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세종시 영평사(永平寺)와
세종호수(世宗湖水)를 다녀와서!
연기군(Yeongi-gun, 燕岐郡)
충청남도 동쪽 끝에 있었던 군으로 2010년 12월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2012년 6월 폐지되고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로 출범하였다.
동쪽은 충청북도 청원군, 서쪽은 공주시, 남동쪽은 대전광역시, 북쪽은
천안시에 접하였다. 경부선의 통과 노선이었으며, 조치원역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청주를 거쳐 충주·제천을 지나 중앙선 및 함백선과 연결되는
충북선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이 화강암으로 구성, 조치원(鳥致院) 북쪽으로 차령산맥이
지나가 구릉의 기복이 심하기는 하지만 높지는 않다. 하천은 금남면
(錦南面)에서 발원하는 삼성천(三城川)이 북류하여 금강(錦江)으로
유입하고, 전의면(全義面)에서 발원하는 조천(鳥川)과 조치원 부근을
지나는 미호천(美湖川)이 남류하여 금강에 유입하여 유역 일대에 비옥한
평야를 이루면서 충청북도의 음성(陰城)까지 연결된다.
특히 미호천 유역의 평야는 연기군의 주요 농경지이고, 자연지리적으로
목장, 과수원, 농작물 재배에 적합하다. 군내 임야지에서는 밤·버섯·호두
·대추·도토리·은행 등 각종 임산물이 생산되었다.
상고시대에는 삼천단부지(三千團部地)에 속하였으며 백제 초부터 백제의
영토가 되어 구수왕(仇首王) 때 적현역(赤峴域)이 되었다. 그 후 두잉지현
(豆仍只縣)으로 바뀌었다가 백제 말에는 주류역(周留域)이 되었으며 신라
시대부터 연기라 불렀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는 청주(淸州)에
소속되었고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나중에는
목천(木川) 감무가 겸임하였다.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에 전의와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하였고 1416년에 다시 분리하여 현감을 두었다. 1680년(숙종 6) 문의
(文義)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된
뒤 1909년 전의면 일원과 공주군 일부(양아리 명탄)를 편입, 동·서·남·
북·전의·전동·금남의 7개 면을 두었다.
1911년에는 군청을 남면 연기리에서 조치원으로 이전하였으며, 1917년
북면 조치원리와 죽내리(竹內里)로 조치원면을 신설하고 나머지는 서면
(西面)에 이속시켜 북면(北面)을 폐지하였다. 1931년 조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40년에 서면의 반암(磻岩), 신동(薪洞:지금의 新安), 내창
(內倉:지금의 端令), 동리(東里:지금의 鳳山)의 4개리를 조치원에 편입
하고 1973년에 공주군 장기면(長岐面) 나성리(羅城里)를 남면(南面)에,
반포면(反浦面)의 도암(道岩)·성덕(聖德)·영곡(靈谷)의 3개 리를 금남면
에 편입시켰다. 1995년 전의면 소정출장소를 소정면으로 승격하였다.
2003년 조치원읍, 금남면·남면·동면·서면·전동면·전의면·소정면의 1읍 7면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005년 5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2010년 12월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2012
년 6월 충청남도 연기군이 폐지되고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다.
출처:(두산백과)





























































1948년의 대전역 모습
1959년 어느날 밤 12시40분경. 산책 나온 듯한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내 플랫폼 가스등 아래 머문다.
청춘남녀가 두손을 꼭잡고 눈물 글썽한 시선으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북쪽에선 남자를 떠나보낼 목포행 0시50분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가 시를 쓴다.
대전블루스 가사였다.
사내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 직원이었던
최치수씨로 지방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최씨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씨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대전블루스를 완성했다.
가수는 블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로 정해 녹음에 착수했다.
출반 3일만에 서울 지방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대전블루스는 야간작업까지 강행, 창사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작사. 작곡가, 가수에게 특별보너스와 월급인상 혜택이 돌아갔다.

1950년 9월 전쟁으로 폐허가된 대전역
십수년이 흐른 뒤 이노래는
조용필의 리바이벌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순배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척 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병을 입에 대고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피서철이면 대전역 광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한잔의 술과 함께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즐겨부르기도 한다.
술이 뒤따라야만 제목청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래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잘담고 있다.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 처럼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다. 80년대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와
임철우의 중편소설 사평역 은 해방과 6.25, 조국 근대화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 적으로 그려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의 이 시는 당시 대전발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묘사한 듯하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0시50분열차는 지금 없다.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05분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씨와 김부해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 나온다.
출처 : 전남대학교

大田부르스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애 노래
1.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 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2.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렛트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 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서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보슬비에 젖어우는 목포행 완행열차
2019-03-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