낯설어함, 어이없음, 뜬금없는 정서와 반응이 이어진다. 익숙해하는 자, 낯설어하는 자, 그 사이, 그 틈새에서 빚어지는 어이없음은 희극성 창출의 동력이 될 줄이야.
각목 세우기, 석가래 올리기, 휘장을 둘러치기, 이런 집짓기 과정에 낯설어하는 선녀, 일시적 디딤돌, 예기치 않는 버팀목 역할을 강요당하는 과정, 거부하려 하여도 너무도 급박한 작업이기에 저항의 틈새마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두 팔을 벌려야 하고, 이를 포기하면 거의 다 완성된 집은 무너질 것 같다. 거부와 와해의 길항 정서 구조, 이는 그 자체로서 재미와 스릴 그리고 희극적 묘미를 자아낸다. 거부 정서를 펼칠 여유가 없는 급박한 상황, 이를 주도하는 노모,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적응해야 하는 선녀, 익살과 희극 놀이의 아기자기함이 펼쳐진다.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오막살이 좁은 공간, 아들 없는 노모의 실존은 무의미하다. 달콤한 신혼 재미, 지나칠 정도의 밀애 그림, 이를 지속시키려는 자들, 이를 말리려는 자, 그 줄다리기 그림이 놀이 그림으로 펼쳐진다. 아들을 빼앗길 것 같은 분위기, 당혹스러움을 주체 못하는 노모(고재경 분), 잠자는 아들의 손발만이라도 만져보고 싶다. 며느리인 선녀가 재빨리 아들을 빼앗아 간다. 아들의 발끝이라도 잡고서 잠자고 싶은 심정, 이 역시 선녀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의 실랑이, 유아적인 반응과 정서 교차, 익살 이미지극의 묘미가 우러나온다.
노모의 복수가 시작되는가. 중천의 뜬 해, 젊은 신혼부부, 방에서 나올 줄 모른다. 휘장을 걷어치우는 자, 아들에게 지게질을 강요하는 노모, 며느리에게 호미질과 물 길러오기를 강요하는 자, 반발 정서로서 호미질 그림, 그 규모와 강도가 점차 커져간다.
시간이 흘러 선녀는 아기를 출산하고 인간이 되어 간다. 새 가족 탄생, 이상향의 세계가 펼쳐지는가.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새로운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
2. 모성애의 위대함과 그 구원성
인간과 자연사물이 공존하고 서로 교감이 가능한 세계, 숲속 동물을 친구로 여겨 목숨 걸고 그들을 구해주는 관계, 이런 동화 색조의 스토리, 그림자 이미지로 펼쳐진다.
검은 의상, 가면 쓴 배우들이 사슴 인형을 조종한다. 노모와 나무꾼의 삶, 위기에 처한 그들의 삶, 사슴이나 자연사물의 정서적 반응, 이게 꼭두 놀이로 펼쳐진다. 그림자 이미지를 향해 배우가 무대에서 반응한다. 그림자 극속의 세계와 무대극 안에서의 세계가 자연스레 하나가 된다.
이런 이상향의 세계에 어느 날 문제가 발생한다. 효과적인 문제 제기 장치, 이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사냥꾼의 폭력, 이는 총소리로, 그리고 그림자 이미지 놀이로 변용된다. 총소리와 더불어 사슴이 꼬꾸라진다. 푸른 색 조명이 붉은 색으로 뒤바뀐다. 섬뜩함이 상기된다.
사슴을 구하려는 나무꾼, 예기치 않는 살상을 한다. 두려움, 죄책감, 피범벅이 된 아들 나무꾼, 위로하려는 노모, 치마 자락으로 아들을 감싼다. 핏물 옷을 빨아 그 흔적을 없애려는 몸부림, 누군가 뒤쫓는 것 같은 느낌, 손놀림 동작은 점차 빨라진다. 함께 몸부림치는 노모의 애타는 심경이 상기된다. 그러다 갑작스레 동작을 멈추는 노모, 망설이는 노모, 고뇌하는 노모, 결심의 표정, 작정의 표정, 아들 살리는 길은 무얼까. 더 깊은 오지로,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험하고 힘든 삶의 여정, ‘가자’ 라는 선율이 울려 퍼진다. 무거운 세간 살이, 집 기둥과 짐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는 자, 앞으로 움켜잡고 비틀거리는 자, 세찬 바람에 쓰러질 듯 허우적거리는 이미지, 정처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자, 탈 마스크를 쓴 코러스 배역들이 지친 행렬 이미지를 빚어가는 데 일조한다. 선율을 통해 고난, 고단함의 강도는 더욱 커져간다. 진한 동정과 연민이 우러나온다. 새로운 안식처는 어디일까. 낯선 산골 조형물, 이에 대한 반응 연기로서 배우들의 몸말 반응 기호가 일품이다.
가족 공동체의 이상향, 자연 공동체로서의 이상향, 더 깊은 산골에서 가능한 것일까. 사슴이 안내하는 곳, 사슴 인형을 코러스 배역이 조종한다. 사슴과 인간의 만남, 그들만의 대화, 일상인이 범접하기 힘든 소통 기호, 선율이 이를 절묘하게 창출해낸다. 말을 건네는 표정, 끄덕거림, 코러스 배우, 꼭두 인형 사이의 움직임이 선율과 정교한 앙상블을 이룬다. 바로 그 곳에서 예기치 않는 축복의 선물, 선녀를 만날 줄이야.
선녀와 가족을 이루고 아이가 탄생하고 그 알콩달콩한 삶은 전쟁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한다. 포성 소리, 폭음 소리, 무대는 잿빛 색조로 바뀐다. 전쟁놀이, 총 쏘기, 대량 살상 작업, 이를 강요하는 군인들, 권총의 위협에 못 견디면서 나무꾼은 총 쏘기 살상에 가담한다.
사령관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음, 그 달콤함, 그 환상의 선율은 즐거움의 절정으로 이어진다. 대단한 상징이다. 기발한 패러디 착상이다. 전쟁, 폭력, 이게 달콤한 연주음으로 포장된 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오늘도 그 폭력을 은폐시킨 연주음에 매료되어 환성을 지른다. 병들어버린 현대 문명,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해법이 상실된 오늘의 문명 구조에 대한 놀라운 패러디 착상이다.
전쟁, 포연, 대량 파괴, 대량 죽음, 이는 환상적인 연주 행위로 변용된다. 나무꾼은 징집되어 가족들 곁을 떠나 있다. 완전히 쓰러져 있는 오두막집, 폐허로 변한 집 안팎 여기 저기, 극도의 가난, 궁핍, 기근이 몰아닥친다.
어린 갓난아이마저 굶어 죽을 것 같다. 선녀, 땅 속 풀뿌리를 캐 씹어 본다. 그걸 어린 아기 입에 넣어주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절망한 선녀, 실망과 낙심을 주체 못하며 내뱉는 절규 언어, 그러나 어찌하랴. 이제 아기의 아비만은 찾아 살 궁리 모색해야 한다. 군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자. 집안 가재도구들, 기둥 오브제를 들쳐 메고 떠나야 하는 상황, 애절함, 애처로움 속에서 ‘가자’라는 선율이 또 들려온다.
군부대 철조망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선녀, 정욕에 굶주린 군인들, 그녀를 가만 놓아 둘리 만무하다. 보초를 서는 군인들, 어느 순간 폭행자로 돌변한다. 스타킹으로 빚어낸 익명 이미지의 군인들, 선녀가 군인들에게 폭행당한다. 기다란 장대, 들려 올려 진 선녀, 또 다른 장대가 기겁해 하는 선녀의 가랑이를 관통한다. 인격과 정서가 송두리째 망가져가는 상황, 이를 목격한 노모, 재빨리 총을 쏘며 방어하려 하지만 또 다른 군인 총에 의해 노모,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모든 장해물을 뛰어 넘는가. 노모의 자식 사랑이 익살스레 펼쳐져 왔다. 극 후반부에선 선녀의 자식 사랑이 애절하게 펼쳐진다.
망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선녀, 맨발과 속옷 차림, 흐트러진 동공, 과연 어찌해야할까. 장총을 목 아래에 놓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선녀, 누군가가 만류하는가, 누굴까. 바로 어린 갓난아기가 아닌가.
아, 저 어린 핏덩이를 어찌해야 할꼬……. 저 아이를 놓아두고 차마 죽을 수 없다. 저 어린 혈육을 위해 이제 부터서라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과연 선녀의 생존 해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선녀의 고민은 관객 모두의 고뇌로 전이, 확산된다.
암전된 무대, 성냥 불빛, 그리고 담뱃불이 부쳐진다. 조명 들어오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선녀가 클로즈업된다. 맨발 차림, 속옷 차림, 그녀 주변 여기저기에 홍등가 푯말 창(娼)이 세워져 있다. 창녀 생활로 연명해야하는 삶, 이게 선녀의 방책이다. 기가 막히다.
몸 파는 영업, 손님이 군인이 그녀에게 다가선다. 손을 내미는 선녀, 동전이 건네지고 텐트 안에서 그 짓이 연출된다. 짐승 소리를 방불케 하는 집단 괴성, 섬뜩하다. 소리를 듣는 어린 아기, 눈물짓는다. 어미가 어린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판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우화이기에 가능하리라.
울먹거리는 아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픽션, 허구의 틈새, 고발성 비유 메시지가 강할 때 리얼리티 약화 틈새는 자연스레 메워진다. 비유 메시지가 살아 있기에 서유의 힘, 연극성의 힘은 오래 지속된다. 이게 이 작품의 미덕이자 성찰극 색조의 품격이다.
몸을 팔고 나온 선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선녀, 그녀 앞에 어린 아기가 손짓한다. 그녀의 표정은 어찌해야 할까. 환한 미소, 두 팔을 크게 벌려 환호하는 선녀, 아, 바로 이게 모성애의 위대함이다. 여성성, 모성애, 이게 구원의 첩경이요 위대함의 원천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