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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 11. 14. 16:54
태학(太學)
스키타이(Scythia) 사카(Saka)족의 언어와 산스크리트어
2016.09.29 10:51 광화세계
스키타이(Scythia) 사카(Saka)족의 언어와 산스크리트어
'스키타이(Scythia)'는 그리이스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고,
'사카(Saka)'는 페르시아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영문판)에 따르면, 스키타이(Scythia) 사카(Saka) 족의 강역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았다고 한다.
[그림 1] 스키타이와 파르티아의 강역
사진>508-1
또 [그림 1]에서 보면, 스키타이 강역 바로 오른편에 월지(Yuezhi)라고 표기되어 있다.
월지(Yuezhi, 月氏, 月支) 족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이전에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Xinjiang)
지역과 감숙성(Gansu)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월지(Yuezhi) 족은 서기전 2세기 중에 흉노에게 패한 후, 뿔뿔이 나뉘어져 여러 방향으로
이주했는데, 대월씨(大月氏, The Greater Yuezhi, Da Yuezhi)는 타림 분지를 건너 서쪽으로
현재의 중화인민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지대(lli Valley)로 이주하여 이들이 스키타이족(사카족)에
포함되어졌다고 한다.
또 소월씨(小月氏, The Lesser Yuezhi, Little Yuezhi, Xiao Yuezhi)는 남쪽 티벳고원(青藏
高原)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월지(Yuezhi, 月氏, 月支) 족이 살았다는 리 계곡(lli Valley)의 위
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현재의 중화인민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지대 리 계곡(lli Valley)
사진>508-2
또 『위키백과(Wikipedia)』영문판에 따르면, 오손(Wusun, 烏孫)은 본래 현재의 중화인민국
감숙성 둔황(Dunhuang, 敦煌)과 기련산(祁连山, Qilian Mountains) 사이에 있었으며,
월씨(Yuezhi, 月氏, 月支)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즉, 돈황(敦煌)과 기련산의 위치는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3] 돈황, 호탄, 툼슈크, 페샤와르 등의 위치
사진>508-3
그런데 대월씨(大月氏, The Greater Yuezhi, Da Yuezhi)는 리 계곡(lli Valley)으로부터 오손
(Wusun, 烏孫)에 밀려 다시 남쪽 소그디아(Sogdia)로 이주했다가, 다시 박트리아(Bactria)로
밀려가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월씨(Yuezhi, 月氏, 月支) 족에 5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쿠산족(Kushanas,
貴霜)이 중심이 되어 주변 종족들을 끌어모아 현재의 인도(India) 서북부 지역에 이를 때까지
남쪽으로 내려가서 쿠샨 제국(Kushan Empire, 105~250년)를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지명을 따서 이들을 '인도-스키타이안(Indo-Scythian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쿠샨 제국(Kushan Empire)이 3세기에 가장 강력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강역이 [그림 4]에
서 보는 바와 같이 타림분지에 있는 투르판(Turfan)으로부터 현재의 인도 동쪽 파탈리푸르타
(Patalipurta, 현재의 비하르주 파드나)에 이르렀다고 한다.
쿠샨 제국(Kushan Empire)은 실크로드(Silkroad)의 중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음으로써
동서교역의 중간역할을 하였으며, 불교를 동쪽으로 전래하는 중간자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림 4] 쿠샨 제국(Kushan Empire)의 최대 강역(3세기)
사진>508-4
그런데 월지(Yuezhi, 月氏, 月支)와 오손(Wusun, 烏孫)이 본래 위치가 올바르게 추정된 것인가?
또 월지와 오손의 본래 위치가 올바르게 추정된 것이라면, 흉노의 위치는 올바른 것인가?
여기서 월지와 오손의 위치에 관하여 의문을 갖게하는 이유는 중화인민국이 주장하는 역사는 명대에
왜곡시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즉, 흉노의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태원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지만, 중화인민국이 주장하는 흉노
의 강역은 태원시 북방지역으로 변이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월지, 오손, 흉노 등의 위치에 관해서는 별도로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하고, 스키타이(Scythia)
사카(Saka) 족의 언어에 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한편, 『위키백과(Wikipedia)』영문판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동부 사카(Saka) 족의 언어는 동부
이란어로서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 타림분지에 있었던 고탄(Khotan), 카슈가르(Kashgar),
툼슈크(Tumshuq) 등 고대 불교국가의 언어로 밝혀졌다고 한다.
고탄(Khotanese) 사투리와 툼슈크(Tumshuqese) 사투리 등 두 가지의 사투리가 있었다고 하
는데, 고탄(Khotan, 호탄)과 툼슈크(Tumshuq)의 위치는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5] 고탄(Khotan, 호탄)과 툼슈크(Tumshuq)의 위치
사진>508-5
한 이론에 따르면, 사카(Saka) 족의 두 사투리는 스키타이(사카) 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데, 중화
인민국 측의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서기전 200년경에 사카(Saka) 족 중에서 서로 다른 사투리를
쓰는 두 부족이 타림 분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미국의 Harold Walter Bailey(16 December 1899~11 January 1996)가 돈황(Dunhuan)
에서 발견된 약 2,300점의 문서를 해독한 결과, 고탄(Khotanese) 사투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툼슈크(Tumshuqese) 사투리는 15점에 불과했다고 한다.
4~7세기에 사카(Saka) 족의 말을 나무 또는 종이에 쓴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Brahmi script)라
고하는데, 브라흐미 문자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후 초기 수세기 동안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
티스탄 지역에서 카로슈티 문자(Kharosthi script)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브라흐미 문자(Brahmi script)가 쓰여진 돈황문서의 사례는 [그림 6]과 같으며, 브라흐미 문자
(Brahmi script)가 쓰여진 대표적인 유물은 현재의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칙령을
새겨 전국에 세운 '아쇼카 석주'인데,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6] 돈황문서 중 고탄(Khotanese) 사투리가 쓰인 문서(12지지)
사진>508-6
[그림 7] 아쇼카 석주(칙령)
사진>508-7
그런데 고탄(Khotanese) 사투리를 썼던 고탄 왕국(Kingdom of Khotan)은 타클라마칸 사막
(타림 분지) 남쪽 실크로드에 있었던 고대 사카(Saka)족 불교왕국이었다고 한다.
왕국의 도읍지는 본래 현재의 호탄( Hotan, 和田)의 서쪽에 있었으며, 한(漢) 대부터 당(唐) 대
까지 우전(于闐, Yutian)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무슬림 국가로 개종한 카라한 왕조(Kara-khanid khanate, 840~1212sus)에 의하여 1006년
에 멸망할 때까지 거의 1,0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고탄 왕국(Kingdom of Khotan)의 사람들은 고탄(Khotanese) 사투리와 간다리어(Gandhari
Prakrit)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간다리어(Gandhari)는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후 4세기까지 간다라 지방(현재의 파키
스탄 북부 페샤와르)에서 쓰던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쓴 언어인데, 미국의 Harold
Walter Bailey(16 December 1899~11 January 1996)가 1946년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
다고 한다.
간다리어(Gandhari)는 베딕 산스크리트(Vedic Sanskrit)에서 나왔거나 베딕 산스크리트(Vedic
Sanskrit)와 매우 밀접한 언어라고 한다.
[그림 8] 카로슈티(Kharosthi) 문자의 발음
사진>508-8
비록 내 글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한번 유심히 읽어 보시기바랍니다.
'스키타이(Scythia)'는 그리이스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고,
'사카(Saka)'는 페르시아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샤카는 색족이라고 했습니다.
색족의 활동이 너무 광범위합니다.
심지어 백제는 색족이라는 역사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왕족은 사카족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중 지장이 지나국을 유학할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
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
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사카족'이란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 아
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 스키
타이 강역 바로 오른편에 월지(Yuezhi) 월씨(Yuezhi, 月氏, 月支) 족에 5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쿠산족(Kushanas, 貴霜)이 중심이 되어 주변 종족들을 끌어모아 현재의 인도(India)
서북부 지역에 이를 때까지 남쪽으로 내려가서 쿠샨 제국(Kushan Empire, 105~250년)를 세웠
다고 한다.
여기서 지명을 따서 이들을 '인도-스키타이안(Indo-Scythian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508-9
쿠샨 제국(Kushan Empire)의 최대 강역(3세기)
『위키백과(Wikipedia)』영문판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동부 사카(Saka) 족의 언어는 동부 이란어
로서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 타림분지에 있었던 고탄(Khotan), 카슈가르(Kashgar), 툼슈크
(Tumshuq) 등 고대 불교국가의 언어로 밝혀졌다고 한다.
고탄(Khotan, 호탄)과 툼슈크(Tumshuq)의 위치
사진>508-10
한 이론에 따르면, 사카(Saka) 족의 두 사투리는 스키타이(사카) 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데, 중화
인민국 측의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서기전 200년경에 사카(Saka) 족 중에서 서로 다른 사투리
를 쓰는 두 부족이 타림 분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미국의 Harold Walter Bailey(16 December 1899~11 January 1996)가 돈황(Dunhuan)
에서 발견된 약 2,300점의 문서를 해독한 결과, 고탄(Khotanese) 사투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툼슈크(Tumshuqese) 사투리는 15점에 불과했다고 한다.
4~7세기에 사카(Saka) 족의 말을 나무 또는 종이에 쓴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Brahmi script)
라고 하는데, 브라흐미 문자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후 초기 수세기 동안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티스탄 지역에서 카로슈티 문자(Kharosthi script)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동부 사카(Saka) 족의 언어는 동부 이란어로서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 타림분지에 있었던
고탄(Khotan), 카슈가르(Kashgar), 툼슈크(Tumshuq) 등 고대 불교국가의 언어로 밝혀졌다
고 한다.
네!
이대목을 자세히 말하자면
신장위구르자치구 타림분지에 있었던 고탄(Khotan), 카슈가르(Kashgar), 툼슈크(Tumshuq)
이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말합니다.
사막이라고 해서 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것은 아니고요.
사막중에서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지하는 바다가 있습니다.
고대에 빙하가 녹아서 모두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카레즈 라고 하는 오아시스를 개발하여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사막의 낙원인 곳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어요
이전원이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환민족의 고향은 타림분지 이전원입니다.
고탄(Khotan)이라고 소개한 곳이 이전원입니다.
이전원이란 중국말로 이덴웬
에덴 이라는 ....
사진>508-11
고탄(Khotan, 호탄)과 툼슈크(Tumshuq)의 위치.
지금 말하는 것은 석가 탄생 이후이지만
박민우가 말하는 1만 2천년전에도 이곳을 터전으로 우리 환민족이 살앗다는 것입니다.
1만 2천년전에는 더욱 살기가 좋았습니다.
물론 초기에 환인씨 광명족이 이곳으로 피난 왔을 때는 홍수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지만 약 1천년이 지난 후에는 그야말로 타클라마칸 사막이 물이 가득한 호수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낙원으로 바뀌어쟈 있엇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고인 물은 빙하가 잠시 녹아서 생긴 호수(※염수?)이기 대문에 언젠가는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빙하가 녹은 물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소
지금도 타클라마칸(태극마칸)의 지하는 소금바다와 탄산가스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환인시대가 지속되던 3301년간은 이곳은 사막이자 낙원이엇습니다.
오늘날 환민족의 정체성은 이곳에서 살았던 고대 황백종에 의해서 모두 갖추어지게 되엇습니다.
오늘날 우리말은 무제국에서 이루어져 1만 2천년전에 파미르에 와서 완성되고 이전원에서 다시 완성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보여 집니다.
이게 우리말의 북방계 산스크리트가 됩니다.
남방계 산스크리트는 다시 드라비다인이 인도 남부로 이주했고 인도 남부 스리랑카 일대에서 타밀어로 변화 했습니다.
이곳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제국 언어를 쓰고 있엇던 지역이므로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날 까지 전해 집니다.
남방계 산스크리트는 1만 2천년전에 대 홍수가 나면서 청구대륙으로 피신한 무리들이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방계 산스크리트 중에 하나라 때 삼묘족이라고 할 수 잇는 구려 자오지 천황의 후손 구려가 중국 동부에서
청구대륙으로 해서 한반도로 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말 산스크리트는 북방언어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잇습니다.
8도 지역마다 사투리가 생긴 것도 지역의 지형과 풍토 그리고 지기와 관련이 잇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는 거의 타밀어 쪽입니다.
1만 2천년이아니라 꾸준히 가야 신라 때까지 배를 타고
인도 남부 동남아 일대에서 왕족 귀족들이 경상도 경주 포항 고령 가야 일대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토 신라에서 기마민족이 와서 보니 이게 남방 족속들이라 일단 추장부터 제압하고 꼬붕으로 만들어서 왕으로 앉히고 충성 다짐을 받고 본토 신라(돈황, 난주, 금성)으로 돌아가기를 수백년간 관리를 햇습니다.
(추정) 그런데 요상하게도 말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본토에 은(殷,동이족)나라도 우리말을 썼습니다.
은나라는 몽골 서부 소하서 지역 에서 섬서성으로 내려와 은나라를 세웠습니다.
후일 은나라는 망해서 뿔불히 흩어지게 되는데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서쪽으로 가서 중천축국을 세우게 됩니다.
중천축국은 산스크리트의 본고장인데 이때부터 산스크리트는 경전으로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중원에서 전국시대가 열렷을 때 중천축국은 부흥하게 되고 이시기가 기원전 3세기 경이니 스키타이 흉노 돌궐 전성기인데 모두 같은 핏줄 한민족입니다. 호남 지방은 청구대륙으로 들어온 일단의 남방 산스크리트민족이 중국의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약 1만년전부터 4500년전 까자 라고 볼 수 잇습니다.
그 때는 서해바다가 없엇고 육지였으며 대륙과 한반도는 거대한 강물이 실핏줄처럼 뻗어있었을 시기 입니다.
단국 천황 개국 이후 서해가 생기면서 배로 이동해온 민족이 호남에 도착해서 살게 되엇습니다.
호남은 1만 2천년전 자기 조상들이 피난 온 이후 부터 젖줄 역할을 했던 곳이므로 고향인 것입니다.
이곳에 매장 문화는 북방 스키타이 식이 아닌 남방 고인돌 식이고 옹관묘 형식입니다.
이게 전부 남방식 매장문화입니다. 토기를 잘 만들어서 죽은자를 큰 토기에 넣어서 매장하였다는 물론 토기 생산은 남방뿐 아니라 북방 홍산 에서도 잘 만들엇다고 보는 데 그 기원은 남방문화입니다.
즉 유목민은 고기를 먹고 젖을 먹었으므로 토기 발달이 늦엇습니다.
토기 빗살무늬 토기도 원래는 농사 문화가 발달했던 남방에서 발명한 것입니다.
빗살무늬에 대환 환상도 깨버립시다.
빗살무늬에 뭐 광명을 새겼다느니 신비감을 부여하는데
최근에 밝혀진 분석에 의하면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여 구우면 깨지니까 안깨지게 하려고 빗살 무늬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하서 문화까지 갈대로 간 홍산문화는 쇠퇴기를 맞으면서 몽골 서부에서 남방으로 내려가
은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은나라에서 토기 문화가 급진전을 합니다.
드디어 무문토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무문토기란 무늬를 넣지 않고 구운 것인데 굉장히 만들기 힘들다고 해요
왜냐 무늬가 없으면 깨지기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빗살무늬 토기는 기술력이 부족했던 결과물입니다.
중국 동남부 고 백제 지역에서 나오는 토기는 무문 토기입니다.
옹관들 보셈 무늬를 새기지 않앗습니다. 옹관이 아주 큼니다.
이렇게 큰 토기를 만들려면 빗살무늬부터 시작해서 수천년이 걸려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남방 문화가 호남지방으로 들어왔고 오늘날 전라도가 되엇습니다.
끝으로 영남과 호남을 이어주는 지리산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겠습니다.
지리산은 영산입니다.
한민족의 개국과 관련있는 신선의 땅입니다.
만고의 신선이 청학을 타고 세상에 나타나면 천국이 다시 열리게 되고 세계는 평화를 찾게 됩니다.
그런 전설이 내려오는 땅입니다.
[지리성모]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에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박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黼)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고 물었다.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이 설화를 통해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모순 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
여기서 중국황실은 고구려입니다.
<제왕운기>에는 “성모가 도선 선사에게 명하였다”라고 한 부분 가운데 성모 부분에 “지리산천왕이다”라는 주를 달았다. 이를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라고 풀이했다. <제왕운기>에는 지리산의 성모가 위숙왕후라고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김종직은 위숙왕후라고 했을까? 아마 성모는 ‘성인(聖人)의 어머니’ 또는 ‘국모(國母)를 높여서 일컫던 말’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김종직은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를 읽고 위숙왕후 설을 거론하긴 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위숙왕후설은 선도 성모 전설을 듣고 합리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선도산의 산신은 신라 시조 혁거세를 낳아준 성모이다. 즉 신라시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국가의 수호신인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 것이었는데, 이승휴가 이를 고려 태조 어머니 위숙왕후로 대체한 것이라고 봤다. 위숙왕후를 신격화한 성모나 선도산의 성모는 모두 왕국의 시조를 낳아 나라를 열었으며,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나라를 수호하고 도와주었다. 이는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킨 왕의 어머니를 온 백성들이 떠받드는 성모 신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신생 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워 건국의 명분을 얻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산신이 정치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에 와서는 지리산 성모의 위상은 많이 추락하게 된다. 이는 유교적 영향이 크며 결국은 지리산이라는 한정된 지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위상만 갖게 된다. 셋째는 마야부인(摩耶夫人) 설이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를 말한다. 즉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신격화되어 성모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처라는 기도의 대상을 배경으로 한 마야부인 설처럼 산신화하기 좋은 소재도 없을 것이다. 위숙왕후설이 정치적 색체를 띤다면 마야부인 설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야부인 설은 주로 유학자들 보다 승려들에 의해 확산되고 전파되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流頭流錄)>에 “내가 다시 묻기를 ‘성모는 세상에서 무슨 신을 일컫는 거요?’라고 하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 입니다’라고 하였다. 24)라는 문장이 있다. 유학자들에게 답한 지리산의 승려에... |
사진> 508-12
우리나라에 성모신 설화는 경주 지리산 그리고 개성에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2 경순왕 편 마지막 부분
사론(史論)
☞ 아래의 동신성모(東神聖母)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이름이다
(중략)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臣) 부식(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따라갔다가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 한 집에 선녀상을 모셔둔 것을 본 적이 있다.
관반학사(伴學士) 왕보(王)가 말하기를
“이는 그대들 나라의 신(神)인데 공들은 그것을 아는가?” 하고는 마침내 일러주었다.
“옛날에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다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海東)의 첫 임금이 되었고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 있었으니 이것이 그의 상(像)입니다.”
나는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의 동신성모(東神聖母) 제문(祭文)을 보았는데,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동신(東神)은 곧 선도산의 신성(神聖)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 왕노릇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내용중 일부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 사로는 신라를 의미한다
☞ 시왕은 박혁거세를 의미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3) 고려도경 제 17권 동신사(東神祠)
동신사는 선인 문안에 있다.
☞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 고려에 왔던 사신 서긍이 지었는데
1123년(인종 1) 송나라 휘종(徽宗)의 명에 따라 한달 남짓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체험한 견문을 바탕으로
송나라에 돌아가 편찬한 사서임
삼국사기 사론(史論) 원문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 見一堂設女仙像
伴學士王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고려도경 동신사 원문)
절강성에는 선도산(仙都山)이 있다.
절강성 일대는 신라 명이 많다. 신라산 도 있음.
절강성 임해현에는 "신라산"이 있다
“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 설화”
진평왕 시절에 한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지혜(智惠)라 하였으며 어진 행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안흥사(安興寺) 불전(佛殿)을 새로 수리하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 때 꿈에 모양이 예쁘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성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기뻐해서 금 10근을 주어 그 일을 돕고자 한다.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불삼상(主佛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불(觀樂王樂上二菩薩經에 나타나는 53분의 부처)과
6류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풂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
고 말했다.
지혜는 놀라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선사(仙祠)의 자리 밑으로 가서 황금 160량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이루었는데,
모두 성모가 한 말에 따랐던 것이다. 이게 조선시대 선조때 금서가 된 질성모하사량훈 이란 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 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道詵 漢都讖記 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의 1백여권과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 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 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하였다.
사로(斯盧)의 시조왕(始王)은 선도산(仙桃山)의 성모의 아들이다.
이 문구가 바로 금서로 지정되었던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그 책하고 상관이 있을 것
그런데 지리성모와 선도산이 무슨 상관이잇을까요
여기서 선도산은 서악이라고 했지 지금의 경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리성모하사량훈은 지리산에 전해지는 선도성모 이야기로 압축했습니다.
이게 왜 금서가 되어야하는지 궁금해 집니다.
지리산에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의 성모 이야기 재미 있는 발상아니겠습니까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청학동 하동에서
道證記 도증기는 징심록 증심록과 관계있는 것 같아요.
지리성모하사량훈은 선도성모가 고구려 시조와 신라시조를 낳았다는 모티브인데
저의 주장을 뒷바침해주는 내용입니다.
단국조선이 쇠해가면서 돈황부근 삼위산과 난주 금성 일대에 단국조선의 문서와 책 역사를 기록한 것들을 비전했다고 봄
그래서 선도성모가 대륙에서 왔다고 적었다는 것입니다.
징심록은 증심록으로도 부릅니다.
도증기는 바로 증심록의 일부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리성모하사량훈은 선도성모가 전하는 징심록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필이면 지리산에 은거 했을 까요
그것은 한민족의 미래가 바로 호남과 영남의 중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칩니다.
- 끝 -
[출처] 508.스키타이(Scythia) tkzk(Saka)족의 언어와 산스크리트어ㅣ작성자 집쟁이