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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소(羅仲昭, 1867. 4. 13. ~ 1928. 7. 4., 양력 8. 18.)는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서 활동 중 군대가 해산되자, 1910년대 50대 장년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신민부 등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이다. 특히, 나중소는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서 독립군 장교 양성에 큰 기여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28년 8월 나중소가 만주 돈화현에서 순국하자 동아일보 1928년 10월 11일자에서는 <나중소씨 영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현적을 만주 길림성 돈화현에 둔 평안도 출신 라중소(羅仲昭)씨는 구한국시대 육군부위(副尉)를 지내다가 정국의 변함을 딸아, 만주로 이거하야 북만 일대에서 00단의 군정서 장교로 있든 중, 군대에 쫓기여 돈화현 산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지난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는데, 슬하에는 자녀도 없이 단신으로 망명 중, 별세한 가련한 형편이라더라.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자축
나중소는 일제의 강점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이국 땅 만주에서 순국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나중소는 노 혁명가로서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직접 전투에 참여한 인물로 주목된다.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골짜기와 완루구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고동하 등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일컫는다. 특히, 10월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는 약 1,300명의 병력으로 연합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6일 간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2,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독립군은 130여 명이 전사하고, 2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와 같은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만주지방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는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 국내의 독립운동도 지켜준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족에게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해 주었다.
뒤늦은 기록이기는 하나, 동아일보 1958년 4월 22일에 연재된 <대지의 성좌>(박계주 작성)에서 백발이 성성한 가운데 동지들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후방에 있기로 한 백발이 성성한 참모장 나중소장군이었다. “아 이 웬일이십니까?, 여긴 위험합니다. 후방에 가 계십시오.” 김좌진장군은 당황한 얼굴로 권면했다. “아닐세. 나는 자네들 곁에 있을라네. 자네들 곁에서 자네들 싸우는 광경을 보려하네. 저 원수 놈들이 하나하나 쓸어져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네” 나중소 참모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시선을 적군 편으로 보냈다.
나중소는 만주에 망명한 이후 김좌진계열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가로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대한군정서, 신민부 등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지였다. 또한 김좌진장군과 함께 대한군정서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며, 만주지역에서의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회의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한편 나중소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28일자 <마적 경계로 돈화현 동포들이 보위단 조직>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간도 돈화현 지방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근일 간도일대에 출몰하는 마적으로 생명재산에 위협을 받아 그곳 중국관헌의 양해를 얻어 현 내에 거주하고 있는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동포청년 약 50명은 보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나중소를 선거한 후 현재 각 주소지에 지단을 설치하여 7명 내지 10명의 무장대를 배치하여 주야로 엄중히 경계하는 중이라더라(간도)
나중소가 돈화현 지역의 마적 퇴치를 위하여 주민들의 선거로 보위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소는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현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서 아버지는 나윤철(羅允鐵), 어머니는 이(李) 씨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나주이며, 본명은 영훈(泳薰), 호는 포석(抛石), 또는 일운(一雲)이다. ‘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부인은 밀양 손씨(1874년생)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일상(호적명 寶吉, 1906년), 인상(仁相, 1915년생)이며, 딸은 장녀 복희(福姬, 1897생), 둘째 아지(1908년생), 셋째 운상(云相, 1910년생) 등이다. 부인 손씨는 나중소가 만주로 망명할 때, 함께 가지 않고 서울 정릉동에 살았다고 한다. 나중소는 망명 당시 아들 2명과 딸 2명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큰 딸은 이미 시집을 간 이후였다. 큰 아들 일상은 25세 때 만주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당하였다. 둘째 인상은 만주에서 9세까지 거주하였다. 만주 거주 시에 경기도 파주출신이며,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박찬익(朴贊翊)의 아들 박영준(朴英俊)과 함께 기거 하였다고 전해진다. 딸 가운데에는 둘째 딸 아지가 아버지 나중소와 오래 동거하였다고 한다.
나중소는 16세 때인 1882년 무과에 급제하고,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한 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898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함북시찰관과 진위대 부위를 역임한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1922년 2월자 일본 측 기록 <군정서 이홍래(李鴻來) 일파의 농사경영에 관한 건>을 통해 나중소가 대한제국 장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2월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으로부터 나중소(노백린이 參領일 때, 나중소는 正尉로서 부하였다)에게 송부한,
그러나 나중소가 3품에 해당되는 정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보다 한 단계 낮은 부위로서 일반적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나중소는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나중소가 만주로 망명한 것은 집안의 땅이 철도부지로 모두 빼앗겨 더 이상 고향에서 살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나중소의 손녀 나영자는 증언하고 있다.1)
나중소가 만주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대한정의단에 대한 기록이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3·1운동이 일어 난지 24일 만인 1919년 3월 25일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초기에는 아직 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강령을 만들어 발포(發佈)하였으며, 단원들을 모집하는 한편, 순 한글로 된 『일민보(一民報)』·『신국보(新國報)』 등의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일을 단장으로 만주 각지에 5개분단과 70여 개 지단을 설치하였으며, 7월에는 국내의 동포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대한정의단 산하 안도현 지부의 경우,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김연일(金延一), 김우종(金禹鍾), 이태극(李泰極) 등을 중심으로 약 300~400명의 결사대원을 확보하여 50명씩 교대로 사하(沙河) 국민학교에서 목총을 가지고 교련을 시작하였다. 이때 교관으로 안석진(安錫鎭) 등이 활동하였으나 교관인원의 부족으로 독립군 양성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한정의단에서는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서 만주로 망명한 나중소를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나중소는 이때부터 안도현에서 대한정의단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진력하였다.
나중소는 대한정의단이 대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자 대한군정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나중소는 대한군정서에서 김좌진을 만나 그와 함께 만주지역에서의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대한군정서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에 만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단체이다. 1920년 7~8월 대한군정서의 조직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재부에는 비서장 김성, 비서 윤창현, 사령관 김좌진, 사령관부 부관 박영희, 참모장 이장녕, 참모부장 나중소, 참모 정인철, 서무부장 임도준, 재무부장 계화, 인사국장 정신, 경리국장 최익항, 군법국장 김사직, 이사 남진호, 준사국장 김경준, 탁지국장 윤정현, 모연국장 최수길, 징모과장 김국현·이시권, 기계국장 양현, 기계보관과장 서청, 경신국장 책오, 제1분국장 이민주, 제10분국장 최주봉, 제21분국장 강훈, 제33분국장 이근식, 통신과장 채신석, 조사정탐대장 허중권, 지방시찰장 김석구, 경비대장 허활·이교성, 군의정 주견룡이었다.
대한군정서 사령부일지 1920년 7월 8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나중소의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날 밤부터 사령관은 趙相衍군을 데리고 수도실에서 入定하다.
營內의 일체 要務는 참모副長(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겸직) 나중소 각하에 위임하였다.
나중소는 김좌진을 대신하여 사령부를 총괄하는 입장에 있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1920년 5월 3일 왕청현 봉의동에서 신민단(新民團)·도독부(都督府)·광복단(光復團)·국민회(國民會)·의군부(義軍府)·군정서(軍政署) 북간도지역 6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북간도 각 기관의 통일과 사업 발전을 논의할 때 김좌진과 함께 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였다. 당시 신민단 대표로는 김준근(金準根), 이흥수(李興秀), 군무도독부 최진동, 이춘범(李春範), 광복단 대표 김성륜(金聖倫), 홍두극(洪斗極), 국민회 대표 김동흡(金東洽), 김규찬(金奎燦), 의군단 대표 김종헌(金鍾憲), 박재눌(朴載訥) 등인 것으로 보아 당시 나중소의 비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나중소는 동년 5월 5일자로 신민단, 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부 등이 결속하여 국민회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할 때에도 김좌진과 함께 대한군정서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과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 하에 1919년 가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1920년 2월 초에 북간도의 왕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의 깊은 밀림의 요충지에 병영을 짓고 연병장을 닦아 근거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근거지의 동서남북의 산과 산기슭에 경계선과 경위선을 쳐서 참호를 파고 24시간 경비케 하였다. 근거지에의 적과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방지하고 근거지를 엄중히 지키게 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약 1천 1백 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근거지 안의 병영에 현역으로 입영시켜 철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의 오전 훈련에는 제식(制式)훈련을 철저히 실시했고 오후 2시부터 밤중까지 계속되는 오후 훈련은 주로 사격술과 총검술을 비롯한 총기사용 훈련과 학과 훈련을 철저히 실시해서 정예군대를 만들었다.
나중소는 김좌진 등과 함께 근거지를 설치하고 장정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편성할 때 근거지 안에 1920년 2월 초에 먼저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다. 나중소, 김좌진 등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華麟)·오상세(吳祥世)·이운강(李雲岡)·김훈(金勳) 등을 비롯한 다수의 훈련장교들과 각종의 교재를 공급받았다. 나중소, 김좌진 등은 모집한 장정들 중에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초·중등 교육을 받은 신체 건강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우수한 청년 300명을 선발하여 입교시켜서 사관연성소를 열어 사관교육을 시작하였다. 교수부장은 나중소가, 그리고 사관연성소 소장은 사령관 김좌진이 겸임하였다.
나중소는 교수부장으로서 생도들에게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한 역사교육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군사교육도 실시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두 개의 연병장에서 사관생도들에게 철저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술과는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실탄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사관연성소에서 기초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일제 측은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둔 중국군 혼성여단 보병제일단장(混成旅團步兵第一團長) 맹부덕(孟富德)에게 대한군정서군을 ‘토벌’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맹부덕은 9월 6일 200명의 중국군을 서대파에 파견하였으나, 나중소는 사령관 김좌진 등과 함께 중국군을 맞아 큰 소 2마리와 돼지 1마리를 잡아 대접하면서 ‘협상’한 결과 원만한 교섭이 이루어져 중국군은 9월 7일에 되돌아갔다. 대한군정서와 중국군 사이 ‘협상’ 내용은 1개월을 기한으로 대한군정서 독립군 전부를 다른 삼림지역으로 은둔시키거나 국내로 진공시키고, 중국군도 1개월 기한을 조건으로 철군하여 대한군정서 독립군을 추격하지 않기로 약정한 것이었다.
1920년 9월 9일에 왕청현 십리평의 삼림에서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298명의 사관이 배출하였다. 그 중 80명은 소위로서 임명·배치되었고, 나머지 200여 명을 중심으로 연성대[敎成隊]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나중소는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부관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 이범석, 소대장 이민화(李敏華)·김훈·이탁(李鐸)·남익(南益) 등이었다.
연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대한군정서 독립군 승전의 주역이 되었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백운평 전투와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면에서 섬멸한 것도 연성대였다. 독립군을 창설하면서 처음부터 무관학교를 설립한 것도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가지지 못했던 대한군정서의 특징이었지만 연성대라는 최정예부대가 대한군정서의 막강한 전투력의 골간이었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대첩 후 북만주로 이동하여 1920년 12월경 밀산에 도착했다가 치타정부의 군사원조 약속을 받고 1921년 1월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으로 갔다.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체들은 1921년 3월 하순 6단(團) 회의의 결과 대한총군부라는 통합단체를 조직하여 군사 통일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년 4월 12일 이만에서 다시 36개 대소 독립군 단체의 수뇌들이 모여 독립군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총군부의 이름을 대한독립단이라고 바꾸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대한독립단은 단본부에 외교부를 설치하여, 중국 영안현(寧安縣)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다시 임원을 선임하였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고문 백순(白純),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명록(崔明祿), 사령관 겸 참모부장은 김좌진이었다. 이때 나중소는 이장녕과 함께 참모직책을 맡았다.
총재인 서일은 나중소를 서간도에 파견하며, 금후 독립기세를 왕성케 하려면 먼저 민심의 부활을 필요로 하므로,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일, 러시아공산당의 원조, 중국관헌의 동정, 영안현에 우리 사관학교 설립 등 우리에게 유리한 것들을 선전하라고 훈시하였다. 이에 나중소는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들을 다수 규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현천묵은 북간도와 파견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웅대한 무장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시작했으나 1921년 6월 흑하사변(자유시참변)이 일어나 좌절당하게 되었다. 나중소는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자유시를 탈출하여 북만주를 돌아왔고 나머지 대부분의 병사들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혁명조정의회에 의하여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산하 한족연단(韓族旅團)으로 개편되었다.
1921년 10월 3일 밀산에서 나중소는 김좌진과 함께 국내진공을 위하여 전 군정서 사관학교 졸업생 전부를 안도현 백하(白河)지방에 소집할 것과 모연대 30명을 연길, 화룡, 왕청 지방에 파견하여 소맥분(小麥粉)을 징발하고, 이를 안도현 백하 지방으로 보낼 것을 협의하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아울러 연길현에 살고 있는 박창손(朴昌孫), 박봉춘(朴逢春), 김성룡(金成龍), 이춘근(李春根) 등에게 생도들을 모집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나중소는 1922년 1월 20일 경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6월경에는 김좌진, 이장녕 등과 함께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에서 50여리 떨어진 한인마을에서 독립군 모집 및 군자금 모집 등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동년 7월에는 돈화현 동구(東溝) 거주 마진(馬晉), 동현성(同縣城) 거주 방진성(方振成), 이광태(李廣泰) 외 10여명 등과 함께 마적을 이용하여 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동년 8월 4일에는 북만주에서 9개 독립군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자, 서무부장 겸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에 <고려혁군 신진용, 로국 후원 하에 세력을 확정>이라는 기사에 나중소가 고려혁명군에서 서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삼위에 있는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에서는 아라사(러시아) 적군 간부의 후원 하에 무기와 자금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는 중인데, 최근에 간부회의를 열고, 아래와 같이 조직을 편성하였다. 연해주 총지부에서는 참모, 외교, 서무, 사법 등 도합 9부를 두고, 그 관할아래 4군대에 사령부를 설치한 후, 총사령이 이를 통할한다 하며, 한 사령부에 6개 소대를 부속케 하였는데, 1개 소대는 40명씩 이라 하며, 간부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더라. 총사령관 김응천, 참모부장 이중집, 외교부장 양재노, 서무부장 나중소, 사법부장 이범윤
1925년 1월 목릉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한 결과, 동년 3월 10일에 영안현 영안성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때 참가한 각 단체와 지역 대표는 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북만지역의 민선대표(民選代表) 및 국내 단체의 대표 등으로 알려져 있다.
신민부의 조직은 3권 분립 제도로서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 검사원(사법기관), 참의원(입법기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검사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의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실제 운영할 수 없었다. 또한 참의원도 독립전선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집행위원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조직 당시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보면,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민사부위원장 최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빈(許斌),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黙), 연락부위원장 정신(鄭信),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돈(金燉), 총사령관 김좌진, 보안사령관 박두희, 제1대대장 백종열(白鍾烈), 제2대대장 오상세(吳祥世), 제3대대장 문우천, 제4대대장 주혁(朱赫), 제5대대장 장종철(張宗哲), 별동대장 문우천(文宇天) 등이다. 나중소는 참모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신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감사원 위원으로 활동하던 나중소는 1925년 9월 하순 정의부의 지청천(池靑天) 장군이 신민부 본부를 찾아와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 모연대를 조직하자 이에 서남로(西南路) 사령관 지청천 휘하에서, 서남로향관(西南路餉官)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관할구역은 간도의 훈춘, 돈화, 안도, 장백, 그리고 국내는 함경남북도 지방 등이었다.
또한 나중소는 돈화현에 1926년 3월 신민부 돈화판사부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돈화현은 안도현과 영안현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왕래하는 지역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단체 역시 특별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1926년 3월 이후 신민부 지방조직 위원들이 이 지역에 와 신민부 지방 조직을 만들려고 하자, 나중소는 이들과 협의하여 돈화현 전 지역을 신민부 구역으로 편입하고, 돈화현 이도양자(二道梁子)에 신민부 돈화변사부(敦化辨事部)를 설치하였다. 아울러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되자 이에 대한 추모회를 개최하는 등 민족의식 고양에 기여하였다. 당시 나중소와 함께 신민부 돈화 변사부의 주요 간부로 활동한 인물로는 이승래(李承來), 이승림(李承林), 이백남(李白男), 마진(馬晉), 김계산(金桂山)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나중소는 1928년 8월 18일 돈화현 산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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